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그늘들의 초상
최호빈
외팔이 악사가 기타를 연주하는 하얀 레코드판 위로 한 아이가 돌면
걸음마다 붉은 장미가 피어난다 오선지에 적힌 외팔이의 과거를
한 페이지씩 뒤로 넘기면 검게 변해버리는 장미, 같은 자리를
다시 지날 때 멈추는 음악, 검은 장미의 정원 줄이 끊어진 듯 문은 닫히고
검은 레코드판 위로 한 줌의 꿈을 꾸었다고 고백하는 잿빛 음악이
무책임한 허공을 읽는다
*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십시오,
안내 방송이 끝나기 전 먼저 도착한 바람에 몸이 흔들린다
*
태어나자마자 걸친 인간의 가죽이 낯설어서 울면,
목에서 흘러나오는 짐승의 잡음을 따라 다른 영아들도 울었다
우는 자에게 위안은 더 우는 자를 보는 것 전생과 후생 사이를
감지하는 나의 두개골은 밀봉되기를 거부했고 뒤늦게 나타난 간호사가
기껏 흘린 피를 지워주었다 차지해야 할 자리를 잡지 못한
오감의 무중력 속 나는 갈라진 틈의 눈으로 울다가 낯선 요람에서
잠을 깨기도 했다
*
울음마저 피곤하게 느낄 때 내게 열리는 것
보일 듯 말 듯 소중해지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움직인다
기묘하게 균형을 유지하려는,
책상과 옷장과 침대가 말없이 싸운다
젖은 옷을 입은 채 나를 말리기 위해
회의적인 귀를 바닥에 대면
잠든 나에게 속삭이는 누가 있다
집으로 돌아가진 못한 소식들이
무언가에 부딪혀 움푹해진 순간으로 흘러든다
예전의 마른 상태로 돌아가는 소매
팔보다 긴 그림자를 흔드는 소매
나조차 없는 느낌의 눈 속엔 아무도 없는데
속삭임이 멈추지 않는다
지금 내 귓속엔 하루를 순환하는 입이 살고 있다
☞[2012 경향 신춘문예]시 심사평-“개성과 진실은 시를 계량하는 중요한 잣대” - 경향신문 (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