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임성빈]

연민 / 임성빈

         지난해 가을, 서울의 청량리역에서 전철을 갈아타기 위해 좁고 긴 지하도를 지난 일이 있었다. 수직으로 난 그곳을 오고 가는 사람들 또한 거침없는 수직의 물결을 지어내고 있었다. 나 또한 그곳을 어서 지나고자 바삐 걸었다. 그러던 중 그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어떤 버려진 물건처럼 쪼그리고 앉아 계신 왜소한 몸집의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다. 거침없는 물결의 좁은 도랑 가에 불거져 나온 돌부리처럼 그 할머니는 한 바구니의 대추를 무르팍에 바짝 당겨놓고 거센 물결에 쓸려가지 않으려는 듯 잔뜩 웅크리고 앉아 계셨다. 불 꺼진 집처럼 아무런 생명의 기운도 없이 앉아 계신 그분의 그 모습은 순간 무거운 쇳덩이가 되어 내 가슴에 첨벙 빠트려졌다. 갈아타야 할 전철 생각에 바빴던 발걸음을, 그분을 지나쳐 저만치 가서야 멈추고 발길을 되돌릴 수 있었다. '왜 이리도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으셨을까? 이 바쁜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도대체 누가 한 봉지의 대추를 사기 위해 걸음을 멈출 것이라고… 저 밖의 길거리에 좌판을 놓고 장사하시는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했더라면 그래도 좀 수월치 않았을까? 그 할머니께 되돌아가기 위해 몇 걸음을 걷는 동안 나의 마음속에 아픈 한숨과 함께 스쳤던 생각이었다.  

         그 할머니께 몸을 낮추어 대추 두 봉지를 달라고 청했다. 그 순간 그분의 얼굴에 피어올랐던 밝은 생명의 기운, 작은 봉지에 넘치도록 대추를 담아 건네주시며 덤으로 주신 "팔아주어서 고마워요," 라는 다정한 인사, 그것은 순간 나의 마음속에서 어둠을 말끔히 걷어내는 생명의 빛이었다. 그 할머니께 그러한 생명이 감춰져 있을 것을 전혀 기대하지 못했기에 더욱 선물 같은 따스한 울림이었다.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할머니." 어느새 나의 인사에도 그분 미소의 밝은 기운이 옮아 있었다.

        '슬픔은 인간을 정화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가장 깊은 원천이다.' 이는 수필집[연민]의 작가이며 인터넷 신문 [가톨릭 뉴스 지금여기]의 주간이었던 한상봉 씨의 말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슬픔은 자기의 슬픔, 즉 자신의 건강이나 가족의 일원을 잃는 경우와 같은 개인적인 슬픔은 아니다. 그 슬픔은 타인의 슬픔이며 세상의 슬픔이다. 그 누구도 원치 않는 십자가에 짓눌려 허덕이는 사람들, 하루하루의 삶을 누리기보다는 견디고 버티는 일로써 메꾸어가는 이들의 슬픔이다. 타인의 그러한 슬픔이 어느 순간 자기 가슴에 날카롭게 공명하여 올 때, 우리의 가슴엔 영원히 멈추지 않는 울림이 시작된다. 그렇기에 단 한 번의 마주침이 지워질 수 없는 흔적으로 각인된다. 그리고 그 후의 삶의 여정 속에 되풀이되어 매만져지는 구원을 향한 메시지로 남는 것이리라.

         그들의 삶을 가장 힘겹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아마도 그것은 물질적 가난과 그에 따른 생활의 고단함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물건처럼 생명력을 잃고 앉아 있는 삶, 단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 하염없이 삶을 놓치고 마는 일상, 그러한 일상의 고통은 진정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 세상에 꼼짝없이 붙박여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중 한 분, 그 무수하고 단호한 발걸음들을 표정 없는 눈길로 바라보시던 그 할머니는 무엇을 찾고 계셨을까? 그곳에 있으나 오직 자기 홀로 그곳에 속하지 못하는 외로움과 이질감, 자신의 모습에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밑바닥 삶의 슬픔이 지나치는 그 많은 사람 중 그 누구에게도 공명되지 못하고 되돌아와 자신의 무릎 앞에 비듬처럼 수북이 쌓이는 것을 보고 계셨을까? 가지고 계신 것을 다 팔아도 돈 몇 푼 남지 않을 대추를 앞에 놓고 하염없이 자신의 시간을, 건강을, 삶을 갉아내고 계시던 분, 받아들여 지지 않는 손, 거절당하는 존재였다.    

         유독 무거워 보이는 십자가에 짓눌려 살아가는 이들을 만날 때 우리는 그들의 부서져 가는 존엄성 앞에 숙연해진다. 그러한 이들의 고통과 슬픔에 공명할 줄 모르는 마음들, 그러한 냉혹함도 모자라 경멸과 무시의 시선을 보내는 마음들은 진정 삶의 진실을 깨치지 못한 불행한 마음들이다. 타인의 고통 앞에 슬퍼할 줄 모르는 자는 영영 구제받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과는 달리 이곳에는 이러한 슬픔이 잘 감추어져 있다. 그렇기에 자칫 온 세상이 다 이렇다는 듯한 착각 속에 살기 십상이다.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공감 능력이며 이 공감 능력을 갈고닦아 타인을 사랑하는 길 외에 그 어떤 행복에의 길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 톨스토이도 '행복은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다'라고 했다지 않는가? 수많은 현인이 이구동성으로 설파해 온 사랑을 우리는 어디에서 체험할 수 있을까? 사랑의 체험이 없는 하루는 과연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삶이 그 자체로서 사랑일 수 있다면 굳이 애써 사랑하여 채워야 할 이유가 없겠지만, 불행히도 우리들의 삶은 사랑이기보다는 그 반대인 듯, 끊임없이 허기지고 애착으로 인한 불안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부단한 깨임을 통한 실천을 요구한다.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릭 프롬의 말대로 사랑 또한 애써 노력해서 익혀야 할 기술인 것이다.

         따스한 가슴을 지닌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들을 접할 때 우리는 감동한다. 그러나 그 감동이 우리들 마음의 두꺼운 각질을 뚫고 들어와 우리의 행동 양식에 영향을 미치기엔 아무래도 모자라는 듯하다. 그러나 자신 안에서, 자기 말에서, 손길에서 진실한 사랑이 감지되어 올 때, 우리는 감동 너머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바로 우리를 정화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가장 깊은 원천을 다지는 일이리라. 그 사랑이 나의 하루에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을지 더욱 진지하게 살피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병옥]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소소한 일을 사랑의 눈길로 세심하게 그려내셨네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윤옥]

여기서 벌써 이 따뜻한 글을 읽을 수 있군요.
교황님도 말씀하셨어요. 누구나 가슴 속에 놀라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기탄없이 풀어 헤쳐 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