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남편은 오십대 중반의 예비 할머니, 할아버지입니다. 남편을 만난 지 어느새 스물일곱 해가 지나 두 남매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느라고 우리 부부만 남아 황혼을 설계하고 있답니다.
여기서 잠깐 바깥양반을 소개하자면 충청도 토박이 선비 같은 사람으로 젊었을 때부터 애정표현은 유치하다면서 고개를 흔드는 성품입니다. 그런 무뚝뚝한 남편이 어느 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갑자기 “우리 신랑각시놀이 할까?”라는 것이에요? “이 양반이 저녁 잘 드시고 무슨 뚱딴지 같은 말씀이세요?” 하고 코웃음을 치고 보던 책을 계속 읽으며 곁눈질로 남편을 훔쳐보았지요.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무엇인가 꺼내더니 싱크대로 가 깨소금을 빻는 조그만 절구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손에 든 것을 ‘콩~ 콩~’ 공이질을 하고는 곁으로 다가앉아 “각시 봉숭아물 들여 줄까?” 라며 손을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냥 농담하는 거겠지, 했는데 어느 틈에 비닐조각과 실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았더군요. 남편은 손가락 발가락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해 다진 봉숭아꽃과 잎을 올려놓고 비닐로 싼 뒤 풀어지지 않도록 실로 꼭꼭 매어 주었습니다.
그런 남편을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릿속으로만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평소답지 않은 남편의 행동이 의아스럽기도 했지만 내가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였던 것이 언제였나, 추억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때였을 겁니다. 정말 긴 세월이 흘렀네요.
허리를 구부리고 눈이 어두워 돋보기를 끼고 실을 묶는 남편의 모습. 그 젊고 남자다웠던 얼굴에는 잔주름이 눈가를 파고들고 까맣던 반곱슬 머리는 서리를 맞아 이제는 뽑아서는 해결할 수 없는 반백이 되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지만 입이 얼어붙은 듯 말이 나오지 않고 눈가에 눈물만 맺혔습니다. 행복을 찾아 오십 년 넘게 살아온 이제야 진정한 행복을 만난 기분입니다. 남편의 따스한 손길이 스칠 때의 행복감은 신혼시절보다 더욱 애틋하게 마음속으로 파고듭니다.
실매듭이 끝나자 남편은 날 안아 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더니 “좋은 꿈 꾸세요” 하고 이마에 뽀뽀를 해 주었습니다. 눈을 감았지만 가슴이 설레어 잘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설레는 마음으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실을 풀고 비닐을 벗겨 보니 손톱과 발톱에 나를 사랑하는 남편의 예쁜 사랑이 곱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올 가을에는 손톱의 봉숭아물이 사라지기 전에 좋은 일이 찾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김숙희 / 대전시 유성구 봉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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