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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1
고창 판소리 박물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241-1
판소리를 중흥시킨 신재효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8년 개관하였다.
건물 2층 규모로 신재효의 유품과 고창지역의 명창 판소리 자료 등 총 1,000점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은 소리마당과 아니리마당 등 5개 공간으로 구성된다.
이 중 소리마당에는 판소리의 기원과 판소리 시연 모형, 판소리 계보 등이 전시되어 있고
아니리마당은 고창군 소개와 신재효.진채선.김소희 등 이 지역 출신 명창들을 소개하고 있다.
가사집과 국악관련의 음반.서적 등 희귀한 전시물도 많다.
박물관 2층에는 진환의 서양화와 김옥균의 친필, 김정희의 간찰 등 8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입구에는 소리하는 광대와 고수에 대한 설명이 주욱 이어지고
안으로 들어가면 판소리에 대한 설명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판소리는 설화, 무가, 광대놀음, 판놀음, 시나위, 민요, 정악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이 녹아들어가 있으며 이들이 성악의 극학적인 추구를
중심으로 통합되어온, 우리 정통 무형 문화유산의 집합체이다.
판소리는 역사적, 예술적, 민족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언어학적, 문학적 관점 등
어느 면에서나, 고급예술과 서민예술이 만나고 상하계층을 아울러 언어문화가
종합되고, 뛰어난 예술성과 함께 대중성을 겸비함으로서, 민족의 정체성을
증명해주고 실현해준 전통적인 문화예술이다.
판소리는 우리민족의 창조적 재능에 관한 걸작으로서의 기능과 기술의 적용에
있어 그 어느나라의 전통문화와도 견줄만한 우수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판소리 현대화와 창극의 전형 일궈낸 계면조의 대가 정정렬(丁貞烈, 1876~1938)
남성 명창 못지 않은 성량과 독특한 수리성음으로 일세를 풍미한 박록주(朴錄珠, 1906~1979)
해방 이후 최고의 성음과 예술로, 국창의 반열에 오른 김소희(金素姬, 1917~1995) 명창
청미하고 풍부한 성음으로 일찌기 명창의 반열에 오른 천재소녀 명창 박초월(朴初月, 1916~1983)
김연수제 판소리 다섯바탕을 집대성 하여 후학을 길러낸 위대한 판소리 교육자 김연수
(金演洙, 1907~1974)
오늘의 보성소리를 있게 한 판소리의 위대한 교육자 정응민(鄭應珉1896~1964)
타고난 성음으로 최고봉을 이룬 천하명창 임방울(林芳蔚, 1904~1961)
명창 중 최고 벼슬에 오른 독창성과 즉흥성의 소리 이동백(李東伯, 1867~1950)
가문의 동편소리에 서편소리를 가미하여 판소리의 신기원 이룬 천재 명창
송만갑(宋萬甲, 1865~1939)
흥보가(興甫歌) 창:박녹주, 북:박동준
현재 불리는 흥보가에는 송홍록에게서 송광록과 송우룡을 거쳐 송만갑에게 이어진
동편제(흥보가)와 정창업에게서 김창환에게 이어진 서편제(흥보가)가 있다. 송만갑의 흥보가는
김정문을 거쳐 박논주.강도근이 이어받았고, 또 박봉래를 통하여 박봉술이 이어받았다.
서편제 흥보가는 김봉학, 오수암, 박지홍을 통하여 정광수, 박초월, 박동진이 이어받았다.
김연수의 흥보가도 동편제 계통에 든다.
판소리의 전승과 판소리의 기원, 판소리의 공연원리, 동편제 계보와 서편제 계보를 설명하고 있다.
동편제:동편(東便)은 우조(羽調)를 주장하여 웅건청담(雄建淸淡)하게 하는데
호령조가 많고 발성초(發聲初)가 썩 진중하고 구절 끝마침을 꼭 되게 하여 쇠망치로나
내려치는 듯이하고......담담연(淡淡然)하고 채소적(菜蔬的)이며.....천봉월출(千峰月出)격이라.....
서편제:서편(西便)은 계면(界面)을 주장하여 연미부화(軟美浮華) 하게 하고
구절 끝마침을 끌어서 꽁지가 붙어다닌다.
...서는 진진연(津津然) 육미적(肉味的)이며....만수화란격(萬樹花爛格)이다.
판소리란 무엇인가?
소리를 할 때 장단을 맞추는 북, 합죽선과 부채
판소리 형성기(18C 이전) 명창들
우춘대(禹春大), 하은담(河殷譚), 최선달(崔先達),
가장 오래된 판소리 기록
만화집(晩華集)의 춘향가 한시 사설 200구:조선 영조 30년(1754년), 만화 유진한(柳振漢) 지음.
우춘대, 권삼득, 모홍갑 등 명창 이름 등장
長安盛設禹春大 장안에서는 우춘대를 많이 일컫고 있는데
當世誰能善繼聲 오늘날 누가 그 소리를 제대로 계승해 나갈 것인가.
一曲樽前千段錦 한곡 소리하고 나면 술동이 앞에 많은 비단이 보수로 쌓이네
權三牟甲少年名 권삼득과 모홍갑은 어린 나이에도 유명하구나.
전기8명창시대(19C 전반)의 명창들
시대개관:19C 전기 순조(1801~1834) 무렵은 판소리의 기틀이 확립되고 동편제.서편재.중고제 등
다양한 유파로 발전되었으며, 서울과 경기의 양반들과 궁중에서도 판소리가 불려진 판소리의 전성기로서
8명(권삼득, 송홍록, 모홍갑, 염계달, 고수관, 신만엽 김제철, 박유전, 주덕기, 황해천)
정도의 명창이 뛰어난 활동을 벌였다고 하여 흔히 '전기8명창시대'로 일컬어진다.
전기8명창시대(19C 후반)의 명창들
시대개관:19세기 후반 현종-철종-고종으로 이어지는 시대(1835~1863)에 뛰어난 활동을 보였던 8명
(이날치, 송우룡, 김세종, 장자백, 정창업, 정춘풍, 김찬업, 김정근, 한송학)
정도의 명창이 활약하던 시기를 흔히 '후기8명창시대'로 부른다.
전기8명창시대에서 시작된 유파적 특색이 더욱 세련되엇고, 양반층에서도 판소리를
애호하게 되었으며, 대원군과 고종이 명창들에게 벼슬을 내리는 등 판소리는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잔칫날 초청된 판소리꾼
최초의 여류명창이 탄생되던 당시의 광경
동리정사에서 여류명창을 양성하는 모습
근대5명창시대의 명창들
시대개관:고종 후기에서부터 일제 치하였던 1930년대까지의 시기를 흔히 '근대5명창시대'라고 말한다.
1910년 이후로는 사회적 변동으로 판소리가 쇠퇴하면서 판소리는 창극으로 분화되고 산조 등으로 기악화 되었으며,
축음기의 등장으로 유성기음반 취입이 성행하면서 판소리는 더욱 대중의 취향에 의존하게 된다.
해방이후의 판소리 명창들 (1)
시대개관:해방이 되자 4일 후인 8월 19일 국악 건설 본부가 발족 되었으며, 이는 후에 '국악원'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창극 운동도 다시 활발해져 다시 여러 단체가 생기는 가운데, 레퍼토리도
전통 판소리를 벗어나 설화나 야사.야화 등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호황도 잠깐, 6.25로 인하여 거의 아사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6.25이후에는 다시 여성국극단이 생겨 일시 인기를 끄는 듯했으나 마침내는 16개 단체가 난립하는 가운데,
1958년 이후는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4.19이후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해방이후의 판소리 명창들 (2)
시대개관:판소리가 재생의 계기를 맞게 된 것은 정부의 무형문화재 지정에 뒤이은
판소리 창자들의 완창 발표회, 그리고 일부 뜻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된 판소리 감상회였다.
원각사에서 공연되던 창극
소리책, 사설, 유성기 음반을 통해 본 소리꾼의 흔적
명창 송만갑, 정정렬
명창 김창환, 이동백 이선유 등
명창 이화중선, 박록주, 정응민 정권진, 전도선 등
동초계 판소리 다섯마당
동초 김연수(東超 金演洙, 1907~1974)는 현대판소리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명장 중의 한명이다.
일제시대말부터 1970년대에 걸쳐 창극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며, 판소리 다섯 바탕을
새로 짜고 소위(동초계) 판소리를 완성하는 등 뚜렷한 행적으로 남겼다.
김연수 명창은 전남 고흥군 금산 출신으로 29세 되는 1935년 순천에 머물던 유성준 명창에게서
수궁가 전편을 수업하고 같은 해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 들어가 송만갑에게
흥보가와 심청가를, 이듬해 정정렬 문하에서 적벽가와 춘향가를 사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학께에서는 유성준, 송만갑, 정정렬, 등 당대의 근대 5명창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운 것은
확실하지만 2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5바탕 전편을 완벽하게 다 배웠을 것으로는 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판소리 다섯바탕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무속집안에서 출생하여
국악의 배경 하에서 성장하고 고흥신청 무속인들, 즉 국악 명인들로부터 배우고 교우하면서
음률이론을 체득하여 스스로 판소리 이론을 정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리광대의 삶에 대하여
신재효본 판소리 여섯마당
고창에서 출생하여 판소리사에 큰 족적을 남긴 동리 신재효 선생(洞里 申在孝, 1812~1884)은
판소리를 지극히 사랑했던 평범한 아전 출신 지식인이었고, 판소리 애호가였으며,
이론가였고, 판소리 창자들을 후원하면서 가단(歌團)을 이끌었던 판소리 지도자였다.
신재효 문하의 명창으로는 당대의 8명창으로 꼽히는 박만순, 이날치, 김세종, 정창업, 등의
명창들이 많았는데, 이들 명창들은 하나같이 판소리 이론에 밝고 소리광대로서
법통을 알고 지켜나가는 소리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판소리 여섯마당의 집대성
동리는 당시 구비전승되어오던 판소리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그리고 변강쇠가를 집성 정리했다.
40세를 전후하여 판소리에 심취하기 시작해서 53세(1864년경) 토벌가의 정리를
시작으로 유명을 달리하기 전까지 이어진 인생의 대기획이었다.
신재효 호적단자에는 호주의 이름, 나이, 본관, 호주 및
가족 그리고 소유노비 등이 기재되어 있다.
아래쪽에 두루마리 방아타령(근대초기 가로213, 세로34
동리 신재효 선생이 개작한 단잡가 20여수 중 방아타령 두루마리본이다.
동리 신재효 선생의 친필본이다.
평산신씨 계보, 평산신씨 세보, 동리조고행록(손자인 신찬영이 1942년에 쓴 글)
신재효 통정대부 교지
광대가(廣大歌)
이 광대가에서 동리 신재효는 광대를 중심으로 판소리에 대한 이론을 펼치고 있으며,
이 때 광대가 갖추어야 할 네가지 조건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 등을 제시하고 있다.
후반부에서는 역대 판소리 명장과 중국의 최고의 문장가를 비유함으로서
판소리 광대의 예술적 역활과 위상을 격상시켰다.
증동리신군서(贈桐里申君序)
1873년(고종 10년) 신재효가 62세 때 당시 진주목사였던 미금당 정현석이
신재효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당시 동리 신재효의 판소리 지원활동과
정현석의 판소리에 대한 견해와 당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수도
두루마리 심청가(근대초기 가로181, 세로33)
동리 신재효 선생이 개작정리한 삼청가본을 한지에 필사하고
노랗게 염색된 긴 배경지에 붙여 만든 두루마리, 필사자는 미상
차정첩(差定帖)
경오년(1810년) 부친 신광흡이 무장현감으로부터 받은 첩문으로 신광흡을
가설절충점일장출급자로 삼는다는 차정첩이다. 무장현감의 수결과 관인 3개가 찍혀있다.
만장은 생전에 고인과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이 고인을 기려 영전에
바치는 글인데 행상(行喪) 때는 상여 앞쪽에 위치한다.
만장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고인의 학덕, 이력, 선행, 문장, 직위 등에 대한 칭송과
고인과 글쓴이와의 친분관계 등을 표시하고 평소에 다정하게 지냈던
일이나 특별한 일을 떠올려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히기도 한다.
고창의 위대한 명창들
신광흡 추증교지, 신재효시고편
도리화가에 얽힌 사랑이야기
스물네번 바람불어/만화방창 봄아드니/구경 가세 구경 가세/도리화 구경 가세
우리나라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 나이 쉰아홉에 지어 불렀다는 '도리화가'의한 구절이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각 고을 광대를 불러모아 판소리 이론을 세우고 판소리사설을 완성한 신재호는
진채선이라는 최초의 여류명창을 탄생시킴으로서 판소리사에 또하나의 이정표를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판소리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진채선(陳彩仙, 1847~미상)은 신재효와
소리선생이었던 김세종의 지도를 받아 풍류, 가곡, 무용에도 능했고 특히 판소리를 잘했는데
미려하면서도 웅장한 성음과 다양한 기량으로 남자명창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고 한다.
고종 4년에 경복궁이 세워지자 축하잔치가 벌어졌는데 신재효는 진채선에게 소리를 가르쳐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에 보냈다. 그 자리에서 남장을 하고 방아타령을 불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채선은 대원군의 눈에 들어 대원군의 대령기생이 되고 말았다.
신재효는 곧 돌아올 줄 알았던 진채선이 끝내 돌아오지를 않자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외로움은 그리움으로 변하여 그 정을(도리화가)노래로 엮어 진채선에게 보냈다.
그때에 신재효는 쉰아홉이었고 진채선의 나이는 스물넷이었다.
바람이 스물네번 불었다는 가사 안에서는 신재효의 애틋한 마음이 녹아나 있다.
또한 이 노래는 명창이 된 채선이 공연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 본 공연과정이 숨어 있으며 절대가인의
풍류가 없었던 것을 한하고 여창자를 억대 풍류가격과 견주어 보려는 신재효의 긍지가 나타나 있다.
동리의 곁에서 판소리를 배웠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싹튼 애틋한 연모의 정이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 못다한 연정이 아름다운 노래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후 고창은 진채선을 필두로 허금, 김여란 등 여성명창의 보금자리가
되었고 김소희 등의 걸출한 여성명창이 배출되었다.
최초의 여성명창 진채선은 심청가와 춘향가(기생점고하는 대목)을 잘했다고 한다.
위쪽에는 영당축원, 도리화가이고
아래에는 합죽선(1984년 3월 16일 김소희 판소리의밤 공연을 축하하기 위해
제작한 합죽선, 바탕엔 송학장생의 화제와 그림이 그려져 있음)
비녀, 반지, 쌍가락지는 김소희 선생의 유품을 제자인 이영희 명창이 소장하다 기증하였다.
동리 신재효
동리 대상을 받은 명창들이 소개되어 있다.
발림마당에서는 북과 북채로 영상에 맞춰 직접 소리를 흉내낼 수 있으며,
혼마당에서는 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
판소리 박물관 한쪽에 김소희전이 열리고 있어서 그곳으로 가보았다.
김소희 선생 약력
국악계의 사표(師表)이며 국창(國唱)으로 불리운 만정 김소희(晩汀 金素姬, 본명:김순옥)는
1917년 12월 1일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345번지에서 태어났다.
8세까지는 꽤나 풍족하고 화목했다고 하지만 점차 살림이
어려워지면서 아버지가 자주 집을 비웠다고 한다.
김소희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거문고로 유명한 시대의 율객 박석기를 만나
이들 사이에 박윤초를 낳았다. 그러나 그는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사포리 345번지에 있는 김소희 생가는 마을 주민이 개축,
관리하여 오던 것을 고창군에서 2002년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다재다능했던 김소희
한국민요선집
이화중선 녹취테입, 춘향전(창극)옥사방문, 춘향전 광한루경개가, 심청전 선인따라가는데 등
김소희 심청전
김소희 심청가, 춘향가
남도민요, 덧뵈기 춤, 가야금, 가야금 연주, 살풀이춤
정정렬 판소리 선집
판소리 인간문화재 5호, 창조적인 예술가 김소희의 예술관
김소희 판소리의 특징
김소희 소리의 계보
춘향가:송만갑/정정렬/정웅민-만정판 춘향가(김소희제)
심청가:전반부-박유전-이날치-김채만-박동실-김소희
후반부-박유전-전재근-정웅민-김소희
흥보가:송만갑-김정문-강도근-김소희
*대충 1931년(열다섯살 때)에서 1934년(열여덟살 때) 사이에
송만갑에게는 (흥보가)를 배운 바 있으며, 송만갑 바디가 중심을 이룬다.
수궁가:박유전(1834~) 이날치- 공창식-박동실-김소희
김소희 판소리 입문
김소희의 스승들
송만갑, 정정렬, 박동실, 정응민
김소희의 제자들
낯익은 얼굴이 보여서 자세히 보니 오정혜가 김소희 선생 제자였다.
평상시에 입었던 한복이 전시되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인정서, 훈장증
노리개, 염주, 뒤꽂이, 옥반지 등
화장품 및 화장소품
김소희 선생이 사용하던 밥그릇, 수저, 보석함, 쟁반 ,접시, 종지, 함지박 등
김소희 선생이 아끼던 항아리인 듯하다.
붓, 붓발, 부채, 자작 서예작품 앞에서 찍은 사진.
김소희 선생의 서예작품
박물관 터는 신재효 고택이 있던자리로 현재 고창 신재효고택
사랑채는 박물관 오른쪽으로 옮겨져 있다.
체험방에서는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 등
각종 판소리를 들으면서 북치는 방법을 익힐 수 잇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동절기는 5시)까지이며 관람료는 어른 800원, 어린이 500원이다.
박물관 옆에는 신재효가 노래청을 두고 제자를 길러낸 옛집이 복원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