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까지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던 부산 강서구 명지동과 신호동, 녹산동, 송정동 등지를 다니며
염전 현장을 답사했다.
하지만 낙동강 하구인 이들 지역은 아파트와 산업단지 등이 많이 들어서는 등 지형 변화가 심해
염전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임 기자가 "염전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는데, 명지·녹산에서 소금이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김일기의 '전오염 제조방법에 관한 연구'를 비롯한 관련 논문들과 유승훈의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푸른역사) 등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질문에 답하였다.
"먼저 김해 지역에서 24년간 유배생활을 한 낙하생 이학규(1770~1835년)의 한시를 한 수 보겠습니다.
'염전에 구운 소금이 만석은 되어도(鹵地熬鹽萬斛優)/한 해의 반은 배 위에서 보내나니(一年强半上江舟)/자잘한 원한일랑 아예 생각 마시게(生來啀眥休相念)/한 숟갈 생선기름이 소금밭에는 무섭다네(政怕鹺渦一勺油)'. 이 시는 이학규가 1819년 지은 금관기속시(金官紀俗詩) 78수 중 하나로 녹산·명지의 염전과 관련하여 먹고 사는 사내의 생활에 대해 지었습니다.
그는 이 시 뒤에 '김해부의 남쪽 녹산·명지도 연안에는 모두 소금을 생산한다…'고 적고 있지요."
1731년 '승정원일기'(영조 7년)에도 보면 우리가 아는 암행어사 박문수가 명지도에서 제염사업을 벌이자는
논의를 했다는 내용과 2년 뒤 1733년 12월 박문수가 여기서 소금 2만 석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권3 '삼소관음 중생사(三所觀音 衆生寺)'에는 김해 사람들이 경주 중생사에 쌀 6섬과 소금 4섬을
시주하였다는 내용이 있고, '홍재전서'와 '일성록' 등에도 명지의 소금에 대한 기록이 있다.
임 기자는 다시 묻는다. "명지·녹산 염전에서는 어떤 소금을 생산하였는지요?".
■ 천일염과 생산 방식 다른 자염
1940년대 바닷물을 끓여 자염을 만들던 명지염전의 모습. 사진 강서문화원
염전은 낙동강 하구인 명지와 녹산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명지·녹산 염전이라 불렸다.
명지동 녹산동 송정동 화전동 신호동 등이 해당됐다.
"이 지역에서 생산된 소금은 바닷물을 끓여 생산한 자염(煮鹽)이었어요. 1900년대 서해안은 천일염전이 설치된 이후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천일염이 점차 주류를 이루게 됐지만, 낙동강 하구는 자염이 계속 생산
됐지요. 현재 자염 생산 풍속은 거의 사라졌으며, 서해안에서 볼 수 있는 염전은 천일염 생산시설입니다.
우리나라 전통적 소금은 자염이라 할 수 있지요."
정 기자는 명지·녹산 염장의 현황이 어땠는지도 궁금해했다.
큰 규모로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명지 일원의 현재 모습. 사진 강서문화원
1907년 통감부가 조사한 명지의 염전 현황을 보면 당시 염전 수는 총 37개, 염전 면적은 82.86정(町), 생산량은 3만7287석이었다.
염전의 평균 면적은 2.24정(町)(약 2만2200㎡)이며, 명지염전의 1정당
생산량은 약 450석이다.
당시 명지면의 동서남 모든 해안가에 골고루 염전이 있었다.
"1960년대 국립건설연구소가 간행한 지형도를 보면 녹산 송정마을
서남쪽과 방근마을 남쪽에 염전이 펼쳐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지도상에 표시된 염전을 보면 10여 개가 확인됩니다.
명지에는 1907년과 달리 서남단 해안가에 염전이 몰려 있지요. 평서마을 서쪽에 3개, 하신마을 앞에 8개
남짓한 염전이 있습니다. 이 염전이 바로 명지제염소이지요.
그리고 전등마을 앞에 4개가량 염전이 있으므로 합하면 15개 정도입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명지염전의 60%가량이 사라진 셈이지요.
명지염전이 퇴조한 뒤로 신호도가 명지·녹산 일대 염전에서 생산량이 가장 많았습니다."
■ 산단과 주거지로 변모
강서구 송정마을 주택에 그려진 옛 염전 벽화.
임 기자는 명지·녹산의 소금이 어떻게 유통이 되었는지 묻는다.
소금배는 삼랑진과 수산, 남지, 현풍을 거쳐 대구와 왜관, 구미, 상주,
안동까지 올라갔다.
대구는 명지산 소금이 가장 많이 유통되던 곳이다.
낙동강 하구에서 출발한 운송선은 소금과 어물, 젓갈 등을 가지고
올라갔고, 내륙의 곡류를 싣고 내려왔다.
낙동강 하구에서 소금배가 출발하는 주요한 포구는 하단이었다.
하단은 낙동강에서 내려오거나 올라가는 기점이었다.
정 기자가 "그렇다면 명지·녹산 염전이 왜 폐전이 되었는가"하고 또 물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1950년대 정부의 천일염 장려정책으로 생산비가 높은 자염이 위기에 놓인 것도 이유가 되겠고, 1959년 닥친 사라(sarah) 태풍이 명지·녹산 염전의 폐전을 가속한 큰 이유라 할 수 있지요.
이보다 앞서 1933년 3월부터 1936년 7월까지 시행된 낙동강 제방 공사의 영향으로 특히 명지면의 동쪽,
즉 동낙동강 유역에는 염전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즉 명지면 염전이 녹산보다 급격히 사라진 것은 명지도 둘레를 따라 대규모 공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지요. 신호도는 녹산과 신호도 사이 바다를 매립해 명지녹산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녹산의 남쪽 해안지형이 사라졌고, 신호도는 육지로 변모했습니다. 이후 명지제염소가 있었던 자리에 명지주거단지가 대규모 개발되면서 염전 모습은 거의 사라진 것이지요."
그렇게 부산의 모습도 바뀌어갔다.
동아대 다우미디어센터
# "송정동 전체가 염전…바쁠 땐 일꾼만 100명, 땔감 거제도서 공수"
■ 염전 종사자였던 박춘식씨
-언제 염전 일을 하셨는지.
"일본에서 태어나 12살 때 강서구 송정동으로 건너와 그때부터 17살 때까지 염전에서 일했다.
18살 때인 1952년 부산에 나가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는 등 십 년
가까이 지내다 돌아와 보니 염전은 거의 없어졌더라."
-당시 송정동 염전 상황은.
"1960년대 송정염전이 폐전하기 전까지 주민 대부분이 염전에서
일했다. 송정동에는 염전이 잘 될 때는 오일장이 섰고, 가덕도에서
배로 송정동에 와서 생필품을 사기도 했다. 시장 거리에 술집과 기생도 많았다."
-송정동 전체가 염전이었다고 하던데.
"그랬다. 마을 전부가 염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000평과 1만 평 등의 염전이 있었는데,
1만 평 염전을 운영하는 데는 많을 때 100여 명의 일손이 필요했다. 전문적 일꾼은 5~10명 정도였다."
-당시는 연료가 부족하지 않았는가.
"자염은 염정에서 나온 짠물을 가마에 달여 생산하므로 불을 때는 연료가 많이 필요했다.
인근의 갈대가 좋은 연료이긴 했으나 부족했다. 멀리 거제도에서 장작 솔가지 솔잎을 배에 싣고 오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