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9]대한민국 1호 칼럼니스트의 책 『건배』
정지아 작가의 에세이집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를 읽은 후, 양주동 박사의 『문주 반세기』와 변영로 선생의 『명정 40년』이 떠올라 내처 그 소감들을 주저리주저리 엮어 몇몇 지인들에게 보내니, 한 친구가 ‘듣보잡’인 책 『건배』(심연섭 지음, 2006년 발행)의 표지를 찍어 보내왔다. 궁금한 것은 못참는 습성으로, 알라딘중고서점에서 악착같이 절판본을 구했다(오죽하면 일부러 야탑점으로 달려갔을까). 알고보니, 저자 심연섭(1923-1977)은 언론인 출신(49년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필두로 동양동신 외신부장, 논설위원, 국제부장 등)인데, 무슨 연유로 62년과 69년 두 차례 유엔총회 한국대표도 역임했다(서울대 영문과 출신으로 요즘 동시통역사쯤 되었을까).
내용인즉슨, 책의 부제 ‘칼럼니스트 심연섭의 글로벌 문화탐험기’처럼 전세계 유명짜한 술집들을 순례한 품평기록 비슷했는데, 저자 자신을 한마디로 하면 양주동, 변영로, 정지아는 저리 가라할 ‘웰빙 애주가’였다. 비슷한 사람으로 떠올릴 사람이 ‘명동백작’으로 불렸던 작가 이봉구 정도일 듯하다. 20년대생 지식인답게 한학漢學에도 조예가 있었을 터, 사용한 단어가 대부분 고투古套의 한자단어이고, 인용하는 한시漢詩도 넘쳐났다. 게다가 영어, 불어 등 외국어에도 일정한 내공이 있었던 듯. 뭐라 할까, 그분의 글은 천의무봉天衣無縫한 듯하고, 영혼이 몹시 자유로웠던 분같다. 요즘 54세에 졸한다는 것은 요절夭折과 같을 텐데, 그것이 아깝고 안타까웠다. 글 곳곳에 펼쳐지는 그분 특유의 유머와 위트는 시종일관 책을 손에서 놓치 못하게 했다. 나는 이런 글이, 이런 책이 생경하면서도 참으로 만나다(맛나다라고 하면 어감이 떨어진다). 재밌어 글 읽는 맛이 뚝뚝 떨어진다. 그래서 반가웠다. 오죽했으면 아마도 생전에 펴낸 책으로 유일했을 『건배<술, 멋, 맛-주유만방기酒遊萬邦記, 1977년 효문출판사 발행』라는 책을 그와 그를 좋아하는 지인들이 발벗고 나서 재편집하여 2006년에 어렵게 내놓았을까.
칼럼니스트라고 흔히 쓰이는 직업명도 그에게서 유래돼, 그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칼럼니스트 1호로 문명文名을 휘날렸다. 그를 모른 것은 순전히 내 과문의 소치였다. 수탑須塔이라는 그의 호인지 필명인지도 특이하다. ‘모름지기 탑’이 무슨 의미였을까? 그의 글 행간에서 미뤄 짐작하면 술꾼이었으므로 ‘술의 탑’아니면 풍류맨이었으니 ‘맛과 멋의 우두머리’를 줄인 게 아니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한 시대 깨끗하고(실력있는) 멋지게 산 지식인(언론인)이 쌓아올린 ‘언어의 탑’을 의미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 잔, 두 잔 술 취해가는 농익은 풍경에 제동을 거는 ‘스탑stop’에서 힌트를 얻어 박수를 치며 자호自號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참말로 재밌는 『건배』책의 소제목 <주사酒辭>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독파한 소감을 마친다. 흥미로운 지인들은 큰 도서관에서나 이 책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래古來로 술 마시는 핑계는 가지가지였을 것이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는 “까닭이 있어서 술을 마시고 까닭이 없어도 술을 마신다. 그래서 오늘도 마시고 있다”고 했으며, 17세기 프랑스의 한 주객은 <술의 예술>이라는 책에서 술 마시는 핑계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 “1, 먼 곳에서 찾아온 귀한 손님 때문에 2. 당장 목이 말라서 3. 앞으로의 갈증에 대비해서 4, 술이 좋아서 5. 그밖의 여러 가지 이유로”였다니 핑계도 가지가지가 아니던가. 우리나라 술꾼이라고 왜 핑계가 없겠는가? 첫째 1, 3, 5, 7, 9 소줏병 수는 ‘홀수’로 마셔야 한다고 웨장을 친다. 이것 때문에 신세 조진 사람이 무릇 기하인데도 여전히 홀수를 외쳐대는 저 몰상식한 술꾼들은 대체 누구인가. 다음이 이유 불문, 주종 불문, 장소 불문이라니, 기도 안찰 노릇이다.
저자가 사도斯道의 선배에게 들었다는 ‘주불단배酒不單杯’ 설명은 일리도 있고 품격까지 느껴져 여기에 소개한다. 주불단배를 '한 잔 술은 없는 법이니 계속 마셔야 한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그게 아니다. ‘홑 단單’자에는 ‘입 구口’가 두 개 들어있으니, ‘단배’라 하면 ‘두 잔’이나, 그것은 너무 박덕薄德하여 주도酒道에 어긋나므로 최소한 술을 마신다하면 ‘석 잔’은 마셔야 한다. 그것을 ‘품배品杯’라 하는데, 입구 자가 셋이므로 셋이 모여서 최소한 각자 세 잔씩은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네 명이 모여 네 잔이상씩을 마시면 안된다는 것. 이유인즉슨, 네 잔은 ‘효배囂杯’라 하는데 ‘시끄러울 효’자는 입구 자가 네 개이므로 넉 잔을 마시면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게 되고 시끄러워지므로 피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죽을 사死’자의 ‘사배死杯’가 아님을 알아야겠다. 그러니 세 명이 모여 점잖게 품배를 기울일 일이다. 우리 항상 그렇게 하자. 품배가 좋다. 효배는 싫다. 하하.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프랑스어 부제副題를 명기해야겠다. “A Votre Sante!”(아, 보트르 쌍떼, 당신의 건강을 위하여). 프랑스인들의 대표 건배사(권주사)인데, 상대방은 “A la Votre!”(당신의 그것을 위하여)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미국인들의 건배사는 대부분 “Cheers!”나 “Cheer up!”이고, 중국인들은 "깐베이乾杯"(술잔을 빨리 비워라)나 “지아여우加油”(기름을 더 부어라)라고 한다나, 어짼다나. 우리는 그저 "(건강을) 위하여"가 가장 무난하다.
심연섭 님은 한국전쟁때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AP, AFP, UPI 등 세계 유수의 통신기자들과도 흔연히 어울렸던 것같다. 그들과의 우정 속에서 알게 된 글로벌 술문화를 이토록 실감나게 쓸 이는 별로 없을 것같다. 위와 같은 위트와 음주의 지혜를 켜켜이 낡은 책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또 하나의 기쁨이다. 이 책을 추천한 여성 지인은 제 이름의 ‘숙淑’가 실은 우리말 ‘술’이라고 호언하는, 이름만 대면 많이 알 수 있는, 문화계에서 그녀를 모르면 간첩인, 아주 준수한 문화애호가 중의 한 명이다. 나는 그녀가 좋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