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38)
[에피소드86]
내가 다녔던 학교는 농구부와 배구부가 있었다. 한번은 1학년 초에 체육을 가르치는 H선생이 나에게 농구를 한번 해보라고 권유를 하였다. 나의 키와 체격을 감안해서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는 아주 뛰어나지 않고는 농구선수로 생활해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또 나는 운동신경이 뛰어나다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곡히 거절했다.
H선생은 체육시간에 학생들의 가슴 젖꼭지를 꼬집는 악취미를 가졌는데, 다들 한번 꼬집히면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었다. 사춘기 때는 가슴에 멍울이 맺히는 아픈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H선생은 내가 자기의 권유를 거절한 때문인지 유독 나의 가슴 꼭지를 꼬집어 혼을 내곤 했다.
[에피소드87]
나는 집 근처 이대 부속 다락방교회 중고등부에 다녔다. 같이 다녔던 학생들은 다들 우수한 학교와 훌륭한 집안의 학생들이었다. 나는 학교생활 보다는 교회생활이 더 즐거웠다. 그리고 지금은 뉴욕에서 살고 있다고 들었지만 이화여중에 다녔던 H양을 수년 동안 연모(戀慕)하기도 했다. H양은 부친이 목사님이었는데, H양이 이화여고에 들어가서 얼마 안 되어 가족을 데리고 미국이민을 갔다고 들었다. H양이 이화여고 입학식 때 내가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기도 했지만 그 때는 서로 어려서인지 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당시 나와 친했던 동급생인 김재준 군은 경기고, 서울상대를 나와 한국 IBM의 부사장이 되었고, 지금은 호주에서 살고 있다. 그의 세 살 아래인 여동생 김신영은 숙명여고, 이화여대 대학원을 나와 백석대 교수를 했었다. 지금은 정년을 하고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소식이 끊어졌다. 그 밖에 2년 선배였던 중앙고, 서울대 수학과를 나와 대우실업에 들어갔던 K선배, 중앙고, 한양 공대를 나와 무역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던 김재진 선배, 그리고 금란여고를 나와 이대 불문과에 다녔던 나와 동급 여학생인 K양, 나중에 서강대 교수가 되었다는 나보다 1년 선배인 미모의 P양, 한 학년 아래인 서울고와 연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현대자동차의 중역이 되었던 이치삼이 추억의 동산에서 지금도 가끔 상념에 잠기면 그립고 애틋하게 떠오른다. 또 한사람 신일고를 다녔던 고명진군은 대학을 졸업한 뒤 모 신문사 사진기자가 되었는데, 6.29선언을 이끌었던 6.10 민주항쟁 때 웃통을 벗고 대형 태극기 앞에서 거리를 뛰어가던 모 청년의 그 유명한 사진을 찍었다. 그 후 그는 그 해의 사진기자상과 세계적인 민주화항쟁 특종사진을 찍은 유명 사진기자가 되었다.
나와 동갑인 미모의 K양은 이대 입구 그린하우스 제과점 근처에 집이 있었는데, K양을 좋아한 재진형과 같이 그녀의 생일 날 꽃을 사 가지고 집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
K선배는 부친이 한국은행 부총재를 하셨고 형님이 서울대 교수였던 명문집 자제였는데, 불행히도 딸 둘을 낳고 아내와 이혼했다. 그리고 대우건설 리비아 현장에서 조현병이 들어 귀국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한 가슴 아픈 비극을 겪었다. K선배는 마음은 참으로 착하고 여린 사람인데 속에서 끊어 오르는 분노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릴 때 친모와 헤어진 그의 부친이 새로 데려온 새엄마와의 갈등이 내면에 잠복되어 있다가 한번 씩 폭발하는 것이었다. 그 후 K선배는 병원에서 퇴원한 다음 몇 달 쉬고 영등포 우체국 지하의 주차관리원으로 일했다. 그는 거기서도 고객과 주차문제를 놓고 싸워 얼마 안 되어 해고 당했다. 그 때 그의 자취방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20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날이었다. 그는 당시 제주도에서 사시던 그의 부친과 전화통화를 했는데, 그는 통화하면서 많이 울먹였고 전화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부친의 음성도 흐느끼는 듯 했다. 세상의 파도에 심하게 좌초되어 어렵게 살아가는 막내아들에 대해 늙으신 아버지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 회한의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 장면이었다. 그것은 마치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처럼 탕자가 집을 떠나 세상의 온갖 고초를 겪은 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자 아버지와 아들이 눈물과 사랑으로 뜨거운 포옹을 하는 장면과 흡사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의 가슴에도 뭉클해지는, 잊을 수 없는 삶의 한 장면이었다. 그러고 나서 부친과 형의 도움으로 그의 소유로 있던 화곡동의 집을 팔아 충청도 산골마을에 있는 어느 정도 인권이 있고 죽을 때까지 머물 수 있는 조건으로 정신병자 보호시설에 입소하였고, 그 후에는 소식이 끊어졌다.
여름방학이 되어 중고등부 전체가 경기도 광주군 미사리에 여름 수양회를 갔다. 낮에는 주로 강물에 들어가서 수영을 하고, 저녁에는 촌극 경연대회, 문학의 밤 등 다채로운 행사를 가졌다. 특히 별빛 쏟아지는 한여름 밤 백사장 모래밭에 남녀학생이 오순도순 둘러앉아 손을 맞잡고 짜릿한 시간을 보내던 청춘의 그 아름다운 순간은 영원히 잊혀 지지가 않는다.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잠깐 허용해준 청춘의 아름다운 전율이자 떨림이었다.
내가 이후 살면서 생의 즐거움과 행복한 때를 많이 누려 보았지만, 이 꿈같은 청춘의 아름다움과 영롱함, 눈부신 무지갯빛 파노라마, 이성에 대한 애틋한 설레임, 그리고 더없이 맑고 순수한 느낌 등은 더 이상 맛보거나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희열은 신기루와 같이 일시적인 것이고 사라지면 언제나 애틋함만이 남는다. 이것이 일회적이고 짧은 우리 지상생애의 숙명이고 존재양식(存在樣式)인 것이다.
그렇지만 청춘시대의 추억은 때로는 눈부시게 아름답기도 하다. 왜냐하면 삶에 지치고 괴로울 때 그 때를 회상하면 왠지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번져 나오고, 아련한 향수에 젖어 행복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우리 집 골목 입구에 이화여대 음대 교수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 집의 외아들은 부모의 힘으로 이화여대 부속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약간 정신지체가 있었다. 그 아들은 나와 같은 학년이었는데 어느 날 내가 그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고 그 후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그 친구는 어느 날 자신은 장래 대학교에 가지 않고 대신 시계수리를 배우겠다고 나에게 얘기했다. 부모가 일류대학의 교수였지만 자식의 장래를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왠지 그 애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그 친구와 교제하다가 나는 여의도로 이사하였고, 그 후에 소식이 끊어졌다. 지금 그 친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첫댓글 갯바위에 부딛혀 튀어오른
빛나는 포말들이 떠오릅니다.
짧은 순간 각자 아름답게 빛나다가
본디 모습인 바다로 돌아가는...
중학시절과는 달리
고교시절은 좀 빛나 보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인생 파노라마를 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외양으로 보이는 것과
미래를 찾아가는 길이
힘든 파도를 넘는 일이지요.
또 다음 회를 기다려 봅니다.
정신병원에 입소한 그 친구가 안타깝습니다
이세상을 살다보면 사회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쁜분 들이 가끔 눈에 띱니다
그런분 들이 많이 안타깝습디다
충성
음대교수 부부의 외아들.
지금 아마도 장인이 되지 않았을까....생각됩니다.
다저스님 글에는
지난날의 슬픔들이
그리움으로 용해되어 있습니다.
모쪼록
가슴시린 글들이
많은 분들 공감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