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0월 23일)은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가 저격당해 사망한 날입니다. 1996년이니까 지금부터 28년전입니다. 김구 선생의 서거일도 아니고 암살범이 죄값을 받고 죽은 날을 굳이 언급하는 것은 민족에게 크나큰 상처를 입힌 국가적 공공의 적은 반드시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의미를 되살리고 싶은 마음에서 입니다.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현역 육군 소위인 32살 안두희에게 숙소이자 집무실이었던 서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김구 선생의 암살은 이 한반도의 큰 비극이 태동할 시발점이였는지도 모릅니다.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10일동안의 장례기간동안 120여 만명이 장례식장을 찾기도 했습니다. 서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50만 가까운 조문객이 몰려들었습니다. 여기서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 이유나 배경 등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워낙 방대한 양이여서 말입니다. 아직도 안두희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암살을 저질렀는지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김구 선생과 베트남의 호치민 선생을 동시에 떠올리곤 합니다. 김구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1945년 해방직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습니다. 해방 직후 중국에서 귀국해 새로운 국가 건설에 앞장 섰습니다. 베트남의 호치민선생은 1941년부터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펼쳤으며 1945년 일본의 패망후 곧 이어 벌어진 프랑스와의 8년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1955년부터 20년동안 있었던 베트남 전쟁 특히 미국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했습니다. 선생은 1969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사망했습니다. 김구 선생과 호치민 선생은 한국과 베트남에서 국부로 일컬어집니다. 특히 호치민 선생은 베트남의 명실공히 국부로서 그 위치를 아직도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화폐에는 모두 호치민선생의 얼굴이 새겨져 있으며 선생이 탄생한 5월 19일은 국경일로 정해져 있습니다.
김구 선생과 호치민 선생의 다른 점은 호치민 선생은 일본과 프랑스와 미국과의 전쟁을 이끈 전쟁의 승리자이라면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망명 임시정부의 리더역할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해방후 좌우익 갈등속에서 혼란했던 남한을 효과적으로 이끌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호치민 선생을 정점으로 일치단결했던 베트남 상황과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김구 선생은 그런 혼란한 정치 사회분위기속에서도 리더로서의 가져야 할 덕목을 가졌던 민족의 지도자라는 데 이론이 없습니다. 만일 김구 선생이 희생당하지 않고 나라를 이끌었다면 한국전쟁도 이승만 독재 정치도 없었을 것이고 박정희 군사독재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 정권도 태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참으로 혼란스런 40년 (1950~1990년)은 없거나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김구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그 이후 이승만 정권에서 군납공장으로 큰 돈을 벌었지만 이승만 정권 붕괴 이후 평생을 숨죽여 살았을 것입니다. 이민을 시도했지만 국민여론에 의해 여권조차 발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정의로운 피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이리저리 피해다니면서 모양새를 변장하고 있었지만 민족의 원수를 처단하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65년에는 곽태영씨에게 칼로 목을 두번이나 찔렸지만 요행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1987년 노송구씨에게 각목으로 얻어 맞았고 1992년 권중희씨에게 끌려가 백범 묘소에 강제 참배하기고 했습니다. 결국 1996년 오늘 (10월 23일) 버스 운전기사인 박기서씨에게 맞아 결국 김구선생을 암살한지 47년만에 저 세상길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암살범이자 민족 공공의 적인 안두희가 무슨 이유로 김구선생을 암살했는지 이제 다시 조사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과 국민들의 리더였고 국부였던 인물을 저해한 그 씻지못할 죄는 언젠가는 죄값을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민족의 앞길을 흐트러뜨린 암살범 안두희의 행적에 대한 재조사는 분명히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김구 선생 이후에도 의문사한 한국의 정치 사회적 리더들이 여럿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장준하 선생입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는 재야인사로 활동하던 장준하 선생은 1975년 등산을 나갔다가 피살된 채 발견됩니다.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살벌하게 야당과 반체제 인사들 그리고 저항하는 학생운동가들을 때려 잡던 시기입니다. 등산에는 남다른 소질이 있던 장준하선생이 등산길에 그다지 험한 길도 아니데도 목숨을 잃었다는데 당시 의식있는 국민들은 참담함을 금치 못합니다. 아직도 누가 왜 장 선생을 살해했는지 규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추측만 있을 뿐입니다.
민족을 이끌 위인들이 총탄에 희생되거나 외진 곳에서 살해당하는 그런 사건은 이 나라 발전과 전진에 대단한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 못된는 지도 모른채 나라를 도탄에 빠지게 하고 민족이 공분할 짓을 저지른 세력들은 반드시 보복을 당하거나 그 죄값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정의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의 사망날 정말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2024년 10월 23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