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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여는 떠나고... >> 1999년 12월 방학이 되자 나는 다시 가족이 있는 러시아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20여일을 지나다가 학교에 돌아오게 되었다. 2월 하순에 큰 아이가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콘서바토리 대 공연장에서 연주계획이 잡혔기 때문에 그때 참석하기 위해서는 학교에 미루어 둔 일들을 처리해야했기 때문이었다. 1월 중순에 귀국하는데 새벽 비행기를 타야했기 때문에 집에서 새벽 3시쯤 나오게 되었다. 아이들이 깰까봐 살금살금 나오는데 갑자기 정여가 자다 깬 얼굴로 아빠! 하고 부르는 게 아닌가? "아이고 정여 깼구나. 아빠 2월 하순에 다시 올께. 그때 모스크바에서 보자." 라고 하며 건성으로 안아주고 뽀뽀를 했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었다. 아마도 정여는 그것이 마지막 인사일 줄 미리 알았었던 것 같다. 그랬으니까 아빠가 인사하지도 않는데도 스스로 새벽 3시인데도 불구하고 깨어서 아빠에게 인사를 유도했던 게 아니었을까..... 정여는 러시아에서도 큰스님 테이프를 참 좋아하고 열심히 보았다. 우리는 졸리운데도 이 아기는 무엇을 아는지 오랫동안 테이프를 보곤 했다. 한국에 혼자 돌아와 나는 부지런히 밀렸던 일을 처리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이것저것 준비를 했다. 특히 정여가 좋아하는 장난감들을 샀다. 뱅글뱅글 도는 자전거를 타는 인형도 사고 신발도 샀다. 모스크바로 가기 3일 전 전화를 했더니 정여가 조금 불편해 한다고 했다. 나는 가슴이 덜컥했다. 이제 미운 마음이란 다 사라지고 삶이란 것이 눈에 보이는 형상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정여도 몸은 어렵기는 하지만 충분히 인생을 즐겁고 의미있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고통스런 아픔만 이 아이에게 없으면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번 여행이 끝나면 큰스님께 찾아가서 예전에 드렸던 말씀 중에 옷을 갈아 입혀 달라는 말을 취소하고 이대로도 좋으니 부디 우리 정여가 우리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할 예정이었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모스크바로 가족이 이동하고 나는 서울에서 모스크바로 가서 만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정여가 아프다면 여행은 어려울 거고 서윤이 연주도 어려울 것이었다. 그런데 여행 당일 날 아침 정여는 일찍 일어나 모스크바 여행에 들떠 있었다고 한다. 21일 가족은 결국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호텔을 잡았고 나는 22일 저녁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만난 집사람의 얼굴이 침울했다. 한참만에 입을 열었는데 오늘 새벽에 정여가 갔다는 얘기였다. 나는 한동안 정신을 잃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모스크바에서 고요히 엄마품에 안겨 힘들었던 이승을 떠난 것이었다. 그 동안 정여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기억들이 하나씩 생각나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런 중에도 다음날부터 집사람과 나는 큰아이 모르게 장례절차를 논의했다. 어떻게 해야하는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우선 대한항공에 국내로 운구할 수 있도록 자리를 부탁해 놓았다. 그리고 대사관에 가서 행정 절차를 밟았다. 파김치가 된 우리는 저녁에 호텔로 돌아와 스님께 통화를 했다. 서윤이가 모르게 표정을 관리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큰스님께서는 한국으로 운구를 하지 말고 화장을 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뼈를 한국으로 가지고 갈 테니 우리 선원에서 운영하는 영탑을 하나 마련해 달라고 부탁 드렸다. 스님께서는 뼈도 갖고 오지 말라고 하셨다. 뼈를 큰바다로 나가는 강에 뿌리라고 하셨다. 큰스님께서는 참으로 냉정하시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정여를 조금 더 가까이 두고 싶었는데 그것마저 막으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빨리 정여를 잊게 하기 때문에 큰스님께서 일부러 그러시는 거라고 막연히 믿고 그렇게 따르기로 하였다. 우리는 과연 모스크바에 큰바다로 나가는 강이 있는가를 가지고 한참을 지도책을 펴고 고민하였다. 도저히 그런 강이 없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다음날 화장을 마친 후 상페테르 부르크로 비행기를 타고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다시 스님께 말씀드렸더니 모스크바에 그런 강이 있으니 뿌리라고 하셨다. 다음날 지리전공자들과 함께 의논한 결과 모스크바강이 운하를 거쳐서 큰바다로 나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결국 우리는 정여의 뼈를 모스크바강에 뿌리게 되었다. 우리는 정여의 마지막 길에 부처님이라는 글자를 새긴 천을 정여에게 덮었다. 큰스님께서 어떻게 모스크바강의 구조를 알고계셨는지 궁금했다. 과연 큰스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가? 큰스님께서는 모스크바에 와 보시지 않으셨을 텐데..... 지리도 공부하신 적도 없으실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선 지금은 스님 말씀을 따르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추운 모스크바 겨울의 강에서 얼음이 얼지 않은 곳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장례용 버스가 우리를 얼음이 녹아 있는 곳까지 안내해 줘서 뿌릴 수가 있었다. 우리는 정여를 모스크바 강에 뿌린 후에 눈밭에서 3번 절을 했다. 나는 마치 로봇이 된 것 같았다. 전혀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한국에 계신 혜안스님께서 큰스님의 지시를 알려주셔서 그대로 했을 뿐이었다. 이유나 논리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그냥 그대로 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때 다짐을 하였다. 여기서 마치 로봇 처럼 움직였으니까 한국에 돌아가면 무조건 스님의 말씀대로 하자. 이제부터는 철저히 스님의 가르침대로 살도록 하자. 이것이 나의 다짐이었다. 모든 것이 귀찮아 지고 다 버리고 싶었다. 26일 연주회를 마치자 말자 급히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윤이는 이때까지도 정여가 이생을 떠났는지 모르고 있었다.
<< 세 번의 거부와 순응... >> 비행기에서 내리자 말자 우리는 큰스님께 찾아갔다. 서윤이는 안양 본원에서 비로소 정여가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차리리 다행이었다. 절에서 알고 절에서 실컷 울었으니까...... 얼마나 큰소리로 울던지......목이 매인 울음이 다시 나를 울렸다. 큰스님께서는 우리를 보시더니 울지말라고 하셨다. "잘 모르니까 눈물이 나지 자세히 알면 덩실덩실 춤을 출 일"이라고 하셨다. 나는 이 말씀도 역시 위로의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시면서 아들을 하나 새로 낳지 않겠냐고 물으셨다. 방금 아이 장례 치르고 온 부부에게 아이를 낳으라시니 답답하기도 하고 정말이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 말씀도 위로의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답했다. "자신이 없습니다." 라고. 왜냐하면 위험요소가 너무 많았다. 첫째 또다시 정여와 같이 건강하지 않은 아이가 태어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고 둘째 집사람이 이미 마흔 둘이 아닌가. 그리고 이미 두 번이나 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았으니 지금 다시 낳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날 그렇게 인사를 드리고 울산으로 내려왔다. 며칠을 울산에서 지난 후에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큰스님을 찾았다. 러시아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에서 스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도저히 살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과 그 감사함을 표시하기 위해서 큰스님을 뵈었다. 큰스님께서는 또 말씀을 하셨다. "정여가 다시 아들로 오고 싶어 하니까 아기를 가지라"고. 또다시 나는 대답했다.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고 울산으로 돌아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지금까지의 일련의 과정에 스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크게 일어났다. 우리는 또다시 갖고 있는 모든 돈과 융자까지 얻어 스님께 감사함을 표하기로 했다. 지난번에는 집사람이 그렇게 하자고 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알몸의 나만 있기를 원했다. 연구실에 있던 오래된 책과 잡동사니들 가구들도 다 버렸다. 머리도 아주 짧게 깎아버렸다. 그렇게 라도 해야만 정여에게 덜 미안할 것 같았다. 3식구가 안양으로 올라갔다. 스님께서는 또다시 "정여가 아들로 다시오고 싶어하니 아기를 가지라"고 하셨다. 이번까지 세 번에 걸쳐서 아이를 가지라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또다시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거부의사를 밝혔다. 그러고서 울산에 와서 며칠을 지냈다. 매일 눈물 없는 날이 없었다. 밥 먹다가도 울고 자다가도 울고 아침에 깨어서도 울었다. 가족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각자 속으로 우는 모습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나는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려 키보드를 누르기가 어렵다. 큰아이도 슬픔을 감추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엄마 아빠 속상할까봐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정도는 부모로서는 다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꿈을 꾸게 되었다. 정여를 해수욕장에서 잃어버렸는데 며칠이 지난 후에 남아메리카의 어느 바닷가에서 구조되어 한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와 우리 가족과 만나는 꿈이었다. 벌써 정여가 지구를 한바퀴 돌았다는 말인가. 정녕 큰스님의 말씀대로 모스크바강이 큰 바다와 다 통해서 온 지구를 감싸고 돌았다는 말인가 하고 기쁜 생각이 들었다. 순간 나는 내가 모스크바에서 한 약속을 떠올리게 되었다. "장례를 치르고 한국으로 가면 스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노라"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왜 3번이나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아이를 가지라는 당부를 거부하고 있는가... 집사람과 나는 이 점에 관해서 의논을 하였다. 집사람도 그 점에 동의했다. "그럼 약속을 지키자.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설혹 죽는다 하더라도 설혹 또다시 건강하지 않은 아기가 태어난다 하더라도 스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니까 시키시는 데로 하자." 라고 우리는 결심했다. 그로부터 우리는 노력하여 결국 아기를 갖게되었고 이 사실을 큰스님께 보고하였다. 스님께서는 건강한 사내아기를 낳을 것이니 몸과 마음가짐을 잘 하라고 일러주셨다. 어느 정도 한국에서 마음을 추스린 후에 집사람과 서윤이는 다시 음악공부를 위하여 러시아로 떠났다.
<< 불안한 마음 >> 집사람 뱃속의 아이가 약 4개월에 접어든 어느 날 우연히 혼자 TV를 보다가 연골 무형성증을 갖고 있는 4형제에 대한 이야기가 교육방송국에서 기획시리즈로 방송되는 것을 시청하게 되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생겼다. 혹시 뱃속의 아기가 또다시 연골 무형성증이면 어떻게 하나.... 두려운 마음이 걷잡을 수 없게 커져갔다. 급기야 울산대 부속병원에 안면있는 의사 선생님과 의논을 하니 서울 중앙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으라고 하셨다. 나는 서울 중앙병원 의사 선생님과 통화한 후 우선 내가 병원을 방문하여 진찰 받고 다음에 집사람을 러시아에서 임시로 귀국시켜서 유전자 검사를 받기로 결정하였다. 마침 월요일날 예약을 하였는데 일요일 안양 법회가 있어서 하루 더 묵은 다음 병원에서 진찰받을 계획으로 법회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법회가 끝나고 나니 왠지 내일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는 마음과 강한 자신감이 생겼다. 큰스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꼭 나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병원을 예약했기 때문에 서울에 머물려고 하다가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미쳤다. 혜안스님께서 내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큰스님이 계신데 무슨 걱정이냐고 말씀하셨다. 나는 내일 병원 예약을 취소하려고 전화를 하였다. 그런데 병원에서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었다. 내 책임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약속을 어기는 것에 위안을 하면서 울산으로 돌아갔다. 왜 그렇게 마음이 홀가분한지 몰랐다. 다음날 아침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진료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의약분업 파업 때문이라고 하였다. 전 날 법회 후에 바로 울산으로 내려온 것이 정말 잘한 일이 되어버렸다. 큰스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다시 크게 일어났으며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나는 러시아로 전화를 해 집사람에게 한국으로 진단 받으러 오지 말라고 하였다. 집사람도 오지 않겠다는 마음을 벌써 굳히고 있었다. 이심전심이었을까...... 나는 결심을 하였다. 만일 아픈 아이가 태어난다 하더라도 어쩔 것인가? 이미 정여가 떠나기 전에 얼마나 다짐을 하였던가? 몸이 불편하더라도 주어진 삶을 의미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충분히 있으니까 좌절하지 말자고 그리고 더욱 용기를 가지고 아이를 대해야 한다고.... 부모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인 아이를 무조건 잘 키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고 배수진을 치니 두려움이 좀 사라졌다. 집사람도 나의 이런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보다는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하여 태산보다 큰 믿음을 갖고 오히려 걱정을 하고 있는 나를 위로해 줄 때가 많았다. 집사람이 참 태평스럽게 보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집사람은 임신 8개월이 될 때까지 러시아에서 병원한번 가지 않고 잘 버티다가 출산 2개월을 남기고 귀국하였다. 배를 만져보면 불뚝불뚝 발로 차는 것이 느껴진다. 아가야 튼튼하게만 태어나라...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였던가.... |
<< 산부인과에서 .....>> 세월은 어느 듯 흘러 벌써 임신 8개월이 되었고 집사람은 큰 아이 서윤이와 함께 출산을 위해 귀국하였다. 우리는 울산대학교 병원 산부인과로 향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몇가지를 질문하셨다. 나이, 출산경험, 기 출산방법, 문제점등등. 우리는 먼저간 정여에 대한 이야기도 해 드렸다. 선생님은 벌컥 화를 내셨다. "아니 어찌하여 임신 9개월이 될 때까지 한번잘못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초음파 검사를 했다. 선생님께서는 심장, 머리사이즈 등 발육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일단 뱃속의 아기가 정상적으로 자라주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너무나 감사하면서 병원 문을 나섰고 그 동안의 걱정이 눈녹듯 사라져 갔다. 출산 1주일 전 최종 점검과 수술 예약을 하러 다시 병원에 들렀다. 예전과 같이 다시 초음파로 여러 가지를 검사하시더니 "이제 일주일 전이니 태아의 성별을 말씀 드려도 되겠지요." 라고 하셨다. 우리는 사실 그것이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건강한 아이냐 아니냐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한번도 사내아이냐 여자아이냐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이미 큰스님께서 사내아이로 올 것이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에 우리식구 누구도 그 사실을 의심해 본적이 없었다. 조금 자세히 초음파로 살펴보시더니 "딸아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순간 나는 나의 머리가 굳어지는 느낌을 받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집사람 역시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이었고 큰아이 서윤이도 절대 그렇지 않다는 표정과 함께 "아니에요. 아들이에요." 라고 그만 말하고 말았다. 의사 선생님은 우리 세 가족의 표정과 분위기에 또 한번 놀라서 움칠하셨다. "다른 병원에 가서 확인해 보셨어요?" 라고 퉁명스럽게 반문하셨다. "아니요." 라고 대답하고 그래도..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떻게 아들이라고 그러세요?" 라고 하시니 그만 서윤이가 "우리 큰 스님께서 아들이라고 하셨어요." 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이 말에 의사 선생님은 또다시 화가 잔뜩 나시었다. 그렇지 않아도 임신 9개월만에 불쑥 나타난 산모인데다 너무나 자신만만한 표정에 기분 나쁘셨을텐데 서윤이가 그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만 "우리 큰스님이 아들이라고 하셨으니 아들이 틀림 없어요." 라고 주장을 하였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아니 그럼 이때까지 병원에 안 가신 것도 스님이 가지말라고 해서 안 가신 거예요? 스님이 점쟁이예요?" 라고 잔뜩 화가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또다시 그런 게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어정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스님께서 말씀하신 게 사실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때까지 우리 절과 스님께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믿음이 무너지기 때문에 올 것인 그 혼란스러움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절에는 어떻게 다닌단 말인가? 등등의 미래에 대한 불확신감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윤이의 너무나 당당한 말과 우리가족의 표정을 보신 의사 선생님께서는 참 웃기는 사람들도 다 있네 라는 표정을 지으시면서 초음파 검사를 다시 하시고 계셨다. 우리의 표정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다시 검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한참을 다시 보시던 선생님이 " 어 ! 아들 맞네 " 라고 하시며 약간 겸연쩍어 하셨다. 그때 우리가족은 환하게 웃었고 서윤이와 나는 그럼 그렇지 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스님이 어떤 분 이신데......" 라고 하면서.... 이렇게 하여 우리는 최종 점검과 수술 날짜를 잡고 편안한 일주일을 보내었다. 스님께 아들 같다는 말씀을 전해드렸다. 일주일 후에 드디어 온 가족의 축복 속에 중일님이 태어나셨다. 큰스님의 그 오랜 동안의 계획과 지시... 그리고 과감하게 모든 것을 던지고 스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한 우리 부부의 결단으로 먼저간 정여가 튼튼한 신체를 갖고 사내아이의 몸으로 다시 우리 가족의 품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적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질책과 지도를 아끼지 않으신 울산지원의 세분 스님과 안양의 주지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 그리고 큰스님의 그 광대무변하신 원력과 사랑에 어찌 감사해야할지를 모른다. 세 번이나 거부하다가 마지막에 승복하여 결국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계속하여 메시지를 던져주신 큰스님.... 큰스님의 사랑은 정말로 넓고 끝이 없습니다.
<< 그 후 ..>> 중일님이 생후 100일 되는 날 나는 꿈을 꾸었다. 바로 중일님의 전신인 정여가 나타나서 인사를 했다. 정여는 커다란 황소위에 올라타서 피리를 불면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 바람 따라가는 떠돌이 멋진 피리하나 불고 다닌다....." 라는 노래를 개구장이 처럼 신나고 재미있게 부르면서 산 속으로 소를 타고 가고 있었다. 우리 절에 그려놓은 심우도 모습 그대로였다. 그날 나는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아... 정여와 중일님은 한 몸이구나.... 정말 중일님이 큰스님의 말씀대로 정여가 다시 온 것이 확실하구나...그리고 이제 부터는 정여와 중일님을 따로 두고 생각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우리 정여는 미련한 아빠에게 정말로 친절하게 그리고 아주 상세하게 부처님 법을 가르치려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이제부터는 중일님을 나의 자식이 아닌 부처님, 큰스님의 아들로 생각하여야 하며 우리 부부는 이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보살피는 보모의 역할을 잠시 부여받는 행운을 얻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특히 큰스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지금 보다 더 지극한 정성으로 우리의 아이들을 길러야만 된다는 각오를 하였다. 어느 듯 중일님도 이제 7개월이 되었다. 서윤이의 음악 공부를 위해 엄마와 함께 세 가족은 현재 뉴욕에 거주 중이다. 뉴욕에서 비교적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플러싱에 한마음 선원 뉴욕지원이 있다. 뉴욕지원 바로 뒷집에 방 한 칸을 얻어 3식구가 살고 있다. 미국 집들은 모두 침대생활을 하기 때문에 바닥에 깔려있는 카펫은 한국의 방처럼 기어다니기에는 너무 더럽다. 이 집으로 옮기기 전에 침대에 두었다가 한 번 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중일님은 매일 한마음 선원 뉴욕지원의 넓직한 마루바닥에서 실컷 기어다닐 수가 있게 되었다. 선원에 매일 갈 수 있는 곳에 집을 얻어 너무나 다행이다. 선원은 바로 중일님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여와 중일님이 선원에서 주신 선물이라면 먼저 간 정여는 박선아와 김규년 그리고 큰아이 서윤 우리 식구들에게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해 오신 보살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보살님은 현재 우리가족의 일원이 되어 항상 우리들의 마음자리가 옳은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우리 부부는 이러한 자세로 우리 아이들을 대하기로 하였고 그렇게 하는 것이 큰스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이 있도록 하신 큰스님께 그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을지... 죽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다.
<< 후기..... >> 기억에 한계가 있고 이야기를 축약하다 보니 중간 중간 빠진 이야기가 많이 있다. 특히 불편한 몸의 정여를 엄마와 서윤이가 한국에 없는 시간 동안 한달 이상 대구 댁으로 데려가 보살펴 주신 황규홍 대구지원 부회장님 내외분, 정여가 태어났을 때 마음으로 같이 아파해주고 고민해 줬던 동반자 박승휘 초락당 원장님 내외, 한마음 선원으로 발걸음을 인도해 주신 윤병국 교수님, 정여가 선원에 있을 동안 사랑과 친절로서 지켜봐 주신 많은 보살님과 처사님, 이분들의 자비와 사랑을 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미련한 저를 10년 동안이나 지켜보면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처님과 큰스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지도와 편달을 아끼지 않으신 울산지원의 혜안스님, 혜자스님, 혜담스님 동국대학교의 성본스님, 안양이건 울산이건 언제나 사랑과 자비의 말씀을 주시는 주지스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끝으로 아둔한 저희에게도 대자대비를 베푸시어 부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시고 이렇게 커다란 선물까지 안겨주신 큰스님께 감사의 말씀을 다시 한번 올립니다. 큰스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언제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01년 11월 19일)
<< 후기2..... >> 지난번 울산지원 사랑에 올렸던 "우리가족의 불교입문 이야기" 연재물을 정리하여 현대불교신문에서 주최한 신행수기 공모전에 출품해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어제 토요일 날 수상식을 한다기에 조계사에 올라갔었습니다. 법산스님께서 시상에 즈음한 법문을 하셨습니다. 신행수기로 엮어진 한마디 한마디 글자 한자한자가 모두 마음의 사리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으로가 아닌 마음으로 만들어진 사리들이라 하셨습니다. 저에게는 과분한 말씀으로 생각되었습니다만 거기 참석하셨던 다른 여러분들을 뵈니까 정말로 마음의 사리를 엮어오신 분들이었습니다. 저도 서울로 올라가면서 비행기에서, 조계사에 도착해서, 또 수상장소에 들어가서도 자꾸만 정여의 생각과 중일님 생각 때문에 솟아 오르는 눈물을 훔치느라고 애를 먹었습니다. 어쨌든 시상식을 끝내고 안양으로 가서 주지스님을 뵐려고 했습니다만 시간이 벌써 6시가 가까와서 그런지 주지스님을 뵐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새로 조성된 도량탑을 열심히 살펴보고 왔습니다. 정말 장엄한 우리 한마음 선원의 기념물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울산지원에도 이런 장엄물이 빨리 조성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 졌습니다. (2002년 2월 3일)
(출처 - 김규년 님글 한마음선원 / 아비라카페 알맹이찾기)
*이 글은 참고로만 활용해 주세요.내용의 취지와 갈길은 조금 다르지만 불자의 신심은 어느 문도나 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