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1:1에 보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사 시대는 ‘사람이 각각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심을 부정하고 영적 지도자가 없는 상황이어서 각자 자신들이 편한 대로 살고, 신앙생활도 그렇게 자기 생각대로 했습니다. 룻기는 그 사사 시대에 살아가던 평범한 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모압으로 향했던 엘리멜렉과 그 가족들은 10년의 세월 동안 아버지와 두 아들이 죽고 어머니 나오미와 두 며느리 곧 오르바와 룻만 남겨지게 됩니다. 그러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사 양식을 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결단하였고 두 며느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권합니다. 두 며느리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결국 오르바는 거듭된 시어머니의 권면에 고향으로 돌아갔고,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며 굳은 결심을 보여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을 향하게 됩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가족 4명이 함께 떠났는데 자기 혼자 살아 돌아왔고, 또 며느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멀리하던 모압의 여인이었습니다. 21절을 보면 ‘풍족하게 나갔더니’라는 표현을 볼 때 나오미의 가족은 당장에 먹을 것이 없어 모압을 향해 간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 나은 삶, 곧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위해 떠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으니 사람들이 아마도 뒤에서 뭐라고 말했을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이가 나오미냐’라는 이 표현은 나갈 때 나오미와 되돌아온 나오미의 얼굴, 행색, 표정이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내용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은 모른 채 사람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20-21). 나오미는 자신을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불러달라고 합니다. 나오미의 뜻은 ‘기쁨’이란 의미입니다. ‘마라’는 ‘쓴’,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가족 모두가 죽고 재산을 잃고 실패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오미에게 ‘기쁨’이라는 이름은 오히려 자신을 두 번 죽이는 이름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마라’라고 불러주는 게 더 속이 편했던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 십년의 세월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괴롭게 하셨고, 징벌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성읍 사람들이 모두 알 정도로 유력하고 풍족한 가정이었던 나오미의 가정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모압으로 향했고, 그 선택의 결과 ‘텅 빈 인생’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엘리멜렉을 치시거나 두 아들을 죽이셨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인생의 쓴 경험을 통해 나오미는 점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나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평범해 보이는 가정에 일어난 비극으로 나오미의 심령은 가난할 대로 가난해졌고,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텅 빈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은혜의 이야기들이 이제 펼쳐집니다. 나오미가 롯과 함께 돌아올 때 그 시기는 ‘보리 추수 시작할 때’(22)라고 합니다. 나오미가 그 시기를 알고 돌아왔지만 그런데도 이 시기를 적어 놓은 것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배경을 설명해주며 동시에 그들의 삶에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임을 암시해주는 표현입니다.
나오미의 상실감은 룻기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는 계기가 됩니다. 나오미의 상실감은 룻이 타작마당에서 보아스에게 넉넉한 보리를 선물로 받고 돌아올 때 상징적으로 충만하게 채워집니다. 더 이상 나오미는 빈손으로 베들레헴에 돌아온, 자신의 이름을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한 여인이 아닙니다. 나오미의 상실감은 룻기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역전됩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오벳’을 낳게 되었을 때 나오미의 이웃 여인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외칩니다. 룻이 아니라 나오미가 낳았다는 것이죠. 마라가 아닌 본래의 이름 나오미를 찾게 됩니다. 나오미가 마라에서 다시 나오미가 된 것은 자기 노력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였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불평하였지만, 하나님의 자비로움으로 자신의 이름을 회복하였습니다.
우리는 나오미처럼 하나님을 입술로만, 이름뿐인 전능자로만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습관적인,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나의 괴로움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 뒤에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시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마라’가 아닌 ‘나오미’일 것입니다.
[함께 나눌 질문]
1. 약속의 땅을 떠나 더 나은 삶을 위해 모압을 향했던 나오미의 삶이 텅 빈 그릇과 같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녀의 상실감을 떠올려보며 지금 내가 향하고 있는 길이 모압을 향한 길은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2. 나오미는 삶에 찾아온 여러 고난을 통해 자기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 삶에 찾아오는 어려움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