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4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9,7-9
솔직함이 주는 힘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헤로데 영주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습니다. 죽은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는 소문, 엘리야나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무성하였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는 것까지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헤로데가 자신의 잘못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만나려면 요한의 목을 벤 사실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에 자신의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분을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려면 자기 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솔직해져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루카 2,35) 하시는 분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을 거부하면 의롭지 않은 사람임이 증명됩니다.
영화 ‘뮬란’(2020)은 중국 역사에서 여성이 실제로 남성으로 위장한 채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볐던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내용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진실’입니다.
영화에서는 ‘진실과 초자연적 힘’을 결합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지혜와 힘을 지닌 여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는 여성은 얌전하게 시집이나 잘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사내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문의 수치였습니다.
하지만 뮬란은 이런 기존의 틀을 거부합니다.
뮬란은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 대신 군대에 입대합니다.
그리고 남성으로 속이고 모든 훈련을 감내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내재한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실할 수 없는 이유는 여성인 것이 발각되는 즉시 군에서 쫓겨나고 그러면 가문 전체가 불명예를 입기 때문입니다.
뮬란은 자신의 힘이 발휘되지 않으면 자신의 전우들이 죽게 될 것을 알고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초자연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숨을 내거는 결단이었지만, 그 진실함 때문에 자신 주위에 맴돌기만 하던 기(氣)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기는 우리로 말하면 성령님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오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동료들을 구합니다.
사람이 왜 진실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교만’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다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같아지는 것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느님 뜻보다 우선합니다.
그런 교만함은 죄를 짓게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렵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아담이 주님의 존재를 느끼고 뒷걸음질 친 것과 같습니다.
진실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평판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병자성사에 관련된 말씀을 하며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야고 5,16)라고 권고합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려는 겸손이 없으면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남을 비난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멀어지고 그분이 주시는 은총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고해성사 때 굳이 죄를 사제 앞에서 고백하게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헤로데는 “내가 요한의 목을 베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까이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한 달 정도 어느 부대의 중대장 운전병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제 기억으로 미스터 건국대였습니다.
대학에서 보디빌딩으로 일등을 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늘 자랑하였습니다.
그분은 30대 중후반이 되었고, 저는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저는 운전병으로 운동할 시간이 많아서 근육이 한창 붙을 때고 그분은 빠져나갈 때였습니다.
그분의 대학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몸을 만드는 것을 좋아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사우나에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저의 몸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멀리에서 해. 내 옆으로 오지마!”
다른 것은 몰라도 팔뚝은 제가 더 두꺼웠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근육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제가 조금 더 좋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 하는 사람은 자신과 비교될 만한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물며 우리 죄의 민낯이 드러나게 만드는 주님께서 옆에 계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야겠습니까?
내 죄가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도록 나를 낮추기를 원해야 합니다.
낮아지기를 원치 않으면 주님을 가까이하기 싫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원하고 그분이 주시는 성령의 힘을 받아 살고 싶다면 가장 우선하여서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여 겸손해지는 일을 즐기는 것입니다.
겸손이 은총과 진리를 부르고 지혜와 힘을 발휘하며 살게 합니다.
그러려면 솔직함으로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코헬렛 1,2-11
루카 9,7-9
모든 것이 지나가고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는 오늘 제1독서인 코헬렛의 말씀을 묵상하며 여러 반성꺼리들이 떠올랐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 날 몇 일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는 TV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보면 큰 일 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한 마디로 ‘인생 뭐있어?’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 때와도 같나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가나이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과거 ‘전도서’라 칭함)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세상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입니다.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을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 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 루가 9,7-9 :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간단히 말씀해 주셨다. “길을 떠날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9,3-5)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한 선교의 효과는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헤로데 왕의 동요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기도 했으며, 또는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혹은 신명 18,15에서 말하듯이 다른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자 헤로데 왕은 가뜩이나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에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9절)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 예수님께 대한 소문은 꽤나 영향이 컸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을 제자들의 복음선포 활동에 연결 지어 볼 때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떠한 자세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사심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진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주님 앞에 참 삶을 통하여 복음의 향기가 이웃으로 퍼져 나가도록 열심히 노력하자. 여기에 우리의 참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쁘고도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기도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