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60-80대의사랑과 추억 원문보기 글쓴이: 빛과소금
오늘~ 8/13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독립기념일 (1960년)
----------------------------------------------------------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 백범 김구, [나의 소원]
--------------------
2009 - 순수 국내기술 쇄빙선 '아라온' 첫 출항
한진重 건조..연구능력 세계 최고 수준
한진중공업이 순수 국산기술로 건조한 극지전용 쇄빙선 '아라온'호가 첫 출항에 나섰다.
한진중공업(097230)은 남북 극지 탐사를 수행하게 될 대한민국 첫 쇄빙연구선 '아라온'호가 해상시운전을 위해 영도조선소에서 출항했다고 13일 밝혔다.
아라온호의 운항능력을 처음으로 점검하게 될 이날 시운전에는 아라온호 건조사업을 주관하고 있는 국토해양부 및 극지연구소, 해양수산기술진흥원 관계자와 한진중공업 기술진 등이 승선했다.
'아라온'호는 총 톤수 6950톤급으로 길이 110m, 폭 19m, 최고 속도 16노트(시속 약30km)의 최첨단 연구선박이다. 60여종의 첨단 연구장비와 헬기 및 승조원 25명과 연구원 60명을 태우고 1m의 얼음을 시속 3노트 속도로 쇄빙하면서 70일동안 2만 해리 연속 항해가 가능하다.
순수 국내기술로 건조되는 '아라온'호는 크기 면에서 타국 쇄빙선에 비해 큰 편이 아니다. 하지만 극지 연구 전용인데다 60여가지 첨단 연구장비와 최신 설비를 갖추고 있어 연구능력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다.
아라온호는 수주간 운항능력을 점검한 뒤 오는 9월말경 극지연구소에 인도돼 내년부터 본격적인 남·북극 탐사 및 연구, 보급활동에 나설 예정이다.
이데일리 정재웅기자 /조선닷컴 2009.08.13 15:56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13/2009081301943.html
한진重, 첫 국적쇄빙선 '아라온' 출항
13일 해상시운전 위해...9월 극지연구소에 인도
남북 극지 탐사를 수행하게 될 국내 첫 쇄빙연구선 ‘아라온’호가 해상시운전을 위해 13일 오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출항했다.
이날 시운전에는 건조사업을 주관하고 있는 국토해양부 및 극지연구소, 해양수산기술진흥원 관계자와 한진중공업 기술진 등이 승선했다.
전 세계 모든 바다를 누비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아라온호는 총 톤수 6950t급으로 길이 110m, 폭 19m, 최고 속도 16노트(시속 약30km)의 최첨단 연구선박이다. 60여종의 첨단 연구장비와 헬기 및 승조원 25명과 연구원 60명을 태우고 1m의 얼음을 시속 3노트 속도로 쇄빙하면서 70일 동안 2만 해리 연속 항해가 가능하다.
순수 국내기술로 건조된 아라온호는 ‘하늘의 나로호’, ‘지상의 KSTAR(차세대 초전도 핵융합실험장치)’와 함께 대한민국의 3대 거대과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라온호를 통해 한국은 극지연구에 대한 독자적 기반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미래 극지개척의 새로운 장을 열 것으로 기대되는 한편 우리나라가 극지 연구국으로서의 위상도 크게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해외 전문가들의 관심도 뜨겁다고 회사측은 분위기를 전했다. 크기 면에서 타국 쇄빙선에 비해 큰 편이 아니지만 극지 연구 전용인데다 첨단 연구장비와 최신 설비를 갖추고 있어 연구능력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 이 때문에 벌써부터 극지 연구 선진국들이 아라온호와 공동협력을 제안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진중공업측은 “첫 국적 쇄빙연구선을 성공적으로 건조함으로써 우리의 조선기술력을 다시 한 번 세계에 과시하게 됐다”면서 “국가 위상 제고뿐만 아니라 첨단선박 건조기술 확보로 고부가가치선 건조능력을 배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아라온호는 수주간 운항능력을 점검한 뒤 오는 9월말경 극지연구소에 인도돼 내년부터 본격적인 남·북극 탐사 및 연구, 보급활동에 나서게 될 예정이다.
채명석 기자 oricms@asiae.co.kr" target=_blank>oricms@asiae.co.kr /아시아경제 2009.08.13 15:11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09081315085386119
2009 - 북한, 현대아산 근로자 유성진씨 석방
136일 동안 북한에 억류돼 있던 현대아산 근로자 유성진 씨가 8월 13일 오후 풀려나 남측으로 돌아왔다.
개성공단에서 숙소 관리 업무를 하던 유씨는 3월 30일 오전 개성공단 현지에서 북측 당국자들에 의해 체포됐다. 북측은 “유 씨가 북한 체제를 악의에 차서 헐뜯으면서 공화국의 자주권을 침해하고 해당 법에 저촉되는 엄중한 행위를 감행했다”고 발표했었다. 그 뒤로 북측은 남북 당국 간 접촉에서도 유 씨가 어디서 어떤 상태로 지내고 있는지 밝히지 않았고 우리 측의 접견요구도 거부해왔다.
북측은 자기 측 출입국사업부에서 추방 형식으로 유 씨를 남측에 인계했으며 유 씨는 이날 밤 9시12분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해 간단한 소감만 말하고 서울로 떠났다.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ptk@donga.com /동아사이언스TV 2010-08-13 09:18:14
http://etv.donga.com/view.php?code=&idxno=
201008130035590&category=002013&page=1
2006 - 제27회 국제원예학대회(IHC 2006) 개최 (13~19일)
한국농업근현대화 100년 사업의 일환으로 국제원예학회와 (사)한국원예학회가 주최하는 "제27회 국제원예학대회(International Horticultural Congress IHC 2006)"가 8월 13일(일)~19일(토) 서울 코엑스 컨벤션센터에서 개최한다.
국제원예학대회는 매 4년마다 원예 산업 선진국을 순회하며 열리는 세계 원예 올림픽이며, 이번 대회에는 110개국 2천 여명의 원예분야 연구자 및 관련 종사들이 참가할 예정이다.
금번 제27회 학술대회는 ‘지구촌 원예 - 다양성과 조화’를 슬로건으로 다양한 원예작물에 대한 활용기술과 환경 보존기술이 조화롭게 양립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금번 대회기간 중에는 농림부가 주최하는 2006 서울국제원예전시회가 8월 15일(화)부터 18일(금)까지 동일 장소에서 열려 학술대회의 효과가 배가될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나라는 1995년에 금번 대회의 서울 개최를 국제원예학회에 신청하였으며, 1998년에 열린 제25회 국제원예학대회 총회에서 서울 개최를 확정한 바 있다.
자료문의 :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 강경희 연구관 031)240-3554
박진선 /농촌진흥청 2006-08-12
http://www.rda.go.kr/user.tdf?a=user.board.BoardApp&c=2002&board_id=rda_issue&seq=859
<지상중계> ‘2006 서울국제원예전시회’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2006 서울국제원예전시회’가 지난 15~18일 4일간 서울 삼성동 코엑스(COEX) 1층 태평양홀에서 개최됐다.
농림부 주최 (사)한국원예학회와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 주관으로 한국농업 근현대화 100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이번 전시회에는 세계 20개국 168개 업체가 참가해 각종 원예 관련 신기술과 자재, 신품종들을 선보였다.
전시회는 세계 원예기술을 엿볼 수 있는 ‘세계관’과 국내 원예 기술의 발전상을 전시한 ‘국가관’, ‘업체관’, ‘교양·취미관’으로 나눠져 농진청과 각 지자체 및 국내·외 원예 산업체에서 개발한 최첨단 원예기술과 농특산물 등이 전시됐다.
이중 미국, 네덜란드, 이스라엘 등 20개국 28개 업체가 참여한 세계관은 세계 유명 기업에서 생산되는 원예제품과 국내 제품간의 품질을 비교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해 국내외 원예산업을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일반 관람객을 위한 볼거리와 체험행사도 다양하게 마련돼 ‘도시민 생활원예 콘테스트’, ‘수박 예술조작 작품 만들기’, ‘김도향의 자연명상’, ‘압화 체험’, ‘김치만들기 및 와인시음’ 등이 행사기간 내내 펼쳐졌다.
오대민 농진청 원예연구소 박사는 “우리나라 농업 발전상을 세계 원예석학과 외국 업체들에게 알리는 기회뿐만 아니라 농업인에게는 발전된 원예기술의 경험을 통해 영농기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고, 일반인에게는 재미와 감동을 선사했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원예인들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제27회 국제원예학대회(IHC 2006)’가 코엑스 컨벤션센터에서 13~19일 개최됐다.
‘지구촌원예, 다양성과 조화’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국제원예학대회에는 전 세계 110개국 2000여명의 원예전문가들이 참석해 원예작물에 대한 활용기술과 환경 보존기술이 조화롭게 양립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가 됐다.
한편 이번 전시회장에는 ‘전자식 해충퇴치기’, ‘다이아몬드 숫돌’, ‘발 보호 깔창’ 등 국제규모의 행사와는 동떨어진 업체와 제품들까지 전시돼 보다 신중한 업체 선정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박유신 기자(yusinya@aflnews.co.kr" target=_blank>yusinya@aflnews.co.kr) /농수축산 신문 2006년 8월 21일
https://aflnews.co.kr/aflnews/news/news_contents.asp?news_code=2006082101108&c_code=0103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
리(왼쪽)가 2001년 8월13일
오후 야스쿠니 신사에서 참
배를 마친 뒤 제관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나오고 있다.
/조선
2001 - 일본 총리, 신사참배(2001)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2003년 오늘 야스쿠니 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정부 여당 간부들과 최종협의를 거친 뒤 애초에 공언했던 15일보다 이틀 앞서 이날 오후 4시 30분 신사참배를 강행했다.
현직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은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총리 이후 5년 만이다.
한국과 중국은 총리의 신사참배가 일제의 태평양전쟁이 주변국에 끼친 고통과 피해를 무시하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YTN
2001 -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2001년 8월 13일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당초의 방침이었던 `8월 15일 참배`를 이틀 앞당겨, 이날 오후 4시43분쯤 태평양전쟁 주모자인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도착, 참배를 마쳤다.
이날 야스쿠니 신사엔 수백명의 일반 참배객이 모여 일장기를 흔들며 환호성을 보냈고, "만세"를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이날 참배와 동시에 고이즈미 총리는 과거 침략을 반성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으나, 그동안 한국과 중국 등 국제사회가 참배를 강력히 반발하거나 비난해 왔다는 점에서 공허한 변명으로 비춰졌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는 1996년 7월 자기 생일에 참배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당시 총리 이후 5년 만의 일이다. 한국과 중국 정부는 각각 성명을 발표,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조선
2001 -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2001년 8월 13일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날 오후 4시43분쯤 태평양전쟁 주모자인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도착, 참배를 마쳤다.
참배와 동시에 고이즈미 총리는 과거 침략을 반성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으나, 그동안 한국과 중국 등 국제사회가 참배를 강력히 반발하거나 비난해 왔다는 점에서 공허한 변명으로 비춰졌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는 1996년 7월, 자기 생일에 참배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당시 총리 이후 5년 만의 일이였다. 한국과 중국 정부는 각각 성명을 발표,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ptk@donga.com /동아사이언스TV 2010-08-13 09:18:14
http://etv.donga.com/view.php?code=&idxno=
201008130035590&category=002013&page=1
1998 - 러시아, 정치인을 포함해 3명의 승무원을 실은 소유즈 우주왕복선이 카자흐공화국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성공적으로 발사
1996 - 한총련, 연세대 점거시위(1996)
1996년 오늘 한총련, 즉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제6차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강행한다.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은 이날 건국대와 고려대 등 서울시내 6개 대학에 모여 있다가 오후 7시쯤부터 각 학교를 빠져나와 연세대 진입을 시도했다.
학생들은 연세대 진입을 원천봉쇄하는 경찰에 맞서 돌과 화염병을 투척하며 밤늦게까지 거센 시위를 벌였다.
연세대 안에 있던 학생 3천여 명은 자정이 지나 노천극장에서 통일대축전 전야제와 개막식 행사를 열었다.
경찰은 병력 수천 명을 동원해 시위학생 검거와 해산작전에 들어가지만 학생들은 투항하지 않는다.
연세대 점거 시위 엿새째 경찰은 음식물 반입을 차단하는 압박작전을 펼친다.
8월 20일 경찰이 헬리콥터로 최루탄을 살포하고 2천여 명의 병력을 대학 건물에 투입하자 학생들이 결국 투항의사를 밝히면서 사태는 일단락된다.
한총련 사태로 5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4백60여 명이 구속됐다. /YTN
정석해 교수 /조선
1996 - 전 연세대 교수 정석해씨 별세
정석해 전 연세대교수가 1996년 8월 1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97세를 일기로 타계한 서산 정석해 선생은 격동의 우리 현대사를 직시하며 살다 간 20세기의 선비이자 참스승이었다.
1899년 평안북도 철산 태생인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문과재학 중 3·1운동이 터지자, 기독학생회장으로 학생시위를 주도하면서 이미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망명, 이어 프랑스와 독일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했다. 이 때에도 그는 언제나 태극기를 지니고 다닌 확고한 애국심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1940년 귀국해서도 일제의 탄압으로 연금-은거생활을 했던 선생은 광복이 되자 교육계에 투신, 연세대 철학과에서 후학을 길러내는 일에 전념했다.
4·19가 터졌을 때 학생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정권은 더 이상 존속할 이유가 없다며, 교수데모를 주동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선생은 5·16 이후에도 대일 굴욕외교를 정면으로 반대하다가 정치교수 1호로 꼽혀 줄곧 탄압과 감시에 시달리는 고초를 겪었다. 이 땅에 민주 국가 건설을 염원했던 선생은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등장한 1981년 미국으로 떠났다. /조선
1991 - 원로 한학자 김종무씨 별세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
은?`의 배용균 감독 /조선
1989 - 배용균 영화감독,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42회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 수상
1989 - 배용균 감독의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대상 수상
신예 배용균 감독이 제작ㆍ연출한 극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1989년 8월 13일 스위스에서 열린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금표범상을 수상, 한국 영화 70년 사상 처음으로 세계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는 쾌거를 기록했다.
11개국 18편이 본선에 오른 경쟁부문에서 `달마가...`는 대상을 비롯, 청년비평가상(2위), 기독교평론가상, 최우수작품상, 국제기자협회상(1위), 바크리상(2위) 등 특별상 4개부문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세계 8대 영화제의 하나로 꼽히는 로카르노 국제영화제는 1-2편을 연출한 신인영화감독들만을 대상으로 역량을 평가하는 전통깊은 세계무대 등용문이다.
1951년 대구 출생인 배용균 감독은 서울대 미대를 거쳐 프랑스 파리대 대학원에서 조형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후 대구 효성여대 서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었다. 파리유학시절부터 세계영화제에 진출, 그랑프리를 거머쥐겠다는 집념을 불태워 왔다는 그는 이번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8년의 정열을 쏟아부었다. /조선
1989 - 배용균 감독,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대상 수상
신예 배용균 감독이 제작ㆍ연출한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1989년 8월 13일 스위스에서 열린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금표범상을 수상, 한국 영화 70년 사상 처음으로 세계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는 쾌거를 기록했다.
세계 8대 영화제의 하나로 꼽히는 로카르노 국제영화제는 1-2편을 연출한 신인영화감독들만을 대상으로 역량을 평가하는 전통 깊은 세계무대 등용문이었다.
11개국 18편이 본선에 오른 경쟁부문에서 ‘달마가...’는 대상을 비롯, 청년비평가상(2위), 기독교평론가상, 최우수작품상, 국제기자협회상(1위), 바크리상(2위) 등 특별상 4개부문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ptk@donga.com /동아사이언스TV 2010-08-13 09:18:14
http://etv.donga.com/view.php?code=&idxno=
201008130035590&category=002013&page=1
1988 - 건설부, 1992년까지 16조3천억원을 투입, 택지 5천7백만평을 마련해 주택 2백만호를 건설한다고 발표
1986 -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 준비위원회 구성
1980 -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정계은퇴 발표
1980 -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정계은퇴 발표
1954년, 26세 최연소자로 3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근 30년간 정치 활동을 하던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1980년 8월 13일 총재직 사퇴와 동시에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 총재는 이날 서울 시내 무교동에 있는 그의 개인 사무실에서 “오늘의 정치상황에 처하여 야당 총재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사임 이유를 밝혔다.
김 총재는 자신의 정계 은퇴와 함께 이민우 부총재를 당 총재 직무 대행으로 지명했다.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ptk@donga.com /동아사이언스TV 2010-08-13 09:18:14
http://etv.donga.com/view.php?code=&idxno=
201008130035590&category=002013&page=1
1979 - 중국, 산아제한정책 발표
1978 - 베이루트 PLO본부 폭파
1978 - 이란 반정폭동 격화
1977 - 북괴, 리비아탁구팀 코치 김창제씨 납북기도
1977 - 영국 런던서 전후최대의 인종폭동
1969 -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중국 국경경비대와 소련군 기갑부대 격렬한 무력충돌
1965 - 1개사단 전투병력 월남파병 동의안 국회통과
1965 -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안 국회 통과(1965)
1965년 오늘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안이 국회에서 심의된다.
야당 의원은 한명도 참석하지 않은 채 여당인 공화당 소속 의원들만이 표결에 참여한다.
출석 의원 104명 가운데 101명이 찬성함으로써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안이 통과된다.
베트남 파병과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여온 야당 의원들은 모두 사퇴서를 내고 이날 표결에 참가하지 않았다.
전투부대 파병안의 국회 통과로 같은 해 10월 9일 청룡부대가, 11월 20일에는 맹호부대가 베트남에 도착한다.
이듬해 4월 16일 혜산진부대가, 8월 15일에는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함으로써 우리 나라는 미국 다음 가는 베트남 파병국이 된다. /YTN
군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베를
린 장벽이 세워지고 있다. /조선
1961 - 베를린장벽 철조망 설치(1961)
1961년 오늘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브란덴부르크문에 처음으로 철조망이 설치된다.
동서냉전의 상징이 된 이른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동독 정부가 서독으로 넘어가는 동독의 기술자와 지식인들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처음에 철조망만 설치됐지만 40여km에 이르는 콘크리트 장벽으로 바뀌고 고압선까지 얹었다.
자유를 찾아 이 장벽을 넘으려던 동독인 백명 이상이 목숨을 잃는다.
베를린 장벽은 설치된 지 28년 만인 1989년 11월 9일 붕괴돼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YTN
1961 - 베를린 장벽 설치
1949∼61년까지 250만명에 달하는 동독의 전문직·지식인들이 서독행을 택함으로써 동독의 경제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되어 동독 인민회의의 결정으로 1961년 오늘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한 장벽을 설치했다. 1989년 10월 동유럽의 민주화로 동독의 강경보수 지도부가 해체되면서 11월 9일 28년간 독일을 동서로 갈라놓았던 국경선인 장벽이 개방되었다. /KBS
1961 - 베를린 장벽 설치
1961년 8월13일, 막 잠에서 깬 서베를린 시민들은 눈앞에 펼쳐진 낯선 광경에 경악을 금치못했다. 밤새 동ㆍ서 베를린을 잇는 13개 도로와 80개 통로에 철조망이 쳐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입구마다 탱크와 장갑차가 배치돼 통행을 가로막고 있었다. 철조망 길이는 45km. 곧 150km로 늘어난 철책에는 전류가 흘렀고 콘크리트와 붉은 벽돌로 된 높이 2mㆍ폭 2m의 장벽은 동족간의 이동을 금지시켰다.
1949년 동독정권 수립이래 매년 20만명, 1961년까지 이미 250만명이 경계를 넘은 상황에서 동독정부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특히 전문직과 숙련노동자의 탈출이 심각해 자칫하면 고급 두뇌의 공백으로 동독의 기술ㆍ산업기반이 붕괴될 판이었다.
베를린을 자유도시로 하자는 소련측의 제안을 서방측이 거부하자 1961년 6월 흐루시초프는 "베를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긴장은 고조됐고 이로인해 서베를린으로의 탈출러시가 가속화됐다. 7월 한 달동안만 3만명이 고향을 등졌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28년간 동서대립의 상징이었고 독일인들을 갈라놓은 `벽(壁)`이었다. /조선
1961 -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다. /위키백과
베를린 장벽(-墻壁, Die Berliner Mauer)은 서베를린을 동베를린과 그밖의 동독으로부터 분리하는 장벽이다. 그래서 서베를린을 공산국가안의 유일한 자본주의 지역이라고 해서 '육지의 섬'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동독의 관리들은 이 장벽을 "antifaschistischer Schutzwall"(反 파시스트 보호벽)이라고 불렀다. 냉전의 상징이자 독일의 분단을 상징하여 왔다. 동독탈주자가 많아지자 이를 막으려고,1961년에 만들어진 이후, 점차 장벽은 보강되었으며, 1989년 11월 9일 자유 왕래가 허용된 이후 차례로 붕괴되었다. 일부는 아직 기념으로 남아 있다. /위키백과
[백승종의역설] 베를린장벽
1961년 8월13일, 동독 정권은 서베를린을 에워싼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후 독일의 분단과 미-소를 정점으로 한 냉전질서를 상징했다. 이후 서베를린은 “자유세계의 진열장”이 되었고,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쪽으로 가려다 동독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이가 200명가량 된다.
독일 현대사의 흉물이던 그 장벽의 수명은 길지 못했다. 1989년 11월9일 밤, 동·서독 시민 수만명이 장벽의 해체에 들어갔다. 당시 나는 독일 유학 중이었던 관계로 시시각각으로 전해진 이 사건 관련 보도를 접하며, 손에 땀을 쥐었다. 독일 통일의 주역 헬무트 콜 총리는 그 무렵의 하루하루를 “역사적인 날”이라 선포했다.
장벽이 사라지리란 징후는 그해 10월 말부터 나타났다. 서베를린의 발터 몸퍼 시장은 동베를린 공산당 간부들에게서 미리 언질을 받았다 한다. 하지만 장벽의 종말은 그의 예상보다 빨리 현실이 되었다. 운명의 날 11월9일 오전, 몸퍼는 <빌트 차이퉁>의 기자에게서 당일 중에 모종의 중대한 변화가 있으리라는 소식을 들었다. 과연 그 말대로 동독 당국은 자국민의 여행 자유화를 즉각적으로 시행했다. 환희에 젖은 시민들은 누구의 허락을 얻을 필요도 없이 역사의 흉물을 제거했다.
통독은 곧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동독에서는 많은 인권운동가들이 독재정권에 맞서 지속적으로 투쟁했고, 서독에선 빌리 브란트 총리 이후 좌파든 우파든 대다수 정치가들이 동독과의 화해 노선을 유지했다. 그러다 결정적인 시점이 되자 그들은 주변국과 강대국들을 설득했다. 영국, 프랑스 및 폴란드는 본래 독일 통일을 꺼렸지만, 결국 독일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흡수통합’은 독일 내부에 적잖은 후유증을 남겼고, 결과적으로 통일 방식에 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통일과 화해를 향한 지난날의 정책을 헐뜯는 사람은 거의 없다. 통일의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로서는 부러운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백승종 역사학자 /한겨레 2009-11-13 오후 06:32:5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87532.html
1960 - 윤보선 제4대 대통령 취임 (12일 당선, 13일 취임)
1960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독립
1960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프랑스로부터 독립
니이카타항을 출항하는 귀국 제1차
선의 모습. /조선
1959 - 북-일 '재일교포 북송 협정' 체결(1959)
1959년 오늘 북한과 일본의 적십자사 대표가 인도의 캘커타에서 '재일교포 북송 협정'에 서명한다.
북한이 재일동포 북송을 제안한 지 4년 만에 협정이 체결됐다.
일본은 폭발적인 인구증가와 재일교포 처리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터여서 북한의 제의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일본 정부는 거주지 선택의 자유라는 명분을 내세워 북송을 희망하는 모든 재일동포를 송환시키기로 결정한다.
우리 정부는 재일동포 북송반대 범국민시위와 외교적 활동을 펼쳤지만 소용없었다.
같은 해 12월 14일 재일교포 북송 제1진이 일본 니가타항을 떠난 이래 1967년까지 8만8천여 명의 재일교포가 북한으로 입국했다. /YTN
1959 - 일본 적십자사와 북한적십자사, 인도 캘커타에서 재일교포북송협정 체결
일본적십자사와 북한적십자사가 1959년 8월13일 인도 캘커타에서 만나 `재일교포북송협정`을 체결했다. 북송협정을 포기하면 `한일기본협정` `재일교포귀환협정` `평화선 철폐`등을 체결할 수 있다는 한국정부의 끈질긴 설득과 한국민의 북송반대 데모에도 불구, 일본은 북송방침을 고수했다.
다시 한국정부는 북송문제를 국제재판소에 회부하자고 주장했으나 일본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재일교포 북송은 자유송환으로 간주한다"는 미국 국무성의 발표도 한국정부에 불리하게 작용, 결국 12월14일 재일교포 1진 975명을 실은 북송선이 일본 니이가타항을 출발했다. 재일교포는 이후 모두 1백50여차례에 걸쳐 약 8만여명이 북한으로 건너갔다. /조선
1959 - 재일교포북송에 관한 협정 조인
1959년 8월 13일 북한과 일본 정부가 인도 캘커타에서 '재일교포북송에 관한 협정'에 정식 조인했다. 재일교포북송 문제가 처음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55년 2월이었다. 당시 북한은 6·25전쟁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이유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의 귀환을 추진하면서 귀환자들의 생활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입장을 대내외에 알렸다. 그 무렵 일본도 인구증가와 각종 사회·경제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모색하던 중이었으므로 양측의 이해관계는 서로 일치했고 협상은 급진전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재일교포북송 반대시위가 잇달았으며 외교 활동도 다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1958년 11월 17일 재일조선인귀국협력회가 결성되는 등 북송을 실현시키기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마침내 북한과 일본 정부 간에 협정이 조인되었고, 1959년 12월 14일 975명의 북송재일교포 제1진이 일본 니가타 항[新潟港]을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동(同) 협정의 만료시한인 1962년 11월 12일까지 7만 7,288명의 재일교포가 북송되었다. 이후 기한이 연장되어 북송이 계속 진행되었으나, 북송교포의 비참한 생활상이 알려지면서 그 수가 급감해 북송사업은 종결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브리태니커
제2대 지방의회 의원 선거 유세 장
면 /조선
1956 - 제2대 지방의회 의원 선거 실시
제3대 대통령선거가 끝난지 약 석달 뒤인 1956년 8월 13일 전국 437개 선거구에서 제2대 서울시의원-전국 도의원선거를 실시했다. 선거결과 정당별 당선자수는 자유당이 의원총수 437명의 57%인 249명으로 과반수를 넘었으며 민주당은 98명, 무소속 83명, 기타 7명이었다. 시·읍·면장과 시·읍·면의회 의원선거는 도의원선거보다 5일 앞선 8월 8일 실시되어 자유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번 제2대 도의원선거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3선당선 여세를 악용한 자유당의 방종과 관권개입으로 부정불법이 전국적으로 판을 쳤다. 곳곳에서 관권의 협박 때문에 야당후보들의 사퇴가 잇따르자 야당 국회의원들이 이에 항의,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자유당은 무더기 대리투표, 표바꿔치기 등의 불법 행위를 곳곳에서 저질렀다. 전북 정읍군 서성면에서는 투표함의 봉인을 뜯어내고 자유당후보표를 무더기로 집어넣는 광경을 투표함 호송경찰관 박재표 순경이 목격하고 8월 27일 동아일보 본사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폭로했으며 민주당 김의택 국회의원도 전남 함평군 선거에서 경찰이 투표함을 개표장으로 호송하는 도중 무더기 표바꿔치기를 했다고 폭로했다. /조선
1955 - 국내 최초로 성전환 수술
1953 - 소련 수소폭탄 실험
1952 - 근로기준법 국회 제출
1951 - 국민방위군사건 김윤근소장 등 사형 집행
1949 - 지방체신관서설치법(법률 47호) 공포
1948 - 한국-대만, 국교수립
영국의 소설가 겸 문명비
평가였던 허버트 조지 웰
스 /조선
1946 - 영국의 과학소설가, 문명비평가 웰스(Wells, H. G.) 사망
웰스 [Wells, H(erbert) G(eorge), 1866.9.21~1946.8.13]
1946 -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 사망
영국의 소설가 겸 문명비평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가 1946년 8월 13일 향년 80세로 사망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대학을 마친 웰스는 교사생활을 잠시 거쳐 문필활동에만 전념, 일생동안 10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처음에는 자연과학적인 넓은 교양과 상상력을 결합해 책을 저술했다. `타임머신`(1895)과 `투명인간`(1897) `우주전쟁`(1898) 등이 이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타임머신`에서는 퇴화하고 멸망한 인류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투명인간`은 남의 눈길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소외된 인간의 고독을 현실감있게 그렸다는 점에서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이후에는 `연애와 루이셤씨` 등처럼 풍자와 유머가 넘치는 소설을 썼다. 그는 역사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져 1920년 `세계사 대계`를 내 놓았고, 그후 2년 뒤 이를 읽기 쉽게 압축한 또 다른 `세계사`를 펴냈다. 이 초판본과 1946년, 1965년 2차례에 걸친 개정판을 비교해 보면,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또한 세계정부 지지자로 미래를 낙관하며 살아온 그가 2차대전을 거치며 비관주의자로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이 직접 수정한 개정판에서 자신의 세계관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전망에 다소의 잘못이 있었음을 시인했으며, 아버지의 시각을 토대로 웰스의 아들이 다시 수정한 2차 개정판에서는 한국전쟁이 동서 이데올로기 분쟁의 최대 희생물이라고 썼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우유부단한 정책과 소련의 뒤틀린 야망이 분단을 초래하고 마침내 엄청난 비극을 몰고 왔다는 것이다. /조선
1943 - 광복군, 버마전선에 사관1대 파견
일제시대 농촌계몽소설
`상록수`를 집필했던 소설
가 심훈. /조선
1935 - 심훈 '상록수' 동아일보 공모에 당선
1935 - 심훈의 상록수, 소설 현상공모에 당선
35년의 짧은 생이었지만 심훈(1901∼1936)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작품에는 늘 강한 민족의식이 배어있었다. 재능 가운데 먼저 빛을 발한 쪽은 영화였다. 영화 `장한몽`에 이수일 역으로 출연했고,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정통으로 영화를 공부한 뒤에는 원작ㆍ각색ㆍ감독으로 `먼동이 틀때`를 제작해 큰 성공을 거뒀으나 곧 영화계를 떠났다.
심훈의 타고난 운명은 기자였고 작가였다. 7년간을 동아일보ㆍ조선일보ㆍ조선중앙일보 기자로 지내며 많은 작품들을 쏟아냈다. 조선일보 기자 시절에는 장편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를 연재했으나 둘 다 일제의 검열에 걸려 중단하고 말았다.
1932년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판하려 했으나 또 일제의 검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충남 당진으로 낙향해 손수 필경사(筆耕舍)라는 초가집을 짓고 소설 `상록수` 집필에 몰두한다. 55일 만에 탈고한 심훈은 동아일보의 소설 현상공모에 응모했고 상록수는 1935년 8월13일에 당선된다. 상록수의 인기에 힘입어 일약 유명작가가 됐으나 명성도 잠시 뿐 이듬해 장티푸스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조선
1926 -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출생
1914 - 중국에서 활약한 조선족 작곡가 정율성(鄭律成) 출생
정율성 [鄭律成, 1914.8.13(음력7.7)~1976.12.7]
전라남도 광주(光州)에서 태어났고, 초명은 부은이다. 광주숭일보통학교를 마치고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南京]·상하이[上海] 등지를 전전하는 동안 크리누아에게 작곡과 성악을 배웠다.
1937년 옌안[延安]의 루쉰[魯迅]예술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1939년 중국공산당에 입당, 《옌안송》 《팔로군대합창》 등을 작곡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 《팔로군대합창》 중의 <팔로군행진곡>은 1949년 중국 건국과 함께 《인민해방군가》로 불려 오다가 1988년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정식 군가로 비준을 받았다.
한때 문화대혁명에 협력하지 않은 죄로 시련을 겪었으나 다시 작곡활동을 개시하여 가곡·가극·영화음악분야 등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naver
정율성의 연보
1914년 7월7일 -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163번지에서 정율성 출생
http://www.gjimf.org/about_05.html
정율성
출생 : 1914년 8월 13일
사망 : 1976년 12월 7일
출생지 : 광주광역시
직업 : 음악인
/네이버 인물검색
http://people.naver.com/DetailView.nhn?id=26636&menu=basic
(음력으로 7월 7일이 양력 8월 13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정율성] 13억 중국인의 가슴마다 아로새겨진 ‘중국인민해방군가’의 작곡가
13억 중국인의 가슴마다 아로새겨진 ‘중국인민해방군가’의 작곡가 정율성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보낸 조국인 한국에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중국의 2백만 조선족 동포들에게는 추앙을 받고 있는 작곡가다.
정율성은 조선인이면서도 1937년 이후 중국에서의 항일투쟁과 탁월한 음악적 업적으로 최고의 중국음악인 반열에 오르게 된다.
19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 개막식 첫 프로그램과 2000년 6.15 공동선언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역사적인 첫 만남에 울려퍼진 곡이 모두 그의 곡이었다는 사실은 중국과 북한에서의 그의 음악적 위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항일독립투쟁, 국가건설, 문화혁명 등 파란만장한 중국현대사 속에서 혁명성 짙은 작곡으로, 때로는 침묵의 저항으로 일생을 보낸 그는 1914년 광주시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광주 숭일소학교를 마치고 전주 신흥중학교에 입학했으나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학업을 그만둔 율성은 1933년 봄 셋째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1934년 의열단의 남경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곳에서 항일비밀활동에 종사하는 한편, 매주 일요일 상해로 가 러시아의 저명음악가 크리노와 교수로부터 성악을 배우게 된다. 교수로부터 이탈리아에 가서 계속 공부할 것을 권유 받지만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던 율성은 1937년 10월 연안으로 옮겨 노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이곳 연안에서 모든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팔로군행진곡’, ‘연안송’ 등 주옥같은 음악을 남기게 된다.
특히, 힘차게 시작되는 ‘팔로군행진곡’은 큰 사랑을 받으며 군가로 채택됐고 1988년 중국군사위원회로부터 정식 ‘인민해방군군가’로 비준을 받게 된다.
외국인으로서 불가피하게 갖게 되는 음악적 언어전달의 어려움을 그는 한국인의 특유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중국인민의 모든 것을 몸소 체득하고 배움으로써 극복했던 것이다.
1966년 작곡, 공연 등 모든 예술 활동이 금지된 문화혁명기간 마저도 정율성의 불타는 창작열을 끝내 꺽지 못했다. 그는 이 기간 “그 자체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기백이 넘쳐흐르는 교향악으로 중국혁명사의 최고탑” 이라고 불리는 마오쩌둥시사 20편에 곡을 붙이는 작업을 완성하게 된다.
대자연을 한없이 사랑하고 노래한 그는 문화혁명이 막을 내린 1976년 12월7일 베이징 근교의 운하에서 낚시를 하던 중 고혈압으로 쓰러지면서 그의 길지 않은 파란만장한 예술적 삶을 마감하게 된다.
http://captaindice.tistory.com/tag/%EC%9D%B8%EB%AF%BC%ED%95%B4%EB%B0%A9%EA%B5%B0%EA%B0%80
정율성은 누구
1937년 중국 최고의 음악인 반열에 올라
13억 중국인의 가슴마다 아로새겨진 ‘중국인민해방군가’의 작곡가 정율성. 중국 인구 6억 이상은 중국의 위대한 혁명가로 그를 기억하고 있고, 중국 인구 10억 이상은 그가 작곡한 노래를 최소 한 곡 이상 부를 안다.
그는 1937년 이후 중국에서의 항일투쟁과 탁월한 음악적 업적으로 중국 최고의 음악인 반열에 오른다. 한국의 ‘아리랑’과 같은 ‘연안송’의 작곡가가 정율성이며, 홍군의 대장정을 직접 답사하고 그 감흥을 바탕으로 작곡한 ‘팔로군행진곡’은 1988년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중국인민해방군가’로 공식 비준되었으며,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개막식 첫 프로그램으로 연주되었다.
정율성은 1914년 광주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광주 숭일소학교를 마치고 전주 신흥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갑작스런 부친의 죽음으로 학업을 그만두고 1933년 봄 셋째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간다.
1934년 의열단의 남경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곳에서 항일비밀활동을 하는 한편, 매주 일요일 상해로 가 러시아의 저명 음악가 크리노와 교수로부터 성악을 배운다. 교수에게서 이탈리아로 가 공부할 것을 권유받지만,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1937년 10월 연안으로 옮겨 노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연안에서 모든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연안송’, ‘팔로군행진곡’ 등 주옥같은 작품을 만든다.
1966년 작곡, 공연 등 모든 예술활동이 금지된 문화혁명기간에도 그의 불타는 창작열을 꺽지 못했다. 그는 이 기간 그 자체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기백이 넘쳐흐르는 교향곡으로 중국혁명사의 최고탑이라 불리는 ‘모택동시사’ 20편에 곡을 붙이는 작업을 완성한다.
문화혁명이 막을 내린 1976년 12월 7일 북경 근교의 운하에서 낚시를 하던 중 고혈압으로 쓰러져 생을 닫았다.
/빛고을 광주소식 2007-10-04 14:37:20
http://inews.gwangju.go.kr/Source/articleshow.php?Domain=gwangju&No=5812
1913 - 독립의군부 사건 선고공판 열림
1912 - 조선삼림미간지 및 산림산물특별처분령 공포 시행
1912 - 미국 라디오방송 면허제에 관한 무선법 제정
1912 - 프랑스 의사 가스통 오댕이 암 병원균을 발견해 배양했다고 발표 /동아사이언스
1912 - 프랑스의 작곡가 마스네(Massenet, Jules) 사망
마스네 [Massenet, Jules(-Emile-Frédéric), 1842.5.12~1912.8.13]
프랑스의 작곡가.
리옹 근처 몽토 출생. 1851년 파리음악원에 입학, 피아노 ·작곡 등을 수학하고 1863년 로마대상을 받았다. 이탈리아에 유학한 후 오페라 창작에 전념했으며, 《라올의 왕》(1877)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이 작품에는 친구인 비제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그 후 《마농》(1881) 《베르테르》(1892) 《타이스》(1894) 《노트르담의 곡예사》(1902) 등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오페라 이외에 관현악곡 ·가곡 ·부수음악 ·피아노곡 ·종교음악 등도 있으며 그의 음악은 모두 섬세하고 감각적이며 인상적이다. 또 파리음악원의 교수로서 샤르팡티에, F.슈미트 등을 길러냈다. /naver
/en.wikipedia
1910 -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 사망
1910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사망하다. /위키백과
1910 - 영국의 간호사 나이팅게일(Nightingale, Florence) 사망
나이팅게일 [Nightingale, Florence, 1820.5.12~1910.8.13]
"백의의 천사" "등불과 같은 여인" 등으로 알려져있고 박애주의의 대명사로 불려진 나이팅게일이 1910년 8월 13일 런던에서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독신으로 산 나이팅게일은 어렸을때부터 간호원직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크리미아 전쟁중에 그녀는 군대병원이 얼마나 비위생적인가를 알고, 간호원팀을 조직하여 터키에 있는 수쿠터리와 발라크라바이 병원들을 소독해가며 위생적인 의료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군대와 싸웠다.
그녀는 영국으로 귀국한 후, 간호원을 양성하기 위해 나이팅게일 간호학교와 기숙사를 세운 다음 건강위생에 대해 전문적인 교육을 강의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의 메릿훈장을 수여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조선
1909 - 조선고서간행회 조직
1907 - 청, 자정원 설립
히치콕 /브리태니
커
1899 -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출생
1899 - 미국의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Hitchcock, Alfred) 출생
히치콕 [Hitchcock, Alfred, 1899.8.13~1980.4.29]
히치콕은 '스릴러' 영화를 다수 발표해 명성을 얻은 영국 태생의 미국 영화감독이다. 세인트 이그나티우스 칼리지와 런던대학교에서 공학을 전공했다. 1925년 첫 작품인 <쾌락의 정원 The Pleasure Garden>을 감독했고, 1926년 <하숙생 The Lodger>을 감독하면서 서스펜스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29년에는 영국 최초로 성공을 거둔 발성영화 <공갈 Blackmail>을 만들었다. 이후 서스펜스 영화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해 인기를 얻었다. 1939년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만든 첫 작품 <레베카 Rebecca>(1940)로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이후 30년 동안 1년에 1편 정도의 작품을 감독했으며 1948년부터는 제작도 겸했다. 그는 살인사건과 스파이 활동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위협·공포 등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능했다. 여기에 카메라의 구도와 움직임, 정교한 편집, 효과적인 사운드트랙 등 기술적인 효과를 사용함으로써 서스펜스 영화의 재미를 더했다. 1979년 미국영화협회(American Film Institute)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1980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만약 내가 신데렐라를 찍는다면 관객들은 곧바로 신데렐라의 마차 안에 시체가 있으리라고 예상할 것이다. "
- 앨프레드 히치콕
1898 - 미국군, 마닐라 점령
1898 - 스페인, 미국에 마닐라 할양
1898년 8월 13일 필리핀 마닐라가 미국에 할양되었다. 1895년 2월 쿠바인들이 스페인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일으킨 독립투쟁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은 1898년 4월 스페인과 미국이 서로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미해군 아시아 함대 사령관으로는 조지 듀이 준장이 임명되었다. 5월 1일 미해군 소함대는 마닐라 만으로 진입해 그곳에 정박 중이던 스페인 함대를 공격했다. 이날 아침의 전투는 사소한 포격이 수차례 오간 뒤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전투 결과 미국측의 피해는 수병 7명의 부상에 그쳤지만 스페인군 사상자는 381명에 이르렀다. 마닐라 점령에 이어 미군은 7월 3일 쿠바의 산티아고에 정박해 있던 파스쿠알 세르베라 제독 휘하의 스페인 카리브 함대까지 격파했고, 이로써 전쟁은 사실상 끝을 맺었다.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 체결로 스페인은 쿠바에 대한 모든 권리주장을 포기했으며, 괌·푸에르토리코를 미국측에 양도하고 필리핀 통치권도 2,000만 달러에 미국측에 넘겨주었다. 미국은 이 전쟁의 승리로 광범위한 해외식민지를 보유한 강대국이 되었으며 국제정치 무대의 새로운 중추로 떠올랐다. /브리태니커
1889 - 윌리엄 그레이, 주화사용 전화기로 특허취득
1888 - 세계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에 성공한 베어드 출생
1888 - 영국의 텔레비전 발명가, 전기공학자 베어드(John Logie Baird, 1888.8.13~1946.6.14) 출생
영국의 텔레비전 발명가·전기공학자. 스코틀랜드 헬렌스버그 출생. 목사의 아들로 공업전문학교를 거쳐 글래스고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병약한 탓으로 전기 기술자직을 그만두고, 1922년부터 텔레비전의 발명에 몰두, 1926년 최초로 공개시험에 성공하였다. 그가 창설한 베어드 텔레비전 개발회사에 의하여 1929년에 처음으로 BBC 방송이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였다.
베어드의 주사방식(走査方式)은 기계식이었으나 얼마 후 전자식으로 바뀌었다. 1927년에는 적외선을 이용하여 어둠 속에서 상(像)을 송신할 수 있는 녹토비저(noctovisor)를 발명하였다. /naver
1871 - 독일의 사회주의자, 혁명가 리프크네히트(Liebknecht, Karl) 출생
리프크네히트 [Liebknecht, Karl, 1871.8.13~1919.1.15]
1863 - 프랑스의 화가 들라크루아(Delacroix, Eugène) 사망
들라크루아 [Delacroix, (Ferdinand-Victor-)Eugène, 1798.4.26~1863.8.13]
1826 - 프랑스 의사 라엔네크 사망
1704 - 블렌하임 전투에서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이 프랑스, 바바리아 연합군을 격파하다. /위키백과
블렌하임 전투(Battle of Blenheim, 일부 국가에서는 제2차 회흐슈테트 전투(Second Battle of Höchstädt)로 불리기도 한다.)는 1704년 8월 13일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주요 전투이다. 루이 14세는 합스부르크의 수도 빈을 포위함으로써 황제 레오폴트 1세를 전쟁에서 손 떼게 하고 유리한 평화협정을 맺으려 하였다. 빈의 위협은 상당한 것이었다. 바이에른에 거점을 둔 바이에른 선제후와 마르신 원수의 군대는 서쪽에서 위협을 가했고, 이탈리아 북부에 배치된 방돔(Vendôme) 원수의 대군은 브레너 가도(Brenner Pass)를 통해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위협을 만들어냈다. 빈은 또한 동쪽에서 접근해오는 라코치(Rákóczi)의 헝가리 반란군으로 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말버러 공작(Duke of Marlborough)은 빈에 대한 위협을 완하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의 군대를 베드부르크(Bedburg)에서 남쪽으로 진군하여 대동맹과 함께 황제 레오폴트 1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모략과 현명한 조율의 결합으로 말버러 공작의 진짜 목표를 친구로부터 적에 이르는 모든 이들로부터 숨길 수 있었고, 말버러 공작은 이것으로 인해 저지대 국가에서 도나우까지 5주간 방해받지 않은 채 250마일(400km)를 진군할 수 있었다. 도나우 강에 위치한 도나우뵈르트(Donauwörth)를 확보한 후에, 영국의 공작은 탈라르(Tallard) 원수가 슈바르츠발트(검은 숲)(Schwarzwald)을 넘어 구원군을 이끌고 도착하기 전에 선제후와 마르신의 군대와 교전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의 사령관들은 그들의 병력이 충분해질 때까지 싸우는 것을 꺼려했고, 말버러 공작은 군대를 끌어내기 위해 바이에른에 대하여 약탈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은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증명되었지만, 탈라르가 선제후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외젠 공작(Prince Eugene) 역시 동맹군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했고, 양군은 결국 블렌하임(Blindheim)의 작은 마을 근처에 있는 도나우 강의 강둑에서 만나게 되었다.
블렌하임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즁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압도적인 동맹군의 승리는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으로 부터 빈의 안전을 공고히 했고, 대동맹이 붕괴되는 것을 막아냈다. 바이에른은 전쟁에서 이탈 했으며, 루이 14세는 끝을 보기 위한 빠른 승리를 원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영국에게 체포된 탈라르 원수를 포함해 30,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1704년이 가기전에 전역은 끝이 났다. 동맹군은 다음해 전역에는 프랑스 본토로 진군해 들어가기 위한 준비로 트리어(Trier)의 도시들과, 란다우(Landau) 그리고 모젤(Moselle)에 있는 트라바체(Trarbach)를 점령했다.
배경
1704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은 4년째를 맞았다. 전년 프랑스와 그들의 동맹자들은 승리를 이루어냈는데, 가장 특기할 것은 빌라르(Villars) 원수와 바이에른의 선제후가 합스부르크의 수도인 빈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빈은 두 장군의 불화로 인해 간신히 지켜질 수 있었는데, 군을 이끌던 지혜로운 빌라르 원수는 덜 역동적인 마르신 원수로 교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04년 위협은 아직도 현실적이었다. 라코치의 헝가리 반란군은 이미 제국의 동쪽을 위협하며 다가오기 시작했고, 방돔 장군의 병력은 북부 이탈리아로부터 침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드리드와 베르사유의 궁전에서는 빈의 함락은 의심할 여지없가 없다고 생각되고 있었고, 또 이 함락은 대동맹(Grand Alliance)의 붕괴를 이끌어 낼 것이라고 여겨졌다.
드 코그니 장군은 다른 군대의 갑작스런 기습에 대비하여 알자스를 지키고 있는 동안에 고립된 다뉴브에서 다른 동맹 사이에 위치한 빌레루아(Villeroi) 원수의 46,000명의 군대는 네덜란드의 마스트리히트(Maastricht) 근처의 70,000명에 달하는 영국 네덜란드 연합군을 저지하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비엔나의 방어를 위해 즉각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병력은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탈라르 원수를 감시하기 위해 스톨호펜(Stollhofen) 근교의 경계에 주둔하고 있던 바덴의 공작 루이(Prince Louis of Baden's)가 지휘하는 36,000명의 군세 뿐이었다. 그리고 스티럼(Styrum) 휘하에서 울름(Ulm)를 순찰하던 약병 10,000명이 있었다.
런던에 있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대사 브라티슬라브 백작(count Wratislaw)과 말버러 공작 모두 다뉴브의 상황이 지닌 진짜 위험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방어를 위해 말버러 공작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네덜란드는 다뉴브와 같은 먼 남쪽에 대한 모험적인 군사적 행복을 반대하였으며 또 스페인 네덜란드에 대한 어떤 군사적 약화도 허용할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말버러는 모략과 비밀스런 행동을 이용하여 네덜란드의 방해를 이겨내는 방법을 펼쳤는데, 그 방법은 그의 군대가 그저 모젤로 이동하여 간단히 움직일 뿐이라고 그의 네덜란드 동맹자들을 속이는 것이었으며 이는 네덜란드 정부의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한번 네덜란드 정부의 사슬에서 풀려간게 되자 말버러 공은 남독일의 오스트리아 군대와 합류했다. "나의 계획은" 말버러 공작은 헤이그에서 4월 29일 그의 정치적 친구인 시드니 고돌핀(Sidney Godolphin)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영국군과 함께 코블렌츠(Coblenz)로 진군하여 모젤에서 전역을 벌이겠다고 선언하는 것이었소. 그러나 내가 그곳에 갔을 때 나는 네덜란드 정부에게 편지를 썼는데 나는 전적으로 나의 지휘하에 있는 군대들을 이끌고 진군하여 제국을 구하고 바덴의 루이 공과 바바리아의 선제후를 약화시키기 위한 공세를 하기 위해서는 독일에서 그들과 합류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소." ... /위키백과
1396 -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 사망
234 - 중국 촉한 전략가 제갈공명 사망 /YTN
232 - 중국 삼국시대 촉한 시대의 전략가 제갈량(제갈공명) 사망 /조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