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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먼저 한 수행자의 삶을 고요히 떠올려 드리고자 합니다.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지식 청화 대종사 (淸華, 1923년 2월 6일 ~ 2003년 11월 12일)께서는 젊은 날의 허무를 깊이 관하시어
세상의 번뇌를 등지고 고요를 향한 마음 하나로 산중에 들어서셨습니다.
지리산의 바람과 설악의 눈을 수행의 도반으로 삼으시며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계율을 등불로,
정진을 그 등불을 지키는 바람으로 삼아 평생을 청정한 수행에 바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고요하면 세상이 고요하다.” 이 말씀은 스님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수행의 결이었습니다.
▣— 스님의 이력·저술·가르침을 밝히는 법문
스님께서는 1924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시어 어린 시절부터 생사와 존재의 문제를 깊이 관하셨고,
출가 이후에는 지리산·설악산·오대산 등 깊은 산중에서 참선·묵언·기도·독경으로 하루를 채우셨습니다.
스님의 수행은 화려한 언어가 아니라 고요한 숨결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숨결은 산사의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처럼 지금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스님의 가르침은 산중 수행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아주 실질적인 지혜를 남기셨습니다.
1.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 첫 수행이다
고요는 외부가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됨을 일깨우셨습니다.
잠시 멈추고 호흡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고요로 향합니다.
2. 계율은 마음을 지키는 울타리다
계율은 억압이 아니라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선택임을 보여주셨습니다.
3. 고독은 자기 자신을 만나는 스승이다
스님께서는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독은 스님에게 가장 큰 도반이었습니다.
4. 단순함이 곧 지혜다
스님의 삶은 단순함 속에서 본질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불필요한 것을 내려놓을 때 삶은 가벼워지고 선명해집니다.
5. 수행은 마음을 바로 세우려는 모든 이의 길이다
스님은 수행을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을 바로 세우는 것, 그것이 수행이다.” 이 말씀은 현대인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님의 저술 또한 이러한 가르침을 담아 오늘날 많은 이들의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청화스님 법문집
스님의 법문을 모아 엮은 대표적 저술
수행·계율·고요·마음의 본질에 대한 핵심 가르침 수록
마음이 고요하면 세상이 고요하다
스님의 대표 법문을 현대인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책
스님의 수행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헌
산중수행 이야기
스님의 산중 결사 수행 경험을 중심으로 한 기록
고독·자연·수행의 관계를 깊이 있게 다룸
청정한 길
계율 중심 수행의 의미를 강조한 저술
스님의 수행 철학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냄
주요 저서 및 법어집
금강심론
정통선의 향훈 (법어집)
마음, 부처가 사는 나라 (행장과 법문 모음)
가장 행복한 공부 : 청화스님 말씀
청화 스님의 불교핵심교리 설법
청화 스님의 참선공부법
위대한 스승 청화 큰스님 (제자 및 후학들의 증언과 회고를 묶은 책)
이 저서등은 스님의 수행과 법문을 그대로 담은 등불입니다.
또한 스님의 업적은 화려한 외형이 아니라 수행의 본질을 되살린 데 있습니다.
계율 중심 수행의 부활,
산중 결사 수행의 현대적 계승,
참선 수행의 본래 정신 회복,
대중 교화의 새로운 방향 제시,
그리고 수행자의 삶 자체가 가르침이라는 모범을 남기셨습니다.
— 스님의 고요가 우리에게 남긴 길
스님께서는 2003년 11월 12일 오후 10시 30분 세랍 80세, 법랍 56세로 고요히 수행자의 삶을 마감하셨지만
스님의 고요는 여전히 산중에 머물고, 스님의 자비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며,
스님의 길은 고요를 찾는 모든 이에게 지금도 조용한 길잡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청화스님의 생애를 통해 고요는 멀리 있지 않고 마음을 바로 세우는 그 자리에서 이미 시작됨을 배우며,
스님의 가르침을 통해 수행은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맑히고자 하는 모든 이의 길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스님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고요의 향기가 오늘 가장 헹복한 공부 도량에 모인 모든 분들의 마음에도 잔잔히 스며들기를 발원합니다.
출생과 출가
1924년 전남 장성 출생
어린 시절부터 생사와 존재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짐
1950년대 초 출가, 이후 평생을 산중 수행에 헌신
지리산·설악산·오대산 등 깊은 산중에서 장기간 결사 수행
수행과 정진
극기·청정·고요를 중심으로 한 삼학(戒·定·慧) 수행
계율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아 “계율 없는 수행은 뿌리 없는 나무”라 강조
묵언·참선·기도·독경을 중심으로 한 청정 수행 전통의 계승자
대중 교화
산중 수행자였지만, 법문은 전국적으로 큰 울림을 줌
화려한 언어 없이, 수행자의 숨결 그대로 담긴 담백하고 깊은 법문으로 유명
현대인에게 “마음이 고요하면 세상이 고요하다”는 가르침을 널리 전함
입적
2003년 11월 12일 오후 10시 30분 세랍 80세, 법랍 56세 , 수행자의 삶을 마감
입적 후에도 스님의 법문과 저술은 많은 이들에게 수행의 길을 밝히는 등불로 남음
청화 대종사 스님의 생애
산은 스님을 부르지 않았고, 스님 또한 산을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고요를 향한 마음이 자연스레 산중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젊은 날의 허무가 스님의 발걸음을 출가의 길로 이끌었고,
그 길 위에서 스님은 세상의 소리를 멀리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소리를 더 깊이 들으셨습니다.
지리산의 바람은 스님의 숨을 닮아 고요히 흐르고, 설악의 눈은 스님의 마음처럼 맑고 차분하게 내려앉았습니다.
스님은 산중의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고독은 스님에게 세상보다 더 큰 스승이었기 때문입니다.
계율은 스님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었고, 정진은 그 등불을 지키는 바람이었습니다.
스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고요하면 세상이 고요하다.”
그 말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스님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스님의 하루는 기도와 참선과 묵언으로 이어졌고, 그 고요한 숨결은 산사의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처럼 지금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스님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스님의 고요는 여전히 산중에 머물고, 스님의 자비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며,
스님의 길은 고요를 찾는 모든 이에게 조용한 길잡이가 되어 있습니다.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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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첨부 - 하늘이 오래 전 작성 보관 법문 문건 2부
1.
선지식을 찾아서 - 청화스님 법문
“진리 그대로의 성품 불성광명(佛性光明)이 진여불성”
일체 공덕 다 갖추고 있는 근본 생명이 광명
우주(宇宙)의 본체(本體)가 바로 진리입니다
참선(參禪)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장 쉬운 공부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 용어로 안락스러운 법문 즉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고 합니다.
다른 것은 까다롭고 경(經)도 많이 외워야 하지만 참선공부는 경을 많이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선(參禪)은 어디서 빌려온 것도 아니고 또 다른 것을 보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가 본래(本來) 갖추고 있는, 본래 자기의 생명(生命) 자체인 마음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쉽고 가장 경비(經費)도 안 드는 공부입니다.
그렇게 가장 쉬운 것이 어려운 한문(漢文) 문화권(文化圈)을 거쳐 오면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참선 공부가 어째서 쉬운가?
이는 우리가 원래 갖추고 있는 생명(生命)의 보배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쉽습니다.
나한테 갖추어져 있는 마음자리, 나한테 갖추어 있는 보배 가운데 최상(最上)의 보배 마니보주(摩尼寶珠), 이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래서 과거(過去)에 도인(道人)들은 자기 마음 찾는 공부를 비유(譬喩)해서 기우멱우(騎牛覓牛)라 했습니다.
소를 타고서 소를 찾는 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소가 어디에 있는 지 안 보이니까 지금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소를 찾는 격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과 깨달은 도인(道人)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깨달은 분들은 모든 현상(現象)의 본모습을 봅니다. 본 성품(本性品)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본 성품을 못 보고 겉의 현상(現象)만 봅니다.
우리는 우선 깨달은 분과 우리 중생과의 이런 차이를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선(參禪)이 쉽다는 이유는 어차피 현상적(現象的)인 것은 본 성품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봄이 가면 반드시 여름이 오듯이 우리 중생들은 본래(本來) 성품(性品)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방황(彷徨)하는 나그네가 결국은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듯이 그와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기왕이면 잘 먹고, 잘 입고, 많이 쓰고, 많이 놀고 또 높은 감투까지 쓰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현상적으로 거기에 얽매어 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사람도 역시 어느 땐 가는 죽어서 윤회(輪廻)하다가 결국은 본 성품(本性品)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돌아가야 할 것이며 또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故鄕)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부처님이라고도 하고 여래(如來)라고도 합니다.
여래란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꼭 진리(眞理) 그대로의 성품(性品)을 보고 여래(如來)라고 합니다.
진리에서 나와서 진리로 가고 -같을 여(如)자, 올 래(來)자- 같을 여(如)자, 그 자(字)는 바로 진여(眞如)라! 진리를 의미하는 것인데,
여래란 말은 진리에서 그대로 조금도 흠축(欠縮)이 없이 왔다는 그런 뜻입니다.
따라서 진리에서 왔으니까 다시 진리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眞理)를 생각할 때는 진리는 고정불변한 어떤 교리(敎理)가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 같은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진리(眞理)는 모든 생명(生命)을 다 감싸 있는 일체(一切) 존재(存在)의 근본자리입니다.
다시 확실히 말씀드리면 우주(宇宙)의 본체(本體)가 바로 진리입니다.
따라서 진리(眞理)는 과거(過去)도 없고, 현재(現在)도 없고, 미래(未來)도 없고 언제나 그대로 있습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바로 광명(光明)인 것입니다.
우리는 참선(參禪)을 해서 깨닫고자 합니다마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른바 목적(目的)을 뚜렷이 설정을 해야만이 그곳에 도달하려고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또한 거기에 걸맞는 수행(修行)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자기 목적의식(目的意識)이 희미하면 가고자 하는 열성도 적고 또 공부하는 방법도 거기에 계합(契合)된 걸 맞는 공부를 못합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여래 자리, 또는 부처님 자리,
이 자리는 그냥 무조건 어디에 인격적(人格的)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빛입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이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하고 신통자재(神通自在)를 하였습니다.
도는 그곳까지는 미처 못 간다하더라도
부처님을 조금 모셨지만 부사의(不思議)한 힘으로 아픈 것이 그냥 나아버리는 원리(原理)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오염(汚染)된 생명(生命)이 차근차근 정화(淨化)되어서 그러한 광명세계(光名世界)로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부사의(不思議)한 힘을 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천지우주(天地宇宙)의 근본 생명(生命)인 광명(光明) 자체는 일체(一切) 공덕(功德)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상적(現象的)으로 잘나고 못나고 또는 학문적(學問的)으로 지식(知識)이 많고 적음은
마음의 본바탕을 닦아서 가는 생명의 본질인 광명을 향해서 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일자무식도 상관이 없고 또 과거에 설사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중생(衆生)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쉽게 생각하면 사람이나 동물만 중생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은
부처님의 근본(根本) 도리(道理)에서 볼 때는 유정무정(有情無情), 식(識)이 있는 것이나
의식(意識)이 없는 것이나 또는 유상무상(有像無像), 모양이 있는 것이나 모양이 없는 것이나 모두가 다 중생(衆生)입니다.
따라서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 즉 모든 중생(衆生)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는 말은
어떠한 것이나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두두물물(頭頭物物), 천지만유(天地萬有)가 모두가 다 불성(佛性)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가슴에 있을 것인가,
머리에 가 있을 것인가?
불성(佛性)은 우리 머리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가슴 또는 심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몸 전체가 그런 불성의 화신(化身)입니다.
나무 그러면 나무 핵심(核心)인 목심(木心)에 불성(佛性)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무 전체(全體)가 불성이 화신입니다.
불교(佛敎)는 바로 생명(生命)의 종교(宗敎)입니다.
요즈음 생명(生命) 해방(解放) 운동을 부르짖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생명(生命)이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本質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모두가 다 생명(生命)뿐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서 불교(佛敎)야말로 견성(見性)을 해서
생명(生命)의 성품(性品)을 딱 체험(體驗)해 버려야 비로소 안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가장 지름길이 참선(參禪)공부입니다.
참선공부는 마음을 열고 하는 공부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선(先)자, 깨달을 오(悟)자, 먼저 이치(理致)나 이해(理解)로
깨닫고 닦아야 참선(參禪) 공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2.
청화스님 법문 -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부처님 가르침은
욕계, 색계, 무색계를 다 해탈하고
모든 번뇌를 다 멸진(滅盡)시키는 가르침
무주당 청화 큰스님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산시산(山是山)이요 수시수(水是水)라.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그런 법어(法語)가 있습니다.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중생(衆生)이 본 산 그대로 산이요, 물 그대로 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삼독심에 가리어서 실제적(實際的)인 실상(實相)을 못 보고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도 미처 못 보며,
또한 일체(一切)의 존재(存在)의 본 성품(本性品)도 못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조사어록의 법어는
우리 중생이 보는 산 그대로 산이요, 우리 중생이 보는 물 그대로 물이라는 그런 의미(意味)가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法門)에는 많은 갈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고마문령(藁馬聞鈴)처럼 따라가면서 그대로 공부하는 성문승(聲門乘)이 있고,
또는 스스로 명상(暝想)을 하여 인연(因緣) 따라서 깨닫는 연각승(緣覺乘)도 있으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실상(實相) 그대로를 믿고 닦아 나가는 보살승(菩薩乘)의 법도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법 가운데서 참선(參禪)하는 법이 가장 최상승(最上乘)의 법이며 바로 불도(佛道)의 정문(頂門)입니다.
그래서 불경(佛經)에도 최학도(最學道)라고 했듯이 우리 불자(佛子)가 배우는 공부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배움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신미(辛未)년 삼동(三冬) 결제(結制)를 즈음해서 최학도(最學道)를 공부하고자 많은 스님들이 모였고,
또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최학도인 선(禪)에 대한 간절한 서원(誓願)으로 이 자리에 모이셨습니다.
비단 우리 불교(佛敎) 문중(門中)뿐만 아니라,
고도로 문명(文明)이 발달 된 오늘날의 세상에는 불교 외에도 많은 종교(宗敎)가 있고 또 종교 외에도 가지가지 수련법(修練法)이 있습니다.
그래서 각 수련법에서는 자기 나름대로 체계(體系)를 세워 놓고 각기 자기 수련법이 제일 수승(秀勝)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때에 이 참선법(參禪法)이 어째서 가장 수승한가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우리 공부에 대한 바른 체계가 없으면 그냥 그쪽으로 따라가고 맙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추운 날씨에 이렇게 참여하신 여러분들을 위하여,
부처님의 참선법이 가장 수승한 성불(成佛)의 지름길이고,
이른바 최학도(最學道)이며, 성불(成佛)의 정문(頂門)인 것을 아실 수 있도록, 아니면 어렴풋이 짐작이라도 하시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라!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에게 49년 동안 설법(說法)을 하셨습니다.
45년 설도 있으나 49년 설을 더 많이 주장합니다.
그런 설법 가운데서 그때그때 중생의 그릇 따라서 하는 법문(法門)이기 때문에 방편설(方便設)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연도(年度)로 따지면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후 12년 동안에는 우리 중생 차원(次元)에서 상식적으로 보고 느끼는, 있다 없다,
그런 차원에서 하신법문(法門)이 초기(初期) 법문, 즉 초기 근본불교(根本佛敎)의 법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일체종지(一切種智), 만중생(萬衆生)의 본성품(本性品)과 현상(現象)을 다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방편(方便) 법문(法門)을 하신다 하더라도 부처님 법문(法門)은 그 속에 모든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뜻이 다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 중생들은 그냥 문자(文字)나 말만 집착(執着)해서 부처님의 초기 경전을, 있다 없다 에 관해 말하고
또 일반 세간적(世間的)인 윤리(倫理), 도덕(道德)의 차원을 말하기 때문에 별로 깊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초기 법문은 우리 중생의 그릇 따라서 하신 법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정도의 법문은 기독교(基督敎)나 유교(儒敎)나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즉 악(惡)을 피하고 선(善)을 행하라든가,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한다든가 명상(暝想)을 조금 한다든가 하는 정도의 그런 법문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衆生)의 그릇이 조금 익어진 때는 부처님이 금생(今生)에 나오신 뜻이 그냥 세간적(世間的)인 범주(範疇), 일반(一般) 윤리(倫理) 도덕적(道德的)인 범주에 멈추는 것이 아니므로
부처님께서 사실 그대로를 말씀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제법공(諸法空)의 공 도리(空道理)를 말씀하셨습니다.
22년 반야설(般若設), 즉 49년 설법(說法) 가운데서 22년 동안이나 공 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 것인가?
우리는 그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뜻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있습니다만 이 소중한 내 몸이 원래(原來) 공(空)이다,
국민학교부터 대학(大學)까지 공부한 소중한 내 관념(觀念)도 공(空)이다 라고 생각할 때는 굉장히 허무(虛無)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실상지혜(實相智慧)에서 볼 때에는 공(空)인 것입니다.
영가현각(永嘉玄覺) 대사(大師)가 도(道)를 깨닫고 법희선열(法喜禪悅)에 넘쳐서 지은 노래인 증도가 가운데서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하고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
꿈속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地獄)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그런 것이 분명히 실재(實在)하게 보이지만 깨달은 뒤에는
이 대천세계(大千世界),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천지우주(天地宇宙) 모든 세계가 텅텅 비어서 보인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런 뜻을 우리 중생들이 쉽사리 알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이런 뜻을 모르면 우리 불자님들은 그저 있다, 없다, 나다, 너다, 내 것이다, 네 것이다 하는 차원(次元)에서 머물다가 맙니다.
따라서 번뇌(煩惱) 해탈(解脫)을 못하고 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다 해탈(解脫)하고 모든 번뇌(煩惱)를 다 멸진(滅盡)시키는 가르침입니다.
즉 삼계(三界)를 해탈하는 가르침입니다.
번뇌에서 해탈해야 만이 참다운 자유(自由)가 있고, 참다운 행복(幸福)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바로 인간론(人間論)이고 또한 바로 행복론(幸福論)입니다.
본래적인 인간(人間)의 참다운 자기(自己)를 아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가장 최상(最上)의 영생(永生)의 행복(幸福)을 맛보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번뇌(煩惱)에 구속(拘束)되어서 해탈(解脫)을 못하면 참다운 자유(自由)와 참다운 행복(幸福)은 없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으면, 나를 위해서 나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것은 자기한테, 자기한테 싫은 것은 남한테 떠넘기는 것이 중생(衆生)의 본(本) 근성(根性)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다 공(空)이라는 그런 공 도리(空道理)를 모르면 우리 중생심의 차원(次元)에서 약간 좋은 짓을 한다고 해도 사실은 위선(僞善)을 면치 못합니다.
내가 분명히 있으니 기왕이면 좋은 음식, 자기가 먹고 싶고, 좋은 옷을 자기가 입고 싶고, 좋은 집에서 자기가 살고 싶을 것입니다.
따라서 억지로 도덕(道德)을 부린다 하더라도
이런 제법공(諸法空)의 도리(道理)를 모르는 차원에서 위선(僞善)은 절대로 면치 못합니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참선(參禪)
이것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요, 교(敎)는 바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우주만물(宇宙萬物)은 오로지 불심(佛心)뿐입니다.
첫댓글 마하반야바라밀 ~🙏🙏🙏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지식 청화(淸華) 대종사(大宗師) - 복 지으시어 감사 드립니다.
약사여래불 약사여래불 나무약사여래불 ~ ()()()
佛ㆍ法ㆍ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의 加被와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You are welcome to the Buddha, the Dharma, and the Three Seasons.
I pray with the utmost heart that the holy and merciful Buddha's hide and mercy shine. Thank you.
attain Buddhahood
Amitabha Buddha, Avalokiteshvara Bodhisattva()()()
= 朴圭澤 華谷·孝菴 公認 大法師(佛敎學 碩士課程 2學年 在學中)의 좋은글 中에서(Among the good articles of Park Gyu-Taek HwagokㆍDharma-Bhānaka and Hyoam's official Daebosa(I'm in my second year of a master's course in Buddhist studi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