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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가 모였다
17일 오전 8시 양재역 인근 서초구민화관 옆.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춰 도착했는데 늘 부지런한 선배들이 반갑게 맞아줍니다. 혹시 제가 가장 늦은 것 아닌가 하고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으려 하는데 아브물이 거의 다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적이 마음이 놓입니다. 제가 담배를 입에 물고 몇 모금 빨자 아브물이 도착합니다.
인원은 모두 8명. 피플러버 회장님, 그린란드 형님, 컴불 형님, 저(희망과용기), 아브물, 알자지라, 멍게, 댕기입니다. 나중에 컴불 형님이 "8명이면 산행하기 딱 좋다"고 반색을 하길래 제가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지요'라고 '드립'을 쳤습니다. 홍일점이었던 피플러버 회장님은 이날 산행 내내 컴불 형님에게 백설공주라는 말을 들어야 했지요.
댕기가 9인승 승합차를 몰고 왔는데 차는 두 대가 출발하더군요. 알자지라가 어제 산바람 모친상 문상을 못했다며 양복을 차에 싣고 왔다네요. 나중에 올라오는 길에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들를 요량으로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에 차를 세웁니다. 차를 세운 김에 아침식사를 거른 상당수 회원들이 라면과 우동과 충무김밥 등을 시켜 먹었습니다(원래는 차에서 김밥을 먹기로 했지요).
알대장 차는 주차장에 세우고 모두 승합차에 올랐습니다. 초중고교의 토요 휴무제가 전면 실시됐는데도 아침 경부고속도로는 비교적 한산합니다. 오히려 한산해 아깝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탄 차는 당당하게 버스전용차로를 탈 수 있으니까요.
차 안에서 설왕설래가 이어졌습니다. 당초 알대장이 고지한 대로라면 알대장이 감탄해 마지 않았다는 황간역 근처 중국요리점에서 자장면을 먹고 직지사 반대편 쪽에서 황악산을 올랐다가 직지사 쪽으로 내려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굳이 자장면 먹으러 그곳까지 갈 필요야 있겠느냐" "궁벽한 면소재지 중국집이 맛있게 해봐야 그렇지"라는 반론에 부딪혀 직지사 쪽에서 원점 회귀 환상의 코스(이때 환상은 판타스틱의 幻想이 아니라 고리 모양 環狀이라는 뜻입니다)로 오르내리기로 합니다.
그린란드 형님은 지인한테서 인근의 청암사가 꼭 가볼 만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을 꺼냈지만 시간이 빡빡해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경치가 일품인 금강휴게소에 잠깐 쉬었습니다. 초록빛 강물과 막 초록빛을 띨락 말락하는 산, 그 위에 펼쳐진 물안개가 몽환적인 풍경을 자아내며 한폭의 산수화를 방불케 합니다. 비가 막 그친 뒤여서 공기도 상쾌합니다.
추풍령휴게소를 지나 직지사 사하촌에 도착하니 시곗바늘이 오전 11시15분을 가리키고 있네요. 눈앞에 보이는 식당 가운데 오대산 가는 길 진부면의 부일식당과 상호가 똑같은 집을 발견해 들어갔습니다. 손두부와 산채비빔밥을 시켜 이른 점심을 든든히 먹고 각기 취향에 따라 술도 한두 잔 곁들였습니다. 산채비빕밤 가격이 7천원으로 지방식당치고는 비싸다 싶었지만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고 나물도 푸짐하게 주더군요. 즉석에서 부쳐내 서비스로 건네준 배추전도 맛있었습니다.
봄과 겨울을 넘나든 안개 속의 산책
직지사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린 뒤 등산화 끈을 조여매고 스틱 길이를 조절하는 등 준비를 마치니 낮 12시가 됐습니다. 당초 계획보다 이른 시간입니다. '東國第一伽藍 黃嶽山門'이란 편액이 걸린 웅장한 문을 지나 직지사 경내 왼쪽을 돌아 걷기 시작했습니다.
황악산 정상까지는 4.4km. 식당 아지매나 매표소 직원을 말로는 왕복 5시간이면 된다고 했는데 잘하면 그 전에 등산을 마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더욱이 오르다보니 1.5km 넘게 포장도로가 이어져 있었거든요. 지겹던 포장도로가 끝나고 산길로 접어들어 한동안 땀흘려 걷다보니 마침내 능선에 올랐습니다. 이곳이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잇는 길이지요. 황악산 정상까지는 2,26km. 산길을 감안하더라도 능선길이니 한 시간 남짓 걸으면 될 것 같습니다(그러나 이는 착각이었습니다).
마주 오던 등산객이 아이젠이 필요할 것이라고 충고합니다. 이때만 해도 우리는 반신반의했지요. 왼쪽(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얼마 걷다보니 진짜로 눈길, 빙판길이 나오긴 하는데 금세 흙길이 다시 나와 큰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도가 높아질수록 겨울 풍경으로 접어듭니다. 바람도 세게 불고 눈도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좌우 시야는 여전히 안개 속입니다. 저와 댕기는 아이젠을 준비하지 못했고, 회장님은 아이젠 빈주머니만 들고 왔다가 멍게 아이젠을 빌려 신습니다.
이윽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아쉽게도 주변 풍경은 아직도 안개에 가려 있네요. 컴불 형님이 떡을 돌렸고 오렌지, 과자, 초콜릿, 커피 등도 나눠 먹었습니다. 회장님이 백설기를 맛잇게 먹자 컴불 형님이 "백설공주여서 백설기를 좋아한다"고 놀립니다.
이제 하산길입니다. 올라오는 데 걸린 시간보다 적게 걸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직지사에서 출발해 시계 반대방향으로 황악산 정상을 향해 돌아내려오는데, 정상을 중심으로 서쪽 능선의 길이가 동쪽 능선의 길이보다 1km 이상 긴 겁니다.정상에서 한참을 걸었는데도 본격적인 하산길로 접어들 때 '직지사 3km'라고 쓰인 이정표를 보니 힘이 빠지더군요.
게다가 내려올 때 빙판길, 눈길, 진흙탕길이 교대로 나타난 것도 시간을 지체하게 만들었지요. 미끄러질까봐 조심조심 발을 떼야 했기 때문입니다. 몇몇 사람은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저는 회장님 바로 뒤에서 내려오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회장님을 상대로 백태클을 건 형국이 됐습니다. 회장님은 비명을 지르며 제 몸 위로 넘어졌지요. 이때부터는 저도 알대장에게 아이젠 한쪽을 빌려 신었습니다.
또 등산 때와 달리 하산 때는 직지사에 다 도착할 무렵에야 포장도로가 나타났습니다. 올라갈 때는 포장도로가 지겨웠으나 미끄러운 길에서 내려오며 고생하다보니 포장도로가 무척 반갑더군요.
점심을 먹고 올라갔기 때문에 산에서 식사를 한 것도 아니고 술판을 벌인 것도 아닌데 이런저런 이유로 5시간 30분이나 걸렸습니다.
올라갈 때는 지겨운 포장도로가 계속되고, 능선에 올라서는 안개 때문에 주변 경치가 안 보이고, 내려올 때는 미끄러워 투덜대기는 했지만 좋은 점도 많았습니다. 무슨 일에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이지요.
5시간 30분 동안 만난 등산객이 달랑 5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호젓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고, 전망이 안 좋은 대신 안개 속에 휩싸여 마치 구름길을 걷는 듯 환상적인 기분이었지요. 회장님은 속세와 다른 미지의 세상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몇 시간 만에 계절의 바뀜을 두 차례 겪은 것도 인상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완연한 봄에서 시작해 한겨울을 거쳐 다시 봄의 세상으로 내려온 것이지요. 걱정했던 비가 내리지 않은 것도 다행스러웠습니다.
황악산 정상의 해발고도는 1,111m. 역시 1,000m 넘는 산은 아무리 높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해도 결코 우습게 보면 안됩니다. 또 깊은 산에서는 겨울이 더디 물러가고 빨리 찾아오는 법이지요. 해빙기 등산을 주의하라는 산꾼들의 당부를 새삼 실감했습니다.
다 내려와 서로의 행색을 보니 엉망입니다. 등산화는 진흙투성이가 됐고 바지 아랫단에도 진흙이 튀어 지저분하기 짝이 없네요. 차를 몰고 온 댕기는 깨끗이 씻지 않으면 차에 태워줄 수 없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모두 개울가에서 스틱과 등산화와 등산복을 정성스럽게 씻었습니다.
직지사 경내에 울려퍼지는 법고 소리
직지사 경내에 들어섰습니다. 법고 소리가 울려퍼집니다. 자연스레 발걸음이 그리로 향합니다. 스님 세 분이 북을 치고 있습니다. 북채를 쥔 손놀림이 조금 어설프다 싶었는데 장삼 옷깃에 밤색 띠를 두른 것을 보니 역시 사미승이네요.
제게 여러 차례 설명을 들은 분이 많기는 하지만 처음 저와 절에 들른 회원도 있어 전각과 불상의 의미, 대웅전 외벽에 그려진 심우도(십우도) 등을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직지사는 대찰다운 풍모와 사격을 갖초고 있지만 고졸한 멋과 아늑한 맛은 없습니다. 으리으리하게 지어놓은 만덕전과 천불전은 오히려 흉물스런 느낌을 줍니다. 경내 왼쪽 도로변의 높은 석축과 돌담도 지나치게 위압적이지요.
우리나라 전통 산사 건축의 특징은 산세와 물길을 최대한 거스르지 않으려고 최소한으로 터를 닦아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지사는 널찍하게 자리를 잡아 굴착기로 흙을 파내고 채운 뒤 불도저로 평탄하게 만들어 웅장한 전각들을 지었습니다. 기와도 너무 번쩍거리고 단청도 지나치게 화려합니다. 고풍스러운 기존의 전각들과 새로 지은 건물이 따로 노는 듯한 느낌입니다. 경내 왼쪽 위의 부도밭이나 위편의 극락전도 터를 큼지막하게 잡았더군요.
중창불사, 대작불사를 잘해야만 주지들이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조계종의 승풍이 한심하게 여겨집니다. 화려한 전각, 큰 불상을 대하면 더 신심과 원력이 생기고 이른바 크고 유명한 절에 가야만 '기도발'이 잘 먹힌다고 생각하는 불자들의 마음가짐에도 문제가 있지요. 이게 어디 절집, 아니 종교만의 문제겠습니까?
그래도 어쨌든 한 번쯤은, 아니 몇 번쯤은 가서 찬찬히 둘러볼 만한 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황악산 등산이 아니더라도 경부고속도로를 지날 일이 있으면 직지사에 꼭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고속도로에서 그리 멀지도 않습니다.
아브물 "쏘가리매운탕과 도리뱅뱅 제가 쏠게요"
등산에 문화유산 답사까지 마치니 이제는 저녁 먹을 일만 남았습니다. 40여분 자동차로 달려 금강휴게소에 도착했습니다. 휴게소 옆으로 빠져나와 경상식당에 차를 댔습니다. 알대장이 추천한 집답게 손님으로 북적거립니다.
피라미 도리뱅뱅과 쏘가리 매운탕이 식탁에 차려져 있습니다. 손님이 너무 많은 탓에 종업원이 제대로 손님들을 챙겨줄 틈이 없습니다. 종업원 얼굴에 피곤과 짜증이 가득합니다. 컴불 형님이 "잘돼는 식당은 이게 문제야. 손님이 많으면 종업원을 충분히 써야 하는데 일하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대로 힘들고 손님은 손님대로 대접을 못받고..."라며 혀를 끌끌 찹니다.
그래도 맛은 있습니다. 소주 한잔씩 걸치니 몸이 나른해집니다. 아브물이 그동안 선배들에게 많이 얻어 먹었으니 오늘 저녁 값을 내겠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멍게 총무가 남은 회비를 돌려줄 기색은 없습니다(다음달에 쓴다고 하니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상경하는 길에는 아브물이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만남의 광장에 차를 대고 알대장과 멍게를 내려놓았습니다. 나머지는 강남역과 신사동에서 나눠 내려 집으로 향했습니다. 즐겁고 뿌듯한 산행이었습니다.
첫댓글 댕기야! 수고 많았다. 그런데 돌려준 가요CD를 산에 올라가기 전에 차에 두었다가 다시 놓고 왔다네. 오른쪽 맨 뒷좌석 오른쪽 손잡이에 놓여 있거든. 다음에 꼭 챙겨다오.
항상 많은 것을 남기고 가는 형. 잘 읽었습니다. 맞춤법 틀린 곳이 몇 군데 보이는데 그게 무슨 허물이 되겠습니까.
다음에는 제가 cd플레이어를 준비하겠습니다.^^ 형님에 입담은 언제나 정겨워요...
직지사는 꼭 가 보고 싶었는데 영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형의 쫀득쫀득허니 찰진 산행기로 대신 위안을 삼아봅니다.^^
역시 글빨로 먹고 사니까 무쟈게 빨리 올리네...황악산의 안개는 조금 날만 저물었으면 전설의 고향이었어. 알은 계속, fog와 misty를 부르짖고 다녔으니까. 근데, 진짜 나에게 감정 없냐? 나쁜 걸루다...ㅎ 나는 지금도 마이 아프다. 끝나고 740번 버스 타고 곧장 집으로 갔니? 참새 방앗간인데...참, 해바라기씨는 맛이 있더만...아브믈 잘 먹었다. 산을 다녀온 게 어느 덧 아련하네...다음을 기약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운전하느라 수고한 댕기여! 우린 편하게 잘 다녀서 고맙고, 올 때 운전한 아브믈도 수고!!!
아브믈 형 덕분에 가장 수지 남는 산행이 아니었나 모르겠습니다. 여튼 감사. 그런데 겨울에는 쏘가리 먹는 걸 삼갈 걸 그랬습니다. 여름에 견줘 거의 곱절로 가격이 뛴 듯. 알았더라면 황간면의 그 중국집으로 기수를 돌렸을텐데. 금강휴게소 쪽으로 가는 도중, 값이 많이 올랐다는(그런데 주인들 결코 얼마란 얘기는 하지 않죠) 전화를 받았는데 설마설마 했던 거지요. 형에게 굉장히 죄송한 마음입니다.
안개가 짙어서 전혀 주변 경치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때문에 산행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우리말고는 등산객이 몇 안돼는 산길을 호젓하게 걷는 즐거움이 쏠쏠했고 올해 마지막으로 아이젠을 차고 등산하며 지난 달 한라산 눈산행을 못한 아쉬움을 그런대로 달래볼 수 있었다.산행기 쓰느라 수고했고 덕분에 황악산을 추억으로 다시한번 올라볼 수 있었어.
희망과용기 형이랑은 한 번도 같이 산행을 못 해 봤네요...형의 산행기와 다른 회원들의 댓글을 보니 형의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산행하는 재미가 느껴집니다...산행앨범 보니 안개도 자욱헌 것이 도란도란 재미졌겄습니다...저는 두문불출 뱃살만 불리고 있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