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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사람
황 석 영
나는 제대를 하고 나서 식구들의 권유로 시골에 있는 외삼촌네 과수원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해 가을에 나는 이웃 나라의 전장(戰場)으로부터 돌아왔던 것이다. 수송선 안에서 맞았던 방역주사와 십여 일간의 뱃멀미와 갑자기 바뀐 기후 때문에 악성감기를 앓았으므로 나는 몹시 쇠약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대 날짜를 때우기 위해 일주일 동안이나 영농작업을 했었다. 하루종일 기차를 타고 집에 돌아와 잠자는 식구들을 깨웠을 때, 세상의 기적과 같은 일들이 있을만하다는 것을 나는 절감했다. 무공훈장을 가슴에 단 영웅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대자들과 다름없는 귀향병으로서 나는 하루 이틀 내 예전의 정서를 회복해갔다. 될 수만 있다면 내가 되찾기 시작한 정서가 가족들과 친지들께 떠벌린 무용담처럼 어느 정도 과장되거나 각색된 그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진실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사실 전선에서의 ’우리’ 라는 말로써 이루어진 여러 행위나 감정들은 거의 믿을 수 없는 것들일지도 몰랐다. 나는 ‘우리들’ 속에 잠적해서 편안히 잠들어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집에 돌아온 첫 주부터 나는 고열로 앓아누웠다. 헛소리도 했고, 어떤 때는 소리를 지르며 깨어 일어나 마당을 기어다니기도 했는데 꿈은 별로 꾸어보지 못했다. 그것은 어렴풋한 반수상태였다고 생각된다. 어머니가 주장해서 굿을 한번 했다. 어렸을 때 일찍 젖을 뗐기 때문에 체질적인 경기(驚氣)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누님의 해석도 있었으며, 매형은 내가 군대에서 고생을 많이 한 탓이라고 얘기했지만 나는 누구의 말에도 선뜻 그렇다고 끄덕이지는 않았다. 몸이 갑작스레 쇠약해진 탓이라고만 여겼다. 앓고 나서부터는 불면증 때문에 고생하기 시작했다. 숙맥 같은 여러가지 처방을 해보았으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형광등이 지잉 하고 우는 소리와, 자기의 숨소리만을 들으며 매일 밤을 뜬눈으로 새운다는 건, 참으로 무료한 짓이었지만 달리 해볼 도리가 없었다. 술을 마시는 일은 만취하더라도 자기의 의식을 자각하게 되거나 아니면 제한 없는 충동에 빠져버리는 것 같으니까 질색이고, 갑자기 닥친 혼란으로 해서 책이라면 탐정소설도 읽을 수가 없었고, 여자 역시 돈 주고 사는 것은 썩 내키질 않았다. 나는 불면의 나날이 몹시 불편해졌고 도무지 살아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바로 그 무렵에 식구들이 권하는 대로 건강해지기 위하여 서골로 내려갔던 것이다.
그 고장의 과수원들은 이제 한창 수확기에 이르러 있었다. 여러 마을에서 모여든 빈손들이 날마다 과목 위에 다닥다닥 붙어서 품을 팔고 있었다. 나는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삼촌이 정해준 열을 맡아 작업을 감독하고 불량품이나 될 사과를 한곳에 모으는 일을 거들었다.
내가 만수원을 알게 된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알아보았다고나 할까. 만수가 일하고 있는 과목 밑에서 서성대고 있었을 때에 내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무 위를 쳐다보고서 그가 며칠 전에도 웃음을 지으며 내제 말을 걸려고 애썼던 사람임을 알았다.
“몰라보겠습니까요?”
하고 그는 말했다.
“내가 만수요. 내 이름 생각나죠?”
그가 자기 이름을 대자, 나는 차츰 그를 알아보았다.
“전혀 몰랐소.”
라고 나도 감탄하며 말했다.
“방죽 위에서 둘이 싸웠잖습니까?”
나는 기억을 헤쳐보았다. 어느 해인가의 겨울방학 때 싸락눈 오던 날, 누구와 된통 싸웠던 것을 알았다. 나는 그때 코피가 터졌었다. 그리고 썰매를 수문 속에 빠뜨렸던 것이다.
“그게 당신이었구만, 우리가 왜 싸웠죠?”
내 물음에 대답 않고 만수는 생각이 잘 안 난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기만 했다. 그는 과목 가지로부터 사과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땅 위에 내려서서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악수했다. 만수가 말했다.
“있잖아요, 우리 큰형 말요.”
“큰형이…… 아, 그래서 싸웠지. 아직두?”
“네, 그렇죠 뭐.”
나는 의젓한 장정이 되어버린 만수를 똑똑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내가 외가에 들렀던 것은 중학교 이학년 여름이 끝이었으니 처음엔 서로 몰라볼 것이 당연했다. 어릴 적의 만수는 고추장단지라고 불릴 정도로 배불뚝이의 키 작은 땅딸보였다. 나무를 베면 온 마을에 화재가 난다는 전설이 있는 솔산 아래에 만수네 집이 있었던 것을 나는 기억했다.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폭 좁은 시냇가의 초라한 방앗간이 만수네 마지막 소유였던 것이다. 방앗간 주인은 만수의 식구들 중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었던 그 애의 큰형수였다. 내가 그 애와 방죽에서 싸웠던 것은 분명히 그의 큰형 때문이었다. 만수네 큰형은 실성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검게 더럽혀진 옥양목 저고리의 고름을 질질 빨고 다니면서 가끔 그의 뒤를 따르며 놀려대는 아이들에게 히죽히죽 웃어 보였다. 언젠가 만수는 자기 큰형 이 공부를 너무 하다가 돌아버렸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는 믿고 있질 않았다.
만수는 동촌으로 이사가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애네는 원래 외갓집 동네인 서촌에서 살던 부농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원래부터 외갓집 마을에 살던 사람은 몇 가구 안되며, 서촌도 오래 전에는 수재민촌이 되어 있는 지금의 동촌처럼 몹시나 어수선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어렸을 때엔 서촌 부근의 과수원이 모두 자기네 소유였다는 거다. 만수네 삼형제 중에서 자기만이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던 것은 집안의 몰락에 있다는데, 사실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작은형은 가까운 도회지의 교사였고, 만수는 사각모를 쓴 자기 큰형의 누렇게 퇴색한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만수는 주먹다짐도 제법 할 줄 아는 시골 건달이 되어버린 것 같았는데, 우선 재담이 그럴듯했다. 나는 소싯적의 친구인 만수를 이 무료한 세월에 다시 찾게 된 것이 반가웠다.
나는 그담부터 언제나 만수가 일하는 과목 밑을 찾아가 앉기를 즐겼다. 그가 과목 위에서 과일 따는 손을 멈추지 않는 것과 똑같이, 끝없는 음담패설을 씨부려대어서 나를 미치도록 웃기곤 했기 때문이었다. 저녁때 타관에서 온 일꾼들만 행랑채에서 모여 자곤 했으나 만수는 자기 집에 돌아가지 않고 내 방에서 함께 자는 날이 많았다. 나는 그가 도회지에 대한 열망으로 몹시 들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재수 옴붙은 고장이죠. 여태껏 고생만 직싸도록 하구 말이오.”
그는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줄곧 어느 항구의 경비부대에 근무했단다. 엉뚱한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바다를 본 젊은이가 요런 산골에서 평생을 지낸다는 게 어려울 것은 정한 이치처럼 여겨졌다.
“기회가 오면 곧 여길 뜰 테요. 맨손으로 말이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 두 손으로 주먹을 쥐어흔들며 말했다.
수확이 끝나고 사과를 상자에 포장하는 끝마무리도 모두 마친 날, 만수는 나를 불러 조용히 할 얘기가 있다고 청해왔다. 나는 처음엔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만수의 성격으로는 시끄럽게 못할 얘기도 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장창고의 뒤편에 수북이 쌓인 마른 짚더미 위에 뒹굴면서 얘기했다. 만수는 교사노릇을 하는 둘째형이 입만 살아 있는 뼈없는 놈이라고 욕했다. 그리고 실성한 큰형과 난리통에 죽은 자기 부모의 얘기를 할 땐 목소리가 낮고 침울해지며 눈가에 가는 주름이 잡히는 것이었다. 늦가을의 짧은 해가 솔산의 나무들 사이를 누비며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늘 위를 낮게 날아가는 멧새들의 지저귐이 들렸다. 숲은 곧 어두워지고 새들도 쉬러 갈 그런 무렵이었다.
“내가 여길 전작 뜨지 못한 건…….”
하고 나서 그는 망설였다.
“할 일이 있기 때문이죠. 군에 있을 때부터 벼르던 건데, 꼭 해치울 거요.”
만수는 비닐챙이 달린 낡은 조합원 모자를 눈썹 위로 치켜올렸다.
그는 노을이 비낀 어두컴컴한 들판 건너를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나 만수는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말했다.
“우리, 읍내로 나갑시다.”
나는 그가 술 생각이 난 줄을 알았고 “한잔 하겠소?”라고 떠보았다. 만수는 자기 호주머니를 툭툭 두드려 보였다.
“내가 사겠소. 삯을 받은 게 있으니까.”
하늘 위에 초저녁 별이 하나둘씩 고개를 내밀었다. 우리는 읍내로 향한 한길을 따라 걸어갔다. 묵묵히 걷고 있던 만수가,
“서리를 한탕 했으면 좋겠소.”
라고 말했다.
“돼지서리 말입니다. 꼭 한마리 잡아놓구 제사를 지내야 할 텐데.”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돼지를 훔친단 말인가, 아니면 잡겠다는 거요?”
“여길 뜨기 전에 살풀이를 해야겠소.”
만수는 침을 돋우어 뱉었다.
“속살이 포동포동 오른 돼지 말요. 요새는 꿈에도 보인다니까요. 돼지새끼를 실컷 줘박고 나서 모가지를 쑤시는 꿈을…….”
“이상스런 꿈도 있군.”
“통쾌한 꿈이죠.”
만수가 먼저 서리 얘기를 꺼냈으니 말이지만, 우리는 어렸을 때 철마다 참외서리, 콩서리, 고구마서리를 했는데 그 상대는 언제나 이웃 마을이었다. 반대로 이웃 마을 아이들은 우리 마을로 원정을 왔었다. 촌로들은 어느 한계까지는 서로를 묵인했다. 그들 자신도 옛날에는 서리놀이를 즐기며 자라났고, 풍습 같은 것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끔 두 마을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 소년들이 장터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서로 치고 받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했는데 원인은 원정갔던 녀석들의 좀 지나친 노략질 때문이었다. 가령 수박서리를 갔던 패들이 몇 개 따는 데 그치질 않고 평소의 적개심을 발휘하여 덩굴을 잡아뽑거나 설익은 것까지 모조리 깨놓는 짓궂은 분탕질을 즐긴 뒤에 말썽은 일어났다. 한해 농사가 망쳐진 밭고랑 사이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할 주인을 상상해보는 것이 놀이의 철저한 즐거움이었다. 이런 경우에 아이들은 서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고, 그때마다 보복을 하기 위한 새로운 서리의 계획이 이루어지곤 하였다. 이런 종류의 보복이란 끈질기게 추구하다보면 타락하게 마련이고, 엉뚱하게도 빗나간 짓이 되어버리는데 대개는 후회하기 전에 잊혀지는 것이 다행스런 일이었다.
어둠 가운데 읍내의 외곽으로 짐작되는 불빛들이 몇 점 흩어져 있었다. 불빛들은 산 아래를 지나 골짜기 너머로 계속되어 더 큰 규모로 번창해가고 있었다. 만수는 잡화상과 주점이 있는 번화가의 어느 골목 앞에서 나를 기다리게 한 다음, 흰 가운을 입은 이발사 한사람을 불러냈다. 그들은 내 뒤에 처져서 뭔가 소곤거리며 의논하는 것처럼 보였다.
“틀림없이 아직 안 갔죠?”
“아까 내가 봤다니까. 다니러 왔을 거야. 좋은 기회다.”
“서두르면 안되겠어요.”
하는 말들이 간간이 들려왔다. 만수는 이발사와 헤어지면서 말했다.
“알려 줘서 고맙수.”
만수는 기다리고 섰는 내게로 와서 나란히 걸으며 기쁜 듯이 말했다.
“몇년 만에 한번씩 나타나는 돼지가 한마리 있죠.”
좁다란 술청 안에 나무탁자가 몇개 있었고, 두어 패거리가 앉아서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간막이 너머에서 요란한 소리로 칼질을 하고 있던 사내가 코를 내밀고 우리의 주문을 받았다. 만수는 내게 전장에서의 무용담을 해달라고 졸랐으므로, 나는 거짓말 몇마디를 지껄였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교묘하게 위장해서, 자기 것처럼 지어내는 녀석 같이 능숙하게 나는 지껄였다.
“죽이고 싶은 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수가 중얼거렸을 때, 나는 얘기를 뚝 그쳐버렸다. 딱히 죽이고 싶었던 놈이 있어서 총을 쏘고 뛰어다니며 숨고 했던 것은 아니었고, 내가 누구인가를 이 손으로 죽였던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나서 갑작스레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만수는 술잔을 입술 언저리에서 멈춘 채 나를 건너다보면서 말했다.
“마음대로 사람을 못살게 굴고, 불행하게 만든 놈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경찰에서 잡아갈 거요. 재판을 받겠지.”
만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쉽게 잊거든요.”
“하긴 그렇군. 오래되면 사면해버리지.”
하고서 나는 말했다.
“그들은 최소한 현재라든가 가까운 장래만을 다루고 싶어하니까.”
만수는 술잔을 연거푸 기울였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놈이 있소.”
“그런 일은 세상에 너무 많아요. 형무소나 사형대가 가득 찰 거요.”
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살인적인 신경병이 만연한 꼴을 말이다. 길을 가다가 구두를 밟힐 땐 기분이 나빠서 상대편을 때려 죽이고, 버스가 조금 오래 지체한다고 운전사를 몰매로 죽이는 승객들, 내 욕을 하고 다니는 얄미운 녀석은 그의 집 골목에서 기다렸다가 단도로 찔러버린다든가, 그러고 나서는 신경질이 어떻게 나는지 그 자식 죽여버렸지, 라고 말해버리는 어떤 세상을 생각했다. 도무지 한사람의 미세한 감정과 그가 살아온 환경이라든가, 유년시절 따위의 개인적인 역사에 관해서까지 재판할 수 있는 법정이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저들은 사회가 입은 사실적인 해악에 관해서만 응징하려 할 따름이리라. 특히 오래 묵혀진 사실에 대해서 사면(赦免)하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사회적인 증오로부터 차츰 망각되어진 일들이란 이미 신의 영역인 것이다.
“그놈이 살아 있는 한, 용서할 수 없소.”
만수가 말했다.
“어떤 놈, 말이죠?”
“짐승보다두 못한 놈이오.”
만수는 침을 뱉었다.
“내, 보여주겠어요. 그놈을 잡아서…….”
“그러면 걸리게 되어 있어요. 린치는 용서하지 않거든.”
나는 차츰 말귀를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만수는 이미 술이 많이 언른데다, 기분이 격해진 탓인지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 사람들이 안해주기 때문에 내가 할려구 그래요.”
“뭘 하죠?”
“재판 말요.”
“누가 집행하오?”
“그것두 내가 하죠. 그놈두 제맘대루 했으니까.”
그는 대답을 잊어버린 내 쪽으로 얼굴을 바짝 기울였다.
“나는 그놈을 납치할려구 그럽니다. 이제야 기다린 보람이 있어요. 나는 여기서 날라버리면 그뿐이오.”
“그놈이란 도대체 누구요?”
하고 나는 참다 못해 말했다. 그는 더욱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 큰형은 그놈에게 당했죠. 아주 옛날 일입니다. 그놈에게 가혹하게 취급받았어요.”
만수와 나는 술을 각각 두어 되씩 걸치고 나서, 불이 꺼지기 시작한 장터의 점포들 사이를 지나갔다. 천막이 씌워진 청과물 상자들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밤을 새는 상인들이 카바이드 불 아래서 윷판을 벌이며 떠들썩하고 있었다. 나는 시장 골목을 만수와 같이 걸으며 그리 춥지는 않은데도 가슴속에 썰렁함이 끼쳐오는 듯했다. 나는 턱을 부르르 떨었다. 만수가 말했다.
“우리집에 갑시다. 가서 한잔 더 하지 않겠소?”
“당신 집엘?”
“소주 두어 병 사갖구 갑시다.”
“그만두겠소.”
나는 더이상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았고, 그의 음산하게 낮아지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기분 나빴다. 만수는 내 손목을 잡고 흔들면서 거의 애원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제발…… 좀 갑시다.”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약하고 젖은 듯한 목소리라고 느껴졌다. 만수의 목소리는 떨렸다.
“집에 혼자 가기가 싫어서 그래요.”
그의 손바닥은 차가웠다. 나는 그의 손을 빼내면서 말했다.
“남의 집엘 가면, 못 자는 버릇이 있지만…….”
나는 만수가 상점에서 소주와 오징어를 사고 있는 동안 기다려주었다. 어쩐지 만수네 집에 가볼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턱이 쏙 빠지고 눈이 커다란 그의 형수가 생각났고, 항상 못마땅한 얼굴로 의심스런 눈초리를 동네 사람들에게 던지던 만수의 할머니도 생각났다. 만수는 작업복의 양쪽 호주머니에 술병을 쩔러넣고, 오징어 다리를 찢어서 내게 내밀었다. 우리는 오징어를 씹으면서 시장 골목을 벗어났다. 골목 어귀에서 만수가 걸음을 멈추었고, 그의 입놀림이 정지되었다.
“나는 한번도 본 적은 없어요.”
하고 만수는 말했다.
“대강 어림짐작은 하지만요.”
잠깐 어리둥절했던 나는 화가 나서 말했다.
“횡설수설하는 얘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소.”
“그놈은 악질이오. 형수에게서 수십 번 들었죠.”
만수는 말을 끊고, 이상스레 긴장하면서 처마밑 그늘 속으로 붙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식육점의 진열창을 통해서 갈고리에 끼워져 있는 고깃덩이들과 붉은 전등빛에 더욱 진한 핏빛으로 드러난 짐승의 대갈통들을 보았다.
“저런 놈일지도 몰라요.”
만수가 속삭이면서 내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이끌었다.
나는 말했다.
“소대갈통 말요?”
“아니, 그 뒤를 봐요.”
진열창 안쪽에 선반 비슷한 길쭉한 판자가 보였고, 그 위에 포개진 두 팔 속에 뺨을 묻은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은 우리가 얘기하던 죄인의 잘리운 머리처럼 보였을지도 몰랐다. 푸줏간 주인은 짓눌린 볼 근육을 일그러뜨리고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자줏빛 어둠 속으로부터 짐승들의 머리 사이로 사나이의 눈감은 얼굴은 또렷하게 떠올라왔다. 나는 만수를 힐끔 홈쳐보았다. 그는 배고픈 개가 음식을 바라볼 때같이 탐욕스런 눈으로 진열창 속을 넘겨다보고 있었고 꿀꺽 침 넘기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가 피식 하고 건성으로 웃은 듯했다. 만수가 다시 입을 우물거리며 오징어를 씹기 시작했다.
“서두를 건 없다는 생각이 났소.”
만수는 말했다.
“그놈을 봤으면…… 그러면 천천히 오래오래 속 썩여줄 텐데.”
“그건 좋지 않군. 상대편은 거의 습관이 되거나 뉘우쳐버리고 말지도 모르는데…… 그쪽에선 차츰 곯리는 재미가 없어질 거 아뇨?”
나는 만수의 ‘천천히 오래오래’ 라는 말 때문에 지난 한달 동안의 고생스러웠던 불면증을 떠올렸다. 밀폐된 작은 상자에 갇힌다든가 산 채로 벽돌담 사이에 발려버리는 일이 생각났다. 고행(苦行)은 모든 의식과 드디어는 절망까지도 쥐어짤 것이다. 나중에는 한줌으로 쥐면, 겨울날의 얼어붙은 모랫덩이처럼 파사삭 부서져 흩날릴 것이리라.
“그자가 뉘우치는 걸 나는 원하지 않아요. 놈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가치가 조금도 없으니까.”
라고 만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내의 얼굴은 두툼한 눈까풀을 내려뜨리고 입을 벌린 채 붉은 불빛 속에 붙박혀 있었다. 사나이는 자기가 현실의 어떤 얼굴과 겹쳐진 것도 모른 채 위험을 무릅쓴 잠을 자고 있었다. 만수가 만약 원하는 대로 칼날을 곧추세워 그의 뒷덜미에 꽂는다면 불빛보다 더욱 짙은 피가 솟으며 사내가 흰 눈자위를 번쩍 드러낼 것 같았다.
“그런 자를 사람 취급할 수는 없소.”
하고 만수가 내뱉었다.
만수네 집에선 온밤내 귀뚜라미 소리가 유난했다.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울고 있는 소리였다. 그것은 어둠에 살이 찐 귀뚜라미의 떼였다. 나는 그 소리가 칼이나 쇠를 벼르는 듯한 착각을 했다. 그 소리에 귓바퀴 속이 울릴 정도였지만 오히려 더 깊고 깊은 적막감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흙바닥에 멍석을 깐 만수의 초라하고 우중충한 방은 안방으로부터 떨어져 사립문 곁에 있었는데 바로 방문 앞에서 노파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소리는 우리의 기어들어간 숨결을 뒤덮고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종잡을 수 없는 지껄임이었다. 간간이 먹을 것 좀 줘, 배고파 죽겠다라든가, 에미야, 조금만 다오, 하고 보채는 듯한 투정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만수가 숨소리를 죽이고 있어서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망녕이오. 형수가 매일 떠먹입니다.”
만수는 내게로 등을 돌려 돌아누우며 말했다.
“할머니는 죽은 사람만 찾고 있어요.”
노파의 음성은 갑자기 다정해지고 누군가와 정답게 얘기를 시작했다. 만수는 잠 섞인 목소리로 “니기미!” 하고 말했다. 만수네 집은 마치 옛적의 묘실(墓室)처럼 유품만이 남아 있는 곳 같았다. 성의 첨탑 위에 거미줄이 쳐진 수십년 전의 식탁을 보존해놓고 썩은 음식들 앞에서 새옷을 입고 홀로 자축하는 얘기책 속의 늙은 왕이 생각났다. 만수네가 몰락한 뒤에 살았던 솔산 밑의 물방앗간집보다 헐고 음침한 초가집이긴 했으나, 제법 큰 집인데도 텅 비어버린 듯했다. 이 집을 둘러싼 분위기에 빈병 같은 주둥이가 있다면 입술을 내밀고 불어보고 싶었다. 흉, 흉, 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만수의 큰형수는 어디로 갔는지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건넌방 쪽에 희끄무레한 등잔불이 켜져 있어 거기 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만수네 큰형은 집으로 들어오는 길 모퉁이에서 우리를 지나쳐 똑바로 앞만 보며 성큼성큼 벌어져갔다. 만수는 이미 코를 골기 시작했지만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노파의 중얼거리는 소리, 내 곁을 쓱 지나쳐서 숲 속으로 사라져가던 만수네 큰형,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들 때문만이 아닌 어떤 얼굴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직 희미했다. 그것의 음영은 뚜렷이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둠에 덮인 망막 위로 별무늬라든가 색깔의 형상들이 차츰 사라져버리고 나면 그 위로 입을 가로 찢어젖히고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얼굴이 떠올라왔다. 어둠속으로부터 그는 미칠 듯한 폭소를 이빨 속에 깨물고 있었다.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키키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봤던가…… 외국 잡지에 나온 다키치약의 광고같이 드디어 이빨을 드러내고 낄낄거리는 저 검은 얼굴의 형체를. 집 바깥으로 향한 창호지로 바른 창문을 밀어 열고 담배를 태웠다. 나는 이젠 완전히 잠을 빼앗긴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때 밭고랑 위로 우쭐거리며 뛰어오던 사람이 멈추어 섰다. 그는 어느 만큼의 거리를 두고 우뚝 서서 내가 태우는 담배의 불빛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는 창문 아래로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선 채 두 손을 내밀어 보였다. 나는 어릴 적에 그를 놀리던 때보다 더욱더 그 광인이 자기의 과거에 가깝고 굳게 이어져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그는 짓밟혀진 바로 그 순간에 멈춰 있는 것이라는. 다행스럽게도 어둠이 그의 표정을 한꺼풀 씌워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별로 불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피우던 담배를 그에게 던져주었다. 광인은 재빠르게 허리를 꾸부리고 담배를 주웠다. 그는 내 쪽을 힐끗 보고 나서 좀더 느긋하게 피우기 위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빨아들일 때의 훤하게 밝아오는 불빛 때문에 주름살이 드러난 미친 사람의 얼굴은 제법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이 보였다.
그 뒤 사흘 동안 만수를 만나지 못했다. 수확이 끝난 과수원은 철 지난 유원지처럼 쓸쓸하고 메마른 풍경이었다. 집에 올라가겠다고 말했더니 외갓집 식구들은 어리둥절해서 나를 만류했다. 외삼촌은 혹시 누가 섭섭하게 굴더냐고 넌지시 물어왔다.
“그동안 쉬느라고 피곤해져서 말입니다.”
나는 외삼촌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그래서 집에 가 푹 쉴려구요.”
수확한 과일 중에서 최상품 두 상자를 화물편에 부쳐 가져가라 했다. 나는 이튿날 첫차로 이곳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나서 석양 무렵에 일꾼에게 사과 두 궤짝을 지게로 지워 읍내로 나갔다. 탁송을 끝낸 후 나는 일꾼에게 술을 대접 했다. 일꾼은 나중에 외삼촌으로부터 성화를 받을까 염려해서인지 슬며시 새어버리고 나 혼자 이차를 하러갔다. 웬일인지 그날 나는 술에 들떠버렸다. 두번째 집은 색주가였는데 나를 재워준 것은 끝까지 술상머리를 지켜 앉아 있던 코끝이 살짝 얽은 곱살한 여자였다. 나는 여자의 옆에서 잠들었다. 그 다음부터는 모두가 환영(幻影)과 같아서 어느 것이 진짜 있었고 어느 것이 꿈이었는지 모르겠다. 제대해서 며칠 동안과 같이 다시 몽유증을 일으켰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으리란 것은 얘기를 수월히 하는 데나 도움이 될까, 전혀 내 망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눈을 떴다. 옆에선 코고는 소리가 들렸고 내 허벅지에 닿는 남의 살갗이 느껴졌다. 머리맡을 더듬다가 물을찾아서 밖으로 나갔다. 눈까풀을 반쯤 닫아둔 채 물을 떠마셨다. 중천에 달이 올라가 있었다. 나는 달빛 속에 젖어들어갔고, 그 집을 나서서 신작로를 따라 걸어갔다. 나는 조난당한 선원같이 골짜기 저편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향하여 너울너울 헤엄쳐갔다. 내가 어디로 가고 싶어하는가를 느끼고 있었다. 이곳을 뜨기 전에 꼭 만수네를 들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수네 잡초가 무성한 마당과 뚫어진 마루틈에서는 귀뚜라미가 날카롭게 울고 있었다. 사당(祠堂)과도 같은 방들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지만, 부엌 옆에 붙여서 지은 헛간에서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빼꼼하게 열린 헛간문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벽에는 심지가 돋우어진 남폿불이 밝게 빛나고 있었으며 마른 소나무 가지들을 구석 쪽으로 밀어놓은 곳에 굵은 통나무를 깔고 앉은 만수가 보였다. 그는 팔짱을 끼고 찌푸린 얼굴을 천장으로 향하여 치켜들고 앉아 있었다. 만수는 위엄을 차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헛간 안을 한눈에 들여다보기에는 방향이 적당치 않다고 생각했으므로 그 자리를 떠나 헛간 주위를 돌아보았다. 발길을 돌려 읍내로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나중·ll 몹시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냥 감당해보기로 했다. 어렸을 때 야시(夜市)에서 처녀가 뱀으로 변하는 요술을 홈쳐보던 생각이 났다. 생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온몸에 비늘이 돋았을 거라는 아이들의 헛소리 때문에, 식탁에 올라온 물고기는 수저도 매어보지 않은 채 밥상을 물리곤 했었다. 장성해서도 요리된 생선을 보면 께름칙했다. 나는 이 헛간이 내 의식의 중요한 부분을 점 령하게 될 거라는 예감을 느꼈다. 흙벽 이 무너져서 얼기설기한 수수깡이 드러나 있는 낮은 위치의 구멍을 발견하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바로 맞은편 벽에 기대앉아 소나무 껍질을 깎고 있는 만수의 큰형이 보였다. 그는 가끔씩 열중한 작업의 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히쭉 웃음을 지었다. 내가 어째서 여태껏 그쪽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을까. 저고리 소매를 걷어붙인 아낙네가 방금 피우기 시작한 풍로의 숯불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여선생님처럼 곱살하던 만수 큰형수의 턱은 옛날보다 더욱 가름해 보였고, 퀭한 눈가에는 짙푸른 주름살이 늘어져 있었다. 헛간을 가로지른 대들보를 받친 기둥에 한사람이 붙어서 있었으며, 그의 옆얼굴만 보였으나 광대뼈가 두드러진 오십줄의 사내로 보였다. 그는 구겨졌지만 새하얀 와이셔츠에 줄이 선 바지를 입고 있었다. 사내는 머리 뒤통수를 기둥에 꼭 붙이고서 타오르는 남폿불을 향하여 얼굴을 고정시킨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만수의 형수는 숯불이 달아오르기 시작하자 이
마에 솟은 땀을 씻으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녀가 불 가운데 인두를 깊숙이 꽂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숯으로 검어진 자기 손을 득의양양하게 사내의 바짓가랑이에다 닦아냈다. 만수네 형수는 엽연초를 손바닥으로 비비고 나서 한대 말아 천천히 즐기듯 피웠다. 한눈에 들어온 헛간 속의 이러한 광경은 첫닭이 울기 전에 초혼제를 지내는 상가의 음산한 정적을 생각나게 했다.
“물어볼 말이 있는데…….”
묶인 사내의 맥없고 흐릿한 발음이 오래된 늪의 수면 위로 솟는 물방울처럼,
“나를 죽일 셈이오?”
하고 목구멍으로부터 떠올라왔다. 만수는 무릎에 얹었던 다리를 내렸을 뿐,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우린, 당한 것 이상으로 해치고 싶진 않다구. 똑같이 해주면 돼.”
사내는 기둥에 붙인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으며 거의 체념한 눈으로 상대편을 바라보았다.
“한 목숨으론 모자라다고 생각해.”
하면서 만수는 덧붙였다.
“너는 내 꾀임에 속은 거야.”
사내가 말했다.
“알고 있었소.”
만수네 큰형수가 손끝에까지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긴 호흡으로 빨아치우면서 억양없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주인 손톱이 몇개나 남아 있나 봐둬. 우물을 잊지 말부……”
광인은 그의 아내가 자길 손가락질하자, 히쭉 웃으며 무의미하게 반복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사람은 소나무 껍질로, 푸닥거리할 때 버리는 제웅 같은 막연한 형상을 깎고 있었다. 그는 머리 위에 그것을 쳐들고 잘되었는가를 살펴보곤 했다. 광인은 재빠르게 중얼거리며 스스로 감탄을 했다.
“좋다, 좋다.”
만수가 조금 더 크고 호흡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창고에 갇힌 사람은 몇 명이었지?”
사내는 자기의 생각에 빠져버린 듯했고 만수네 형수가 침착하게 말했다,
“우물에서 스믈하나를 건졌어. 거기 우리 식구들은 없었어.”
형수는 말의 끝마디를 내던지며 시내를 홱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발딱 일어서서 발작적으로 사내의 와이셔츠 깃을 잡아 찢어내렸다. 사내의 살집 좋은 어깨가 불빛에 탐스럽게 드러났다. 그것은 조련사가 맹수의 성깔을 길들이기 위해 던진 식욕을 돋우는 먹이처럼 보였다. 사내는 자기의 드러난 어깨 쪽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약간 동요하는 빛을 보였다.
“아시겠지만, 나는 여길 떠나서 오랜 동안 타관에서…‥”
만수가 사내의 말귀를 가로챘다.
“기다리구 있었어. 줄곧!”
“이젠…… 시원합니다.”
사내는 밤 공기가 싸늘했는데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털을 어깨에 문질러 올렸다. 만수는 일어서서 사내의 주위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말해. 창고에 몇사람 있었느냐니까.”
“나는 전혀 몰랐습니다. 군인들이 했어요.”
만수의 형수가 말했다.
“당신이 명단을 적어준 걸 모두 알고 있어.”
“스물넷 중에 미친 사람은 먼저 나갔습니다.”
“시체가 없는 두 사람은?”
만수는 고개를 떨군 사내의 턱을 손바닥으로 받쳐들고 위아래로 몇번 흔들었다.
“당신네 형은 내보냈습니다.”
사내는 헐떡이며 침을 삼켰다.
“두 사람은 어떻게 됐어?”
묶인 사람은 만수의 손바닥으로부터 턱을 돌려 빼내어 간신히 상대방의 시선을 피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분들은…….”
사내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살했습니다.”
사내는 다시 어깨 위에 얼굴을 비볐다.
“영감님이 먼저였습니다.”
“네가 취조했지? 형수는 알고 있어.”
“나는…… 서류를 꾸미기만 했습니다.”
만수네 큰형수가 사내의 머리털을 잡아 뒤로 젖혔다. 그녀는 공포에 질리기보다는 회한에 떠는 사내의 얼굴 위에 타는 듯한 시선을 쏟았다.
“당신은 앙심을 먹구 있었지. 시절을 만나니까 하느님이라도 된 것 같았어.”
만수가 자기 일에 집중한 미친 사람을 끌어 일으켰다. 미친 사람은 고개를 흔들고 자기의 장난감을 내던지며 놓여난 두 다리로 헤갈을 쳤다.
“싫어, 싫어, 싫어.”
“알지? 네 손톱 여덟 개가 필요해. 또 있어.”
만수는 거칠 게 자기 형을 돌려세우고 저고리를 말아올렸다.
“등을 봐. 생각날 거야.”
사내가 여자에게 잡힌 자기 머리를 빼내어 외면하려고 애썼다. 여자는 오물을 던지듯 그의 머리털을 탁 놓아줬다.
“나는 사실…… 동네 사람들을 만나뵈러 온 겁니다.”
사내가 숨을 가라앉히면서 말했다.
“지긋지긋해서요.”
만수는 자기 형을 사내 앞에 세우고 한동안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미친 사람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면서 말했다.
“바보야, 정신 좀 차려. 앞에 와 있잖아.”
“싫어, 싫어, 싫어.”
라고 미친 사람은 붙들린 자기를 놓아달라고 발을 굴렀다. 만수는 갑자기 자기의 형을 밀어던졌고, 광인은 땅바닥에 넘어졌다가 일어나더니 헛간 구석 쪽으로 기어가서 훌쩍거리며 투정하기 시작했다. 만수가 이를 악물고 씹어뱉듯 말했다.
“둘 다 죽여버릴 테다.”
아낙네는 흐트러진 머리를 좌우로 쓸어올리고 나서, 그의 주인 앞에 다가가 다정하게 뭐라고 달래주고 있었다. 만수가 풍로에서 인두를 잡아뽑았다.
“너는 내 손에 달렸어.”
만수는 팔을 소매 안으로 넣어 옷자락으로 인두 자루를 잡고 눈앞에 쳐들었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쇠 위에 침을 몇번 뱉어보았다.
“끝장이 났지. 너두 이제 지쳐빠질 거야.”
사내는 고개를 돌린 채 가슴을 벌떡거리고 있었다. 그는 자제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자기가 당하는 보복과 맞서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 미친 듯한 처형에 희생되어 보상을 받고자 하는 각오를 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나 같은 경우라면 처참한 고문 앞에 완전히 굴복해서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 보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사내가 어떤 신념을 갖고서 능히 가해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 태도는 때에 따른 하나의 능숙한 기능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나는 구멍에서 눈을 뗐다. 밤 하늘에 총총한 별들이 보였고 꼬리를 길게 끌며 하늘 위로 별똥이 지나갔다. 쥐덫에 갇혀 불타는 쥐새끼가 방면되자마자 춤추는 불이 뒤어 밭고랑을 헤매는 때, 그것은 작은 이빨에 젖은 눈을 가진 들쥐라기보다는 유쾌한 불꽃이었다. 나는 뇌리 속에 솟아나는 검은 얼굴을 환각으로 보는 듯했다. 내 얼굴을 더듬었다. 목 위에서 그것은 분명히 만져졌다. 그래, 그것은 내 얼굴도 끼여 있던 네 사람의 웃는 모습이란 걸 알았다. 나는 그때 두 손에 열 가락의 형틀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 나는 불면의 밤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전장에다 내가 두고 온 것은 몇개의 타락한 증오였는지도 모른다. 누구든지 거기서 싸웠던 전우라면 열대성 말라리아라든가 우리를 저격하는 게릴라, 또는 비협조적인 주민들을 인류의 적으로 미워해본 기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적들을 사살한 것은 상대적인 것이었고, 그것은 전장의 엄연한 율(律)이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용기와 전쟁의 허무를 가늠하면서 적을 쏘았다. 그러나…… 그 외에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열기와 서걱서걱한 모래바람이 가득 찬 백색의 하늘. 따가운 볕이 내리쬐는 소리가 바싹 마른 땅 위에서 들려왔다. 하늘에서 두런대는 외국말 방송. 전단이 뿌려진 불귀순 지역은 괴괴했다. 유령과 같은 대낮의 눈부신 땡볕만이 마을의 공터에 타는 듯이 내리쪼였다. 마을을 비우고 나오라는 내용의 방송은 외국어여서 마치 공휴일에 먼 골목에서 떠드는 약장수의 메가폰 소리처럼 들렸다. 처음에 우리는 저항을 받았던 것 같다. 군용판초에 둘둘 싼 동료의 시체가 몇구 보였던 것으로 기억되니까 말이다. 맨 처음에 계집아이의 뭉뚱그려진 그림자가 하나 공터에 나타났다. 그 아이는 타박타박 오랫동안 걸어왔다. 잠시 후에 간격을 두고 여자들, 뒤이어 마을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차에 실려서 난민수용소를 향하여 후송되였다. 우리는 조를 지어 침착하게 마을로 진입했다. 수색하면서 오후를 보냈다.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은 얼굴에 부딪치던 대지의 열기와, 자신의 가쁜 호흡소리와 두 달 동안 입어서 피고름의 상처에서나 살이 썩어 문드러질 때 풍기는 듯한 정글복의 쉬어터진 냄새이다. 감각적인 것 외에는 그때의 의식을 지금 되살려본다 한들 믿을 수가 없다. 햇
볕 속을 꿰뚫고 청명한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던 것이 생각난다. 내 수색구역의 백토로 지은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텅 빈 공간에서 파리가 잉잉거리며 날아다녔다. 둬꼍으로 가서 마당 한가운데 펼쳐진 짚멍석을 들쳤다. 두 개의 독이 묻혀 있었고, 그 안에 누가 있었더라…… 마른 나뭇가지 같은 늙은이의 손이 한데 모아져 비벼대면서 내 발부리 앞으로 솟았다. 내가 알고 있는 몇마디 말을 동원해서 빨리 나오라고 재촉했던 것 같다. 노인은 한없이 빌고만 있었다. 또 다른 독 속에는 발가벗은 아기를 품안에 감춘 비쩍 마른 소년이 있었
던 것 같다. 그 아이는 구부려 세운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아기의 입을 막은 채 소리를 죽여 울고 있었다. 나는 나오라고 또다시 재촉했다. 속눈썹 속으로 아리게 스며드는 땀방울, 말라붙은 혀, 멈춰선 사람에게 짓궂게 날아붙은 파리들, 아기의 입을 막고 고개를 묻은 소년의 흔들리는 어깨. 나는 기다랗게 혼잣말로 쌍욕을 지껄이고 있었다. 쇠끝에 손가락을 걸고 힘을 주었을 뿐이다. 두개골 속의 몽롱한 뇌수를 뒤흔들며 들려오기 시작한 연발 사격의 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내 군화 발끝은 한줌도 안되는 흙을 자꾸만 독 안에 차 던졌고, 그러곤 뒷걸음질쳐 숲 그늘 속으로 신선한 바람을 찾아 달리지 않았던가. 나는 의식의 마비를 체험했다. 내 골통은 화산암과 같이 최대한으로 연소되어 구멍 이 숭숭 뚫려 있었다. 누군가 그때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고속도 촬영을 했다면, 그래서 내가 스스로의 완만한 동작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면 내가 만났던 최악의 피로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죄과란 하늘에 대해서이지만 하늘은 저러한 피로를 구제하실 선택을 받고 계신 것이므로, 나는 신에게서 아직은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속하지 않는 우리들끼리의 타락을 나는 어찌할 것인가. 우리 네 사람의 숨이 넘어가는 듯한 웃음소리.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잘 닫기지 않은 베니어판의 문짝이 덜컹거리머 문틀을 때렀다. 함석 슬레이트 지붕 위에 쏟아지는 빗소리, 번개치논 소리, 뒤죽박죽이 된 의자와 목침대들, 그 조그만 사내는 침대 밑을 헐레벌떡 기어나가고 있었다. 한사람이 기다란 빗자루 끝으로 사내의 궁둥이를 찔러댔다. 맞은편에선 또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반대쪽으로 몰았다. 우리는 탄이라는 포로를 침대 밑으로부터 끄집어내어 여러가지 방법으로 놀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 녀석의 머리 위에 깡통에 반쯤 남았던 맥주를 뿌려줬다. 탄은 포로심문병들이 제일 미워하던 녀석이었다. 놈의 도전적인 눈초리와 가끔 식사를 거부한다거나, 담배를 주면 발 아래 짓뭉개버리는 오만함으로 해서 모두들 그 녀석을 벼르고 있었다. 나도 베푸는 자가 당하는 그런 창피를 탄에게서 받은 적이 있었다. 첫날 그는 다른 정규군포로들과 함께 잡혀 들어왔는데, 쌍통이 엉망진창으로 터져 있었다. 놈은 전기 신관을 이용해서 작전차량을 폭파하곤 했으며, 일주일 동안에 네 번이나 터뜨려서 두 번쯤 크게 피를 보였던 것이다. 보병 잠복조들은 아군의 피를 보고 나서 이를 갈고 있었다. 탄은 발견된 폭약의 전깃줄 때문에 붙들렸다. 아군의 분풀이를 당하느라고 형편없이 터진 놈을 나는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치료를 받고 나서 호송해 데려오다가 나는 탄에게 오렌지 소다수를 한캔 사서 권했다. 놈은 그것을 받았다. 그는 나를 관찰하면서 천천히 깡통을 거꾸로 돌렸다. 소다수는 모래땅 위에 줄줄 쏟아져버렸던 것이다. 물론 화가 치민 나는 놈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한대 질러줬다. 언젠가는 미군의 고급 장성이 포로들을 방문하러 올 때 모두들 기립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수용소의 초소에서 근무하면서 때때로 그의 차갑고 긴장된 눈과 마주칠 때마다 갑자기 외로워졌었다. 그가 나를 미워한다는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생존의 이유, 그가 받드는 가치, 그가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나는 체질적인 저항감을 느꼈다. 우리는 그를 압박하기로 은연중에 약속했던 것이다. 그가 자기 자유를 내세워 주장하는 한, 우리들도 우리의 권능을 행사해야만 되었기 때문이다. 탄은 지방 게릴라였고, 직업은 중학교 교원이며, 두 아이와 스물다섯살난 처를 거느린 가장이었고, 교육받은 자로 포로 인적사항에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타이프라이터로 찍혀진 한장의 종이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따위 종이를 몇초 동안에 꾸겨 던져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 그는 검은 파자마를 입은 작달막한 포로일 뿐이었다. 그날, 밤새껏 몬순이 퍼부었다. 날씨가 험악한 때에는 차갑게 해둔 맥주를 마시면서 지내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훨씬 좋았다. 비번이었던 우리는 늦게까지 마시고 나서 만취해버렸고 근무하는 동료들 외에는 모두들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탄이란 새낄 골탕먹이자. 그래 꺼내와라, 꺼내와, 우리는 탄을 심문실에 끌어다놓았다. 네 사람은 차례로 놈을 골탕먹이기 시작했다.
우선 그 녀석이 위축되도록 헝겊으로 두 눈을 가렸다. 침대 아래 쥐잡기부터 비행기태우기, 원산폭격, 한강철교, 한사람씩 제안할 때마다 방법이 가혹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가 실수를 하면 약간의 매를 때려줬다. 우리는 웃었다. 자꾸만 웃었다. 주위가 너무 조용해서 크게 웃지 못하는, 참는 웃음이었다. 우리는 웃으면서 땀을 뻘뻘 흘렸다. 드디어는 놈의 그것을 꺼내어 자기 손에 쥐게 하고 수음을 시켰다. 탄은 울었던 것 같다. 확실히 탄이란 녀석 혼찌검이 나서 눈물을 흘렸다. “더러운 자식!” 맥주를 그의 얼굴에 뿌리던 한사람이 담뱃불을 슬며시 놈의 그곳에 갖다댔을 때, 기다란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탄의 목소리가 아니라, 담배를 쥐고 있던 동료의 목소리였다. 탄의 이빨은 동료의 손등을 피가 배어나도록 힘껏 물고 있었다.
“놔, 놓으란 말야.”
다른 사람이 떼어놓으려고 탄의 볼따구니를 여러차례 쳤지만, 놈은 이를 악물고 놓지 않았다. 손을 잡힌 자는 왼발을 뒤로 쳐들었다가 놈의 아랫배를 공처럼 내차기 시작했다. 여러차례 만에 길게 내뿜는 숨소리가 나면서 탄의 몸이 옆으로 처졌다. 그는 눈을 홉뜨고 흰동공을 보이며 고개를 뒤로 떨구었다. 깊숙이 찢어져 피에 젖은 손을 간신히 빼낸 동료가 탄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자식, 죽은 척하는데.”
라고 말하면서 그는 축 늘어진 탄을 밀어던지고 뒤로 물러났다. 얼굴을 마루에 처박은 탄의 일그러진 입속에서 끈적한 타액과 피가 흘러나왔다.
“정말 죽어버렸잖나?”
“다시 살려낼 수 없을까?”
우리는 그제야 당황했다. 땅에 태질을 친 개구리의 배 위에 풀잎을 열십자로 얹고 침을 뱉으면 되살아나듯, 우리는 장난질 뒤에 그가 소생하기를 바랐다. 그는 몸을 오그린 채 굳어져 있었다. 네 사람의 연대감은 ―그 순간부터 산산이 와해되었다. 유희 이상으로 적을 대접하기에는 놈에 대한 분노가 너무 커서 가해하는 것이 자릿자릿한 기쁨이었으나, 그가 덧없이 죽어버렸을 때, 우리 마음에 통쾌함은 솟구치지 않았다. 한사람이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들고 우리의 이러한 실수를 상부에 보고하는 동안, 나는 내가 매끈한 광물질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닌가 생각했다. 날이 밝자 네 사람은 시말서를 쓰고 두 주일 동안 영창에 갇힌 뒤 작전현장으로 내쫓기었던 것이다. 나는 누에가 허물을 벗듯 군복을 벗으며, 이러한 나의 정체 모를 시간을 떼쳐버린 줄로 알았다.
이빨 사이로 흘러나온 단절된 신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구멍 속에서는 만수가 이 피할 수 없는 먹이를 노리면서 인두를 쳐들고 있었다.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뜨려 남포 불빛 밑의 표정 없던 탈을 벗어났다. 사내의 의식은 지리멸렬되고 만수의 팔놀림과 함께 수많은 끈 아래 움직이는 인형처럼 그의 어깨와 근육이 춤을 추었다. 불빛에 번들거리는 땀과 눈물이 만수와 묶여 있는 자의 몸과 얼굴에 번졌다.
“그를 죽이지 말아.”
만수의 형수가 달려들어 그의 손으로부터 인두를 뻬앗았다. 사내는 이미 기진맥진해서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만수는 휘청거리며 통나무 위에 걸터앉았다. 그는 검게 변색되어가는 인두를 발 아래 내동댕이쳤다.
“더 이 상은 필요없어 .”
하면서 여자는 축 늘어진 사내의 몸에 침을 뱉었다.
“그냥 내버려둬두 될 것 같아.”
“두려워하지 말아요, 형수.”
만수는 두 손아귀에 머리를 틀어쥐고 말했다. 그 여자는 매정스럽게 대꾸했다.
“괜히 홀가분하게 해줄 필요가 어딨어?”
달이 들판 건너 산 위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구름이 잠깐씩 달을 가릴 때마다 나무들의 윤곽이 또렷해졌다가 명암과 거리감이 흐려지면서 검은 그늘로 변해버리곤 했다.
나는 캄캄하게 불꺼진 대도시의 한길 가운데 서 있는 듯했다. 가로의 집들은 텅텅 비어 있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온다. 나는 모든 시민이 어디론가 가버린 도시의 중심가를 헤매고 있다. 뒤에서 누군가 쫓아온다. 그것은 처음엔 낯선 사람의 거믓한 형상으로만 보이다가 거울 속에서 익은 자신의 얼굴이 된다. 나는 그를 피해서 헐떡거리며 뛴다. 드디어 느릿느릿 움직여가고 있는 사람들의 행렬을 발견하고선 나를 함께 데려가달라고 목이 터지게 외친다. 사람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을뿐더러 아는 착도 하지 않는다.
마을의 지붕과 논밭 위로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고, 헛간 안의 모습은 흔들림 없는 그림이 되어 안개 속으로 잦아들어갔다. 영사막에 비추인 채 장면이 영원히 바뀌지 않는 환등사진같이 온갖 것이 멈추었다. 그들의 손짓, 눈짓, 목소리는 순식간에 과거의 흐름 속으로 가라앉아 종래에는 식은 재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이미 동쪽 하늘 주위에 희끄무레한 얼룩이 번져 새벽의 전조가 보였다. 새벽의 박명 속을 나는 뛰었다. 뒤를 자꾸만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저 미친 사람과 사내와 만수가 내 뒤를 악착같이 따라오지나 않을까 하는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나는 요새도 가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마치 전생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진다. 개가 된 내가 바위이었던 시절을 되돌이켜 이제는 사람이 되어 희미하게 눈치라도 채듯이 말이다.
〔월간문학 1970. 6;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 동서문화원 1975〕
2016년 7월 12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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