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
최장순
밤 열 시, 일단 눕고 본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지만 웬걸, 머릿속이 끓는다. 생각을 말끔히 해소하지 못한 탓일까. 그러나 냉큼 잠들지 못하는 그 짧은 시간이 고마울 때가 있다. 뒤척임이 반짝 생각을 일으켜 세우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희열인 횡재인가. 산책하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운전 중에 스쳐 지나가듯 떠오르는 생각처럼 말이다. 왜 이런 순간에 창조의 씨앗은 발아되는가. 하지만 순간적인 것은 휘발성이 강하다. 잠자리를 박찬다. 망각이 거두어가기 전에 잡아두어야 한다. 자투리 발상이 주제가 되어 한 편의 글이 만들어질 때, 그 기분은 마치 잘 숙성된 포도주처럼 짙다. 강제로 짜내지 않은 오묘함, 뒷맛조차 개운하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까무룩, 하루가 숙면에 들 때는 어림도 없다.
자투리 시간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사무적이고 기계적으로 일하는 뇌와 달리, 쉴 때 작동하는 뇌는 자유로운 영혼이 활성화된다. 의외성이 큰일을 해낸다.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상상력이 힘이 된다. 괴질 코로나19 검사를 ‘드라이브 스루’로 하는 것도 책상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랜 현장경험에서 비롯된 발상이다. 잠깐 잠깐의 골똘함이 만든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창조적 영감이 영혼의 대장간으로 찾아오도록 정신의 자투리도 남겨둘 수밖에. ‘뭘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시간, 무엇을 하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시간, 무엇을 한다고 그리 티가 나지 않는 시간’으로 치부할 수 없다.
자투리땅이 살아난다. 그곳은 더 이상 도시 미관을 해치는 볼품없는 땅이 아니다. 집도 사람도 포화상태인 도심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곳.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에 협소주택을 짓고 꽃과 나무를 심어 쉼터를 만든다. 도시농업으로 사막 같은 회색에 푸른 활력을 불어넣어 새와 벌과 나비를 불러들인다. “이렇게도 쓸 수 있었어?” 모양과 크기도 가지각색이지만 결핍에서 오는 상상력이 아름다운 집을 만들어낸다. 도시의 규격화에 지친 사람들은 자투리땅의 가치를 안다.
자투리 천,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조각보다. 일부러 천을 조각냈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은, 작은 것이라도 아끼고 싶은 마음이 모여 애틋하게 만들어낸 것이다. 비정형의 절묘한 미학이다. 버려질 불안정한 조각들이 섬세한 손놀림을 거쳐 사각의 안정감을 되찾는다. 여인들의 소박한 염원이 담긴 시간과 정성의 창조물이다. 등잔불 아래서 자투리 천들을 이어 붙이며 일상의 고단함과 찢긴 감정을 짜깁기했을 어머니. 바느질 솜씨가 알려졌는지 간혹 주문을 받아 조각보나 베갯모, 수를 놓은 베갯잇을 만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얼굴이 밝아지셨는데 아마도 노동에 곁들인 재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기다림의 밥상에는 어김없이 조각보가 덥혀 있었다. 이젠 손때 묻은 유물이 되어 안방 창 한편의 가리개로 쓰이고 있다.
자투리 시간, 자투리땅, 자투리 천. 가치 없어 보이는 낮춤의 의미가 배어있다. 아마도 ‘통째’나 ‘알짜’와 비교하기 때문일 것 같다. 그러나 자투리는 예쁘면서도 호감이 가는 순수 우리말이다. 숨 쉴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이다. 세모나 반 동그라미나 마름모꼴이나 다각형인 그것은 사각형처럼 규격화되지 않아 기발한 창조성을 자극한다. 자투리는 모든 일상의 시공간에 존재한다. 장소 불문, 죽은 듯 버려진 듯 있다가도 살아난다. 자투리의 반짝이는 발상이 없는 철학자나 과학자나 예술가를 떠올릴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자투리 시간의 성스러운 노동행위로 만들어진 귀한 존재들이다. 자투리 취급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쓸모없다 내팽개친 끄트머리에서 허우적거린 적은 없었는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네모반듯해 보이는 사람이 부럽지 않다. 빈틈없음이 숨 막히게 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눈이 바뀌었다. 허술한 구석이 있는 사람, 속을 드러내도 좋을 사람, 자투리나 끄트머리처럼 보이는 사람이 호감이 간다. 세상에 버려져야 할 자투리란 없다. 자투리가 곧 알짜다. 그것을 발견해내는 상상력만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