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바위얼굴 윤공희 대주교
내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찾아뵙고 싶은 어른은 윤공희 대주교였다. 그 분은 은퇴 후 남평 가톨릭 대학 주교관에서 생활하고 계시다. 장흥 여행 중 주교관에 전화했는데 곧 연락이 왔다. 비서 수녀는 대주교님이 나를 기억하고 반가워하신다며 토요일 오전 방문해 달라고 했다. 나는 초행에 도보여행이라 차질이 생길까 걱정스러워 금요일 오후 일찌감치 남평에 도착 숙소를 잡고 위치를 알아보러 밖에 나갔다. 읍이라지만 남평은 규모가 작았다. 외곽을 흐르는 지석강 강변에는 산책로와 체육공원이 있고 노인들이 최근 한국에서 붐을 이루는 게이트볼을 즐기고 있었다. 이번에 내가 처음 본 게이트볼은 나무 스틱으로 공을 여러 개 문으로 통과시키는 게임으로 유럽의 크로케라는 경기를 2차 대전 후 일본인이 변형해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5명이 한 팀을 이루는 이 게임은 남녀노소 특히 노인운동으로 적합해 한국의 대부분 마을마다 경기장이 있고 지역 리그전과 전국대회까지 개최된다고 한다.
주민들에게 가톨릭 대학을 물으니 모두 모른다고 한다. 이 때 한 사람이 약 5킬로 떨어진 곳을 가르키며 저기 큰 건물이 여럿 있는데 신부들이 가끔 드나든다고 한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곳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조용한 분위기가 어느 연구소 같다. 주민들이 잘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작은 걱정이 생긴다. 대주교님께 빈손으로 가기에는 염치가 없어 작은 과일상자라도 들고 가야겠는데 지팡이에 배낭 메고 선물꾸러미 들고 걸어갈 생각에 난감했다. 이때 또 천사가 나타난다. 강변에서 나물캐는 여자에게 저 건물이 가톨릭 대학 맞느냐고 확인하니 그렇다고 한다. 읍내에서 가는 교통편을 묻자 버스로는 힘들다며 왜 그러냐고 반문한다. 내가 내일 윤공희 대주교님 뵈러 가야하는데 걱정이 되서 그런다고 했다. 그녀는 놀라는 표정으로 대주교님이 그곳에 사시는지 몰랐다며 자기 세례명이 마르티나며 내일 도와드리겠다고 나선다. 나는 또 '야훼이레' 작은 기적을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마르티나 씨와 다음 날 아침 과일파는 농협 직판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여관에 돌아와 남평의 진미를 문의하니 동지팥죽 식당이 일년내내 팥죽을 파는데 유명하다고 한다. 나는 때아닌 동지팥죽으로 저녁을 먹었는데 맛은 그런대로 좋았다.
약속장소에는 마르티나와 남편이 정장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내 복장과는 너무 딴판이다. 전남대학 교수인 남편은 그 분과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언제 있겠냐면서 윤 대주교를 만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는 오히려 나에게 윤 대주교는 광주의 상징이자 큰 어른인데 이렇게 뵐 수있는 기회를 주어 감사하다고 했다. 우리는 약속보다 일찍 도착해 수위의 양해를 얻어 대학구내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전원 기숙사 생활인 대학은 수업 중인지 고요했다. 시간에 맞춰 언덕 위 주교관을 찾으니 수녀가 기다렸다며 거실로 안내했다. 윤 대주교가 반가운 표정으로 나타나셨다. 나는 어쩌면 오늘이 대주교 생전 마지막 만남일 것같아 큰절부터 올렸다. 91세인 윤 대주교는 내가 방문하기 이틀 전 사제수품 64주년을 기념했으며 지난 해 11월 주교성성 금경축을 지낸 한국 천주교의 역사이다. 나는 연세를 믿을 수없을만큼 건강하신 그 분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없었다. 그날 나와 찍은 사진을 누가 본다면 동년배로 보일 정도이다. 기도와 묵상, 성경읽기로 소일한다는 대주교는 요즘도 교구나 성당에서 도움을 청해 가끔 외출하신다고 한다. 또한 그 분의 기억력도 뛰어나 오래 전 일도 소상히 기억하셨다. 윤 대주교는 지금도 매일 한 시간 이상 산책하신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나는 이날 못된 버릇이 도졌다. 큰 어른께 인사차 방문한 자리에서 무례하게 인터뷰식으로 질문을 퍼부은 것이다. 윤 대주교는 개의치 않고 온화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대주교는 자신의 사제생활 64년을 돌이키면 부끄러운 것 뿐이라고 했다. 그 분은 사제로서 좀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못한 것이 못내 한스럽다고 했다. 대주교는 김수환 추기경 예를들면서 사제는 그 분처럼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하고 불의에는 두려움없이 예언자적 사명을 다해야 하는데 자신은 너무 부족했다고 했다. 또한 그 분은 5.18 당시를 회상하고 당시 가톨릭 회관 5층에서 군인들에게 매맞고 피흘리며 짐승처럼 끌려가는 시민들을 뻔히 보면서도 무력했던 자신을 스스로 한탄했다. 대주교는 5.18 정신은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는 것이며, 만일 국민들이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또다른 광주의 비극이 되풀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후일담이지만 나는 세월호 사건 후 그 분 말씀이 생각나 정신이 번쩍들었었다. 대주교는 이날 나에게 조국순례길이라면 여기서 멀지않은 망월동 국립묘지를 꼭 찾아가 용서와 화해를 주제로 묵상해 보라고 하신다. 또한 윤 대주교는 1984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한국과 특히 광주를 방문해 실의에 빠진 광주시민과 국민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던 것처럼 올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이 지역과 이념으로 갈라지고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 겨레에게 용서와 화해 그리고 통일의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고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윤 대주교는 한국 천주교 뿐 아니라 굴곡진 한국 근대사의 역사이며 산증인이다. 지금까지 그 분은 11명의 대통령과 사제로서 일곱 명의 교황을 경험했다. 1924년 진남포에서 출생한 대주교는 평양 교구 출신 신학생으로 공산치하 종교탄압을 직접 체험하고 월남해 50년 3월 사제로 서품되어 명동 성당 보좌를 시작으로 전쟁 후 성신학교 라틴어 교사로 재직 중 이태리에 유학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63년 바오로 6세에 의해 주교품에 오른 그는 초대 수원교구장에 임명되고 67년 노기남 대주교의 은퇴로 공석이 된 서울 대교구 교구장서리를 1년 이상 겸직하면서 어려움을 겪던 교구를 정상화시켜 후임인 김수환 추기경에게 인계했다. 73년 광주 대교구장에 임명된 그는 2000년 은퇴까지 27년 간 유신체제와 5.18 등 현대사의 고비마다 정의의 편에서 국민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어 대한민국의 큰어른으로 자리매김했다. 나는 이날 주교관을 나와 김 교수 내외와 대학 건너편 산중턱에 아담하게 지어진 그 분들 집에서 차를 마시며 윤 대주교와의 만남의 여운을 즐겼다. 김 교수는 윤공희 대주교는 이 시대 대한민국의 큰바위 얼굴로 비록 은퇴하셨어도 그 자리에 묵묵히 계시는 것 만으로도 국민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고 영감의 원천이 된다고 말했다.
이날 나는 큰바위 얼굴 윤공희 대주교께 받은 '용서와 화해'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화두를 마음에 품고 우리 조국이 안고 있는 수많은 갈등과 아픔도 어쩌면 그분이 제시하신 화두 속에 녹아들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보았다. 또 가까운 시일 내 망월동을 찾아 그 분이 주신 화두를 묵상해 보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조국순례 여행 중 이 시대의 훌륭한 어른들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을 수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다시 한번 느낄 수있었다. 오늘도 감사!
(2014.5.30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