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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7-11) 영계입문의 걸림돌들 : 모독, 두려움, 성욕, 반동성
영계입문의 걸림돌들 : 모독, 두려움, 성욕, 반동성
영계입문을 위해 필요한 것들
첫째 유일신 신앙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신앙이 필요하다. 절대자, 무한자는 하나니깐, 이건 기본이다. 이게 다가 아니고, 이 신앙에서 추가되는 것은 인간이다. 보통 인간이 아닌, 하나님-인간 즉 신인(神人)이다. 신인은 하나님이 피조계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 우주는 이원성(二元性)의 세계다. 이 세계로 오기 위해서는 형이상자인 하나님도 이원성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그것이 신인(神人)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형이냐, 그것은 인간에게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인도에도 있다. 아바타(Avatar)라고 하는 화신(化身), 불교에도 있고, 아무튼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분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다.
(골로새서 2:9) “그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몸이 되어서, 충만하게 머물러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다
(이사야 9:6)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 (이사야 25:9) “그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
(골로새서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고린도후서 4: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히브리서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둘째 십계명
이건 기본이다. 우선 인간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가고 천사들과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계명은 간단히 말하면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을 말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구체적으로 1은 하나님 신앙, 2는 우상숭배 금지, 3은 하나님의 이름, 4는 안식일, 5는 부모 공경, 이것이 첫째 돌판에 있는 계명이고, 둘째 돌판에는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탐심이 있다. 유대교 십계명이고, 첫째 돌판에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둘째 돌판에 대한 것은 이웃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 신앙’은 ‘우상숭배 금지’와 동전의 양면이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은 필히 우상숭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이런 것이다.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 이외에 이성(異性)을 흠모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말이 되는가?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을 담고 대변하는 것으로 같은 것이다. 나를 비난하고자 하는 사람은 내 이름을 부르며 비방한다. 이건 하나님에 대한 비방과 모독에도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을 남이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인간 자신의 이익이나 뜻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오남용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이나 성령에 대해서도 똑같다.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고, 성령은 하나님의 활동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에 속한 것이나 좋은 일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고 사용이 권장된다.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교회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영적으로 쉼 즉 평화는 영적 전쟁이 끝났을 때 주어진다. 거듭남이 완성되었을 때 쉴 수 있다. 방해물이 없다. 사랑을 숨을 쉬듯이 할 수 있다. ‘효도’는 자연의 어버이뿐 아니라 영적 어버이에 대한 것이다. 주님과 교회가 영적으로 우리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 둘째 돌판에 있는 계명들은 시민법과 윤리, 도덕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영적이고 천적인 뜻이 있지만,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앞에서 하지 말라는 것들에 대해 마음에서 욕구하지 말라는 것을 말한다. 죄나 악은 행동으로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마음에서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영계 입문을 훼방하는 것들
첫째 인격모독
이것은 판단하는 것이다. 판단에는 선악(善惡)과 우열(優劣)이 들어 있다. 여기에는 미움이 있고, 경멸과 비하가 있다. 상대는 악마화하고 깎아내리고 자신은 신성화하고 높이는 심리 기제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고 에고를 시인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의 선악이나 우열은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다. 하나님만 거룩하시고 하나님만 선하시다. 에고는 판단하지만 영은 판단하지 않고 에고는 나와 너로 분리하지만 영은 나와 너를 하나로 결합한다.
둘째 두려움
두려움은 압도적인 공포를 뜻한다. 의식을 사로잡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할 수 없게 하는 의식을 마비시키는 공포를 의미한다. 일반적인 두려움 따위가 아닌 의식 저변에 웅크리고 있는 강력한 감정이다. 평소에 그 두려움을 대면하는 일은 없다. 순간적으로 밖으로 나오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에고의 변두리에서 수증기 같은 형태로 간헐적으로 발산될 뿐이다. 이런 이유로 에고의 공포의 강력함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로 내적 상태 또는 영적 상태에 놓이게 되면 이를 경험할 수 있고, 그것의 강력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가 있다. 공포의 쓰나미에 압도된 의식은 그 어떤 반응도 할 수 없고 이성적인 판단도 할 수 없다.
두려움과 공포의 근원은 에고다.
에고의 생존본능과 파괴본능, 이 생명본능들은 이기적인 것이다. 나를 위해서 타인을 공격한다. 이 속성 자체로부터 또는 공격으로부터 죄가 발생하고, 죄로부터 죄의식이 발생하며, 죄의식으로부터 처벌에 대한 공포가 발생한다. 내가 공격했으므로 언제든지 남에게서 공격받을 수 있다. 사람은 자기 생김새대로 남을 본다. 자기가 그러한 대로 남도 그럴 것이다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개, 돼지의 눈에는 개, 돼지가 보인다. 이런 인식과 믿음이 잠재의식에 뿌리내리면서 집채만 한 공포의 나무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은 에고가 아니라 영 또는 참나라는 것이다. 영의 본능은 영생본능과 인애본능이다. 에고와는 정반대다. 에고는 육체를 기준으로 하지만 영은 혼을 기준으로 한다. 혼은 사후에도 산다. 문제는 천국이냐 지옥이냐다. 천국을 목적한다면 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타적이어야 한다. 인애를 행해야 한다. 나 자신이 타인에 대해서 선의와 호의를 가지고 있고 이타적인 언행을 행하므로 남들의 나에 대한 접근에 대해서도 개방적이며 긍정적이다. 그렇지만 에고는 그렇지 않다. 에고는 동물과 같다. 어려움에 처한 동물을 인간이 도우려고 손을 내밀어도 그 동물은 사람의 선의와 호의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을 공격하고 잡아먹으려는 것으로 지각하여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친다. 자기가 공격적이기 때문에, 남을 죽이려 하기 때문에 남도 나를 죽이러 온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초식 동물이나 작은 동물에게도 똑같다. 자연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다. 초식 동물도 자기보다 약한 동물을 자기가 살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다. 에고를 나의 정체성으로 삼으면 동물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되고 영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으면 인간의 반응을 보이게 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당신을 처벌하지 않는다.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처벌하는 것은 에고다. 에고의 속성이 그렇다. 공격하고 공격받고, 처벌하고 처벌받고, 하나님은 사랑이지만 에고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의 반대는 사랑이지만 사랑의 반대는 두려움이 아니다. 사랑은 반대가 없이 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적수업 서문) 1문단 6문장 이 수업은 사랑의 의미를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사랑의 의미는 가르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7 이 수업의 목적은 너의 본래 유산인 사랑의 현존을 의식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걸림돌을 치우는 것이다. 8 사랑의 반대는 두려움이나,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에는 반대가 있을 수 없다.
(요한 1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기적수업 텍스트 2장 6과 7문단) 1 오류를 해체하는 교정의 첫 단계는 먼저 갈등이 두려움의 표현임을 아는 것이다. 2 만약 두렵다면 너는 어떤 식으로든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 분명하다고 자신에게 말하라. 그러지 않았다면 두려움이 일어났을 리가 없다. 3 그렇다면 교정의 전 과정은 속죄를 치료법으로 받아들이는 더 큰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실용적인 단계들에 지나지 않게 된다. 4 이 단계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5 먼저 그것이 두려움임을 알라. 6 두려움은 사랑의 결핍에서 일어난다. 7 사랑의 결핍은 완전한 사랑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8 완전한 사랑은 곧 속죄다.
셋째 성욕
영계는 비물질의 세계이므로 생각과 감정과 욕망이 그대로 밖으로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이상한 사람들과는 교류를 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는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를 수 있지만 저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다. 물론 저세상에도 위선자들과 사기꾼들이 있다. 속이는 영인(靈人)들이 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곧 드러나기 때문이다. 순진하고 단순한 영인(靈人)들은 속일 수 있지만 천사들에게는 어림도 없다. 어쨌든 저세상은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세상이기에, 나쁜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악인은 기본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허용이 되어도 – 종종 하나님이 허용하신다 - 그 자신이 천국에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의 생명 상태와 천국의 생명 상태가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악인이 들어가면 고통을 받는다. 숨도 쉴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나와서 머리를 아래로 발은 위로하여 지옥으로 뛰어든다.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 510)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자기의 영(혼)이 속해 있었던 영계의 자신의 공동체로 간다. 모든 사람은 그 영으로는 지옥 공동체나 천국 공동체 중 어느 하나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악한 영은 그의 내면의 지배적인 상태에 따라 점진적으로 자기 자신의 공동체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그 상태가 끝나기 전에 그 공동체를 똑바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태가 끝나면 자기와 비슷한 영들이 있는 지옥으로 스스로 몸을 던진다. 이 뛰어내리는 행동은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한채 거꾸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보이는 이유는 그 영 자신이 거꾸로 된 질서 안에 있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 525)... 따라서 그들에게 주님은 누구나 천국에 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신다는 것과 그들이 원하면 천국에 들어가 보고 머물 수 있다고 알려준다. 그것을 원한 이들은 실제로 들어가 보게 된다. 그러나 바로 문턱에서 천국의 열(천사들이 거하는 신적 사랑)과 천국의 빛(천사들이 거하는 신적 지혜)의 흐름이 닿자마자 그들은 속에서 천국의 기쁨 대신 지옥의 고통을 느끼고 머리부터 천국 아래로 뛰어내린다. 이런 체험을 통해서 그들은 방법을 떠나 자비로 천국이 허락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배운다.
(천국과 지옥 429)... 나는 어떤 영(영인)이 천국에서 흘러나온 기운에 닿자 내적인 고통에 울부짖듯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지옥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닿자마자 그는 조용해지고 흐뭇해했다.
(천국과 지옥 548)... 사람은 스스로 지옥으로 뛰어든다. 악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은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한채 뛰어드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런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힘에 의해 지옥으로 던져지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아니다.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순정 기독교 613) 천계에서는 모두가 주님을 우러르고 지옥에서는 모두가 주님에게서 눈을 돌린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든지 천계에서 지옥을 볼 때에는 마귀들의 등판이나 뒷면 이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마귀들도 발로 걷고 사방을 둘러보지만 때로는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나 자신이 본 이러한 현상은 그들의 속 마음의 방향성이 천국과는 반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중생이 천계로부터 지옥의 제거와 분리에 대응한다고 깨달았다. 지금 이야기한 것과 같이 사람은 생래적으로 축소형의 지옥이지만 그의 둘째 출생에 의하여 축소형의 천계가 된다. 이같이 천계로부터 지옥이 분리되듯 악들이 사람에게서 옮겨지고 분리된다. 그때에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천계가 심어지고 새 사람이 되는데 따라서 악은 주님에게서 눈을 돌리고 서서히 뒤엎여진다. 사람 안의 각 악이 지옥 안에 있는 영들의 유사한 악과 사귀고 있고 사람 안의 각 선이 천사들의 유사한 선과 사귀고 있음을 주지하여야 한다.
(천국과 지옥 558) [나]... 한 마디로 자기 사랑이 우세한 사람에게는 자기 사랑이 머리가 되고 천국적 사랑은 발이 된다. 그는 천국적 사랑 위에 올라서 있고 만일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짓밟아 버린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머리를 아래로 하여 지옥을 향하고 발은 위로 천국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548항 참조).
(순정 기독교 405) 그러나 자아애의 지배애가 머리의 위치를 점하면 그때는 천계의 사랑은 몸을 통해서 발로 추방된다. 그리고 자아애가 증가됨에 따라 천계의 사랑은 발목을 통해서 발바닥으로 내려가고 마침내는 신발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 발 밑에 밟히게 된다..... 완전한 사람 안에는 천계의 사랑, 세간애, 그리고 자아애가 머리, 가슴, 그리고 발에 대응된다. 만일 자아애가 머리라면 사람을 완전히 거꾸로 놓는 것이 된다. 그 사람은 천사들에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는 자처럼 나타난다.
인격 모독을 생각에서나 감정에서나 욕망에서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 판단을 하지 않고 경멸과 비하와 미움과 분노가 에고(=혼)에서 없어야 하는 이유는 영계가 비물질의 세계로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성적 욕망도 금물이다. 이 세상에서 지나가는 여성을 성적 시선으로 보아도 사람들이 모르지만 저세상은 아니다. 그 눈빛에서 음성에서 몸짓에서 다 드러나고 여성들은 이 세상에서도 이것에 관해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저세상에서는 더더욱 날카로운 지각 능력을 소유한다. 이유는 육체를 벗었기 때문이다. 영의 감각을 방해는 것이 없다. 이 세상에서는 언행으로 드러나야 악이 지각되지만 저세상에서는 언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내면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드러나고 이와 더불어 영의 감각은 지상에서보다 수십 배로 예민해진 상태에 있기에 에고 자체가 악한 사람은 영계(영들의 세계, 중간영계)에서 사람들과 같이 있을 수 없다.
성(性) 에너지는 그 자체로는 악이 아니다. 생명에 속한 것이다. 유용한 것이다. 생식에 있어서 그리고 우주에서 제일 강하다. 그래서 영성(靈性)에도 씐다. 하나님은 악도 선용한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서,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쓰일 수 있다. 성(性)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천사들은 사람들을 영계로 인도하기 위하여 성(性)을 정화하는데 힘을 쓰고 또 그것을 이용하여 영적인 성취나 건강을 이루는데도 사용한다. 선용은 사람이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무구 상태에 있을 때 가능하다. 도덕적인 잣대가 성적인 것에 개입하면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 사람이 꺼리게 되면 천사가 그것으로 도움을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다. 성(性) 에너지는 양날의 검이다. 잘 사용하면 유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백해무익(百害無益)하다.
넷째 혼의 반동성(反動性)
혼(魂)은 유전으로 부모에게서 받는다. 내적인 것은 아버지, 외적인 것은 어머니로부터 받는다.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은 생존본능(eros instinct)과 파괴본능( thanatos instinct)이고, 어머니로부터는 쾌락본능(pleasure instinct)을 받는다. 혼의 내부에는 그림자(shadow)가 있고 외부에는 에고(ego)가 있다. 에고와 그림자는 ‘나’를 말한다. 자의식으로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둘인 것은 아니고 이중인격인 것도 아니다. 물론 내가 에고로 있을 때와 그림자로 있을 때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냥 나로 보고, 나의 상태가 달라졌구나라고만 인식을 한다. 혼의 내부에 그림자가, 외부에 에고가 있다고 해서 그림자에게는 생존과 파괴, 에고에게는 쾌락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생존, 파괴, 쾌락 이 셋을 생명본능(life instinct)이라 하는데, 이것들은 에고에게도 있고 그림자에게도 있다. 에고와 그림자의 영역은 고정불변(固定不變)이 아니다. 말했지 않은가? 또 경험이 말하지 않은가? 상태가 달라진다고, 사람들은 자기가 에고로 있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림자로 있을 때도 있다. 그림자는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비인간적인 것을 말한다. 선악의 관념에서 악에 속한 것과 더불어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열등하고 추하고 부끄러운 것들도 의미한다. 우리가 악하고 어둡고 더러운 상태나 면모를 보일 때 우리는 그림자로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에고가 그림자에게 점령당해서 휘둘리는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에고와 그림자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동전의 양면이지만 이 둘은 빛과 어둠, 양지와 음지처럼 상극(相剋)이다. 같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에고가 의식에 있고 그림자가 잠재의식에 있는 이유는 에고가 살기 위해서 그림자를 억압하고 잠재의식으로 추방했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발로(發露)하면 에고는 인간으로서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갈 수 없다. 생각해봐라 어느 누가 그림자의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을 좋아하고 용납할 수 있는지를,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가르침과 훈계를 받고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도 지적을 받고 학교에서도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으면 에고는 지가 살기 위해서, 잘 되기 위해서 그림자를 부정하고 억압하고 추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고와 그림자를 사람으로 치면 둘 사이는 원수지간이다. 에고는 그림자 때문에 자기가 손해 본다고 생각해서 그림자를 공격하고 죽였기 때문이다. 의식에서 억압해서 잠재의식으로 추방하는 것이 사람을 죽여 무덤에 묻는 것과 같다. 원한을 가진 혼령(魂靈)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한을 풀려고 가해자를 공격한다. 이것은 무엇인가? 에고가 추구하는 것을 그림자가 방해하고 훼방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에고에 대해 반동적이다. 이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상호적이다. 에고는 그림자에 반동적이고, 그림자는 에고에 반동적이다. 꿈에서 그림자는 에고의 상대로, 경쟁자로, 적군으로 나온다. 그리고 둘 사이의 싸움은 항상 에고가 간발의 차이로 지는 것으로 끝난다. 그건 정해진 운명이다.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에고가 그림자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에고를 점령하면 의식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매사가 부정적이다. 안 된다. 못한다. 할 수 없다. 하기 싫다. 해서 뭐하냐, 무슨 의미가 있냐, 살기 싫다. 공허하다, 아무 의미가 없다, 뭐하러 애쓰며 살아가냐 등등등 부정적인 생각들과 우울과 공허감이 일어나고 나아가 자살 충동으로 죽음에 몰리게 된다. 이건 뭐냐, 에고가 하는 것이 싫다는 것을 말한다. 에고가 잘 되고 잘 사는 것이 싫다는 것을 말한다. 에고가 하는 것은 무조건 반대라는 것을 말하고 에고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되고, 적극적으로 반대를 한다. 그래서 에고는 진전이 없다. 새로운 마음을 내서 무엇을 하려고 하더라도 금방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들이 에고를 점령하고 에고의 발목을 잡으며 아래로 끌어내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고 매사에 제자리걸음만 하게 된다.
혼은 기본적으로 부모에게서 즉 땅에서 오기 때문에 하늘에 대해서는 반동적이다. 영에서 온 사람 즉 속사람은 하늘을 바라보지만 육에서 온 사람 즉 겉사람은 땅을 바라본다. 서로 바라보는 대상과 방향이 정반대다. 그래서 서로에게 등을 돌려 있는데, 이 속사람으로부터 태어난 새로운 에고, 즉 영적 에고와 겉사람으로부터 태어난 에고 또한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있으며 견원지간(犬猿之間)이다. 이것은 영적인 사람, 거듭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다. 원래 사람은 에고와 그림자로 분열되어 있는데, 거기에 영적인 사람에 한해서는 에고도 분열되어 둘이 된다. 새 에고와 옛 에고로, 적의 원수는 나의 친구다라는 말이 있지만 에고와 그림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둘이 감당할 수 없는 공동의 적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큰 적이 등장하면 서로 싸우던 자들도 그 적을 대적하기 위해서 뭉치는 법이다. 그래서 에고와 그림자는 서로 싸우다가 협력하기로 하고 영적 에고의 영적 충동에 대항하여 반동(反動)하기 시작한다. 즉 영적인 것을 추구할 때마다 반동하고 저항하고 훼방하는 짓을 한다.
영적인 에고가 추구하는 것은 에고가 원치 않는 것들이다. 영적인 것을 위해서는 희생하고 포기해야 한다고 하지만 에고의 본능은 이기적이고, 원하는 것은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들이다. 그것들이 에고에게는 만족과 기쁨과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고는 생존 의지가 강하다. 잘 살려고 노력을 하고 하려고 한다. 하지만 에고가 영적인 에고를 대적하기 위하여 그림자와 연합하게 되면 그림자에게 있는 반동성이 에고에게 유입되어 자기에게 이로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에고에게도 좋고 영적 에고에게도 좋은 것을 영적 에고가 제시를 해도 에고는 영적 에고가 싫기 때문에 그것에 반대를 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다 보니 자기에게도 피해가 발생하고 손해가 발생하는데 그럼에도 포기를 하지 않고 끝까지 고수(固守)를 한다. 예를 들어 운동을 해서 건강해지면 에고에게도 좋은 것이다. 고통이나 돈의 손실을 막을 수 있고 기분도 좋아지고 컨디션도 좋아지니, 그런데 영적 에고가 싫다 보니 그가 기뻐하고 이로운 것은 작은 것 하나라도 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자기에게도 좋은 것인데 영적 에고가 좋아하니 자기가 고통을 받고 손해를 볼지라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학(自虐)이고 자기 파괴다. 원래 이 파괴 또는 공격욕은 외부로 향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잘 되기 위해서 외부로 공격욕을 활용하는 것인데, 어찌 된 일인지 내부가 갈등상태가 되면 공격욕은 내부로 향한다. 내부 총질인 것이다.
혼의 반동성, 에고의 반동성은 그림자의 의식화를 말한다. 에고가 영적 에고를 상대하기 위해 그림자와 손을 잡은 것이지만, 그림자 입장에서는 감옥으로 상징되는 잠재의식에서 나와 사회를 상징하는 의식으로 진출해 그곳에서 즐겁게 살고 있는 가해자인 에고에게 복수하는 기회를 잡는 것을 말한다. 그림자는 용서를 모른다. 에고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자기의 죽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에게는 오랜 세월 동안 단 하나의 목적만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죽인 에고에 대한 복수로서 그의 죽음이다. 그래서 영적 에고가 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고 의미 없다고 하면서 자꾸 죽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울과 허무와 자살충동, 이것이 그림자의 발현이다. 그림자는 안다. 영적 에고가 에고이고 에고가 영적 에고라는 것을, 둘은 하나다. 둘이라고 에고는 인식을 해도, 그림자가 보기에는 하나다. 영적인 에고의 뜻대로 하면 에고에게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림자에게는 한 가지밖에 없다. 에고의 죽음, 자살이든 타살이든, 공격욕은 일차적으로 외부로 향하지만 그것이 막히면 이차적으로 내부로 돌려질 수 있다. 외부로의 공격은 에고가 하지만 내부로의 공격은 그림자가 한다.
에고가 진정 자기 자신을 위한다면 자연본능을 버리고 천국본능을 선택해야 한다. 영생과 인애와 희생을 자기 안에 심어 그것을 자기의 본능으로 삼고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아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림자의 파괴 본능을 이길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영적본능, 천국본능밖에 없다. 그림자가 바라는 것은 영적 에고를 제거하여 에고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에고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고는 영적 에고에게 협조를 해야 한다. 그림자에게는 용서를 구하고, 그림자는 남이 아니다. 나 자신이다. 자기가 자기를 적대시하는 것은 정신이 이상한 것이다. 그림자를 인정하고 관심을 가지며 사랑의 손길을 내밀면 그림자는 태양 아래 얼음처럼 녹는다. 만사가 형통한다. 만사형통(萬事亨通)이다. 에고가 사랑으로 변하면 그림자도 사랑으로 응답한다. 그림자는 에고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방해와 훼방과 걸림돌이 없고 반동이 없다. 순풍(順風)이다. 앞으로 잘 나가게 된다.
첫댓글 질문 8 중음신(中陰身) 또는 중유(中有)란 무엇인가|작성자 법성스님 :⑨ 하늘의 중유는 머리를 위로 하고 올라가니 마치 앉았다가 일어서는 것과 같다. 사람과 귀신과 축생의 중유는 사람과 같이 옆으로 간다. 지옥의 중유는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하여 거꾸로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