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원 감독이 영화 <송환>의 주인공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건 1992년 봄이다. 그때부터 시작된 인연은 2000년 가을 그들이 북으로 송환되기까지 10여년에 걸쳐 이어졌다. 김감독은 '비전향장기수' '남파 간첩'이라는 단어가 주는 레드 컴플렉스의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가혹한 전향공작과 오랜 수감 생활에도 굴하지 않은 그들에 대한 인간적 호기심에서 촬영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호기심에서 시작된 일이 제작기간 총 12년, 촬영에 쓰인 테이프만 500개, 촬영 800시간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남기며 마무리됐다.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가 1,000만 관객 시대를 열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담은 독립영화 <송환>도 1만 관객을 넘어서며 독립영화 사상 최대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웠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가 있었기에 오히려 더 빛이 난 영화 <송환>의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그는 극장 개봉 두번만 하면 골병 들 것 같다는 말로 근황을 전했지만, 1시간이 넘도록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진지한 눈빛과 말투는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
선댄스 영화제 '표현의 자유상' 수상 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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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기간 총 12년, 촬영에 쓰인 테이프만 500개, 테이프에 무려 800시간의 촬영 분량이 담겨 있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
<송환>이 미국 선댄스 영화제 2004에서 ‘표현의 자유상’을 수상하며 주목 받았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세요.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삶을 담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한마디로 설명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1962년 연락선의 부기관장으로 남파돼 굶주림으로 밥 얻어먹으러 민가에 갔다가 체포돼 30년간 복역한 조창손(72) 할아버지와 4.19 직후 남한의 지식인들을 포섭하려는 임무를 띠고 내려 온 정치공작원 김석형(87) 할아버지 2명이 <송환>의 주인공이에요. 45년 복역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76) 할아버지가 가족들을 만나는 장면도 있지요.
‘남파 간첩’ 장기수로 인해 고통 받아 온 남쪽 가족들, ‘송환’은 말도 안 된다며 울부짖는 납북자 가족까지 여전히 살아있는 아픔을 따라간 것이죠. 아직도 현재 진행형의 역사입니다.
영화 개봉 후 주변의 평가는 어떤가요. 독립영화로서 1만 관객이면 성공적인 흥행 성적인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가 확 뜬 가운데 제 영화 <송환>이 나왔잖아요. 태극기, 실미도에서 아쉬워했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분단 문제를 다루었지만 정면으로 다루기보다 드라마틱한 소재로 이용하고 있어요. 너무 휴머니즘이나 가족의 문제로 축소시켰다는 점에서 문제제기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비평들이 있죠. 그래서 저희가 요청하지 않아도 언론에서 관심을 갖는 것 같아요.
12년이라는 긴 제작기간을 보면 제작비가 많이 들었을 듯 합니다. 제작비는 얼마 들었나요. 다큐멘터리 제작하는데 별로 돈 안 들어요. 다큐멘터리는 카메라만 있으면 4,000~5,000원짜리 테이프 2개 들고 나가고 차비만 있으면 되니까. 밥도 길에서 대충 먹고, 혼자 혹은 두명이 다니니까.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하루 1만원 있으면 찍거든요. 테이프도 없으면 기존에 쓰던 것 재활용하고 그러니까.(웃음)
10년 전 기록이 없어서 제작비는 얼마나 들었는지 계산할 수가 없어요. 사실 지방에 갈 때 기름값도 필요하고, 톨게이트비도 썼겠죠. 하지만 큰 부담은 안됐어요. 우리가 없으면 할아버지들이 내고 그랬으니까. 제작비를 환산한다는 게 불가능하죠.
비전향장기수의 삶, "할수만 있다면 나도 그런 삶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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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담지 못했던 에피소드 5가지를 꼽아달라는 주문에 김동원 감독은 <송환> 나레이션 할 때처럼 조용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촬영하면서 사건도 많았을 줄 압니다. 영화에는 미처 다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있다면 해주세요. 영화에 담지 못했던 에피소드 5가지를 꼽아달라는 주문을 하자 김동원 감독은 한숨을 쉬며 “그걸 다 어떻게 기억하나”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송환>에서 나레이션을 할 때처럼 조용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하나하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영화에는 한번만 나왔지만 94년, 96년, 98년 세 번 국가보안법 위반 협의로 잡혀갔어요. 2~3일씩 조사를 받고 풀려나왔어요.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제가 'NL'(민족해방파)은 아니에요. 무리하게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를 씌우려고 했지만 뜻대로 안됐죠. 조사는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어요. 잠을 재우지 않고 밤샘 조사는 했지만, 밥도 먹여주고, 때리지도 않았어요.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의 연애상담을 해 드린 적이 있어요. 할아버지들은 ‘사랑’이란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아요. '부르죠아틱'하다고 생각하는지. 동지로서 인정하고 뭔가 아껴주고 싶고, 안쓰러워 보이고 그런 마음이라고 말하죠. 둘러 얘기하지만 그게 사랑이죠.
봉천동에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가 열명 정도가 살고 계셨어요. 조창선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하다 보니 제가 좋아하던 이종환 할아버지의 얘기를 담지 못했어요. 인민군 의용군으로 북한에 갔다가 간첩으로 내려왔다 잡혀서 43년간 옥살이를 했어요. 부인과 딸 셋을 찾고 싶어했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북한으로 송환됐어요.
북한은 제가 생각해도 안타깝고 못마땅한 부분이 많아요. 영화 뒷부분에도 비전향 장기수에 대해 ‘태양의 아들’이라고 하며,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의 은덕으로 환원시키잖아요. 그건 제가 봐도 치사하죠. 김정일 위원장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닌데.
제가 가진 정보들을 보면 북한에서 체제 유지를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망설였죠. 귀한 자료이긴 하지만 영화 맥락과 닿지 않아 뺐습니다.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삶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과연 무엇이 그들은 수십 년간 0.75평 감옥에서 버티게 하는 것인가요. 우리가 이해 안 되는 것이 한두 가지 인가요. 세상에 너무나 여러 가지 사람이 있는데 다 이해할 수 없죠.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은 저희 윗 세대이고 저희와는 정서가 다른 것 같아요. 봉건시대 사육신처럼 한 신하가 두 군주를 섬길 수 없다는 것처럼.
고문을 견딜 수만 있다면 고문을 견디는 게 낫지. 자기가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보다. 그런데 잘못했다고 시인하고 매를 맞지 않는 게 낫냐. 그건 아니라는 거죠.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에 앞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일 뿐 아닌가요.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송환>이 대중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을 듯 한데. 너무 거친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술적으로 거칠고 제가 봐도 그래요.(웃음) 저는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촬영, 편집, 나레이션까지 혼자 했어요. 그건 경제적 문제도 있지만 또 하나는 할아버지들을 만날 때 극영화나 방송국처럼 5~6명이 촬영을 가서 조명도 치고, 녹음도 하고, 조수도 있다면 더 좋은 음향과 화질을 얻을 수 있겠죠. 하지만 여러 사람이 몰려가면 할아버지들이 자연스러운 모습이 나오지 않잖아요. 하고 싶은 말도 하지 않고요.
화질이나 앵글은 잘 못 맞추더라도 자연스러운 모습을 잡아내는 것.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 같아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아마추어리즘이 더 좋아요.
“독립영화 하기 위해 한나라당 홍보비디오만 빼고 다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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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하기 위해 웨딩비디오 촬영, 정당 홍보 비디오 촬영 한적 있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
독립영화로서 1만 관객이면 의미있는 기록임에는 분명하지만, 1,000만 관객 시대라고 떠들썩한 요즘을 보면 한편으로는 너무 초라한 기록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영화는 기록경기가 아니잖아요. 흥행으로 승부를 내야 하는 것이라면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의 관객을 합한 것을 목표로 잡겠다고 얘기했어요. 그러면 2,000만 관객이잖아요.
그러면 제 목표는 20만명이에요. 독립영화 관객은 ‘일당백’이니까. 20만 관객이 보면 2,000만 본 것과 똑같다고 생각해요.
한 작품에 오랜 시간 몰두하며 작업하는 동안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아내와 2남 1녀를 두고 있는데. 결혼 전 20대 영화 조감독 시절 연봉이 50만원이었어요. 80년대 초반이죠. 그것만으로 생활이 되지 않아서 비디오 카메라를 사서 웨딩비디오 촬영을 했어요.
지금도 푸른영상을 운영하기 위해서 수익사업도 하고 있어요. 90년대 초에는 웨딩비디오 촬영도 계속했고, 홍보영화도 했어요. 한나라당 홍보 비디오만 만들지 않았지 다른 당은 다 만들었어요. 이번 선거에도 요청이 오는데 너무 바빠서 못해요. 저희가 싸고 잘 만든다는 정평이 나 있죠.(웃음)
김감독은 “독립영화 작업에 우리 힘의 절반 이하 밖에는 집중하지 못한다”며 “영화만 해서 먹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잖아요.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는 사회잖아요. 다 똑같지 않은가요.” 상업영화 감독과 독립영화 감독의 피가 따로 있나요? 저는 B형인데 모르겠어요.(웃음) 파안대소한 후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생각한 후 “같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것 같다”며 말문을 열었다.
전 다큐멘터리도 영화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상업적인 냄새가 나는 다큐멘터리도 있고요, 또 김기덕 감독 작품처럼 비상업적인 극영화도 있잖아요. 상업영화는 돈을 버는 게 목적이고 얼마나 허황된 픽션이냐 하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모든 목적이 자본의 재창출을 위해서 기획되고 제작되는 것이죠. 사업가적인 안목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런걸 못해요. 돈이 되는 영화를 만드는 데는 재주가 없어요.
김동원 감독은 늘 자신의 흥행 예측은 틀렸다고 털어놓았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관객 몇 십만, 몇 백만 들겠다”고 예측해 보지만 한번도 맞춘 적이 없다고 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좋기도 하고, 재미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흥행에 실패했고, <송환>은 극장개봉은 생각도 하지 않았으나 독립영화로서는 주목할 만한 흥행성적을 보이고 있다고. 비상업적인 극영화로 김기덕 감독을 언급했는데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 대해 평가한다면. 저는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 같은 영화 좋아하지 않지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피튀기는 영화 질색이에요.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사이에 떠있는 ‘섬’ 같아요. 김기덕 감독 외에 홍창수, 이창동, 임순례, 박찬옥 감독 같은 사람들이 중간 가교역할을 해야 하는데 거의 실패하잖아요. 독립영화도 인프라가 구축돼서 징검다리가 있어야 하는데 허리가 허약한 구조에요.
1,000만 관객 시대에도 공허함 느낀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영화가 상품이거나,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문화가 아니라 산업이죠. 물건에 불과하죠. 하지만 영화가 상품이면서도 문화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감동도 얻고, 좋은 경험을 한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문화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 예술영화나 독립 영화들이죠.
영화가 사회적 위상을 갖기 위해서는 문화가 튼튼해야 합니다.
상업영화가 토대를 구축하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예술영화와 독립영화가 잘 되어야 하는데, 최근 영화계를 보면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바람이 조금 불면 휙 날라갈 정도로 허약합니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를 보지 않았다고 하는데, 직접 보고 평가하고 싶지는 않은가요. 강제규 감독과 강우석 감독의 영화를 알기 때문에 보지는 않았지만 어떤 영화일지 대략 상상이 됩니다. 실망하기 싫어서 보지 않으려고요. 어떤 사람은 <실미도>를 보고 저렇게 역사를 왜곡해도 되는지, 역사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소재로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어도 되는지 화가 났다고 해요. 실화를 바탕으로 할 때는 실화를 아는 사람들이 볼 때는 뒤틀린 내용을 보면 화가 날 때가 있잖아요.
"한번 시작한 문제는 해결될 때까지 손놓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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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동 강제철거문제, 원진레이온 문제, 2차 송환 등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들 계속 촬영할 것.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해결될 때까지 계속 카메라 놓지 않을 것. ⓒ미디어다음 김준진 |
강제규 감독이 <송환>의 프린트(필름 제작) 지원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계기로 그렇게 된 것인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독립영화에 대한 격려겠죠. 똑같은 분단 문제를 다루고 있고, 자기가 부족했던 부분을 <송환>이 얘기하고 있고, 또 관객 1,000만도 넘었고(웃음). 그 쪽에서 봤을 때는 일종의 홍보 이벤트로도 좋은 거죠. 그 전에 지원을 약속했지만 특별시사회 후에 강제규 감독은 십 년간 작업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고 했는데 그게 진심일 수도 있고…
<송환> 이후 구상하고 있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저희는 ‘요이땅’ 해서 시작하지는 않고요. 듬성듬성 찍어놓아요. 강제철거 문제를 다뤘던 <상계동올림픽> 뒷이야기를 하려고 몇 년 전부터 생각은 하고 조금씩 촬영하고 있어요. 또 원진레이온 산업재해에 관한 <원진별곡>에 이어 뒷마무리를 할 계획입니다. <송환> 2차 문제도 다뤄야 하고요. 끝이 없습니다. 무엇을 먼저 시작하고 끝낼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김대중 정부 이후 진전된 남북관계를 바탕으로 99년 본격적인 송환 운동이 시작된 후 2000년 6ㆍ15 남북공동선언과 함께 송환 운동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크고 작은 갈등 끝에 비전향 장기수 63명은 2000년 9월 2일 가까스로 북으로 송환된다. 갖은 고문 끝에 전향해 송환되지 못한 이들은 2000년 전향무효소송을 내고 지금까지 2차 송환 운동을 벌여오고 있다.
김감독은 30~40년을 0.75평 감옥에서 견디고 나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어질 때까지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의 그의 영화를 보고 공감하기를 간절히 원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