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방 멸치 / 박산하
바닷속에 또 하나의 길이 있다
남해 지족해협
잔잔한 물길 속에 빠르게 흐르다
좁아지는 물길
멋모르고 들어온 꼴뚜기, 금새 검은 몸 색이다
뭇 생명, 길 한번 잘못 들었다가
그물 조여지고
막다른 골목, 함정이다
아귀는 어린 것 한입에 덥석 물고
힘센 것이 입을 벌리면 힘없는 것들은
살색이 변한다
살이 녹는다
이때쯤이면 어장주
사립문을 열고 울안으로 들어간다
그들에겐 죽음만이 살길
그래,
살았을 때보다 죽어야 대접받는다
온전한 몸으로 물기를 말리고
죽음에도 격이 있다는 거
흠 없이 죽어야 한다는 거
등이 굽어도 안 되지
꼿꼿하게 죽어서 나가는 섬이 있다
2013년 천강문학상, 2014년 《서정과현실》을 통해 등단
시집 『고니의 물갈퀴를 빌려 쓰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샤갈, 모래톱에 서다』
시 감상: 이 시는 자연의 포획 구조와 인간 사회의 생존 논리를 병치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둘을 관찰하는 ‘시선’ 자체를 문제화한다. 바닷속 길은 단순한 함정이 아니라, 스스로 길이라 믿게 만드는 인식의 장치이며, 생명들은 그 장치 안에서 자발적으로 질서에 편입된다. 여기서 폭력은 외부에서 가해지기보다, 내부화된 흐름으로 작동한다.
시선은 개별 생명의 비극이나 어장주의 권력에 머물지 않고, 그 사이를 무감하게 관통한다. ‘살이 녹는다’는 서술조차 감정의 고조 없이 제시되며, 죽음은 사건이 아니라 절차로, 변화가 아니라 규격으로 다루어진다. 이때 ‘죽어야 대접받는다’는 인식은 단순한 역설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기준이 이미 전도된 체계에 대한 보고에 가깝다.
결국 이 시에서 핵심은 포획된 생명도, 포획하는 권력도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구조적 무감각이다. ‘꼿꼿하게 죽어서 나가는’ 장면은 저항의 실패가 아니라, 저항의 필요조차 소거된 상태를 드러낸다. 이 시는 비판이나 고발 이전에, 세계가 어떻게 아무 일도 아닌 듯 폭력을 지속하는지를 보여주는 냉정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