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인 1974년 7월 15일, 섬서성 문물국은 고고학팀을 발굴 현장에 파견해 병마용갱에 대한 탐사와 시굴을 시작했습니다. '세계 제8대불가사의'로 불리는 병마용은 이제 중국 문화의 명함이 되어 전 세계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 50년동안 병마용을 포함한 진시황제릉구의 고고발굴은 어떤 단계를 거쳤는가?
병마용과 시황제릉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병마용 고고발견 50주년을 맞이하여 진시황제릉박물원 공식사이트 정보와 권위있는 고고학전문가의 논문에 근거하여 아래에 같이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 진시황제릉원(秦始皇帝陵园)은 역사상 '려산원(丽山园)'이라 불렀다.
진시황제릉원은 섬서성 서안시 임동구(临潼区)에 위치하고 있으며 역사상 '려산원(丽山园)'이라고 불렀습니다. 능원지역은 상(商)의 려국(丽国), 주(周)의 려융국(丽戎国), 진(秦)의 려읍(丽邑), 한(汉). 수(隋)의 신풍(新丰), 당(唐)의 소응현(昭应县)관할지였습니다.
송대중 상부(宋大中.祥符) 8년에 현성(县城)을 둘러싼 임수(临水)와 동수(潼水)의 이름을 따서'임동(临潼)'으로 개칭하였습니다. 원(元)나라때는 봉원로(奉元路)에 속했고 명나라와 청나라, 중화민국 초기때는 서안부(西安府)에 속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후 위남(渭南)의 전속 관할로 되었다가 1983년에 서안시에 귀속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 진시황제릉원(秦始皇帝陵园)과 진시황제릉구(秦始皇帝陵区)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진시황제릉원은 능묘를 중심으로 내, 외 이중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능원 범위를 말합니다. 외성 서쪽성벽 길이는 2188.378m, 동쪽성벽 길이는 2185.914m, 북쪽성벽 길이는 971.110m, 남쪽성벽 길이는 976.186m, 면적은 2.135k㎡이고 능묘, 성문, 능침(陵寝)건축 · 원서리사(园寺吏舍) 등이 포함됩니다.
진시황제릉구란 진시황제의 능원 이외에, 능원제도내용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진 유물과 능 조성과 관련된 유물유적구역, 그리고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구역을 포함하여 말하는데 후자는 도요(陶窑), 진정(秦井), 수릉인 묘지(修陵人墓地), 오령유적(五岭遗址), 건축유적(建筑遗址), 작업장유적(作坊遗址等) 등이 포함됩니다.
● 진시황제릉구 면적은 약 56k㎡이다.
고고학 조사와 발굴 연구를 통해 진시황제릉구 유물유적분포구는 남쪽의 려산(骊山)에서 북쪽의 신풍원(新丰源)아래 까지, 동쪽은 대왕가판(代王街办)과 인접하고 서쪽은 임동(临潼) 시내와 접해 있으며 남북과 동서 거리는 각각 7.5km, 면적은 약 56k㎡이고 그중 유물유적 밀집지역은 20k㎡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금까지 수백만 평방미터의 건축구조물기지와 600여개의 각종 배장갱, 배장묘 및 수릉인 묘가 발견되었고 병마용 동차마와 석갑옷(石铠甲), 청동수금(青铜水禽) 등을 포함한 각종 진귀한 유물 만여점이 출토되었습니다.
● 능원은 봉토(封土)를 중심으로 하고 두 겹의 장방형 성벽이 있다.
진시황제릉의 핵심구역이 능원이며 능원의 전체적인 배치는 봉토를 중심으로 하였습니다. 안팎이 겹친 이중 남북 방향의 장방형 성벽이 봉토를 둘러싸고 있는데 면적은 2.13k㎡입니다. 능원내의 지상과 지하에는 유적 및 유물이 밀집되어 있으며 발견된 주요 유적으로는 제릉봉토, 지궁(地宫), 동차마갱(铜车马坑), 침전(寝殿), 편전(便殿), 순장묘역(陪葬墓区), 원서리사유적(园寺吏舍遗址), 진기조수갱(珍禽异兽坑), 석갑옷갱(石铠甲坑), 백희용갱(百戏俑坑), 문리용갱(文吏俑坑), 능벽(陵墙), 동서문궐(东西门阙), 랑방(廊房) 등이 있습니다.
능원 이외에 이미 발굴 및 확인된 중요한 유적지로는 병마용 1, 2, 3호갱, 오사장 수릉인 묘지(五砂厂修陵人墓地), 조배호촌 수릉인 묘지(赵背户村修陵人墓地), 요지두촌 수릉인 묘지(姚池头村修陵人墓地), 동금갱(铜禽坑), 어장건축유적(鱼池建筑遗址), 려읍유적(丽邑遗址), 오령유적(五岭遗址), 정장 석재가공장(郑庄石料加工场), 도공유적(陶空遗址)과 넓은 면적의 건축 유적이 있습니다.
● 명나라때에 이미 학자들이 진시황제릉에 대해 야외 조사를 한적이 있다.
서북(西北)대학 문화유산학원 원장, 저명한 고고학자 단청파(段清波)교수의 논문 '진시황제릉원 관련문제연구(秦始皇帝陵园相关问题研究)'에 따르면 진시황제릉원의 야외 조사는 명나라때부터 시작되었고 도목(都穆)이 서재를 나와 진시황제릉원을 최초로 답사한 학자입니다. 그의 답사 성과인 '려산기(骊山记)'에는 능원 내외의 성벽, 성문터의 구체적인 치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
1906년, 일본인 학자 足立喜六(ADACHI KIROKU)가 진시황릉을 방문하여 봉토의 높이와 형태, 밑변의 크기를 실지로 측량하였습니다. 11년후, 빅토르 사가렌이라고 부르는 프랑스의 한 학자도 봉토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그는 처음으로 봉토의 외형에 높낮이가 다른 3층 계단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