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한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어스름한 저녁 나절, 서울 종로3가 뒷골목의 납작한 가게들이 하나둘 불을 밝힌다. 대로변의 번듯한 식당들을 놔두고 그리로 자꾸만 발길이 향하는 것은 그곳의 오래된 가게들이 품고 있는 소박하고 푸짐한 인심 때문이다.
‘찬양집’은 그 가게들 중 서울에서 해물칼국수로 제일 이름난 집이다. 칼국수 한 그릇에 20원이던 50여년 전부터 이 골목에서 해물칼국수 하나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사실 요즘 바다에서 나는 모든 것들이 점점 귀해지고 있다.
언젠가부터 밥상에 생선 반찬 올리기가 만만치 않다. 조개, 새우, 미더덕 등 해물 가격도 너무 치솟았다. 그러니 “낙지와 조개를 푸짐하게 넣은 값싼 해물칼국수”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 이러다간 해물칼국수를 아예 못 먹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찬양집은 이런 조바심을 다독여주듯이 아직도 5500원짜리 소박한 해물칼국수 한 그릇에 맛있는 행복을 담아낸다.
우선 칼국수 그릇부터 다른 집의 곱빼기용처럼 넉넉하다. 소복이 올려준 김과 파를 고루 풀어주면 뜨거운 김이 오르며 바다 향기가 훅 퍼진다. 멸치로 뽑은 구수한 육수에 해물의 시원한 맛이 깃들어 있는 국물 몇 술이면 마음속까지 따끈따끈! 속풀이 해장으로도 그만이겠다 싶다.
바다 맛이 폭 밴 오동통한 면발은 탱탱한 식감이 가히 감동적이다. 여기저기서 후루룩거리는 맛난 소리에 칼국수를 먹으면서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젓가락으로 조개껍데기를 벗겨가며 쫄깃한 조갯살을 발라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계속 바가지에는 조개껍데기들이 쌓여가고 국물을 떠먹는 숟가락질도 멈출 수가 없다.
옆 테이블 손님이 국물을 더 달라고 하자 바로 큰 국자로 국물을 반 그릇이나 더 부어준다. 국물뿐만이 아니다. 이 집에서는 양이 부족하면 국수를 얼마든지 더 주기 때문에 누구나 한 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착한 가격, 푸짐한 인심 그리고 깊은 바다 맛까지 삼박자가 딱딱 들어맞는 찬양집. 겉으로 보기에는 허름하고 비좁지만 칼국수를 소박하고 맛나게 즐기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싶다.
찬양집은 1965년 김옥분(75)씨가 처음 문을 열었다. 옥호(屋號)에서 짐작할 수 있듯 김씨는 독실한 신앙인이다. 술고래 남편과 헤어진 뒤 경북 영주에서 두 살배기 아이를 들쳐 업고 상경한 김씨는 생선 행상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살아가기가 너무 버거워 차라리 죽을까 생각하던 어느 날 기도 중에 칼국수집을 해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신은 참 재미있는 분이다.
처음에는 변변한 가게도 없이 이 동네 한옥 마당에서 연탄불을 피우고 칼국수를 만들어 팔다가 손님이 점차 늘면서 지금의 가게를 얻었다. 김씨는 그날그날 가장 싱싱한 해물을 구하기 위해 날마다 새벽시장으로 달려갔다. 돈을 벌기보다 사람들에게 넉넉한 인심을 퍼준다는 생각으로 하니 손님이 더욱 몰려들었다.
▲ 윤순병씨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들 뿐
김씨가 평생을 바친 찬양집은 13년 전 조카 윤순병(63)씨가 물려받았다. 김씨는 6개월에 걸쳐 자신이 평생 터득해온 해물칼국수 비법을 윤씨에게 모두 전수해줬다. 이미 명동에서 15년간 항아리수제비를 운영했던 윤씨는 이모의 비법에 자신만의 음식솜씨를 더해 옛맛을 지키되 더 발전된 맛을 추구하고 있다.
찬양집은 아침 10시에 문을 여는데 점심시간인 낮 12시와 저녁시간인 7시 무렵이 제일 바쁘게 돌아간다. 계절에 따라 차이가 좀 있지만 하루 평균 해물칼국수만 600그릇이 넘게 팔려 나간다. 매주 일요일은 꼭 문을 닫는다.
“뻔한 얘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들어야 맛있지요.” 가락시장에 직접 가서 장을 보던 김씨와 달리 윤씨는 노량진수산시장에서 경매가 끝나자마자 단골집에서 최고로 신선한 해물을 가져온다. 해물 중에서도 칼국수와 궁합이 잘 맞는 홍합, 미더덕, 새우, 바지락을 고집하고 있다. 이 해물들은 비교적 사계절 내내 나오기 때문에 언제 가도 칼국수 맛이 일정하다.
밀가루도 제일 좋은 것으로 쓴다. 반죽에는 밀가루와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는다. 반죽에 간이 없어야 국물 맛이 잘 배기 때문이다. 그 많은 칼국수 반죽을 손으로 할 수가 없어 기계로 하는데, 마치 손으로 오래 주무른 것처럼 부드럽고 쫄깃한 맛이 제대로 살아난다.
비법은 반죽의 숙성에 있다. 숙성이 덜 되면 면이 뚝뚝하고 지나치면 반죽이 부풀거나 시어버린다. 오랜 경험으로 날씨에 따라 숙성시간을 딱 맞게 가늠한다. 면발은 흔히 보던 칼국수라기보다 마치 우동처럼 오동통하다. 어쩌다 조금만 가늘어지거나 굵어져도 단골손님들이 야단하는 통에 나무젓가락 굵기를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주방 한쪽의 커다란 통에는 종일 육수가 펄펄 끓고 있다. 칼국수 맛은 국물에 달려 있기 때문에 멸치에 질 좋은 다시마와 디포리까지 넣어 육수 뽑는 일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홍합은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입이 안 벌어지기에 찬물에 넣고 삶아 국수 그릇에 담아놓고, 멸치육수에 국수를 삶다가 투명해지기 시작하면 나머지 해물과 애호박을 넣어 끓인다. 국수와 해물을 함께 삶기 때문에 국수에도 바다 맛이 쏘옥 배어든다.
칼국수는 김치 맛으로 먹는다고들 한다. 이 집에선 테이블 김치 통에 아삭하고 싱싱한 맛의 겉절이와 찡하게 익은 신김치를 담아두고 마음대로 덜어 먹게 하고 있다. 유별나게 고운 빨간 빛깔은 통고추를 불려서 갈아 쓰기 때문이란다. 새우젓의 깔끔한 감칠맛도 특별하다. 윤씨는 매일같이 겉절이 양념을 손수 만드는데 맛깔스럽되 양념이 너무 진하거나 짜지 않게 신경 쓴다.
양념을 2~3일 정도 미리 숙성시켜 두었다가 김치를 버무리는 것도 이 집만의 비법이다. 매일 오후 30포기가량의 배추를 절여놓았다가 오전에 가게 문을 열자마자 숙성시킨 양념에 버무려 낸다. 그날그날 남은 겉절이는 냉장고에 넣지 않고 상온에서 숙성시켜 짜릿하게 익힌다. 원래는 겉절이만 냈었는데 익은 김치를 더한 것은 윤씨의 경험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항아리수제비 하던 때 보면 젊은 분들은 겉절이보다 신김치를 더 좋아하더라고요.”
찬양집에선 소박한 플라스틱 의자에, 옆옆이 모르는 사람과 합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기만 하다. 좁은 공간을 살리느라 벽을 빙 돌려가며 붙인 송판을 테이블 삼아 옹기종기 칼국수 먹는 맛도 괜찮다. 그저 앉을 자리만 있다면 행복해지는 집이다. 단골들이 특히 많은데, 워낙 오래된 집이라 몇 년 차는 단골 축에도 못 낄 정도다. 20년 단골 코미디언 전유성씨를 비롯해 홍석천씨 등 유명인 단골들도 수두룩하다. 한 50대 남자 손님은 일 년 열두 달 매일 아침에 들러서 이 집 해물칼국수로 하루를 시작한다.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같이 이 집을 찾는 외국 손님들도 많다. “자주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는 손님들 덕분에 힘이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