대구의 시가지 모양은 네모에 가까우며 도시가 확장되면서 여러 시설들이 빠져 나갔는데 대표적인 것들이 대학들이다.
서울의 대학들이 경기도나 멀리 충청지역으로 나갔다면 대구는 인근의 경산시로 빠져 나갔고 캠퍼스를 이원화 했다.
중요한 건 대학본부까지 외곽으로 나갔다는 것이며 시내엔 과거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형태 보다는 따로 운영을 하였다.
대구시내를 빠져 경산시(과거 경산군)로 나간 영남대나 대구대(과거 한사대)의 경우 규모가 컸으며 지금은 대구가톨릭 대학이 된 효성여대도 대구 봉덕동에서 경산시로 이사를 간다.
그러나 대명동에 있던 계명대는 시외인 경산시나 외곽으로의 이사 보다는 대구시내인 달서구로 움직이며 대명동 캠퍼스는 캠퍼스대로 유지를 한다.
그리고 의과계열의 학과는 계명대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인 동산동에 그대로 있으며 여기에는 '계명대 대구 동산병원'이 있다.
이 병원이 현재 '계명대 동산병원'의 시작이다.
이 동산병원의 아래의 청라언덕은 대구의 서양의학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며 신명학교가 있고 신명학교의 서쪽 길건너에 계성학교가 있으며 계성의 '계'자와 신명의 '명'이 합쳐져 '계명'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대구의 의료와 사학의 발달을 상징하는 곳이 청라언덕과 그 주변이며 이곳에서 시작되고 세워진 것은 일제 강점기와 6.25동란 그리고 대구뿐 아니라 대한민국이 어려운 시절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제공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고 대구사과의 역사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특히 6.25시기 각종 의료시설과 부상병 치료에 대한 의료인력과 장소를 제공한 공간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가곡 '동무생각'의 무대로 유명한데 이곳엔 노래비가 있고 이와 관련된 사연도 소개되어 있다.
근현대사의 흔적이 크게 훼손되지 않았으며 초기 제중원(구한말 제중원은 여러곳에 있었음)에서 발달한 동산의료원 거기에서 파생된 여러 의료기관이나 학교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주변이 특성 없는 고층 아파트로 더 높아져 구분이 어려울 수 있지만 대구의 지나간 흔적과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청라언덕이 아닐까?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노래책을 보지 않고 '동무생각'을 부르시는 것을 들은적이 있다.
당시엔 별 생각없이 들었는데 아버지가 학창시절일 때 즐겨 부르셨던 것 같다.
일제 강점기에 나온 노래니 오래전 부터 애창한 가곡인데 청라언덕이라는 곳이 무언지 모르고 불렀던 나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 전쟁이 없었다면 아버지는 현역병으로 군대를 마치고 당신이 좋아하시는 일을 찾아 고향 근처의 도시인 대구나 부산에서 삶을 사셨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 상황은 아버지를 직업군인으로 변화시켜 한강이북에서 오래 사셨고 객지에서 가정을 이루셨다.
늘 노후는 따뜻한 부산이나 대구로 가서 사시겠다고 했으나 이루워 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 세대와 나의 아들들이 부산이나 대구로 내려갈 이유는 없다.
대구는 어린시절 잠시 지나 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자주 들렸던 곳이며 어린시절 기억속에 대구는 덥고 역동적인 곳이기도 하지만 큰집으로 가는 버스가 늘 기다리던 곳이었고 아버지를 닮은 분들이 모여 살던 따뜻한 곳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