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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형제자매가 하나도 없는 무남독녀입니다.
따라서, 세상 떠나신 제 부모님을 기억해 줄 자식도 저 하나입니다.
우리 엄마, 우리 아버지...
당신들의 삶을 송두리 째, 하나 뿐인 딸자식을 위한 밑거름으로 다 내어주신 분들...
저는 제 부모님을 기억합니다.. 아픔으로, 눈물로, 그리움으로...
오늘 제 아버지에 대해서 썼던 글 한 편을 올려봅니다.
저 어릴 적 가정사를 시시콜콜 숨김 없이 다 적은 글입니다.
저에게 너 어떻게 자랐냐고 물어보신 분은 없지만,
그냥 눈물을 글썽이면서, 내 부모님이 나를 이렇게 키워내셨노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 들어주실래요? 좀 길긴 해요... ^^
이 글을 쓰면서 많이 울었더랬습니다...
아버지... 이 딸이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그리운 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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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여름 방학 때의 일이다.
그날 남편과 나는 싸웠다.
왜 싸웠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아마도, 별 것 아닌 일에 내가 예민하게 굴다가 싸움이 돠었던 것 같은데,
말을 이쁘게 하지 못하는 것으로는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남편이^^
말싸움 중에 예의 그 가시 돋힌 모진 말로 내 심기를 제대로 건드려서 일이 커졌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이 분은 말 한 마디로 삼천 냥 빚을 만든다... ^^
나는 엄청나게 마음을 상했고, 방에 틀어박혀 한참을 울다가,
저 영감 꼴보기 싫으니 외출이라도 하리라고 옷을 챙겨 입고 거실로 나갔다.
차 키를 쥐고 나서는 나를 보고 남편은 금방 겁에 질린 표정이 되더니,
"어디 가? 내가 운전해줄게"
이러면서, 내가 거절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쏜살 같이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챙겨 입고 튀어 나온다.
하이고... 당신도 많이 늙었구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싸움 뒤 외출이 길어진 내게,
지금 당장 들어오지 않으면 영원히 집에 못 들어오게 한다고 딸을 시켜 전화를 하던 사람이다.. ^^
싸우고 집을 나선 부부는 말없이 조용히 동부간선도로를 달렸다.
그날 내가 향한 행선지는 서대문 로터리 근방,
내 성장기의 추억이 여기 저기에 쌓여있는 곳이다.
그날 나는, 그 동네를 이리 저리, 그냥 걸어다니고 싶었었다. 날도 더운데... ^^
심기 불편한 마나님을 태우고 온 강기사는 경희궁 옆 서울 역사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주차장을 나와 서대문 로터리를 향해 걸어갔다.
조금 걷다 보니 우측으로는 강북삼성병원, 좌측으로는 경향신문 사옥(예전의 MBC 사옥)이 나온다.
경향신문 사옥을 지나 정동길의 예원학교 뒤편에는 무허가 주택이 밀집한 동네가 있었는데
거기서 예닐곱살 무렵부터 국민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었다.
그리고 강북삼성병원(예전의 고려병원)앞으로 언덕배기를 올라가다보면 송월동, 스위스 대사관이 있던 곳인데,
그 옆의 적산가옥(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 1층에서 국민학교 2학년, 3학년 무렵에 살았었다.
그리고 서대문 로터리 구 동양 극장 맞은 편, 강북삼성병원 후문 근처에서는,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무렵까지 살았었고,
서대문 로터리 지나 독립문 못 미쳐 천연동에서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2학년 때까지 살았으며,
영천 시장 뒤 냉천동에서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었다.
그리고 고1 때부터 경인교대 졸업 직후까지는 은평구 녹번동에서 살았다...
이렇게 2년이 멀다하고, 때론 1년 만에 정말 자주 이사를 다닌 까닭은
서울 하늘 아래 집 한 칸이 없었던 우리 부모님이 셋방을 전전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천연동 집에서 살 때는 집 주인이 새파랗게 젊은 부부였는데,
하루는 집 주인 아저씨가 우리 엄마와 싸운 뒤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있어야 할 건데 말이야.." 라고 다 들리게 큰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는 엄동설한이었는데, 그 다음날로 우리 부모님은 새로운 셋방을 구해서 이사를 나가셨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송월동 쪽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고개를 틀어 정동 쪽을 바라본 뒤
우리는 서대문 로터리를 향해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서대문 로터리... 나의 10대를 관통하여 20대 초반까지의 추억이 서리 서리 쌓여있는 곳..
서대문 로터리 횡단 보도 앞, 지금은 헐려나간 서대문 순복음교회를 빼고서는
내 사춘기와 청춘 시절을 이야기할 수 없다.
나는 중 3때 내 발로 걸어서 교회에 갔다.
50세의 아버지와 35세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무남독녀.
넉넉지 않은 형편 가운데 부모님의 사이까지 좋지 못해서 집안에는 대화가 없었다.
세 식구 모두 꼭 필요한 말 외엔 주고 받지 않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던 나는 외로웠고 조숙했다.
부모님의 별로 즐거워보이지 않는 삶을 보며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어,
혼란스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신의 존재를 찾아 의지하고 싶었다.
1976년 5월 30일 주일날에 처음으로 찾아간 교회에 나는 빠르게 잘 적응을 하고
커다란 마음의 위안과 낙을 얻게 되었다.
교회 학생회 활동이 정말 즐거웠고, 좋은 친구들도 많이 얻었다.
그렇게 교회에 정을 붙이던 무렵, 하루는 교회의 어른 한 분이 무슨 이야기 끝에 내게 물어보셨다.
너희 아버지는 무얼 하시니?
너희 아버지는 무얼 하시니... 아버지는 무얼 하시니...
그 질문에 나는 정직하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철학관을 운영하셨다.
주역을 공부하셔서 남의 사주팔자를 풀어주고 작명도 하셨던 아버지.
그 시절에 나는 우리 아버지가 남의 사주를 봐주신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아마도, 60년대 70년대의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미신 타파 등을 외치던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더구나 이곳은 교회가 아닌가?
우리 아버지가 접신하여 점을 치는 무당은 물론 아니었으나
그래도 교회에서, 우리 아버지는 사주를 보신다고 말을 하기가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엉겁결에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는 공안당 한의원에서 일하세요."
(공안당 한의원은, 지금도 서대문 로터리 그 자리에 있는 유서 깊은 한의원이다)
"그래? 그럼 우리 교회 바로 앞이네? 야, 너희 아버지가 한의사시구나?"
"네"
얼떨결에 주워담을 수 없는 거짓말을 해놓고, 나는 그 뒤로 그 어른이 먼 발치에만 보여도 피해다녔다... ^^
우리 아버지는 실제로 한의학에 조예가 깊으셔서,
집에는 한의원 수준의 커다란 약장이 있었고 이런 저런 환약과 첩약을 직접 조제하셨다.
나는 달달한 숙지황을 아버지를 졸라 간식 삼아 얻어 먹기도 하고
새빨간 경명주사를 보고서는 무서우면서도 선명한 그 붉은 빛을 홀린듯이 오래 바라보기도 했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한의사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
게다가, 내가 부끄러워하는 아버지의 그 생업의 덕으로 나는 여태 살았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 아니던가?
그 거짓말이 너무도 스스로 부끄럽고 뼈아팠던 나는,
그 뒤로 누가 아버지의 직업을 물으면, 사주 보시고 작명하신다고 당당하게 말하게 되었다...
내 아버지는 경북 영주가 고향이셨는데, 열 일곱 나이에 다리 하나를 심하게 다치셔서 평생 다리를 저셨다.
게다가, 이목 구비 수려한 잘 생긴 얼굴은, 천연두로 인해 심하게 얽어 있으셨다.
그렇게 다리를 다치고 얼굴이 얽어버리니, 좌절하신 아버지는 무작정 집을 떠나 이리 저리 방황을 하셨고
어느 절에 오래 머물면서 배우신 주역과 한의학이, 하나는 생업이 되고 하나는 부업이 되었다.
우리 엄마는 제주도 부잣집 맏딸로 잘 자라서 제주 참의원까지 지낸 집의 외며느리로 시집을 잘 가셨는데
열 아홉에 시집 가서 십 년이 넘도록 아이는 안 들어서고 남편의 바람끼는 주체를 못하게 심해지고
어찌 어찌 기적처럼 나이 서른에 딸 하나를 낳았음에도 고된 시집살이와 남편의 바람은 갈수록 불감당이 되어
결국은 서른 네 살 나이에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딸은 뺏기고 서울로 도망치듯 올라오셨다.
(그때 엄마가 제주도에 두고 온, 나와 성이 다른 그 언니는, 2008년에 쉰 셋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리고는 우리 아버지를 만나서...
저 사람이라면 나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주겠지 하는 생각에 결혼을 하셨다고 했다..
50세의 내 아버지와 35세의 내 어머니는 그렇게 만나... 딸 하나를 얻으셨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두 분의 시선은 오로지 나를 향해 있었다.
엄마는 '내 실패한 인생의 유일한 희망은 너다'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는데
철들면서부터는 엄마의 그 푸념이 너무도 듣기 싫었다.
내 성장기에도 귀물이었던 바나나를 엄마는 어릴 적에 수시로 드셨다고 했는데
꽃노래도 한 두 번인데, 그런 지난 영화를 되뇌이는 엄마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늘 냉담하셨고,
나 국민학교 3학년 끝 무렵 봄방학 때, 차려놓은 저녁 밥상이 내팽개쳐지는 격렬한 부부 싸움 끝에
내 손을 잡고 가출을 하셔서... 반 년만에 나만 집으로 들여보내셨더랬다.
(엄마는 그 뒤, 나 중 1때 다시 집으로 복귀하셨다)
엄마와 집 밖을 떠돌던 반 년 동안 나는 학교를 가지 못 했기 때문에,
국민학교 4학년 1학기를 통째로 건너뛰고 2학기부터 학교를 다시 다닐 수 있었다.
그 가출 사건 이후 다른 과목은 다 따라가겠으나 산수를 헤매기 시작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지겨운 수학이 내 평균 점수를 깎아내렸는데
내가 나중에 초등교사가 되어보니, 수학 공부에 있어서 초등 4학년 때가 결정적 시기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중요한 때에 반 년이나 학교를 못 다니게 만드시다니...
아예 2학기도 마저 놀린 뒤에 3월부터 4학년을 새로 다니게 해주셨다면 괜찮았을 것을...
그때 엄마의 그 과감한 가출이 나중에 생각해보니 참으로 원망스러웠지만
다시 잘 생각해보니, 그래도 날 데리고 나가주신 것이 감사한 일이었더라..
그때 엄마가 날 버리고 혼자 집을 나가셨더라면, 그 상처를 어린 내가 감당할 수 있었을까?
우리 아버지는 정말 말씀이 없으셨다.
잘 웃지도 않으셨는데,
가끔 손님들에게 내가 학교에서 타온 상장들을 내보이며 자랑을 하실 때에만 활짝 웃으셨다.
엄마 따라 가출했던 내가 돌아왔을 때,
우리 아버지는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굵은 눈물 방울을 뚝뚝 흘리시면서 우셨다.
그리고 밥지어 먹이시고 도시락 싸주시고 빨래도 해주시며 혼자 손으로 나를 삼 년이나 거둬주셨다.
삼 년만에 엄마가 돌아오시긴 했어도, 두 분은 무늬만 부부셨다.
엄마의 넋두리는 전보다 심해졌고, 아버지는 불편한 몸으로 그저 묵묵히,
남의 사주를 봐주고 이름을 지어주시며 처자식을 사력을 다해 부양하셨다.
그 사이 사리판단이 분명해진 나는 성실한 아버지에게 냉담한 엄마를 미워하는 편에 섰다.
애증(愛憎)이라는 낱말을 그때 배웠다.
나에게 지극 정성을 베푸시는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불쌍한 아버지를 홀대하는 엄마를 미워했다...
남편과 나는 서대문 로터리, 허무는 중인 교회 앞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직도 건재한 공안당 한의원의 간판을 살펴본 뒤, 독립문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조금 걷다가 천연동 쪽으로 꺾어지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그 골목, 그 골목...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눈에 눈물이 흐른다...
그 골목의 그 건물은 지금도 그대로 있었다.
그 건물이 시야로 들어오면서부터 나는 울기 시작했기 때문에.. 흐려진 눈에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어도
그 건물과 그 옆의 건물은 예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외양만 조금 손을 본 듯 했다.
지금은 1층이 호프집인 그 건물의 2층에, 우리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철학관이 있었다.
그 전에는 간선도로 변 번듯한 건물에서 일을 하셨는데
연세 드시면서 점점 손님도 줄기 시작하자 보다 월세가 저렴한 뒤쪽 골목으로 옮기셨고
나 대학 1학년 6월에 뇌출혈로 쓰러지시기 전까지 그 건물에 머무셨더랬다.
일조량이 부족해서, 낮에 형광등을 켜놓아도 늘 침침하던 우리 아버지의 사무실.
어느 겨울날 된통 감기가 든 내가 하교 길에 아버지의 사무실에 들르자
근처 순대국 집에서 순대국을 시켜주시고는, 다대기를 듬뿍 풀어서 내게 권하시며
얼큰하게 이걸 먹으면 감기가 떨어진다고 하셨다.
그걸 먹고 나는 진짜로 감기가 바로 나았었다..
아버지 사무실 근처에는 신성루라고 물만두를 기가 막히게 잘 하는 집이 있었는데
거기도 종종 데리고 가셔서 물만두를 사주셨다.
60대 후반의 내 아버지가, 하나 뿐인 딸 자식 가르치고 먹이고 입히기 위해
어떨 때는 하루에 한 명도 오지 않는 손님을 하염 없이 기다리시던 그 골목의 그 건물, 그 사무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아버지는 집에서 하루 종일 쉬시는 날이 없었다.
명절 때 외엔 항상 사무실에 나가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되게 일하셨다.
아.. 내 아버지.. 내 아버지... 우리 아버지...
나는 그날 그 골목에 서서 하염 없이 울었다.
엉엉 소리까지 내서 우는 나와 덩달아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쳐내는 남편을 지나가는 행인이 쳐다봤지만
나는 쉬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아버지 돌아가신 후 아버지를 생각하며 흘린 눈물이 그날 가장 많았던 것 같다.
아미도 당일의 울적한 내 심사가 아버지의 흔적과 만나니 눈물샘이 그만 폭발을 한 것이리라...
내 아버지는 그렇게 사력을 다해, 병환으로 몸져 누우시기 전까지 철학관을 지키시다가
1년 남짓의 투병 끝에
그 이듬해, 딸 자식 대학 졸업도 못 보시고 세상을 버리셨다.
그리고 나의 애증의 대상이던 우리 엄마는..
신혼 초부터 계속해서 나와 함께 사시며 내가 낳은 딸자식 셋을 다 길러내시며 나를 도와주셨고
2017년 12월에 요양원에 입소하셔서 1년 남짓 지내시다가
2019년 1월에 세상을 떠나셨다.
한참을 울고 나서 우리는 그곳을 떠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엄마와 33년을 함께 살아주고, 얼굴도 못 본 장인어른을 생각하며 길에서 나와 함께 울어준 내 남편에게
고맙다고 진심으로 말해주었다....
첫댓글 가정사를 이리 낱낱히 공개한다는것이
결코 쉽지만은않은데 어렵게 성장한걸 봐서는
굉장히 긍정적,적극적으로 삶을 대처하시는군요
응원합니다 앞으로는 부디 즐거운일만 생기도록
기도합니다
저 결혼식 전날 밤에, 우리 이모께서 제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이런 저런 힘든 일 많았는데 잘 자라주고 이렇게 시집도 가니 너무도 대견하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며 우셨어요.
그런데 저는, 막상 자랄 때는 큰 어려움을 몰랐어요.
우리 부모님이 가난 속에서도, 제게 필요한 것 만큼은 아낌 없이 다 해주셨거든요.
저는 가난한 왕국의 공주였던 것 같아요.
물론, 내 부모님이 부자가 아니니까 바랄 것만 바라야지, 하고 제가 알아서 포기한 부분도 많긴 했지만요.
사람마다 가슴 속에 고여있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저는 그것이 제 부모님 이야기입니다. 그냥, 누군가와 친해지면, 제 성장기의 이야기를 눈물을 글썽이며 풀어놓곤해요.
현재는 그런대로 큰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ㅎㅎ
종횡무진님 항상 제 글에 힘 실어주셔서 많이 감사드립니다. ^^
삶의 글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주저리 주저리 풀어놨을 뿐인데
박수까지 쳐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
이런 이야기도 막 쓰는 걸 보면, 제가 이 삶방에 대한 소속감이 확실한가 봅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화요일 되시어요. ^^
부모님과의 추억에 얽힌 애증어린 휴먼 스토리네요..
아버님의 삶의 흔적에 대한 아름답고 진솔한 고백..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으실 두 분의 '외동딸 사랑'이
되살아나, 온누리를 환하게 비추는듯 합니다.
수정구슬님의 오늘은 평화로우시길 바랍니다~~^^
없는 살림 중에도 항상 우리 딸이 세상에서 제일 이쁘고 똑똑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부모님 덕분에
그리고 학교 공납금을 한 번도 밀리지 않게 해주시고
있는 집 애들에게 기 죽을까봐 옷차림을 늘 깔끔하게 챙겨주신 덕분에
저는 자존감 높은 인격체로 자랄 수가 있었습니다.
제 복이지요.
저의 오늘, 부모님의 희생 덕분에 평화롭습니다.
삼락님 날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평안한 화요일 되시어요. ^^
아....
읽어 내려오는
내 눈에도 눈물이 맺힙니다...
소설도 이리 절절하게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요.
아스라한 부모님들의 일생까지 구석구석 기억하시고 또 조숙한 아이가 이해하였으니 잘 키운 딸 하나 열아들보다 낫다라는 말이 맞군요.
철학관을 운영하셨으니 딸래미
사주팔자도 보셨을테고
따님의 이름은 잘 지으셨겠죠?
그 분의 염원으로 수정구슬님은 좋은 가정을 꾸리며 잘 사시게 되었고요.
말 한 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데
삼천냥빚을 진다고
귀엽기도 해라...
고향같고 뿌리같은 영천시장 서대문구 골목길에 가서 펑펑 우는 부부....
더욱 돈독해진 사이로
돌아오고
사랑받는 아내
행복한 자아로
오늘도 건강하세요.^^
외부이고 핸드폰이라
추천은 집에 가서 누르겠어요.
컴화면으로 다시 읽어보고요.
마음 열어주신 삶방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필생의 역작인 제 이름은, 61년 생의 이름치고는 아주 이쁘고 촌스럽지도 않고요,
(제 딸의 절친 이름이 제 이름과 같아요. 제가 가르쳤던 요즘 아가들 중에도 저랑 같은 이름 종종 있었고요^^)
말씀하신대로, 제 사주에 딱 맞게, 제 사주에 물이 없다고 삼수 변 넣어서 이름 지어주셨고
우리 엄마께서는, 너희 아버지 살아 생전에 우리 딸은 반드시 쥐띠에게 시집 보내야 잘 산다고 하셨다면서
쥐띠인 제 남편과의 결혼을 아주 적극적으로 권장하셨어요.
그 쥐띠 남편, ㅎㅎㅎ 살면서 이런 저런 일 많았지만
참 고맙고 좋은 사람임이 분명하다고, 나이가 들수록 확실하게 깨닫고 있어요.
어쩜 이렇게, 구절 구절 가슴에 와 닿는 감동적인 댓글을 쓰셨는지
별꽃님의 이 댓글만으로도, 제가 이 공간에서 글을 쓸 이유가 충분하다고 느낍니다.
정을 담뿍 담아 보내주신 공감의 메아리가 커다란 위로와 기쁨이 됩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
올곧게 잘 자라 멋진 선생님이 되시도록 도와주셨던 울수정구슬님 뒤에는 부모님들이 계셨군요.
아버님께서는 평생 무남독녀인 울수정구슬님을 위해 사셨네요.
아마도 젊디 젊으셨던 어머님께도 남모를 외로움도 있으셨을 듯 보입니다.
울수정구슬님 삶 큰 박수로 응원합니다. ^^~
항상 제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는 순수수피아님 오늘도 너무 너무 감사드려요. ^^
맞아요, 우리 엄마의 그 남모를 외로움은...
제가 어리고 철 없던 시절엔 헤아려 볼 생각조차 안하다가
제가 나이 들어가니, 그 시절의 엄마의 외로움, 채워지지 않았을 마음의 허기,
그런 것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여기에는 차마 쓰지 못한, 엄마에 대한 몇 가지 원망이 있었는데
엄마가 쇠잔해질 대로 쇠잔해지셔서 요양원에 들어가신 뒤에야.. 그 원망까지 털어버릴 수가 있었어요.
남들은 평생을 엄마와 함께 살았다고 제가 착한 딸이라고 하지만
결코 결코 그렇지 않음은 하나님이 아시고 제가 압니다.. ㅠㅠㅠ
수피아님 감사해요, 평안한 화요일 되시어요. ^^
서대문 독립문앞 행촌동 에서 74년 부터 살았는데요
좁은 골목 행촌여관 좌측에서 조금 올라가다30미터 우측
기와집요
공안당 한의원 지금은 할아버지 연세가 많으셔서 손놓고
아드님이 운영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유명한 공안당 아~~옛날이여
그당시는 그쪽 골목이 전부가 기와집 이었지요
동대문 고속터미널까지 택시비가 60원 이었어요
시골서 친척들 오면 늘 마중을 많이 나가서요 ㅎ
수정구슬님!
글보면 힘이 솟씀니다
글도 잘쓰시고 바른생활 선생님 이어서 너무나 좋습니다
코로나19 조심하시고 늘 꽃길만 걸어세요
화이팅
맞아요, 그 시절 그 동네, 기와집이 많았습니다.
공안당한의원을 아시는군요.
참으로 유서깊은 한의원...
공안당 한의원 옆에는 서대문 우체국,
지금은 없어진 고가도로로 인해 늘 어둑 어둑 하던 길 건너의 화양 극장,
제가 살던 집 건너편에 보이던 동양극장,
자주 가서 공부도 하고 그 마당에서 놀기도 하던 4.19 도서관
지금도 꿈에 보이곤 하는 제 유년 시절의 터전입니다.
에구... 바른생활 선생님 아니고요 ㅎㅎㅎ
39년의 교직생활을 끝으로 이제 곧 명예퇴임합니다.
아직 확정공문은 오기 전이지만, 거의 백프로 퇴임 승인 날 것 같아요.
2월 28일 부로 퇴임하면, 3월부터는 전직교사입니다. ^^
공감과 과찬의 댓글에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평안한 화요일 되시어요. ^^
세상에 왜그리 수정구슬님과 나는 비슷한지‥
저도 서대문 근처 충정로에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우리아들딸은 미동 국민하고 졸업했고요 저역시 무남독녀‥ 홀어머니 와 오랜동안
살아왔고 남편과 날마다무지 싸웠을때 울 엄마가
새끼들은 내가 키울테니 도망가서 편히 살라고
하셨지요‥ 참 사연많은 내심정 ‥ 나도 울고
싶습니다 수정구슬님과 술한잔 하고 싶네요
충정로에 사시는군요.
제가 살던 동양극장 앞의 집도 주소가 서대문구 충정로였어요.
저는 덕수국민학교 나왔는데, 저희 동네 친구들은 미동국민학교, 서대문국민학교, 덕수국민학교
이렇게 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골고루 있었네요.
새끼들은 내가 키울 테니 도망 가서 편히 살라고 하신 회장님 친정 엄마의 그 심정..
그 심정이 헤아려져셔 저도 가슴이 찡하네요.
저도 젊을 적에 부부싸움 하고 나면,
내 딸 눈에서 눈물 나게 했다고, 사위 녀석 나쁜 녀석이라고 울먹이시던 울 엄마가 떠오릅니다.
코로나 물러가고 세상 좋아지면, 저도 퇴직하면 시간이 지금보다 넉넉할 테니
카페 모임에 꼭 가서, 뵙고 싶은 분들 뵙고자 하는 희망사항이 있습니다. ^^
제가 회장님께 공손히 한 잔 따라 올려야지요. 그날을 기다립니다.
우리 회장님 항상 감사드려요! ^^
웃음도 있고,
눈물도 있고,
정말 고귀한 휴머니즘도 있는,
구슬님의 단편소설 같은 인생사
저도 홀로 눈물을 흘리며 읽습니다
그 느낌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 나이에
누구인들 살아온 구비 구비 사연이 없을까요..
사람들 마음 속엔, 덜 자란 그 상태 그대로인 아이의 모습이 있다고 하는데
환갑을 맞은 수정구슬의 마음 속에도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 저는 외롭기도 했고, 남과 다른 가정환경으로 인해서 어둡기도 한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힘들고 어려웠던 삶의 그늘은 부모님께서 감당하시고
저만큼은 어떻게든 양지 쪽이 앉히고 볕을 받게 해주셨어요.
그 사랑을 생각할수록 마음이 시리고... 갚지 못할 이 사랑의 빚을 어찌할까 싶습니다...
그저 제 자식들에게 갚는 수 밖에요.
갑자기 눈이 펑펑 내려서 창밖이 온통 설원입니다.
하얀 눈 속에 포근한 날 되시어요. ^^
구슬님의 인생 여정에 격려의 큰 박수 보내 드림니다 오로지 건강하고 해피한 나날 이시길요
부족한 글에 공감해주시고 격려의 큰 박수를 보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건강하고 해피한 나날이 되기 위해서 자기 관리에도 힘쓰고,
노력하는 60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
행복하다고 생각을 하고 행복하다고 말을 한다면 행복해진다고 하였으니
이미 행복하다고 여기고 ㅎㅎ 열심히 살게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
구슬님
지금 행복하시지요?
함께 울어 줄 남편이 있는 거 행복이십니다
저는 요즘 손자를 보면서 진정으로 함께 기뻐할 남편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가끔은 서글퍼 집니다
저는 진정으로 귀여워할 손자가 없어서 종종 아쉽고 ㅎㅎ
저 딸랑구들이 언제쯤이면 내 집에서 나가서 새 가정을 이룰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다들 사는 형태는 달라도,
집집마다 나름대로의 결핍이 없는 집 없고, 나름대로의 고충이 없는 집 없고..
그래서 세상이 공평한가봅니다.
녹우선배님, 따님이 결혼해서 좋은 가정 이뤄 외손주 보심이 정말 부럽고요,
명퇴 이후 삶의 조언 많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우리시대에는 모두다 아픔이 있더라구요
같이 울어 주시며 공감하고 이해해주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 또한 감사하지요
정년을 앞두고 계시다니 남편분과 좋은곳 다니시며 더한 행복 쌓으시길 바래요
그렇지요,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통과하며, 부족함 속에서 성장한 저희 세대지요.
그래도 그 시절이 늘 그립고, 다만 한 순간만이라도 잠깐만이라도 돌아갈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같이 울어 주고 공감하고 이해해주는 제 남편, 고마운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싸우고 지지고 볶은 세월이 길었습니다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서로의 모서리가 둥글어지고 서로에게 맞춰지고...
이젠 저처럼 늙어가는 영감이 그저 안쓰러울 따름입니다.
저는 정년은 2년 반 남았는데 미리 명예 퇴직을 신청했습니다.
제게 늘 힘 실어주시는 함빡미소님 감사해요. 평안한 화요일 저녁 되시어요. ^^
수정구슬님 애쓰셨어요.
그래도 두분 부모님 따님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하며 키우셨으니 그깊고깊은 사랑을 온몸에 받고 크셨기에 지금같이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이어 가시는 것이겠지요.
이젠 좋은기억만 남겨두세요.
그리고 행복하세요.
그러믄요, 성장기 내내 단칸방을 못 면하는 궁핍한 삶이었고
매일 매일 부모님의 돈걱정에 귀에 못이 박혔어도
제게 주시는 사랑이 풍성해서,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엄마가 저를 데리고 집을 나가셨을 때도 엄마의 사랑이 풍족해서 슬프지 않았고
저만 들여보내고 엄마랑 떨어져지낸 삼 년 세월도, 아버지의 사랑이 지극하여 힘들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정말, 저 하나 잘 길러내시려고 이땅에 오셨다 가신 것 같아요.
눈이 너무 많이 내리네요.
폭설 피해 없도록 조심하시고 평안한 저녁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아~ 다시읽어도 그그림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지나가네요
그렇게 힘든어린시절 보내면서도 잘커주고 잘자라준 우리샘~" 대견하네요
제가 힘들었던 것보다는,
힘드신 부모님을 지켜보는 것이 힘들었었죠.
최근에 엄마가 종종 꿈에 나타나세요.
며칠 전엔 아버지 기일이라며 음식 장만을 하시는 모습을 꿈에서 뵈었어요.
이 땅에 태어나서 자식 낳아 기르고 죽는 것이 사람의 삶의 본질 같아요.
그냥.. 세월이 무상합니다.. ^^
지존님 평안한 저녁 되시어요. ^^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들~
위해서 희생을 보람으루 생각 하시면서 키워주신겁니다,
구슬님 어렵게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되서
행복스럽게 사는 모습이 보람차게보입니다,
진달래님의 닉만 보아도, 하얗게 눈세상으로 변한 이 겨울의 한복판이 훈훈해짐을 느낍니다. ^^
작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꽃이 이쁜지 어떤지도 모르고 지나갔는데
금년에는 코로나가 곧 물러간다는 기대감을 안고,
피어날 진달래를 비롯해서 봄꽃들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느끼고 싶네요.
저는 훌륭한 사람은 결코 아니지만, ㅎㅎ
항상 감사하면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은 합니다.
아침부터 칭찬 많이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우신님 진달래님, 행복한 수요일 되시어요. ^^
막내딸 엉덩이냄새 맡기로
빵~터지게 했던 수정구슬님이
오늘은 부모님께 대한 기억으로
울컥하게 하시네요
영천시장은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오래된 시장이더군요
탐방 하기좋은 독립문주변에서 코로나 물러가면 만납시다
ㅎㅎㅎ 그 글을 기억하시네요. ^^
이렇게 들려오는 메아리가 좋아서,
삶방에 머무르며 게시글도 쓰고 댓글도 씁니다.
영천시장, 엄마 손 잡고 따라가서 고등어도 사고 채소도 사고
옷가게에서 때때옷이라도 사주실라치면, 돌아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고 신이 나던지요.
역사탐방, 전에는 직장에 매인 몸이라서 참석할 꿈도 못 꿨는데
이젠 명퇴하게 되니까요, 코로나만 물러가면! 꼭 참석하고 싶답니다.
고우신 님 솔솔솔님, 프로필 사진의 향기로운 음료의 향기가 솔솔솔 풍기는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수요일 되시어요. ^^
진솔함과 애틋함...
그리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한편의 휴먼 드라마를 보고 있는듯 합니다...
어쩜 이리도 구구절절 사연이 많으시고...
구비구비 시리고 가슴아픈 삶의 편린들이었을까!..
이 독자의 두눈에 아스라히 눈물이 맺혀 옵니다...ㅠㅠ
수정구슬님!...
앞으로는 늘 탄탄대로 꽃길만 걸으시고..
항상 행복한 나날이시길 빌어 드립니다...^^
부족한 글을 정독해주시고,
이렇게 제 마음을 찡하게 만드는 댓글을 써주시니,
공감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그 마음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지금껏 걸어온 길이 탄탄대로는 아니었지만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제 능력에 비해서 넘치게 인정 받고 존중받으며 살았다는 생각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꽃길, 그 길에 꽃이 뿌려져있지 않다면
제 손으로 꽃을 뿌려가며 걸어갈 것입니다. ^^
행복한 조부님이 되신 석현님! 똘망한 손녀 무탈하게 이쁘게 건강하게 슬기롭게 잘 자라길 거듭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수정구슬님~!
한편의 심금을 울리는 파노라마입니다.
모친께서 저 세샹으로 가신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만 2년이 되었군요
수정구슬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지라 사주팔자나 점괘를 사단으로
간주하는 종교인 입장에서는 지금은 배척하시겠지만 유소년기 생계를
책임지셨던 아버지의 직업에 대하여는 배척은 커녕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모든 힘듦을 잘 이겨내시고 교장 선생님인 남편과 함께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 등대불을 밝히시는 여선생님~!
인생은 초년보다 노년이 더 행복해야 진정한 행복의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수정구슬님은 이제 정년도 얼마 남지 않으시고 앞으로는 남편과 세 따님들의
든든한 지원속에 행복한 날 만 남은 것 같습니다
방금 MBC TV 피디수첩에서 방영된 회현동의 쪽방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노라니 코로나19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도드라짐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모두 잘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건강이 최고이니까 잘 관리하시고 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게요, 이 난리통에도 돈 벌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고 하고..
사회 취약 계층에게는 이 미증유의 재난이 더 혹독하게 덮쳤고
게다가 그 재난은 현재도 진행형이니...
나라를 위한 기도는 날마다 길어져갑니다.
저는 2월 28일부로 명예퇴임 예정입니다.
정년은 2년 반 남았는데, 저보다 남편이 1년 먼저 정년을 맞이하니까
지금 그만 둬서 남편이 쉬게 되기 전에 저부터 좀 더 쉬어보려고 ㅎㅎ
명퇴 신청을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향후 1년 반은,
남편 출근시키고 여유로이 커피 한 잔 마시는, 제 로망을 실현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
항상 제게 힘 실어주시는 굿님,
더도말고 덜도 말고, 굿님 댁처럼만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
오늘도 많이 감사드려요. 평안한 수요일 되시어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ㅎㅎ 아스세요, 말으세요, 미2, 미3, 미4 까지 걸립니다. ㅋㅋ
저는 중3 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부터,
그 이전에 조금은 어둡던 아이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산애님은 좋은 가정에서 귀한 도련님으로 성장하신 것으로 압니다.
저는 제 자식들은 제가 자랐던 환경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키웠다고 생각을 하는데
각자 나름의 성장통을 겪으면서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나름대로의 상처가 있고, 나름대로의 원망이 있더라구요.
이젠 다들 자라서 그런 저런 마음의 앙금들도 거의 해소가 되었지만요.
날이 많이 풀렸네요.
화창한 겨울 오후예요. 평안하고 행복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든든한 부군께서 주변을 지켜주십니다.
부모님 생각을 이토록
많이 해 주시는 자녀가
계시니 부모님은 행복
한 분이세요.
추억이 가득한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늘 편안한 시간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