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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얼마나 다행스럽고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심판이 아니라 구원!
산책길에서 한 모녀를 만났습니다. 젊은 엄마는 갓난아기가 아닌 예닐곱 살 되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밀고 가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보니 중복장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애야! 저 꽃들 좀 봐. 정말 예쁘지?”
저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그 모습을 보는 제 마음이 얼마나 짠해 왔는지 모릅니다.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에 눈물이 제 눈에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였습니다.
엄마도 아이도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을까? 평생을 저렇게 살아야 할텐데, 그 세월을 어떻게 감당할까, 하는 마음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지만, 오래오래 두 사람을 위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무상으로 우리에게 갖은 은혜를 베푸시고, 놀랍게도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은총으러 초대하실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해서?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너무 사랑스러워서? 우리가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열심히 살아서? 물론 그런 이유도 해당되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우리의 근원적 결핍과 연약함으로 인한 주님의 측은지심으로 인해 우리가 그분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를 받고, 구원과 영생으로 초대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갖은 세파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 존재가 너무 안쓰러워서, 고통과 시련의 바다를 건너가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 가련해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건네시고, 우리를 영생으로 초대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구절 중에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예수님의 강조 말씀이 너무나 은혜롭게 다가왔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밥 먹듯이 죄를 짓고, 똑같은 잘못을 평생토록 반복하는 우리 죄인들에게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요한 복음 사가에 따르면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 프로젝트를 요약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공식이자 신조(信條)가 있습니다.
언젠가 나이 들어 머릿속이 흐려지고 기억력이 감퇴하더라도, 이 공식만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달달 외워둬야겠습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정말이지 군더더기 하나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아무런 부연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간단합니다.
①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② 그 극진한 사랑의 표시로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③ 예수님께서 이 땅에 파견되어 오신 이유는 세상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④ 이 세상 그 누구든, 그 어떤 대역 죄인이든 상관없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받고 멸망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절대 내 생각에서 나온 명령을 해서는 안 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88회 ‘엄마의 말을 따라야 사는 위기의 13세 영재 아들’에서 13세 아들은 영재 대안학교에 다니면서 검정고시로 이미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대학교 시험 준비 중입니다. 대학도 안 다니고 대학원에 바로 진학하는 게 어머니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조금씩 비뚤어지기 시작합니다. 지나치게 스마트폰 게임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의 게임 중독을 고쳐 달라고 제보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문제는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아이는 공부가 어렵고 친구도 없다 보니 쉬는 시간 잠깐만 게임을 하려는 것뿐이었는데 어머니가 지나치게 아이에게 욕심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게 큰딸로서 희생을 강요받아 대학에 가지 못한 설움을 자신은 아들을 잘 키우려 영재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공부시켜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무슨 잘못일까요? 왜 어떤 명령은 사람을 살리는데, 어떤 명령은 사람을 죽일까요? 나는 어떻게 사람을 살리는 명령을 하며 착한 목자처럼 자녀나 가족을 이끌 수 있을까요? 좋은 명령이라고 강요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으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전할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자아가 죽습니다. 당신의 생각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으로 하는 말은 자아의 말입니다.
나를 위해 자기를 포기한 적이 없는 자아의 명령은 상대를 죽입니다. 반면 나를 위한 명령이 피와 함께 온다면 그 명령은 생명이 됩니다.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명령은 상대의 속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살아있으면 그 속에서 상대의 피를 먹는 기생충처럼 됩니다. 반면 죽었으면 상대에게 영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정은표 김하얀 부부는 부모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들 정지웅은 서울대 22학번이 됩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했을까요? 아버지는 자녀가 친구들과 잘 어울리기만을 바랍니다. 그런데 아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이미 높습니다. 그렇더라도 아이의 공부를 방해합니다.
키 크려면 일찍 자라고 하고 주말엔 공부하지 말고 농장에 가서 고기 구워 먹자고 합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자신들의 공부 시간을 챙기려고 따집니다. 엄마 김하얀 씨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가 가자고 그러면 가는 거지, 이것들이!” 이런 엄마의 명령은 자아가 빠진 명령입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명령은 아이들에게 생명이 됩니다. 내 생각을 강요하는 게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하느님 뜻인지 깊이 고민하고 그렇다는 느낌이나 확신이 있다면 밀어붙여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 내 생각에서 나온 명령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 명령이 상대 속으로 가서 기생충이 되거나 양식이 되거나는 나의 자세에 달려있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2,44-50: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44절) 아들을 모르는 사람은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아들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그분은 빛으로서 세상에 오셨으며 당신을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분은 아들로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분이시고 당신을 믿는 것이 아버지를 믿는 것이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45절). 이 말씀은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분이심을 의미한다. 흐르는 물은 샘물의 본질과 같다. 우리는 말씀을 바라봄으로써 아버지를 볼 수 있으며, 아들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는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만난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보고 계시며,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모두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46절) 주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비추는 빛이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다. 인간의 잘못으로 인간이 빛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둠 속에 남아있지 않으려면 세상에 오신 빛을 믿고 빛이 있는 곳으로 나와야 한다. 빛을 피해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서는 안 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47절)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구원의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단죄하는 것이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48절)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업신여긴 이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단죄해서는 안 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다.”(49절)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말씀이시니 아버지를 잘 알려주실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당신께서 아버지의 뜻을 밝히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에 관한 지식으로 인도하시며, 우리가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도록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셨으며, 그러기에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니 이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50절) 영원한 생명이 아들이고 하느님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곧 아버지의 명령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50절) 하신다. 바로 당신이 바로 말씀이라는 말씀이다. 아버지는 참되시고, 아들은 진리이시다. 이 진리는 처음부터 완전해서 새로운 진리를 보탤 필요가 없다. 진리를 말씀하시면 되는 분이다. 이렇게 그분을 맞아들이고 따르면서 항상 빛 속에 살며 세상을 비추어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청혼할 때 남자가 암소를 끌고 처녀의 집에 가서 “암소를 받고 딸을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특등 신붓감에게는 암소 세 마리, 괜찮은 신붓감은 암소 두 마리, 그리고 보통의 신붓감에게는 암소 한 마리로 승낙을 얻곤 했습니다.
한 청년이 암소 아홉 마리를 끌고 청혼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어떤 신붓감에게 주려고 세 마리도 많은데 아홉 마리나 끌고 가나 했습니다. ‘마을 촌장의 딸일까? 아니면 지역 유지인 바나나 농장 주인의 딸일까? 아니면 가장 인기 많은 마을의 여선생일까?’라면서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큰 키에 너무 마르고 심약해 보여서 마을에서 제일 인기 없는 초라한 처녀가 사는 집에 들어가 “이 암소를 받고 딸을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까? 모두가 이 청년이 미친 것이 분명하다면서 말했습니다.
몇 년 뒤, 이 청년이 맞이한 아내는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랑은 자기가 왜 이 여인에게 암소 아홉 마리나 투자했는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내가 어렸을 때부터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청혼했던 것입니다. 물론 암소 한 마리면 충분히 아내를 맞이할 수 있었지만, 제 아내가 스스로 자기 가치를 한 마리의 암소에 한정하고 평생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아홉 마리의 암소에 아내는 ‘내가 진짜 암소 아홉 마리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변했습니다. 누군가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배우자, 자녀, 부모, 친구 등을 사랑한다면서 말하면서도 말과 행동에서 가치를 떨어뜨리게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서도 불평과 불만으로 무능한 하느님으로 전락시킬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나의 바람만을 들어주는 종으로 여길 때도 있습니다. 그 소중한 가치를 떨어뜨리는 우리의 잘못된 모습이 삶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거부하고 또 주님을 멀리하면 그 가치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환한 빛 안에 머무르게 되어 나의 가치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사랑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그 모습을 통해, 우리 역시 주님을 통해서 최고의 가치를 받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생각하는 것을 가르쳐야지, 생각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굴리트).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5)
말씀을 보고
그 안에서
아버지를 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네.
마음이 깨끗한 이들만이
가능하다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들을 믿고
아버지를 믿으며
진리의 말씀을 안에서
말씀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라네.
복음 말씀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44-50
그때에 4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0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