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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희망을 노래하자 !
미국발 금융위기로 글로벌 경제가 요동치고, 그 여파로 우리네 삶의 구석구석에도 암울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환율이 뛰고, 주가는 곤두박질친다. 물가가 폭등하고, 아파트 시세는 나락을 모르고 떨어진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대폭락과 경제 공황의 유령들이 우리 현실 언저리를 어슬렁거리며 먹잇감을 노리고, 자본을 움켜 쥔 자들의 탐욕과 도덕적 해이는 끝이 없다. 이 유령들이 해와 달의 빛을 가리고 독거미처럼 살을 깨문다. 이는 장자가 말하는 “거꾸로 매달림의 상태”가 아닐까. 이것은 인류 생존의 크고 작은 적색경보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 대목을 보자. “대저 생명을 얻는 것은 우연히 시절을 만난 것이요, 그것을 잃는 것은 자연의 변화에 따르는 것이니, 시절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변화에 따르면, 슬픔도 즐거움도 마음에 들어올 수 없다네. 이것이 옛사람이 말한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스스로 풀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물이 묶고 있기 때문일세. 사물이 자연을 이기지 못한 지는 오래 되었네. 내가 어찌 그것을 싫어하겠느냐 ?”(『장자』,「대종사」) 거꾸로 매달린 상태는 부자연스럽고 힘들다. 부자연스러우니 오래 갈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그 상태에 처해 있다.
더 암울한 것은 인류가 산업혁명 이후 더 큰 위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누구 책임인가 ? 바로 어리석음에 빠져 허우적이는 인류 자신의 책임이다. “우리 지구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변동폭을 크게 넘어서는 온난화 추세를 경험하고 있으며, 이는 대량생산과 연관된 인간 활동에서 기인하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러한 과정이 1700년대 후반에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인간의 노동력과 마력, 수력 등이 기계로 교체되거나 보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산업혁명은 영국과 유럽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주로 농경과 상업에 의존하던 사회를 도구와 가축보다는 기계와 엔진에 의존하는 산업사회로 변모시켰다.”(토머스 프리드먼,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 어디 그뿐인가. 인류는 갈수록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 사람만이 아니다. 육식을 위해 키우는 13억 마리의 소들이 날마다 트림으로 메탄을 배출하는데, 이 메탄이 대기 중에서 온실가스가 되어 지구를 뜨겁게 하는데 일조한다. “분자당 비율로 볼 때, 메탄이 대기 내에 열을 가두는 힘은 온실가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산화탄소의 21배에 달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소 13억 마리(미국에만 1억 마리)가 거의 지속적으로 트림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축이 배출하는 메탄이 온실가스의 주요인이라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고 미 환경보호국은 말한다.”(『사이언스월드』, 토머스 프리드먼, 앞의책에서 재인용) 2000만년 동안 아무 변동이 없던 지구 대기의 구성이 지난 100년 동안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고, 인류는 예측할 수 없는 기후 변화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 사태의 원인제공자는 “자기만족과 나태함”에 빠진 인류 자신이다. 한 영화에서는 작중인물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적시한다. “내가 여기에 머무는 동안 내가 깨달은 계시록 하나를 들려주고 싶군. 내가 너의 종족을 분류할 때 문득 든 생각이야. 내가 깨달은 건 당신들은 사실 포유류가 아니라는 사실이지. 지구에 사는 모든 포유류는 본능적으로 주변 환경과 조화로운 균형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하는데, 유독 당신네 인간들은 그렇지 않아. 당신네 인간들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마지막 하나 남은 자연자원이 고갈될 때까지 번식을 해나가지. 당신네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제 자연자원이 고갈되지 않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뿐이야. 아 ! 지구상에 당신네들과 동일한 패턴을 가진 유기체가 하나 있긴 하다. 뭔지 아나 ? 그건 바이러스야. 인간이란 지구의 병적이고 암적인 존재야. 너희들은 전염병이고, 우리는 치료제야.”(『매트릭스』, 스미스 요원의 대사) 제 삶의 터전을 황폐화시키고 자원을 고갈시키는 현생 인류는 바이러스다 ! 이 바이러스들이 지구를 고갈시키고 궤멸한 뒤 결국은 절멸에 이를 것이다. 이 암울함이 암종처럼 자라는 시대에 ‘책(冊)’이 무슨 도움이 되느냐 ? 오늘의 시대야말로 ‘책’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책’은 삶과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책’은 이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 속에서 삶을 근본에서 짚어보고 최적의 생존에 맞는 자기 혁신과 영감에 대해 말한다. 나는 이것을 “존재의 기술”이라고 명명한다. 존재함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떻게 지혜롭게 존재하느냐를 찾아야 한다. 이의 핵심은 자기 탐색과 자기 생성의 기술이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의식적으로 성찰된 실천인 동시에 자발적인 실천”이다.
2천3백여 년 전에 살았던 현인 장자를 떠올려보자. 장자는 이 나라 저 나라를 바람처럼 떠도는 방랑의 천재, 예기치 않은 은유와 환유로 잠든 뇌를 깨어나게 하는 수사학의 달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드는 초월과 지혜의 진인, 웃음의 왕, 이미 2천년도 더 전에 녹색 성장을 주창한 근본 생태주의자다. 그 장자를 시공을 건너뛰어 지금도 만날 수 있다. 바로 ‘책’을 통해서 ! 장자가 살았던 시대도 우리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자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살았는데, 걸핏하면 전쟁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전쟁터에 끌려가 죽음을 당하고, 나랏님들이 벌인 역사(役事)에 끌려가 고된 부림을 받다가 병신이 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다반사였다. 가난으로 굶어 죽고, 추위에 얼어 죽고, 재주가 뛰어나도 정쟁(政爭)에 말려 목이 달아나는 일이 드물지 않았으니, 장자의 시대도 난세요 말세였다. 장자는 걸핏하면 양식이 떨어져 굶다가 양식을 꾸러 다녔다. 그럼에도 장자는 유유자적 천하를 유람하며 매임없이 즐겁게 살았다. 장자는 치언(巵言)과 중언(重言)과 우언(寓言)을 수단으로 삼아 무위자연의 도를 가르친다. 반어와 풍자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말 한 마디로 천하를 들었다 놓고, 웃기고 울리는 사람이 장자였다. 홀로 천지의 정신과 소통하고, 육기의 변화를 몰아 자유롭게 노닐었다. 여러 나라에서 재상 자리를 주겠다고 했으나 다 물리치고 스스로 가난에 처해 민중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기존 정치와 체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연에서의 물아일체의 삶을 이상으로 삼았으니 재상 자리를 마다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장자에게서 삶의 기술을 배운다면 우리도 이 난세에 타고 난 자연수명을 다 누리며 즐겁게 살지 않겠는가 ?
사마천에 따르면 『장자』는 본디 10여 만 자에 이르는 책이다. 우리가 읽는 『장자』는 곽상(郭象, 312년에 사망)이 편집한 것으로 내편(內篇) 7편, 외편(外篇) 15편, 잡편(雜扁) 11편으로 합쳐 33편으로 이루어진 판본이다. 곽상은 장자보다 6백년 뒤에 살았던 위진시대의 학자다.『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고, 『노자』와 『주역』을 합쳐 ‘삼현(三玄)’으로 꼽히기도 했다. 내편은 이치의 근본을 밝히고, 외편은 구체적 사실을 끌어다 내편에서 말한 것을 입증하고, 잡편은 이치와 구체적 사실을 뒤섞어 알기 쉽게 만들었다. 조선의 선비들도 장자를 즐겨 읽었다. 이수광이 쓴 책에서도 장자를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옛사람들은 장자를 문장의 귀신이라고 말한다. 대저 장자의 글은 진인에 이른 백정과 복수가 소를 잡고 바퀴를 만들듯 스스로 깨달음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열리고 닫히고 그 환상적인 변화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교묘함을 이루었으니 고금을 통하여 그에 미치는 자가 없었으므로 그를 문장의 귀신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이수광, 『지봉집(芝峰集)』, 권28, 「병촉잡기(秉燭雜記)」)
우선 내편 7편의 배열은 우연으로 정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 이치에 따른 것이다. 소요(逍遙)한 뒤에 제물(齊物)할 수 있고, 제물 뒤에 양생(養生)할 수 있고, 양생한 뒤에 비로소 처세의 도에 이를 수 있다. 도를 깨닫고 본질을 통달하면 대붕과 같이 천하를 자유롭게 노닐 수 있다. 천지의 상도(常道)를 타고 육기의 변화에 따라 무궁(無窮)에 노닌다면 다시 무엇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 곤이라는 물고기는 천지의 변화를 타고 붕으로 몸을 바꾸고, 이윽고 붕은 구만 리 장천을 매임없이 날아간다. 그래서 ‘소요유(逍遙遊)’를 지었다. 삼라만상의 본질은 하나다. 도에서 나와 도로 돌아가니, 만물은 도 안에서 하나됨을 이룬다. 만물이 제일(齊一)하다는 이치를 깨달은 자는 땅의 음악과 하늘의 음악을 함께 듣는다. 그래서 ‘제물론(齊物論)’을 지었다. 만물을 한 눈에 꿰뚫으니 마음이 두루 담담해서 천하가 거센 변화의 파고(波高) 속에서 요동치더라도 몸과 생명을 너끈히 지켜낼 수 있다. 양생의 도를 터득하고 그 안에 머물면 다치지 않고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 아서라, 유한한 생명으로 무한한 지혜를 구하는 일은 고달프다. 그래서 ‘양생주(養生主)’를 지었다. 삶과 죽음의 분별을 잊고, 옳고 그름의 경계 없이 넘나든다. 세상이 쓸모 있음을 따를 때 홀연히 마음을 비우고 쓸모없음의 가치를 흠모하니 시비하는 자가 없다. 천지간의 변화를 타고 노니 인간 세상에 섞여 살아도 자유롭고 거침이 없다. 그래서 ‘인간세(人間世)’를 지었다. 덕이란 화평을 이루는 수양이다. 재주는 있되 덕이 없다면 불길하다. 덕의 원만함으로 재주를 감싸야 그 재주가 빛이 난다. 성인은 덕의 충만함 속에서 무위자연에 노닐 수 있고, 그래야만 시비의 대상에서 비켜설 수 있다. 그래서 ‘덕충부(德充符)’를 지었다. 강을 건넜다면 나룻배를 지고 갈 필요는 없다. 물고기는 물을 따라 태어나고, 사람은 도를 따라 태어난다. 물고기는 물을 잊고, 물속에서 움직임이 자유롭다. 사람은 몸을 잊고 덕을 잊고 도마저 잊어야 한다. 그래야 부귀와 빈천, 명예와 치욕, 이로움과 해로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무위할 수 있다. 무위에 들면 자유롭고, 자유로우면 매이지 않는다. 천지가 어찌 사사로이 이미 무위에 든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 그래서 ‘대종사(大宗師)’를 지었다. 어리석음과 아집을 버리고 마음이 고요에 처하면 만물의 변화를 고스란히 꿰뚫어 본다. 그걸 볼 수 있는 자만이 거기에 순응함으로서 만물을 제어할 수 있다. 그래서 ‘응제왕(應帝王)’을 지었다.
장자는 산중에 숨어 사는 고독한 은둔자가 아니다. 장자는 2천3백 년 전 저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丘縣) 동북쪽 어딘가에 있었다는 몽(蒙) 지방에 살던 사람으로 본디 이름은 장주(莊周)다. 전국시대 양(梁)의 혜왕이나 제(齊)의 선왕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 대략 기원전 369년경에 태어나 286년경에 죽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장자는 옻나무 숲을 관리하는 말단 관직에 있었고, 박봉으로 늘 살림이 쪼들렸다. 장자가 살았던 시대는 혼란하고 어지러운 시대였으니, 많은 학자와 사상가들이 나타나 제 나름대로 이 혼란과 어지러움을 수습하는 법을 제시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였다. 그러니까 장자는 그 제자백가 중의 한 사람이다. 『장자』를 읽으며 장자가 오늘의 시대를 사는 인물로 착각하곤 했다. 『장자』의 탁월함은 그 현재성에 있다. 장자가 마치 청바지를 입고 홍대 앞을 유유자적 어슬렁거리는 그 사람으로만 여겨진다. 나는 청바지를 입은 채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장자를 만났다. 나는 그동안 왜 장자를 보지 못했던가. 한 소설에서는 작중인물의 입을 통해서 그 대답을 말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우리는 볼 수는 있지만 본질을 통찰하는 눈이 먼 상태이기 때문에 장자를 볼 수 없었던 거다. 그 장자는 2천3백 년 전 복수(濮水)라는 강가에서 낚시를 하다가 초나라 왕이 보낸 신하가 “부디 초나라의 재상 자리를 맡아 주십시오.”했을 때 “나는 비단 옷 입고 궁에서 살기 보다는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겠소.”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2천 3백 년이 지났는데, 그 외관만 조금 바뀌었을 뿐 세상은 돌고 돌아 내가 살았던 시대와 같은 시대로 돌아와 있더군. 세상이 어지러워 !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으로 어지러워 ! 게다가 거대한 고래가 썩고 있는 것처럼 세상에는 악취가 진동하고 있어 ! 내 코가 다 썩을 지경이야.” 그렇게 말했지만 장자의 표정이 심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무심하고 평온했다.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겁니까 ?” 내 표정은 무심할 수가 없었다. 내 속에서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한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죽고 사는 것, 얻고 잃는 것, 운수의 막힘과 트임, 가난과 부유함, 똑똑함과 어리석음, 욕먹는 것과 칭송을 듣는 것, 목마름과 배고픔, 추위와 더위 이 모두는 사물의 변화와 기의 흐름에 따른 것이라네. 한 번 요동침이 크면 그 뒤 안정됨은 오래 가고, 한 번 큰 변고가 일어나면 그 뒤 평화가 길게 이어지네. 변화와 기의 흐름이 안정되지 못한 것은 이 세상이 움직여 다른 세상이 되려 하기 때문이라네. 그 시기 지나갈 때까지 마음을 고요하게 기다려야겠지. 물속에 숨은 용은 아무리 파도가 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 법이네. 다들 머리만 쓰더군. 머리만 써서 해결책을 강구하는데, 머리만으로는 안 돼. 내가 왜 구만리 상공을 여섯 달씩 쉬지 않고 날아가는 대붕 얘기를 했겠나 ? 매미나 새끼 비둘기들은 대붕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석다고 했지만 변화를 타고 놀아야지. 놀되 아주 크게 놀아야지 !” 장자는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회사는 언제 부도날 지 모르고, 회사가 문을 닫으면 직장을 잃고 거리로 쫓겨날 판인데, 놀다니요 ?” “지금은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는 형국이야. 물고기들이 다 불안에 떨고 있지. 도대체 이 바다가 어쩌려고 이렇게 흉흉해지는 걸까. 그러나 사람들은 바다가 흉흉한 것이 불안한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제가 가진 걸 잃을까봐 불안한 거지. 집, 땅, 주식, 직장..... 쥐고 있는 걸 놓아봐.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불안하고 말 것도 없어.” 나는 대붕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대붕이 남쪽 바다로 갈 때, 파도가 일어 삼천리 밖까지 퍼진다. 대붕은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그것을 타고 여섯 달 동안 구 만 리 장천을 날고 내려와 쉰다. 그 대붕은 장자다. "천지는 나와 함께 살아가고, 만물은 나와 함께 하나가 된다. 이미 하나가 되었으니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 이미 하나라고 했으니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 하나와 말이 더해져서 둘이 되고, 둘과 하나가 더해져서 셋이 된다.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뛰어나게 셈을 잘 하는 사람이라도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일반 사람은 어떻겠는가 ? 그러므로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가 셋에 이르렀는데, 하물며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가면 어떻겠는가 ? 헤아려 나갈 필요가 없다. 그저 자연에 그대로 맡길 따름이다.“(「제물론」) 장자는 커피를 다 마셨다. “자, 그럼 이만 나는 가보겠네.” 청바지를 입은 장자는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도 곧 일어났다. 스타벅스를 나온 나는 한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장자’에서 희망을 찾는다. 장자는 시류(時流)를 타고 놀되 그 시류에 잠기지 않았다. 세속에 있으면서도 대붕과 같이 구름을 타고 세속 밖을 날아다녔다. 그는 어려움에 처했지만 담대하고 탁 트였으며, 두루 통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사람은 역경과 시련 속에서 단련되는 법이다. 실직 위기가 넘실대고 파산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대, 막막하고 캄캄한 길에 언제 어디에서 함정을 만나 추락할 지 알 수가 없다. 희망은 줄고 절망은 점점 커진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가난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희망을 잃는 일이다. 자, 두려움 떨치고 일어나자. 다시 희망을 노래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