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34
6월27일[연중 제1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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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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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BxYFOgcNbmk (배한욱 요한 세례자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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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이 순간,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을 하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막의 교부들입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이며 친지, 세상의 부귀영화를 등 뒤로 내던졌습니다.
거칠고 황량한 광야로 들어간 그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섭생을 이어가며 기도와 고행에 전념했습니다. 그 결과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초췌했지만, 영혼은 광채로 빛났습니다.
세상에 살던 그들은 어느 순간 느꼈을 것입니다. 갖은 유혹거리들로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 한가운데 있다가는 평생 가도 진리를 못 찾겠구나, 심오한 신앙의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등지는 수밖에...그들은 결연히 인간 세상을 떠나, 아무도 없는 깊은 사막, 어두운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선택과 집중이었습니다. 진리 중의 진리이신 하느님을 보다 더 잘 파악하기 위한 선택과 집중, 하느님의 말씀의 핵심을 깨닫기 위한 선택과 집중.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에너지의 99퍼센트를 기도와 묵상에 쏟아 부었을 것입니다. 나머지 1퍼센트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한 것이었겠지요. 그러니 아마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의 포기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다니는 맛집이며, 골프 투어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사막에서의 단독 수도 생활의 필수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섭생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묵상에 묵상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취미가 단식이요, 특기가 고행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극단적 선택과 집중의 결과가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의 실체를 손에 잡힐 듯이 바라보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얼마나 달고 단 것인지를 확연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그들은 이제 하산할 때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그 소중한 깨우침을 고통당하는 백성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과 함께 사막을 걸어 나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보다 큰 선이요 아름다움이요 절대적 가치관이신 하느님을 향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옛날 사막의 교부들처럼 가족과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사막으로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매일의 삶 안에서도 사막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다 보면 매일 매 순간 좁은 문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일상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이 시대 참된 영성가들은 바로 이 선택과 집중을 잘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좋은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빨리 오라고 우리를 손짓합니다.
TV나 컴퓨터를 켜면 즉시 이거 사라 저거 사라 외치는데,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꼭 필요한 물건 같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영성가들은 세상의 좋은 것들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설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필요한 많은 것들 가운데 정말 필요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식별력, 그것이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모든 일을 다 할 수도 없고 다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이 순간,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이 시대 영성입니다. 자신이 꼭 서 있을 자리에 반드시, 그것도 항상, 기쁜 얼굴로 서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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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T5oDDLoK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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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사는데도 삶이 지치는 이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무기력증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울해지는 번아웃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지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그렇습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번아웃이 옵니다. 목표에 도달해도 새로운 목표가 없다면 무기력증이 옵니다. 어쨌든 열심히 살면 그 결과는 우울함과 공허함입니다. 그러면 열심히 살지 말아야 할까요?
“내일의 죠”라는 유명한 일본 권투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죠 야부키는 빈민가 출신으로 최고의 권투 선수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권투를 사회에 대한 분노를 배출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생각합니다.
죠는 부유한 체육관 주인의 딸인 요코 시라키를 만납니다. 요코는 죠를 돈벌이로 생각했지만, 나중엔 개인적인 감정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목숨을 건 세계 타이틀에 나가는 것을 말리지는 않습니다. 죠도 목표가 있었기에 몸이 좋지 않았음에도 마지막 결승을 치르고 목숨을 잃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불태웠어. 새하얗게.”
세상은 목적을 정하고 달리라고 말합니다. 뒤 책임은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황금률이 나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황금률은 사랑입니다. 상대가 나에게 해주는 것처럼 나도 상대에게 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생기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이러한 계약입니다. 사랑이 끊임없이 의무를 만들어내고 그 의무가 우리를 지치지 않게 만듭니다.
영화 ‘록키’(1976)는 필라델피아 빈민가에 사는 무식한 생계형 지하 권투 록키 발보아의 인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사채업자의 수행원으로 살지만, 마음씨는 착합니다. 하지만 혼자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도 벅찹니다.
그런 와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수줍은 여동생인 애완동물 가게 점원 아드리안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의 낭만적인 사랑은 잔인한 복싱 세계와 강렬한 대조를 이룹니다.
어느 날 세계 헤비급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는 자신의 계획된 상대가 다쳤기 때문에 홍보용으로 미지의 선수에게 기회를 주기로 합니다. 크리드는 단순히 ‘이탈리안 종마’라는 별명을 좋아하기 때문에 록키를 선택합니다.
일생일대의 기회에 직면한 록키는 이 샷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합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록키는 그가 세계 챔피언에 맞설 능력이 없음을 압니다. 그의 목표는 크리드를 상대로 15라운드를 버티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아드리안에게 합니다. 자신이 끈기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실력 차이로 많이 맞지만, 록키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는 쓰러져도 불굴의 투지로 다시 일어나며 크리드와 정면으로 맞섭니다. 잔인한 15라운드를 견뎌내며 자신이 바라던 대로 끝까지 갑니다. 그는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필라델피아 거리의 부랑자가 아니라 인내, 힘, 존엄성을 가진 사람임을 증명합니다.
군중이 환호하는 동안 점수가 발표됩니다. 거의 이길 수도 있는 점수였지만, 8:7로 크리드가 승리합니다. 여기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록키는 점수와 승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드리안에게 약속한 것을 이뤄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아드리안이었습니다. 심판이 점수를 부르는 동안 계속 “아드리안”을 부릅니다. 둘은 부둥켜안고 사랑을 확인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세계 챔피언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도 있었기에 점수에 신경 쓸 텐데 록키는 사랑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를 존엄한 사람으로 증명하게 만들고 오직 사랑만이 결과에 상관없이 하루하루를 지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그는 아드리안에게 받고자 하는 존경을 아드리안에게 약속한 것을 지켜내며 존중해줍니다. 받고자 하는 대로 주어야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 때문에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한다면 무기력증이나 번아웃에 빠지지 않습니다. 황금률이 삶이 에너지가 되게 하는데, 그 황금률은 사랑할 대상이 있을 때만 지켜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만이 사랑할 가치가 있는 대상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께 받고 싶은 것 때문에 나도 드려야 하는 그 의무감, 이 황금률이 사랑의 결과이고 그 결과 때문에 우리는 삶에서 지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사랑하면 사랑이 목적이 되기 때문에 다른 목적을 달성하더라도 그 결과에 크게 좌우되지 않습니다.
삶에 지치지 않으려면 마르지 않는 사랑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마르지 않는 사랑의 대상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황금률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싸우겠지만, 영원히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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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를 순례하면서 망해버린 고려의 슬픔을 노래했던 시조가 생각났습니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흥하고 망함이, 또 성하고 쇠함이 모두 운수가 정해져 있는 법이니 멸망한 고려 왕조의 궁터 만월대에도 이제는 임자 없는 가을철 풀숲으로 덮여져 있구나. 오백년이나 이어오던 왕업도 저 목동이 부는 피리 곡조에 붙이게 되었으니, 해질 녘에 지나치는 나그네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구나.) 터키 이스탄불에는 ‘성 소피아 성당’이 있습니다. 3번에 걸쳐서 성당은 완공되었고, 성당을 완공한 황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이시여, 이제 나는 당신이 부럽지 않습니다.” 황제는 성 소피아 성당이 솔로몬 왕이 건축했던 예루살렘 성전보다 뛰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주교좌성당으로 자리를 지켰던 성당은 이슬람 사원이 되었습니다. 성당에 있던 아름다운 모자이크 성화는 회칠로 지워졌습니다. 순례의 여정 중에 바오로 사도가 세웠던 교회들이 지금은 폐허가 되었고, 대부분의 지역은 이슬람 교회가 되었습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는 박해와 시련을 겪으면서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의 박해와 시련은 끝이 났습니다. 교회는 로마가 깔아 놓은 길을 따라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로마의 제도와 법은 교회의 법과 제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법과 제도에 따라서 교회는 성장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복음이 빛은 조금씩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권력과 부가 쌓여갈수록 교회의 부패와 부정도 늘어났습니다. 문화와 민족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고유한 전통과 종교를 무시하였습니다. 원주민들의 사원을 부셔버리고 그 위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원주민들이 세웠던 성전의 돌을 뜯어내어 성전을 세웠습니다. 교회의 권위와 힘으로 인류와 역사에 큰 아픔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등불을 켜놓고 됫박으로 가려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교회가 복음의 빛을 권력과 권위라는 됫박으로 가려놓았을 때, 교회가 가난이라는 소금을 교만과 부유함이라는 물에 담가놓았을 때가 있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겸허하게 교회가 인류와 역사에게 잘못한 것들을 인정하고 사과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정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오늘 독서에서 아브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실천하였습니다. 조카 롯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다.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조카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조카에게 해 주었던 아브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자업자득의 허물은 없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 진실을 말하는 이, 함부로 혀를 놀리지 않는 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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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6.12-14: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6절) 여기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소중히 여겨야 하는 모든 영적인 것들이다. 거룩한 것이나 진주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개 안에 담겨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드러낼 때, 신중해야 한다. 사람들이 명백하게 중요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미워하고 하찮게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개로 배를 불리고 어떤 이들은 돼지로 배를 불린다. 나는 어떠한 것으로 풍요를 노력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요약하신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면,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동료가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주라고 하셨다. 이보다 짐스럽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공평한 것이 있겠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몰랐다고 핑계 대며 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그렇게도 평범한 것을 실천하면서 사는 모습은 아니다. 복음을 아는 우리의 모습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그만큼 성숙하는 것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셨고 산상설교에서 겸손하고 온유한 이들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이 편안한 멍에와 이 가벼운 짐을 마다하는 사람이 많아서,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힘들고 문은 좁게 느껴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우리는 하느님께서 남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그 짐은 은총이기 때문에 가볍고 기분 좋은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좁고 비좁은 길을 편하다고 하는 것이냐? 그것은 그것이 문이면서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하셨다. 그 길이 좁아 보이는 것은 주님의 멍에 곧 계명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기꺼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이가 적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안에, 곧 성령 안에 머물 수 있을 때만이, 그 계명을 따를 때만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다. 주님의 뜻을 오늘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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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마라.>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6.12-14)
여기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느님의 말씀, 예수님의 복음, 성사’ 등을 뜻하고, ‘개들’과 ‘돼지들’은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라는 말씀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과 성사 등을 모독하는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선교활동을 할 때 좀 더 신중하게 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세례를 주거나 어떤 성사를 집전할 때, 그 대상자를 충분히 준비시키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 가르침은 7성사나 준성사를 아무에게나 함부로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사모독죄는, 성사를 통해서 은총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말씀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배격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우상 숭배자들도 그 ‘모든 사람’ 속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우상숭배를 버려야 합니다. 만일에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은 채로 하느님(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예수님)을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자기가 숭배하는 우상을 하느님과 예수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표현하든지 간에 결국 다 신성모독죄가 될 뿐입니다. 반대로, 이미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 미신에 빠지고 우상숭배에 빠진다면? 그것은 십계명 제1계명을 위반하는 ‘큰 죄’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라는 말씀은, 뒤의 15장에 있는 ‘가나안 여자의 믿음’ 이야기에 곧바로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5,21-26)
이 이야기에 나오는 ‘가나안 여자’는 우상 숭배자입니다. 딸 때문에 ‘간절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오긴 했는데, 여자가 생각한 예수님은 자기가 숭배하고 있는 우상들과 다르지 않은 분, 또는 우상들 가운데 하나인 분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면 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을까? 이 호칭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뜻이 아닌가?” 아마도 누군가가, 예수님께 간청하려면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가르쳐 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호칭입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는 말씀과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말씀은 명백한 ‘거절’인데,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려면 우선 먼저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여자는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고, 자기가 우상을 숭배하는 강아지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마태 15,27) 복음서에는 없지만, 아마도 우상숭배를 버리겠다고, 또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고백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변화를 인정하셨고 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마태 15,28) 여자가 강아지 상태로 왔다가 자녀로 변화된 것이 그의 딸이 나은 것보다 더 큰 은총입니다.>
신앙인들은 ‘성도’로(‘거룩한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고(로마 1,7),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개, 돼지로 전락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라는 말씀을, “너희는 거룩해진 사람들이니 다시는 개, 돼지로 살지 마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개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묵시 22,15)
‘황금률’은 신앙생활의 ‘대원칙’과 같은 말씀인데, 원래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란다면 ‘너희가 먼저’ 해 주어라.”, 또는 “너희가 이미 받았으니 ‘너희도’ 주어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의 ‘남’은 하느님이기도 하고, 이웃이기도 합니다. 앞의 말씀에 연결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은총을 받아 누리고 싶다면 자녀답게 살아라.”, 또는 “하느님께서 너희를 자녀로 삼아 주셨으니 너희는 개, 돼지 상태에서 벗어나서 자녀로서 살아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좁은 문’에 관한 말씀도 앞의 말씀에 연결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는 인생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일처럼 생각되어도 그 문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라는 것을 믿고, 끝까지 충실하게 자녀로서 살아라.”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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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 말씀은 황금처럼 빛나는 규율이라고 해서 ‘황금률’로 불립니다. 산상 설교(5―7장)의 주요 부분을 갈무리하는 지점에 나오는 이 말씀은 이전 내용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구실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선언하시고(5,17 참조)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충만한 뜻을 여러 가르침으로 밝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모든 가르침을 관통하는 근본정신, 곧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황금률로 압축하여 표현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서 후반부에 언급되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 다음에도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22,39-40 참조) 그렇다면 황금률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남(이웃)이 너희에게 하여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이웃)에게 하라는 것은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사랑하듯 하라는 계명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황금률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로마 13,10 참조)
남이 나에게 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들을 떠올려 보면, 그 많은 것이 결국 하나의 단어로 모두 수렴되는 듯합니다. ‘사랑’, 우리는 결국 남에게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온전한 삶을 영위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랑을 누군가는 주고 있을 것입니다. 받는 존재로만 머물지 말고 주는 존재도 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상호적인 사랑을 강조하신 듯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제는 우리가 남에게 사랑을 줄 차례입니다. 황금률을 다음과 같이 각색하여 보면 어떨까요? ‘남이 너희를 사랑하여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을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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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아브람은 롯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 왔지만 유목사회에서 생활하다보니 물과 목초지가 중요했습니다. 아브람과 롯의 목동들 사이에 물 때문에 싸움이 일어납니다. 여기에 아브람이 중재에 나섭니다. ‘나와 나는 같은 혈육 아니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하면서 조카 롯에서 서로 갈라져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롯이 보니 물도 많고 목초지가 펼쳐지는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여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있는 모레 상수리나무1) 아래에 자리를 잡고 제사를 바칩니다. 아브람은 함께 동행했던 조카 롯에게 헤어지자는 결단의 말을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예’보다 ‘아니다’라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해야 하는 일을 못 하고 우유부단의 모습으로 이어지면 나중에는 더 불편한 일이 벌어질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거절하려면 처음에 하라’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아브람은 삼촌으로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고르라는 배려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진정으로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못합니다.
마태오는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교훈과 삶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특히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오 복음 7장 6절)
그런데 주님께서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얼핏 보아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주님께서 이와 다른 내용의 말씀을 이어서 하십니다.2)
주님께서 구약과 예언서의 정신을 요약해서 한 마디로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오 복음 7장 12절)
자신의 가치관, 자신이 받은 교육,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영향 받은 것, 성격이 아니라 내가 상대하는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일까요?
어릴 때부터 자라며 들었던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살면서 참 지혜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접고 상대방의 뜻을 따라주는 것이 힘들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덕으로 가는 길목인 것입니다.
덕을 쌓기란 오랜 시간과 어려움이 따르지만 구원으로 이르는 좁은 길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율법의 글자해석을 삶의 기준으로 삼던 종교지도자들에게 방향전환을 제시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신앙생활도 적당히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쉬운 방법대로 살고 게으름도 피우고 세상도 섬기고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도 얼굴을 돌립니다. 그런데 사실 구원의 길은 적당이가 아니라 매일매일 성실하게 하느님께로 향하는 좁은 길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오 복음 7장 13절-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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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레 상수리 나무(’ê·lō·wn mō·w·reh)’가 있는 곳은 거룩하고 특별한 장소의 의미를 가진다. (창세 12,6; 13,18; 판관 6,11.19; 9,6). 다르게는 ‘매장지’(창세 35,4.8), ‘종교화합의 장소’(여호 24,26), ‘강한 힘’(아모 2,90, ‘이스라엘’ (이사 6,13)을 뜻한다.
2) 세 주제의 말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7,6)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7,12)과 ‘구원으로 가는 길은 좁다’(7,13-14) 전후가 서로 다른 독립적인 주제이다. 마르코에게서 자주 있는 특징인데, 주님께서 각각 다른 기회에 하신 말씀을 마태오가 한 자리에 연결하듯 편집했다고 본다.
개나 돼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 그 가치를 모르는 유다인, 이방인들에게 선뜻 내어주지 말라는 의미라 할 수 있다. 마태오는 강아지를 이방인으로 표현하고 있다.(마태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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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가르치시면서 예까지 보여 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오 복음 7장 12절)
이 가르침은 참 훌륭하고 바람직하지만, 잘 지켜지기는 그리 쉽지 않은 듯합니다. 사람은 대개 남에게 바라는 건 많으면서, 타인에게 무얼 해줄 때는 자기중심성과 이기심이 발동하는지 좀 야박해질 때가 종종 있어 보이니까요.
"내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창세기 13장 9절)
아브람과 롯의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기 어려워서 서로 갈라져 나가기로 합니다. 이때 아브람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지요. 먼저 선택을 한다는 자체가 엄청난 기득권이 될 수 있습니다. 비옥하고 물이 넉넉한 좋은 땅을 합법적으로 선점할 기회니까요.
하느님에게서 땅과 후손을 약속 받은 아브람은 어디가 되었든 자기에게 돌아오는 땅이 주님 약속의 땅임을 믿기에 관대히 선취권을 내놓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남에게 바라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 같"(창세기 13장 10절)은 곳을 선택하고, 아브람은 그가 고른 곳의 반대편으로 나아갑니다.
롯의 선택 기준은 그러나 주님 눈에는 위험하지요. 성경은 풍요를 좇은 그의 영리한 선택이 소돔과 같은 욕망과 쾌락, 이집트와 같은 노예살이의 결과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오 복음 7장 13절)
롯이 자리잡은 소돔은 "악인들, 죄인들의 성읍"이었지요. 그는 당장 눈에 보이는 외적 풍요가 어떤 결과를 잉태하고 있는지 모른 채, "넓은 문, 널찍한 길"을 택하여 나아갑니다. 복음사가는 이를 두고 "멸망으로 이르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다고 하였지요.
자기가 선택한 땅이 아닌, 하느님께서 선택해 주신 땅으로 나아간 아브람은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창세기 13장 15절)는 축복을 받습니다.
세상에! "보는 땅"이라니요! 발길이 닿은 땅도 아니고 싸워서 점령한 땅도 아닌, 아브람 시야에 들어온, 보는 땅을 주신다는 말씀에서 주님의 무한하신 스케일이 느껴집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오 복음 7장 6절)
"거룩한 것, 진주"는 우리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가리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진주를 산 상인의 비유에서도 보듯(마태오 복음 13장 45절-46절 참조) 모든 것을 걸고 지켜야 하는 영혼의 본질이고 정수일 겁니다.
하느님의 숨을 받아 이 세상에 와 살고 있는 우리가 목숨처럼 소중히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없는 재물이나 현세적 지식, 썩어 없어질 외모가 아닐 겁니다.
무언가 선택을 할 때 (개, 돼지들에게 참 미안한 비유입니다만) 거룩하고 귀한 것을 알아보지 못해 개, 돼지들로 빗대어진 쾌락과 욕망, 허영과 사치들에 자신을 던지지 말라는 뜻이지요.
아무리 삶이 녹록치 않고 제도와 사람들의 이해가 따라오지 못해도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지향, 귀한 꿈을 세상의 바벨탑, 소돔의 널찍한 문으로 밀어넣어서는 안 되지요.
쉽고 넓고 편한 세상의 달콤한 유혹 뒤에는 "멸망"이 감춰져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함, 우리의 진주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이를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의 선택이 어떤 기준에서 나오는지,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거룩함, 귀한 진주를 잘 간직하며 살아가는지 돌아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목놓아 기다리시는 생명의 좁은 문을 향하는 이들이니까요. 이 길에 서로 동행이 되어 주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과 함께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이 생명으로 가는 길임을 굳게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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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입니다. 남의 보기 싫은 모습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럭저럭 살아갈 때가 이 꼴, 저 꼴 안 보고 마음이 편했습니다. 차라리 옛날처럼 살아가고픈 마음이 가득합니다. 언제쯤‘저 사람은 왜 저 모양일까?’ 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고, 남을 되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의 들보를 빼내야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낼 수 있으니 먼저 자신을 점검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두운지라 여전히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지 못하고 남의 약점을 들추어내곤 합니다. 자신은 완벽하고, 다른 사람은 허물투성이처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이러다가 결국 누군가에게 똑같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더욱 하느님께로부터 그렇게 심판을 받는다면 지금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입니다. 나에게 관대하고 부드러운 만큼 타인에게도 부드럽고 넉넉하기를 희망합니다. 남에게 엄격하기에 앞서 나에게 엄격하고 절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자기성찰을 한다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자신을 살펴본 후에야 남을 도와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진정한 사랑으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혹 남보다 내가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누구를 돕는다면 받는 사람은 고마움보다는 비참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잘 될 수 있도록 충고한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내 삶의 모범 없이 강요하는 가르침이라면 상처만 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성찰을 한 후 행동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도움은 기꺼이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옛 말씀도 “자기 몸을 닦은 뒤에 집안을 거느리고, 자기 집안 거느린 뒤에 나라를 다스린다.”身修而后家濟, 家濟而后國治-대학- 고 했습니다. 자기성찰이 모든 행위의 처음과 나중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려거든 먼저 자기 자신에게 충고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자기성찰에 충실한 열심과 정열이 주어지길 기대합니다. 잘못된 열심은 영혼을 상처 나게 합니다.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더할수록 하느님 앞에 나를 비추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 신자는 매사를 기쁘게 희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만큼 살아야 하고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 기쁨과 평화가 없을진대 누구에게 평화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남에게 무엇을 전하려면 그만큼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려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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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하십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먼 훗날에 이 세상 삶을 모두 마친 다음에는 꼭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고 열이면 열 모두 고백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하느님을 직접 보게 되는 지복직관의 상태가 된다고 하지요.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하고 직접 뵙는 것이 과연 행복할까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삶 안에서 보면 하느님과 관계되는 모든 것을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주일미사에 오면서도, 미사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시계만 연신 바라보면서 짜증 냅니다. 기도와 묵상을 1시간 하라고 하면, “어떻게 1시간씩이나 기도해요?”라면서 화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사랑 실천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대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싫고, 주님과 함께하는 일을 거부하면서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있고 함께 마주하며 대화를 나눌 수가 있을까요? 주님께 시간을 내어드리지 않는 신앙인을 향해 어떤 책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더군요.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이교도’
단순히 십계명의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모든 계명을 철저하게 지켰던 부자 청년이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 말씀에 울먹이며 떠났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라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자신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이교도가 아닌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길은 넓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문이 좁고 비좁아서 이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지만, 생명으로 이끄는 문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를 황금률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자신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을 드러내는 것은 멸망으로 이끄는 넓고 편한 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좋은 길은 남에게 해주는 이타적인 삶에 있었습니다. 그 삶이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는 어떤 사람이 주님을 직접 마주 보면서 기뻐하게 될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지금 내가 살아야 할 삶의 방향이 결정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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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아, 참사람이 되시게>
마태오 7,6.12-14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지 마라, 황금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사람아, 참사람이 되시게>
사람아
그대 사람이니
참으로 사람이 되시게
그대 빚으신
하느님의 지으심에
함께 일하는
참사람이 되시게
사람아
그대 사람이니
참으로 사람이 되시게
그대 빚으신
하느님의 함께하심에
함께 뛰노는
참사람이 되시게
사람아
그대 사람이니
참으로 사람이 되시게
그대 빚으신
하느님의 살리심에
함께 어울리는
참사람이 되시게
사람아
그대 사람이니
참으로 사람이 되시게
그대 빚으신
하느님의 의로우심에
함께 숨쉬는
참사람이 되시게
사람아
그대 사람이니
참으로 사람이 되시게
그대 빚으신
하느님의 자유로우심에
함께 춤추는
참사람이 되시게
사람아
그대 사람이니
참으로 사람이 되시게
그대 빚으신
하느님의 완전하심에
함께 깃들이는
참사람이 되시게
사람아
그대 사람이니
참으로 사람이 되시게
그대 빚으신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함께 물드는
참사람이 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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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늘 길, 좁은 길, 생명의 길>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생명의 문은 왜 좁고 멸망의 문을 왜 넓을까요? 생명의 문이 좁은 것은 많은 사람이 못 들어오도록 하느님께서 일부러 좁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기를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셨고, 일부 개신교에서 주장하듯 십사만사천 명만 정원으로 정하셨기에 좁은 걸까요?
그렇다면 생명의 문이 좁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이 좁은 것이고 하느님 사랑의 품이 비좁은 것일 겁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닐 거라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성심성월을 지내며 우리가 믿는 믿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하해와 같다는 것이고, 주님께서도 하늘에는 있을 곳이 많으며 당신은 제자들과 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려고 먼저 하늘에 올라가신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의 문이 좁은 것은, 그 문이 하늘 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문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넓은 길이고 넓은 문이지만 하늘로 오르는 길과 문은 산을 오르듯이 올라야 하기에 싫고 힘들고 좁습니다.
시편에서 이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이 세상 길은 자기 욕심대로 가고, 가고 싶은 대로 가기에 편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가지만 하늘길은 손도 마음도 깨끗하고 정신을 오로지 길 가는 데만 써야 하기에 가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먼저 그 길을 가시며 같이 가자고 초대하시고, 당신을 따라오면 혼자서는 가기 어려워도 갈 수 있다고 부르십니다.
사실 주님께서 하늘에서 굳이 이 땅에까지 내려오신 것은 우리를 그 하늘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인데 문제는 그 길이 꽃길이 아니고 십자가 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꽃길이라 즐기며 노니다가 하늘에 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께서 하늘길을 가시밭길, 십자가 길로 만드시고 그래서 그 길 빨리 벗어나게 하시려는 것 아닌가 하고 제가 생각하는 것은 너무 억지춘향인가요?
억지춘향일지라도 하느님 사랑을 그렇게라도 믿고 싶은 오늘 저입니다.
내일부터 금요일까지 강론을 올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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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제 식대로 말아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손님 대접을 할 때 제가 거의 매번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 형제 중에 접대의 황제 형제는 손님이 오시면 손님에게 갖가지 차와 과자 등을 내놓고 손님이 미안해 할 정도로 극진하게 대접을 하는데 저는 아무 것도 내놓지 않다가 얘기가 끝나갈 즈음에야 내가 아무 것도 내놓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커피를 마시지 않고 주전부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같이 술을 한 잔 하는데 술은 못하는 사람 옆에 앉으면 따라줄 줄을 모릅니다. 저를 무시하거나 배려의 정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정말 술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말씀 잘 이해해야겠습니다. 술대접을 바라니 술대접을 잘 하라는 말씀이 아니지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기 바라는 것처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가 좋아하리라고 나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그리고 그를 위한답시고 그것을 그에게 줍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다른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위하는 마음만 믿고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됩니다.
정말 그를 사랑한다면 정말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정말 그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정말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압니다. 사랑의 순수성만큼, 사랑의 정도만큼 그것을 압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아야 하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소중히 여긴다고 하여도 상대가 그 가치를 모르고 그래서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주지 말아야 합니다. 짓밟거나 심지어는 싫다는데도 왜 주냐고 시비 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다보면 어떤 신앙 집단에서 전단을 나눠주곤 합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기에 나눠주는데 사람들은 보지도 않고 그것을 그냥 쓰레기통이나 길바닥에 버립니다.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의 좋은 마음과 애씀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마음 아프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 쓰레기가 되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그래서 저는 비록 나하고 관련이 없는 전단일지라도 심지어 제가 싫어하는 종파의 전단일지라도 꼭 받습니다.
거기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안 하고는 내 몫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수고에 보람을 주지도 못해도 적어도 그들의 수고를 제가 짓밟지 않기 위해서 그러합니다.
사람에게는 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보물을 주어도 그 보물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셔도 그것이 은총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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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생명의 좁은 문, 구원의 좁은 문>
-은총, 분별의 지혜, 황금률-
어찌보면 하루하루가 좁은 문의 연속입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의 자리, 바로 거기가 생명의 좁은 문이자 구원의 좁은 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는 생명의 좁은 문,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해온 삶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통과해 왔고 통과하고 있고 통과해야할 생명의 좁은 문, 구원의 좁은 문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통과해야 할 문이요 마지막 가장 어려운 생명과 구원의 좁은 문이 죽음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강력히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누구나의 광야 인생 여정, 하루하루 통과해 나가야할 좁은 문의 연속입니다. 끝까지 잘 통과하면 성인이지만, 도중에 넓은 문의 유혹에 빠져 인생 좌초하여 괴물로, 폐인으로 끝나는 인생은 얼마나 많은지요! 새삼 인생은 선물이자 평생 좁은 문들 통과의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좁은 문을 힘껏 잘 통과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하고자 날마다의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각각 고유의 좁은 문입니다. 한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도 각자 통과해야 할 구원의 좁은 문은 다 다릅니다. 사람 숫자만큼 좁은 문의 수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힘들어 무척이나 외롭고 고독하기도 합니다. 좁은 문에 좌절하고 절망하여 목숨을 끊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굳이 구원의 좁은문 찾아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주어진 자리가 생명의 좁은 문, 구원의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행복은 생명의 구원은 바로 지금 여기 있습니다. 눈만 열리면 언제 어디나 구원의 좁은 문, 구원의 꽃자리입니다.
사실 밖에서 볼 때, 몰라서 좁은 문이지 살다 보면 내적으로 점차 넓어지는 생명의 넓은 문일 수 있습니다. 연륜의 수도자들에겐 그렇습니다. 예전 50년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선배 여교사의 충고가 생각납니다.
“이선생,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좀 쉽게 살아.”
“저에겐 이게 쉽게 사는 것인데요.”
힘껏 정도를 따라 사는 것이 사실 저에겐 힘들어도 쉽게 사는 일이었습니다. 그후 20여년후 여기서 뜻밖에 그 선생님을 만났을 때, 참 계면쩍어 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동안 영세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됐던 것입니다. 수도생활도 밖에서 볼 때 좁은 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문의 수도생활도 사랑하면 점차 내적으로 넓어지는 생명과 구원의 좁은 문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도, 공부도, 겸손도, 가난도. 침묵도, 순종도, 정결도 하느님을 사랑하듯 그렇게 모든 수행을 사랑하여 온갖 자발적 노력을 다할 때 주님 의 은총과 더불어 날로 내적으로 넓어지는 생명과 구원의 좁은 문이 됩니다. 언젠가 써놨던 고백시가 생각납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자리 찾지 말자
어디든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그 어디든 뿌리내려
자리 잡아
하늘 가득 담아
하늘 사랑 활짝 꽃피어 내면
바로 거기가 구원의 꽃자리이다.”
행복기도중 한 대목도 이런 진리를 고백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도 수도생활의 좁은 문이 날로 감미로운 생명과 구원의 문으로 변모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며 성규 머리말 끝에서 우리를 격려하며 용기를 줍니다.
“좁게 시작하기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말아라.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니, 주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그분의 교훈을 항구히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성규 머리48-50)
오늘 복음은 세 단절어로 되어 있는데 좁은 문 통과가 그 하나가 둘은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과 황금률입니다. 참 공교롭게도 생명과 구원의 좁은 문 통과에 큰 도움을 주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분별의 지혜요 겸손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참으로 분별의 지혜를 지닌 이들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않고, 우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시기와 질투, 분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 지도 모른다.”
좋은 일을 하고도 어처구니 없는 해를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차별이나 무시가 아니라 분별의 지혜입니다. 아무리 귀하고 좋은 가르침도 때와 사람을 봐야 합니다. 이런 분별의 지혜가 좁은문 통과에 결정적 도움이 됨을 봅니다. 얼마나 많은 선의와 정의의 의인들이 개혁에 좌초하여 억울한 박해와 죽음을 당했는지요. 어제 도올 김용옥의 주역 강의중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난세다. 악랄한 선인들이 필요하다.”
하나는 황금률입니다.
동서양 공통의 지혜로운 잠언입니다. 사랑의 이중계명과 황금률을 잣대로 하면 좁은 문 통과도 수월할 수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이요,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 하지 않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사랑, 공감과 배려, 존중의 사랑입니다. 이런 황금률의 진리대로의 삶이 좁은문 통과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바로 이런 황금률 실천의 모범이 제1독서 창세기의 아브람입니다. 어제 오늘 아브람의 여정을 보면 좁은문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좋은 믿음에 지혜로웠고 한결같았습니다. 주님의 제단을 쌓음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했습니다.
오늘도 아브람은 사심이나 욕심없는 관대한 마음으로 롯에게 선택권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롯은 자기가 택한 참 좋은 요르단 땅에 멸망할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음을 꿈에도 생각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어 하느님께 큰 축복을 받는 계기가 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자들의 좁은문 통과에는 늘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함을 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생명과 구원의 좁은문 통과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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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7,13)
<생명으로 이끄는 문!>
'오늘 복음(마태7,6.12-14)은 짧지만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곧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지 마라.'와 '황금률'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단락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문은 '이미와 아직의 나라인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나라이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는 죽음 저 너머에서 마주하게 될 나라입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인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그래서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고 하십니다.
반면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고 하십니다.
'나는 어느 문을 향해 가고 있는가?'
'그리고 생명으로 이끄는 문인 좁은 문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7,12/황금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대로 사는 것.
그것의 본질인 복음대로 사는 것.
서로 사랑하며, 용서하며, 화해하며 사는 것.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는 것.
머리로 이해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삶으로 살아내는 데에는 큰 문제로 다가옵니다. 참으로 실천하기가 힘든 문제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 힘듦이 좁은 문으로 다가옵니다.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24,13)
좁은 문은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의 문이요 생명의 문입니다. 모든 이들은 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제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잘 살고 계십니까?
정말로 잘 살고 계십니까?
잘 살기 위해서 함께 노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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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mVtdItCkI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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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 6)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소중한 것은
소중한 것을
알아보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소중함의
여정입니다.
소중한 것을
알아보기 위해
필요했던
우리의
여정입니다.
소중함의 문(門)을
열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알아보게
하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진주가
빛나는 것은
진주를 알아보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에게
주어야 할 것도
빛나는 진주의
마음입니다.
진주가 되었기에
진주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참고 기다린
시간이
진주가 됩니다.
소중한 것은
던지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지는
것입니다.
햇살을 받듯
은총을 받고
축복을
빋는 것입니다.
깊이 깊이
품어안으면
꽃이 되고
진주가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주가 있고
구원이 있음을
믿습니다.
서로를 더럽히는
돼지같은
만남이 아니라
서로를
아름답게 하는
진주같은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소중한 것은
소중한 것을
알아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진주가 되고
빛이 됩니다.
서로에게
빛이 되는
소중한 사랑의
복음입니다.
진주같이
영롱한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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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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