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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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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와 남한산성!
오늘 인터넷 뉴스를 찾아보니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남긴 박원순 서울시장의 감상평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박원순 서울 시장은 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오늘 개봉된 남한산성을 관람했습니다. 하염없는 눈물과 함께 끝없는 분노가 치밀었습니다”라고 감상평을 남겼다.
나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영화 원작소설인 김훈의 남한산성도 읽지는 않았다.
인조를 나라와 백성을 위해 상당히 번뇌하고 고민하는 인물로 그렸다고 해서 별로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인조!
나는 조선의 최악의 왕으로 뽑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인조반정!
나는 우리 역사상 최악의 쿠테타라고 이미 명칭을 정해놨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세력!
백성 수십만을 죽게 만들고 수십만이 청으로 끌려가게 했던 하지 않아도 될 정묘, 병자호란을 야기시킨 당시 최악의 정치집단이다.
전쟁을 야기시켜 놓고 백성들은 청에 완전히 노출되어 죽어 가고 있는데 자기들은 남한산성에 갇혀 '화친'이나 '척화'니 말싸움이나 하고 있고 인조는 그 중간에서 번뇌하고 고민한다는 내용!
영화는 묵직하게 만들어 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런 블랙코메디 영화가 없다.
이유를 불문하고 사전에 전쟁은 막았어야 한다.
앞으로 내가 쓴 역사글을 읽어 보면 당시 인조와 서인정치세력이 하는 짓을 보면 기가막히고 코까지 막혀 숨도 쉬기 힘들어 진다.
전쟁을 불러들이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들이었다.
당시 시대상황에서 꼴통 사대부들의 친명사대주의 정신상태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전쟁은 막았어야 했다.
광해가 그렇게 하지 않았는 가?
그런 광해를 끌어 내리고 하는 짓들이....ㅉㅉㅉ
최명길!
이 영화에서 이병헌이 화친파 대표인 최명길 역할을 맡아 백성들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자존심보다는 생존이 우선이라는 화친을 주장 한다!
그런데 전쟁을 막고있던 광해를 쫒아내는 인조반정에 가장 앞장 섰던 인물이 최명길이다.
최명길은 인조반정이 전쟁의 시작이라는 것을 몰랐을까?
요즈음 대외정세가 병자호란 직전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하다.
우리나라 주위 나라만 바뀐 채 우리 한반도는 또 한 번의 전쟁직전 소용돌이 속에 있다.
이번에 만에 하나 전쟁이 터지면 병자호란 때보다 비교가 안되게 우리 민족은 엄청난 피해를 볼 것이다.
전쟁은 절대 안된다.
문재인정부는 병자호란 당시를 잘 살펴보면서 광해나 고려시대 서희처럼 정말 신묘한 외교술로 전쟁을 막아내고 우리 민족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문재인정부는 잘 해내리라 믿는다.
아랫 역사글 부터가 광해이야기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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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오백년!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56
광해 1
광해시대는 격동의 시기였다. 우라나라 역사 상 가장 큰 전쟁인 밈진왜란, 정묘, 병자호란을 겪는다. 당시는 동아시아 전체가 집단광기에 빠져있던 시대였다.
역사를 살펴보면 지금의 눈으로 보면 집단광기로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대세였던 시대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1930년말부터 1940년초의 독일이다. 당시 독일은 히틀러 나찌시대였다. 히틀러는 1차세계대전 패배로 패배감과 상실감에 빠져있던 독일국민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단 시간에 독일을 세계적 패권국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럽을 초토화시키고 유럽인 수백만을 희생시켰다. 또 유태인 600만도 학살한다. 이런 정권에 당시 독일국민은 열렬히 지지했고 환호했다. 당시 히틀러 나찌정권은 군부쿠데타로 일어난 정권이 아니라 90%이상의 국민의 지지로 성립된 정통성있는 정권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잘 알다시피 처참했다.
히틀러보다 오래 된 프랑스 나폴레옹도 비슷하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 자유주의 깃발아래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을 전 유럽을 정복하면서 휘날리게 한다. 그리고 전 유럽 민중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정복당한 독일국민이었던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위한 영웅이라는 교향곡을 만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황제에 즉위하면서 전유럽 민중을 실망시킨다. 베토벤도 실망하여 불같이 화를 내며 악보에서 보나파르트라는 이름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황제즉위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으로 지지했고 국민들은 열광을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가장 증오하는 일제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나가 된 국가였다. 가미가제 특공대를 보면 알 것이다. 천황을 위해서 자기 목숨도 거림낌없이 받치는 집단광끼 최전면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도....
우리나라라고 예외는 아니다. 지금 우리 국민 대다수가 군부 독재시절이라고 생각하는 유신이나 전두환 정권등도 그 당시는 겉으로나마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유신정권은 당시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91.9%, 찬성 91.5%로 확정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보기드문 현상을 보였다.
독재정권이라 할 수 있는 전두환의 5공화국 헌법도 국민투표에서 유신헌법보다 더 높은 투표율 95%와 찬성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대통령선거에서는 간접선거였지만 거의 100% 지지로 전두환이 당선되었다.
이처럼 국민들은 당시 정권들 프로파간다에 현혹되어 마치 집단최면에 걸린 듯이 당시 사회분위기에 빠져 들어 간다.
요즈음 우리나라 교육문제에 대부분 국민이 집단최면과 광끼에 빠져있는 것도 비슷한 경우이다.
사실 정권이 국민을 현혹 시키면 그 당장은 국민들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헷갈린다.
요즈음으로 보자면 역사교과서 국정화 혹은 사드 배치 문제가 대표적이다.
각 개인 입장에서 보자면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100%는 없다. 각자 서있는 위치나 생각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정부차원에서는 다르다. 어떤 정부이든 당시 상황을 잘 살펴보고 국가와 민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서 정책을 결정해야 된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그런 경우가 드물다.
광해 이야기를 쓰기위해서 서론이 많이 길어졌다.
광해가 살았던 시대도 국가적으로 엄청난 위기의 시대였다.
광해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아픔이라 할 수 있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한 생애에 겪었다. 임진왜란 때는 세자로서 분조를 이끌고 직접 전장을 누볐다. 병자호란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쫒겨나 강화도와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어 겪었다.
광해는 세자시절 지난한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드라마틱하게 왕이 되었다.
왕이 되어서도 많은 치적과 악행을 행한다.
광해는 지금까지는 역사적으로는 연산군과 같은 폭군의 부류로 인정 받아 왔다. 요즘에 와서야 광해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거기에 나오는 광해는 그동안 우리가 알았었던 폭군 광해와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나 또한 조선시대 왕들 중 광해에 관심이 많다.
광해는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국제정세와비슷한 상황에서 나름 잘 대처해 광해가 왕이었던 시절만큼은 전쟁을 막았고 평화를 지켜냈다. 그러다 서인의 쿠테타로 광해가 왕에서 쫓겨 나자 인조와 서인정권의 무지한 병신외교로 정묘, 병자호란이 발생한다.
광해는 왕이 아닌 신분으로 그런 참사을 보면서 왕에서 물러 난 뒤에도 19년 간을 더 살았다.
나는 왕조시대 때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자기를 돌보는 하녀들에거 굴욕을 당하면서도 19년 간이나 더 살다간
광해의 당시 인간적 고뇌에도 큰 관심이 있다.
같은 처지인 연산군은 1년 정도 살다가 아주 젋은 나이인 서른에 죽었다.
광해는 임진왜란 때는 세자로서 전장 한 중심에서
조선군의 실질적인 최고 사령관이었다.
병자호란은 왕에서 쫓겨 나 있어서 직접 전장을 누비지는 못했지만 병자호란이 있게 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광해가 임진왜란 한 가운데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체험했기에 명과 후금사이에서 실리외교로 평화를 지켜냈다. 그러나 광해를 왕에서 쫓아낸 못난 서인들 주축인 인조정권은 쥐뿔도 없이 콧대만 세우다 병자호란을 불러들이고 만다.
광해가 왕이던 시절 당시 국제정세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후에 청나라가 되는 후금이 강성해지면서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을 때였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운 것을 명분으로
명나라가 후금을 치는데 조선이 병력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광해는 막강한 정보력으로 후금이 명보다 우세에 있다고 판단하고 명의 요청을 들어 준 척하면서
당시 최고 사령관인 강홍립에게 비밀명령을 통해 적당히 싸운 척하다가 후금에게 투항하도록 해서 후금의 원성을 사지 않고 전쟁을 막아냈다.
이처럼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서 광해는 임진왜란 이후 도탄에 빠져있는 백성들을 또 다른 전쟁에 내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어느 왕조를 불문하고 사대교린정책이 대외정책의 큰 줄기였다.
특히 조선은 건국때 부터 사대교린정책을 기본외교정책으로 삼았다.
여기서 '사대'는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 '교린'은 이웃 나라와는 화평하게 지낸다는 뜻이다. 즉 사대는 명나라에 대한 외교책이며, 교린은 여진족과 일본에 대한 외교책이었다.
사대주의와 사대교린정책은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중국이라는 큰 나라에 붙어있고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주 적은 나라이다. 이렇게 적은 나라가 오천년 가까이 한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버텨 오기 위해서는 특단의 외교정책이 필요했다.
바로 그게 사대교린 정책(事大交隣政策) 이었다.
사대교린은 조선 전기에 확립되었지만 그 형태는 오래되었다.
고구려도 한나라(32년), 북위, 수나라 등 중국에서 강성한 왕조가 들어서면 조공 책봉관계를 맺고 외교적 이익을 취하였다.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당나라와 함께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는 말 할 것도 없다.
고려도 송나라, 금나라, 원나라가 강성할 때는 이러한 외교관계로서 국제적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주변 약소 민족에게 회유와 토벌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외교정책은 서로의 독립성이 인정된 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예속 관계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와 원나라 관계는 조금 모호하지만....)
조공(약소한 나라가 강대한 나라에 정치·군사적인 복속의 표시로 공물을 헌상 )과 책봉(중국의 황제가 국내외 귀족이나 공신에게 왕 또는 공.후등의 작위를 주는 것)의 외교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명나라가 조선에 5만명의 군사를 보내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조선의 사대부들은 사대교린의 정책을 넘어선 명나라에 대한 성리학적 질서에 의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하는 맹목적 사대주의에 빠져 든다.
원래 사대정책은 자기 보다 힘이 센 나라와 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명이 쇠퇴하고 청이 우세해지면 청에 대한 사대정책을 쓰면 되는 것이었다. 광해는 그렇게 해서 전쟁을 막았다. 광해가 진정한 사대교린정책을 쓴 것이다.
그러나 명에 대해서만 맹목적인 사대주의자들인 서인 꼴통들은 광해의 그런 모습에 참지못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를 쫒아내고 당시 교린상대에 불과했던 여진족인 청을 우습게 보고 함부로 대했다가 된통 당하고 만다.
꼴통 사대부들 자기들만 당했다면 모르겠지만 자기들은 별 피해가 없었고 수십만의 백성들만 죽어났고 또 수십만 백성들이 청으로 납치되었고 수많은 문화재를 잃어버리고, 조선왕이 청황제 앞에서 땅에 머리를 쳐박는 역사상 유례없는 삼전도치욕이라는 국가적 수모를 당한다.
사대주의와 사대교린정책을 구별하지 못한 당시 어리석은 정치인들이 불러들인 최악의 국가적 참사였다.
사실, 사대교린정책은 조선의 입장에서도 국제적 평화를 유지하면서 실리를 챙기는 외교였다. 게다가 여진과 일본에 대해서도 무역소나 항포 개항과 같은 회유책과 함께 4군 6진 설치와 쓰시마 정벌과 같은 강경책을 병행하였다.
즉 어떻게 보면 공무역, 사무역이 가능한 대외무역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사대교린정책은 외교 정책의 기본일 뿐이었지 한 나라의 정체성을 잃는 일은 아니었다. 또 우리민족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이 중국과 하는 외교 정책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인조반정 이후 사대교린정책은 사라지고 얼빠진 사대주의만 남았다. 조선의 얼빠진 사대부들은 이미 없어져 버린 명 왕조에 대한 충성으로 소중화주의를 부르짖으며 조선을 끝없는 나락으로 몰고 갔다.
인조반정 이전 광해의 평화추구 이상과 수준높은 외교정책은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현재 대한민국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과 떠오르는 태양 중국이라는 초강대국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이번 미국이 요격미사일 사드를 한반도에 배치하려는 문제로 한국은 미국과 중국 눈치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중국입장에서는 사드가 한반도에 배치되면 유사시 미국을 향할 수도 있는 중국의 대륙간탄도탄이 거의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중국은 필사적으로 반대를 해왔다. 미국은 당연히 정반대 입장에서 사드를 한반도에 배치하려고 했다.국민들도 이 문제로 둘로 나누어져 있다. 사드배치문제의 옳고 그름은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이럴 때 지금 시각으로 보아도 두 강대국 사이에서 수준 높고 실리적인 외교력을 보여준 광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생각으로 앞으로 광해 편을 살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