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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에 썼던 글입니다.
최근에 예전 생각이 좀 나서 다시 올려봅니다.
우선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하나의 사건, 어떤 특정한 게시물을 보고 생각난 게 아니라
후끈하게 달아오르곤 하는 게시판을 전체적으로 보면서 잠시 해본 생각입니다.
게시판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건 좋아요. 팀이 잘 나간다는 증거 중 하나니까요
그리고, 예전처럼 특정인 때문에 팬들끼리 편갈려 싸우는게 아니고 '야구'얘기 하는거니까 재밌고요.
앞으로도 후끈하게 놉시다. 그게 이 곳의 재미고 장점이니까.
아무튼, 옛날 글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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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글스 야구를 보면서 옛날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동네 오락실에서 삼성팬, LG팬 친구랑 같이 떡볶이 내기 야구오락을 하던 생각 말입니다.
뜬금없이 왜 오락실 야구 생각이 났을까요?
한화가 야구를 못해서?
연결이 되긴 하지만 그게 결론은 아니고요
내가 지금 왜 이 야구를 보고 있나...하는,
말하자면 '초심'과 '본질'에 대한 생각입니다.
1990년 즈음 오락실에 다녀보신 분들이면,
아마 'Stadium Hero' 라는 야구 게임을 기억하실 겁니다.
저 이름이 낯설다면 <.482> <.499> <.474> 뭐 이런 이름들은 기억을 하시겠지요.
기억이 안 나신다고요? 에이, 그럴리가요
야구를 좋아했고, 오락실을 다녔던 올드팬이라면
엄마 지갑에서 백원짜리 몇개 훔쳐 오락실 갔다가 죽도록 혼나본 사람이라면
이 게임을 기억 못할리가 없잖아요.
스타디움 히어로. 신야구.
뚱뚱이. 홀쭉이... 이걸 어떻게 기억을 못해요.
단돈 400원만 가지고 있으면
친구랑 둘이서 9회말까지 맞붙을 수 있었는데요.
이렇게 뚱뚱한 애들은 홈런을 잘 쳤지만 발이 느렸죠.
밀어치든 당겨치든 그런 거 중요하지 않았어요. 맞으면, 일단 넘어갈 확률이 많거든요.
그래서 대개 저 게임의 승패는 12:10 이런 식으로 결정나곤 했죠.
위기 상황에 마구 투수를 등판시키면
저렇게 몸에서 불꽃을 쏘아대며 삼진을 잡아줘요.
다만, 마구는 1이닝을 채 넘기기 어려우니까 아껴서 써야 되요.
예나 지금이나, 불펜 혹사는 안 된다는 뜻이겠지요 ^^
아무튼, 저 오락은 참 재밌었어요.
친구랑 200원씩 나눠내고 떡볶이 내기 한판을 벌입니다.
긴장감은 한국시리즈 7차전에 맞먹어요.
지면, 떡볶이 값은 둘째치고라도
친구의 그 놀림을 견뎌낼 자신이 없으니까요.
저 오락에 등장하는 투수는 분명히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인데
그 시절 꼬맹이들은 죄다 송진우니 한용덕이니, 김상엽이니...하면서 우리 영웅 아저씨들 이름을 붙였거든요
상대팀 뚱뚱이가 홈런을 치면요
그건 송진우가 김성래한테 홈런을 맞은 것과 똑같은 분노와 충격이었어요.
홈런을 치면 친구는, 그냥 자기 혼자 좋아하는 게 아니라
"아하하하~ XX" 하면서 욕을 섞어가며 유치하게 놀렸거든요.
이건 반드시 이겨야 됩니다.
죽기살기로 해서 이겨야지, 안그러면 몇시간 동안 놀림을 당하잖아요,
그래서 눈에 독기를 품고 오락을 해요.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는 꼭 해야될 게 있어요.
바로 '사파리'나 '사구구'를 고르는거죠.
.482 .499 이 친구들의 경기 중 실제 타율은 대개 9할 정도 됩니다.
방망이에만 맞추면 절대 안 죽어요
홈런이 되거나, 아니면 직선타를 맞고 야수가 기절을 해서 안전하게 1루에 가거나 대개 둘 중 하나죠.
저 무시무시한 타자를 상대하는 방법은 딱 두개에요. 마구투수 아니면 데드볼
데드볼에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투수가 '베나구'를 던지려면 조이스틱을 위로 올려야 되요.
그리고 던진 다음에 최대한 꺾어서 공을 그 방향으로 보내죠
그런데 제구력이 안 좋은 투수들은 휘는 각도가 밋밋해요.
그러면 저 괴물같은 타자들은
제 자리에 서서 치는 게 아니라 몸을 그쪽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그러니까 바깥쪽으로 이동하면서 스윙을 해요.
그렇게 쳐도 홈런이에요.
<사칠사> 혹은 <사오공>같은 애들도 잘치는데
이 뚱뚱이 사구구와 흑인 사팔이의 포스엔 못 미쳐요.
그래서 일단 사팔이나 사구구를 빨리 찜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선착순 이거든요. 먼저 먹으면 임자.
400원을 넣고 초기화면이 뜨면
두 꼬맹이의 정신은 온통 사구구와 사팔이에 쏠립니다.
이겨야 되니까, 승리 말고는 의미가 없으니까, 떡볶이 값을 저 자식이 내야 되니까.
무조건 잘하는 캐릭터를 고르는 게 장땡이었던 거에요.
그때는 몰랐어요.
사구구든 사칠사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요.
사구구 사팔이를 내가 다 먹어서 그 친구를 콜드로 눌러버리면 정말 세상을 다 가진 줄 알았는데
지금 돌아보면, 동네 오락실 구석진 자리에서 친구와 보낸 시간중에서 내가 그리운 건 그 승리의 환호가 아니더라고요.
저는, 사팔이 사구구의 홈런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그저, 그 친구와 그때 그 시절이 그리울 뿐이죠.
지금 20년 넘게 만나고 있는 친구들이랑,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웃고 떠드는 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그땐 몰랐거든요.
인생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기 시작할 나이가 되면서
친구랑 단돈 몇푼에 그렇게 신나게 보낼 기회도 별로 없거니와
저 오락을 즐기던 여러 친구들 중 한놈은 이미 저 멀리 캐나다에, 그리고 또 한놈은 이미 저 세상에 가 있거든요.
불의의 교통사고로 말입니다.
400원짜리 야구와 사구구 사팔이의 홈런. 그때는 그게 내 전부인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그것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어요
친구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고, 지금 남은 친구랑 그때를 추억할 수 있는 끈 같은거요.
T를 고른 내가 이겼는지, L을 고른 삼성팬 친구가 이겼는지
그런 것 따위,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아요.
제가, 1987년에 야구를 보기 시작했어요.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재미를 들렸고요.
각 구단의 전력을 면밀하게 파악해보고, 누가 제일 잘할까, 우승은 누가 할까...이런 걸 따져가며 응원팀을 골랐....
던 거는 당연히 아니고요. 그랬으면 타이거즈를 좋아했겠죠.
그저 고향이 여기니까 응원팀을 골랐....
던 거도 당연히 아니에요. 서울 토박이니까. 그랬으면 MBC청룡을 응원했겠죠.
어떤 연습생 형이 열심히 해서 주전이 됐는데 홈런을 쳤다고 하더라고요.
교통사고를 당해서 야구를 그만두고 트럭운전수가 됐는데
열심히 재활해서 또 야구장에 나왔다는 아저씨도 있었고요
유니폼 색깔은 촌스러웠는데, 맨날 빨간색 아저씨들한테 져서 불쌍했고
우승은 못해도 홈런은 잘 치는게 재밌기도 했어요.
그래요. 저는 그 사람들이 좋았습니다.
밤새 방망이만 휘둘러대서 팔이 짝짝이가 됐다던 아저씨도 좋았고
솜털 보숭한, 그저 내 또래 같은 형이 잘던지고 맨날 지는데도 싱글벙글 웃는 게 멋있었고
마흔줄을 넘긴 아저씨들이 여전히 저렇게 든든하게 마운드에 서는 것도 좋았어요.
아마 10년 전 같은데
시범경기에 갔었어요
내가 좋아하던 어떤 투수가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왔거든요
그런데 그 투수가 홈런을 맞으니까
제가 막 머리를 뜯으며 괴로워했던 적이 있어요.
"아놔, 우승해야 되는데"
저 사람이 잘 던져야 성적이 좋을텐데.
그렇게 막 씩씩대다가
뭔가를 깨달은 순간이 있어요.
"아,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저는요, 그 투수 얼굴을 실제로 한번 보는게 꿈이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이글스를 우승시키고 일본에 갔는데
몇년 동안 정말 죽을 고생을 하다 몸 상하고 돌아왔어요.
그 사람이, 다시 가슴에 EAGLES 로고를 밖고 마운드로 걸어올라왔는데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 사람이 다시 우리 마운드에서 공을 던졌는데
그깟 홈런이니 삼진이니 하는 게 대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내가 이 난리를 피우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야구를 보는 관점이 좀 바뀌었습니다.
오락실 생각이 나더라고요.
눈이 벌개서 사파리와 사구구를 고르던 생각이요.
이겨야 되니까, 승리말고는 생각할 게 없었으니까
떡볶이를 얻어먹어야 되니까.
그저 캐릭터의 능력치가 최우선이던, 동네 오락실의 중학생 1번선발.
내가 혹시, 아직도 그때의 눈으로 야구를 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더랬죠.
지금 마운드에 서있는 저 남자의 인생
내 눈에는 안보이지만, 분명 땀과 눈물로 얼룩졌을 저 사람의 삶
상처 투성이일 몸과 손
고민으로 가득찼을 그 사람의 머리와 가슴
못할까봐, 욕먹을까봐 노심초사하는 저 사람의 가족과 친구들
그런게 전부 더해진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데
못 이기고 졌다는 게, 경기력이 내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는 게,
과연 그토록 큰 문제고, 내가 화를 내야 할 일인가. 그런 반성(?)을 하게 되더라고요.
야구를 즐기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거에요.
승리를 원하는 것도 그 중 하나고
경기력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전력이 강해지길 바라는 것도 긍정적인 팬심이겠지요.
다만, 두가지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해요.
야구라는 게, 그거 자체로 하나의 전부가 아니라 우리가 삶을 즐기는 하나의 '도구'일 수 있다는 거.
H2의 명대사처럼, 그저 공놀이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정말 저들을 좋아한다면, 저들은 내게서 어떤것을 기대하고 바랄까 그런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예전에, 장종훈 코치가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너희들은 내 팬이 아니라 내 편이라고. 그래서 참 고맙고 좋다고.
정민철은 언젠가 사석에서 그랬어요.
못해서 죄송하다고.
눈물이 나더라고요.
아니 형이 왜 미안해?
혼란스러웠어요. 내가 도대체 이 야구에서 보고 싶은 게 뭘까.
이기는 게 지는 것 보다 더 재밌는 건 일단 확실한데
이길 수 있게 응원을 하면서, 그 와중에 나는 어느정도 선 까지 개입(?)을 해야 되는건가 뭐 그런 생각들 때문에요.
못하는데 잘했다 할 필요없고
잘못이 있는데 무조건 눈감아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게 꼭 좋은 건 아닐테니까.
그런데, 못할때는 원래 죄다 못하는 것들만 보여요.
선수들도 알아요. 너무 잘 알아요. 자기가 못했다고. 팀에 부담이 됐다고
그래서 조급해하고 자책하고, 2군으로 내려갈까, 혹시 팀에서 쫓겨날까 불안해하죠,
그런 걸 오히려 팬들이 보듬어줄 수는 없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해봅니다.
내가 야구 선수인데, 실책하고 삼진당하고 병살치고 그래서 졌어요.
(아마 그런 날은 인터넷을 안하겠지만)
1번선발 승부조작하냐. 감독은 뭔데 쟤를 1군에 두냐 양아들 아니냐,
1번선발이 아니고 병살선발이다 뭐 이런 글들을 보는 거랑
야구가 뜻대로 안되서 갑갑하겠네요. 2군에서 잠시 쉬어가는 게 좋겠어요. 이런 글을 보는 거랑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요.
저는 그래요
대개의 사람들은 전자의 글에 반성하기 보다는
후자의 글에 오히려 더 미안해하고 진짜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것 같더라고요.
왜 사람 심리가 그렇잖아요.
내가 잘못한거 뻔히 알지만
두들겨패고 욕하고 그러는 선생보다는
그냥 보듬어주는 선생한테, 겉으로는 아닌 척 해도 속으로는 더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하고 그러니까.
쓰잘데기 없이 글이 길어졌는데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겁니다.
뭐 야구 좋아하는 성향을 바꾸라고 강요할 건 아니고
다만, 저랑 비슷한 성향이신 분들
분위기 안 좋다며 그냥 주저주저하지 마시고
에잇, 힘내요 담에 더 잘하자고. 이런 글들도 자유롭게 올려주세요.
저게 야구냐 개그냐, 싶어서 헛웃음이 나고 욕도 절로 나오겠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저들을 안 품어주면, 대체 누가 품어주겠습니까.
미우나 고우나
우리 식구들이잖아요.
P.S)
이 아래 부분은 오늘 새로 씁니다
이런 성향 역시 그저 야구를 즐기는 여러 취향 중 하나겠지요.
보듬어준 선생보다, 때려서라도 바로 잡아준 선생이 더 고맙고 기억난다고 믿는 분들도 계실거고요.
존중합니다. 저도 감독이 투수를 혹사한다고 느끼면 누구보다 더 집요하게 때리(?)잖아요.
그냥, "아, 1번선발 맨날 딱딱한 글만 쓰는데 원래 저렇구나"하고 넘겨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얘기 하나
본인이 어떤 성향을 가지셨든
이 게시판에 글 쓰기를 주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옹호를 하든 비판을 하든
모두 다 한화이글스는 <응원>하는 방법이죠
이 글 역시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저만의 취향이고
'타인의 취향'은 당연히 존중해야 하지만
타인의 취향 때문에 내 취향을 바꿀 필요는 없으니까요.
카페 회원수가 오늘 기준 26.017명이니까
한화이글스에 대한 취향과 생각도 26.017개 있는거고
모두가 여기 똑같은 지분으로 글 쓸 수 있겠죠
그러니까, 글쓰기를 주저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한테 글쓰지 말라고 하면 안되지만, 본인 생각 말하는건 누구나 자유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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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좋은 글입니다~~
482든 499든 474든... 강습 타구로 수비수 하나 기절 시키고 1루에 갈때 좌절했죠!! 글구 신야구 때에도 외야 3명이 모두 발이 빠르면 너무 좋았습니다. 전 세이부 라이온즈로 했던 기억이...!! 타이거즈는 서로 안 고르는 것이 원칙이었구요! 추억 소환은 이쯤하구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기에 세상이 즐겁고 재미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또 다같이 이글스의 비상을 응원하는 것이구요! 쥔장님과 의견이 맞을때도 다를때도 있어서 즐겁고 재미나네요. 오래토록 이 까페 잘 이끌어 주시길 바래봅니다. 운영진 여러분들도요~!!
역시 좋은 글은 다시 읽을 때 더 좋은 법이네요. ^^
정말 글도 잘 쓰시고 다르면서도 비슷한 야구관을 공유하는거 같아 즐거운 글이기도 하네요.
한화이글스 팀, 카페운영진, 한화이글스 팬
모두 다 화이팅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1선발님의 철학이 느껴지고요.
저도 이 카페가 좋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야구 공놀이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