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팥죽집
김양순
점심때마다 그 팥죽집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앉을
자리가 없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한 상에서 팥죽을 먹고,
수저를
놓기 바쁘게 일어나서 나가는 모습들로 가게 안은 북적댄다.
너나없이 불경기를
호소하는 요즘 보기 드문 풍경을 나는 그 팥죽집에 갈 때마다 보게된다.
팥죽은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입맛을 돋구어준
별미음식이었다. 팥의 붉은 색이 역질귀신을 쫓아준다고 믿어온 우리 조상들은 동짓날이면 집집마다 새알팥죽을 끓여서 여기저기 뿌리고, 온가족이 몇
끼씩 먹었다, 뿐만 아니라 이웃끼리 울타리 너머로 주고 받던 팥죽그릇 인심은 그 시절의 흔한 풍경이었다. 여름날 저녁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고 온
가족이 밀짚방석에 둘러앉아 뜨거운 팥칼국수를 먹던 일, 동네에 초상이 나면 마을 사람들이 쑤어온 팥죽을 큰 항아리에 담아두고 초상집에 모인
사람들이 너도나도 퍼다 나누어 먹던 일 등. 팥죽은 우리 민족의 몸과 마음을 배부르게 해주는 푸근하고 정겨운 별미
음식이었다.
사계절 내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는 그 팥죽집의 비결은 무엇보다 그 집의 후한 인심에
있다.
손님들이
사람 수에 맞춰 팥죽을 주문하고 나면 양푼에 담겨진 보리비빔밥이 공짜로 나온다.
싱싱한
채소를 곁들인 보리비빔밥 양푼에는 고추장,
된장,
참기름이
알맞게 들어가 있어서 그냥 쓱쓱 비비기만 하면 아주 맛있는 비빔밥이 되는데,
그
소박하고 감칠맛 나는 보리비빔밥을 다 먹을 때쯤이면 주문한 팥죽이 나온다.
진한
팥국물에 동동 떠 있는 뜨거운 새알 팥죽에다 신선한 겉절이김치를 곁들여 먹는 손님들 얼굴은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하지만
보리비빔밥으로 이미 배가 불러버린 손님들은 팥죽을 다 먹을 수 없다.
주인은
이때 손님들이 팥죽을 싸가지고 갈 수 있도록 준비해둔 투명비닐봉지를 건네준다.
내가 처음으로 우리 동네 그 팥죽집에 갔던 날은
3년
전이었다. 동지팥죽을
못 먹고 지나간 것이 서운해서,
동지
뒷날 그 팥죽집을 찾아갔다.
소문난
그 팥죽집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있었지만 처음이라서
한참을
헤매다가 그 집을 찾아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는 이미
영업이 끝났는지 아주머니 서너 분이 주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저는
여기 처음으로 왔는데요.
벌써 오늘
영업이 끝났나요?”
내가 묻자
주인아주머니가
괜찮으니
어서 들어오라고 했다.
새알팥죽
두 그릇만 포장해달라고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기다리는
동안 보리밥을 조금 맛보라며 그 아주머니는 양푼에 보리밥과 나물거리를 담아내왔다.
한
겨울인데 겉절이용 싱싱한 배추가 곁들여 있는 보리밥양푼을 보자 내 입엔 저절로 침이 고였다.
손님이
나 혼자뿐이어서 쑥스러웠지만 보리비빔밥을 먹은 뒤,
주문한
팥죽 두 그릇을 들고 그 집을 나왔다.
영업이
끝나갈 무렵에 찾아간 손님인 나를,
정성껏
대접해준 그 아주머니의 편안하고 넉넉한 태도는,
미끄러운
빙판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들고
온 팥죽 두 그릇이 생각보다 훨씬 많아서 마치 친정집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자주 그 팥죽집에
간다.
처음에는
푸짐한 음식 때문이었지만,
요즘에는
그 집의 활기찬 분위기가 좋아서이기도 하다.
새알팥죽
한 그릇에 5천원이니
서너 사람이 가서 먹어도 2만
원이면 배불리 먹고 팥죽을 싸가지고 올 수도 있다.
요즘
같은 불황에 어디에 가서 그만한 포만감과 활기찬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을까?
“이렇게
하고도 뭐가 남을까?”
가끔 그 팥죽집 걱정을 해주는 내
남편의 말에 나는
“설마 손해를
보면서까지 장사를 할까요?”
라고
대답한다.
내
짐작대로라면 그 집 주인은 서민들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잘 이해하는 사람일 것이다.
가족끼리
외식 한 번 하려면 여러 번 생각해보아야 하는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그 팥죽집 주인은 알 것이며,
지난
날 고향집에서 큰 가마솥에 보글보글 끓인 팥죽을 대가족이 둘러 앉아 맛있게 먹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허허로운 속마음까지도 잘 알고
있으리라.
오늘 점심때에도 그 팥죽집에는 흰머리
어르신들,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몰려든 중년의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팥죽 그릇을 앞에 놓고 정담을 나누는 사람들,
줄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출입문을
열어보고 자리가 없어 그냥 가는 사람들로 그 집은 보글거리는 팥죽솥 같은 분위기다.
무더운 여름날임에도 불구하고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있는 그 팥죽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값
싸고 허물없는 보리밥과 팥죽,
그리고
팥죽보다 더 뜨거운 사람들의 온기로 몸과 마음의 허기를 채우고 갈 것이다.
먹고 남은 새알 팥죽 한 그릇을 싸 들고 그 집을 나서는
나는,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을 성심껏 대접하는 것만이,
삭막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훌륭한
생존 방식이라는 깨달음을 덤으로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