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여당 의원들이 뉴라이트인데
뉴라이트 임명이 뭐가 이상한 일인가?
걱정은 민족이 공동체 의식 보존한 인간군과
기회주의·이기주의를 인간 본성으로 믿는
인간군으로 분열되고 해체될 위기라는 것
뉴라이트의 탄생
“지금까지 친노(親盧)계열의 진보세력만이 소리를 높이고 이와 다른 견해는 냉전수구 또는 반(反)개혁으로 공격받기 일쑤였다. 새로운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뉴 라이트(New Right)’가 건강한 비판세력으로 자리 잡을지 주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의 시장중심주의를 내세운 ‘뉴 라이트 신(新)보수’의 중추적 역할을 기대한다.”(동아일보 2004.11.7. 사설 중)
한국 신문지면에 ‘뉴라이트’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보수주의’란 당시 조지 부시 행정부의 미국이 추구하던 단극(單極) 패권주의적 대외 개입 노선과 이념, 즉 네오콘을 말한다.
북한,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이라크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정책을 그대로 따라 한국도 대북포용정책을 중단하고 강경적대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동아일보가 ‘뉴라이트’라고 부른 ‘이념집단’의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1972년 7.4 공동성명을 채택했던 박정희,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던 노태우, 1994년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약속했던 김영삼 등의 대북 정책 노선과는 분명 달랐다. 이는 ‘한미동맹에 의한 북진통일’을 주창했던 이승만의 노선으로 회귀한 것으로 이 점에서는 새롭다기보다는 오히려 낡았다고 평가했어야 마땅하다.
신자유주의와의 결합
두 번째 ‘경제의 시장중심주의’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세계를 휩쓸던 ‘신자유주의’를 말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풍미했던 고전적 자유주의는 ①도덕법칙과 경제법칙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다, ②경제활동을 하는 자는 오직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면 된다, ③경제주체들의 상호관계를 규정하는 최고, 유일의 법칙은 무제한의 자유경쟁이다 ④국가권력이 어떤 형태로든 경제활동에 개입하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명제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당대 자본주의 선진국들에는 아직 기독교 문화의 자장(磁場)이 강했기 때문에 이들 명제에는 인간 내면의 ‘도덕성’이 전제되었다. 그러나 20세기 말의 ‘신 자유주의’는 이 도덕성까지 배제했다. 박정희 정권 이래의 관치경제에 익숙했던 한국인들에게는 이 역시 새로웠다.
시장이 도덕법칙이나 국가권력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믿음의 신봉자들은 인류가 오랫동안 악덕으로 규정했던 ‘이기심’을 역사와 사회 발전의 핵심 동인으로 재배치했다. 이들은 시장의 확대를 역사 발전의 유일 지표로 삼고 경제학이 시장에서의 인간 행동을 분석하기 위해 채용한 ‘인간은 주어진 조건에서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존재’라는 가설을 실제의 인간형으로 끌어올렸다. ‘인간의 합리적 이기심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든다’는 것이 그들의 구호이자 주문(呪文)이었다.
그런데 ‘주어진 조건에 따른 합리적 선택’이란 다른 말로 ‘기회주의’이고, 자기 이익을 극대화한다‘란 다른 말로 ’이기주의‘다. 이런 인간관을 가지면 친일반민족행위는 ’식민지 상황에서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합리적 행위‘로 보이고, 독립운동은 ’잘못된 사상에 오염되어 벌인 비합리적 행위‘로 보인다. 이런 담론은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기회주의와 이기주의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없애주는 효용이 있었다.
우파 세력을 장악한 뉴라이트
2005년 3월, 자유시민연대 공동대표 한승조가 일본 우파 월간지 『정론(正論)』에 기고한 「공산주의 좌파 사상에 기인한 친일파 단죄의 어리석음; 한일병합을 재평가하자」라는 글의 내용이 국내에 알려졌다. 그는 이 글에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오히려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며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시민연대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내세우고 2000년 11월에 발족한 우파 단체였으나 이 무렵 새로 발흥한 뉴라이트 세력에 영향받아 식민지 근대화론까지 수용했다. 독재정권 시절 이래의 우파 세력이 뉴라이트의 담론을 전면 수용함으로써 한국에서는 올드라이트라고 불릴 만한 사회 세력은 사라졌다.
이 때를 전후해 ’뉴라이트‘를 표방하는 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 2005년 11월에는 ’뉴라이트 전국연합‘이, 2006년 4월에는 ’뉴라이트 재단‘이 창립되었다. 이들은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 이명박을 적극 지원했고, 이명박의 ’실용주의‘와 ’작은 정부론‘도 이들의 구상에 따른 것이었다.
뉴라이트 독립기념관장의 임명
’뉴라이트‘ 인사가 독립기념관장에 임명되자 광복회 등이 임명 철회를 주장하고 나섰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친일반민족행위를 미화하며 독립운동을 폄훼하는 인사가 ’항일 독립운동사의 전당(殿堂)‘인 독립기념관장을 맡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한국에 뉴라이트 아닌 다른 우파가 있는가? 한국의 자칭 우파는 뉴라이트로 단일화한지 이미 오래다. 아직 정의감과 공동체의식이 남아 있는 국민 대중의 정서에 맞추어 발언을 ’자제‘하는 정치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인간관과 경제관, 정치의식에서 뉴라이트 이념과 다른 점을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통령과 여당 의원들이 뉴라이트인데 정부 기관장이 뉴라이트 인사들로 채워지는 게 뭐가 이상한 일인가?
새로 임명된 관장이 자기 소신에 따라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친일 반민족 행위를 미화하며 독립운동사를 이승만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독립기념관 전시를 바꾸려 들 것이라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소한 걱정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힘 지지층의 70% 정도는 ”위안부가 강제동원된 것인지 답변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을 방통위원장 적격자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이번 독립기념관장 인사에 대해 물어도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윤 대통령이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 군사적 목적으로 독도를 일본과 공동 이용하기로 했다“고 발표해도 이 지지율은 별로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정치권력이 대중에게 제시하는 메시지는 그 파급력과 수용도가 엄청나게 크다. 뉴라이트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올드라이트‘와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특징은 일본 찬양과 이승만 숭배다. 삼일절에 일장기를 거는 사람, 자기 차에 욱일기 문양을 새기고 다니는 사람, 집회에 일장기를 들고 나오는 사람, 영화 ’건국전쟁‘을 보고 진정한 역사를 알았다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신임 독립기념관장으로 '뉴라이트'로 알려진 김형석 대한민국역사와미래 이사장이 임명되자, 광복회 회원들이 지난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반대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역사를 공유하는 이들과 공유하지 않는 이들
국가공동체 또는 민족공동체는 ’역사를 공유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내용의 헌법전문은 1987년 민정당 국회의원들도 동의한 것이다. 하지만 뉴라이트는 이 기억을 통째로 바꾸려 든다. 그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지 않으며, 일제강점기의 한국인들은 ’일본제국의 신민‘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승만은 결코 불의(不義)가 아니며 대한민국의 국부(國父)로 추앙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정권을 잡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자기 평소 지론을 바꾸면서까지 이런 주장에 동조한다.
지금 진정으로 걱정스러운 일은, 독립기념관 전시 개편따위가 아니라 ’역사공동체‘였던 민족이 공동체 의식을 보존한 인간군과 기회주의와 이기주의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믿는 인간군으로 한 번 더 분열되고 해체될 위기에 놓였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