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4일 주일 연중 제27주일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3-43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소작인입니까?
소작인이라면 우리는 아주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 동안 우리 민족이나 많은 민족들이 노예처럼 지주에 예속되어 살았기 때문입니다. 소작농(小作農)과 자본제적 차지농(借地農)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존재하는데, 후자는 토지에 자본을 투자하여 이윤의 획득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데 반하여, 전자는 생활수단의 획득이 주된 목적으로 농업경영을 하는 것입니다. 즉 소작농이 주로 자연 경제적 생산을 하는 반면 자본제적 차지농은 상품경제적 생산을 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작농은 자기의 노동을 기반으로 한 소경영생산자로서 지주적 토지소유에 직접적으로 예속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소작농의 발생은 일찍이 고려시대 초부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고려 중기까지는 이들을 이용하는 대토지경영은 별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성행한 대토지 소유형태인 농장(農莊)의 경우도 기본적으로는 농장주에게 신분적으로 예속된 노비 노동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독립적인 소농민 경영을 이용하는 경우는 품관(品官)·향리(鄕吏) 등과 같은 재지지주층(在地地主層), 즉 노비를 보유하지 못한 일부의 농장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과전법(科田法) 실시 이후와 특히 일반 공전(公田)을 중심으로 해서 병작반수(竝作半收:지주와 소작인이 수확물을 똑같이 나누어 가지는 소작제도)라고 불리는 소작제가 광범하게 전개되어, 차츰 귀족이나 중앙관료들의 농장에까지 파급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작 제도는 이 병작반수 소작제도를 말하기도 합니다.
1920·1930년대 이후에는 농민자작지의 감소와 소작지의 급격한 증가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더불어 국외로의 대량 인구유출현상이 발생하여 1945년까지 전체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이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이들 대부분은 식민지 지배의 결과로 형성된 토지 없는 농민들이었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 소작 조건은 차츰 악화되고 지주의 권리는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즉 소작 요율이 대체로 수확물의 5, 6할 수준까지 상승하였으며, 소작료에 토지개량비, 종자·농기구·비료·농약 등의 농업자재의 선대이자(先貸利子), 지세·수리조합비 등의 공조공과(公租公課)의 부담 등이 포함되어 일부지역에서는 소작 요율이 7, 8할에 이르러 빈번한 소작쟁의 발생의 원인이 되었고 소작인은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지주에 대항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농민운동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들의 소작인에 대한 이미지는 아주 좋지 않습니다. 일제에 너무 많이 수탈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국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관리와 황제에게 수탈을 당하고 학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공산주의가 황제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여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땅이나 재산은 하느님의 것으로 본다면, 우리 모두는 소작인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소출의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내고 나머지 모든 잉여 소출을 소작인이 갖게 되는 아주 유리한 소작인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하면 정말 소작인의 권리를 최고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작인과 소출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는 그 소출은 하느님의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이고, 키워내는 것이고, 모아들이는 것이고, 품어 안는 것이고, 사랑으로 이끌어 들여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들이는 것이며, 하느님의 백성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소작인들이 해야 하는 일이고, 농사를 잘 지어서 많은 소출을 내고, 하느님께 사랑 받는 민족이 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예언자들을 학대하고, 죽이기까지 하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게까지 한 민족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수확의 계절에 우리는 무엇을 수확해서 하느님께 바칠 것인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진정한 소작인이 되어서 무엇을 바칠지, 얼마나 바칠지, 어떻게 바칠지, 언제 바칠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소출을 바칠 준비를 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