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壬寅)년 새해를 맞이하여 호랑이 탐구
1.우리 고장의 지명(地名)과의 관계
올해가 임인년 호랑이 해이다. 호랑이는 우리의 옛이야기로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 마을 이름과 앞을 흐르는 실개천이 옛날에는 마을을 인구(寅丘)로 앞시내를 호계(虎溪)라 불렀다. 그리고 우리 마을은 3,000여 년 전 신석기시대 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자취로 고인돌이 여러 곳에 산재 되어있다. 그르니 옛날에 호랑이가 마당지산에 살랐기에 마을이름, 시내이름을 호란이와 관계지은 이름으로 지어 졌다는 생각이 된다.
웃어운 이야기로 우리 마을에는 이름에 호자가 든 이름이 많다. 경산형님 병호, 나의 아명이 호, 병걸의 아명이 태호, 이다. 월연마을에 구강댁의 연호‘ 기계댁의 호식 등 왜 호를 좋아하셨을까? 호랑이와 관계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1)인구(寅丘) - 인구(仁邱)
‘뒷솔밭’에 있던 내가 손 짚고 있는 바위에 寅丘란 글씨가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옛날 인구마을의 이름이 寅(범인) 丘(언덕구)라 적고 불었다. 삼휴공의 종형이신 양계공의 삼휴정을 지었을 때 축시에 寅丘로 적혀있고, 마을 뒤 ‘뒤솔밭’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에 寅丘란 글자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 바위는 수몰로 없어졌다.
백형 되시는 명계공의 삼휴공의 초상 때의 제문에 “그대의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인구(寅丘)에 집을 짓고 밝은 창과 정결한 책상에 좌우로 많은 책을 쌓아두고 기쁘게 스스로 즐겨 나이가 들어 늙어 가는 줄도 알지 못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르다 어느 때부터인지 오늘날의 행정지명인 仁(이질인)邱(언덕구)로 바뀌어 쓰고 있다.
2)호계(虎溪)
인구마을과 월연마을 사이로 흐르는 시내
인구와 월연 사이로 흐르는 시내를 옛날 호계(虎溪)라 불렀다.
종형이신 양계공 문집에 삼휴정을 지은 축하의 글에서 “공의 선고장(先故庄)은 자양(紫陽)동에 있으니 호수공(湖叟公)께서 서식(棲息)하고 은거(隱居)하신 땅이라 공이 그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그 동리 호계(虎溪)의 가에 집을 짓고 시를 지어 읊으면서 마음이 가는 대로 유유히 생활하며 그 집을 삼휴정(三休亭)이라 하고”.....
그르다 세월이 흘러 근세에는 호계는 잊여지고 앞거랑(앞시내)로 어릴 때 불었다.
3)호랑이 굴이 있다.
‘북당골’로 올라가는 입구 바위산(현재는 댐에 놓여있는 ‘귀미마을’로 건거는 다리의 동쪽 끝의 왼편 취수탑 근처)의 바위에 큰 호랑이 굴이 있다. 옛날 할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그 굴에 불을 피우면 연기가 산 넘어 ‘미끼이산’에서 연기가 났다” 고하셨다. 그르니 ‘미끼이’까지 굴이 통한다는 말씀이다. 옛날 난리가 나면 그곳에서 주민들이 피난을 했다고도 전 한다.
2.호랑이와 우리나라와 관계
호랑이는 한반도에서 적어도 10 만 년 이상 살아왔다. 국토의 70 % 이상이 산지면서 산맥으로 연결된 한반도는 호랑이의 서식조건과 잘 맞았다. 충북 청원군(현재 청주시) 두루봉 동굴유적에서 발견된 호랑이 뼈는 최소 12 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 시대에 그려진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서 그 모습을 처음 드러낸다. 고래, 거북, 사슴, 멧돼지 등 사냥물 중 하나로 호랑이가 새겨져 있다.
5세기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의 수렵도에는 말을 탄 사냥꾼에게 쫓기는 호랑이 모습이 등장한다. 사신도 속 백호도 있다. 흔히 말하는 남주작, 북현무, 동청룡, 그리고 서쪽의 백호다. 사신도는 조선 왕릉의 벽화에서도 발견된다.
앞서 언급했듯 액운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기를 소망하며 대문에 붙인 민간의 세시풍속으로서 호랑이 그림도 적지 않다. 각종 민화와 그림, 장식품, 석상, 속담, 전설, 설화 등에서 호랑이는 숱하게 등장한다.
오죽했으면 조선은 호담국(虎談國)이라 할 정도로 호랑이 이야기가 많았다.
3.용맹함과 해학, 두려움의 상징
'호랑'은 한자의 호(虎)와 랑(狼), 즉 범과 이리가 합쳐진 이름이다. 무서운 동물을 뜻하는 일반적 단어였으나 점차 범이라는 특정 동물을 일컫는 명칭으로 굳어졌다. 전 세계에서 호랑이는 아시아 대륙에만 분포했다.
그중 한반도 호랑이는 중국 동북부와 러시아 극동 지역에 서식했던 호랑이와 뿌리가 같다. 하나의 혈통이다.
우리는 백두산 호랑이, 한국호랑이, 한국범이라 불렀다. 세계적으로는 시베리아 호랑이로 잘 알려져 있지만 현재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에는 더 이상 호랑이가 살지 않는다. 현재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북한·러시아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약 500 마리가 생존해 있다.
역사적으로 호랑이와 한민족은 수천 년간 균형잡힌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랑이를 없애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나선 건 조선 건국 이후다. 불교 이념에 입각해 살생을 금한 고려와는 구별된다. 조선 태종 때는 호랑이 사냥을 위한 별도 부대인 '착호갑사'를 처음 중앙에 설치한다. 당시 호환을 제거하는 일은 곧 나라의 안위와 체제 유지와도 직결된 문제였다.
한양도성에 수시로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로 조선은 호랑이가 많은 나라였다. 선조 때는 창덕궁 안에 호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기록이 있고, 영조 때는 궁궐에 호랑이가 출몰한 횟수만 3번이다. 궁궐에 호랑이가 나타나면 전쟁이나 기근 등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민간의 피해도 극심했다.
1734 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전국에서 140 명이 호환을 당했다. 상황이 이렇자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는 수령이 백성을 위해 제거해야 할 세 가지 해악으로 도적과 귀신 무리, 그리고 호랑이를 꼽을 정도였다.
동해안 지역에선 호환으로 죽은 혼을 위로하고, 호환을 예방하기 위해 범굿을 벌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 500 년간 지속적으로 호랑이 사냥에 나선 결과 한반도에서 호랑이 개체 수는 급격히 줄었다.
4.일제 해수구제(害獸驅除) 정책으로 절멸... 민족 애환 함께해
결정적으로 호랑이의 명맥이 완전히 끊긴 건 일제강점기 때다. 일제는 식민지 백성을 해로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대대적인 맹수 사냥(해수구제 정책)에 나섰다.
결국 1924년 경북 경주를 마지막으로 남한에선 호랑이가 자취를 감췄다. 북한에서는 1987년 자강도에서 잡힌 수컷 호랑이가 마지막으로 포획된 호랑이다. 당시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은 한반도 내 야생동물에 대한 체계적 보전 정책 없이 야생동물 퇴치와 포획을 주도한 사업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명백하다. 백두산 호랑이, 아무르 표범 등 한반도 내 대형 포식동물의 멸종에 결정적 원인으로 지목됐다.
다만 한민족의 기를 제거하기 위해 일제가 호랑이를 절멸시켰다는 주장은 확인되지 않았다.
한반도 내 명맥은 끊겼지만 호랑이는 여전히 우리 역사와 민속, 언어, 문화적 상징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한반도 형상을 닭 또는 토끼로 비유했던 일본에 맞서 20 세기 초 우리 영토를 호랑이 모습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 영향인지 우리 국민 4분의 3 이상은 호랑이를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동물로 생각하고 있다는 연구도 있다. 1988 년 서울 올림픽('호돌이')과 2018 년 평창 동계올림픽('수호랑') 마스코트가 호랑이인 것만 봐도 그렇다.
5.전국 곳곳 지명·설화 속 방대한 호랑이 흔적
전국 곳곳의 지명에도 호랑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호랑이가 포함된 지명은 389 개다.
새해 첫해를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의 '호미곶'이 대표적이다. 한반도 지도 전체를 호랑이 모습으로 봤을 때 이 지역이 호랑이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충남 아산시 탕정면 '호산리'도 마을 뒷산이 범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5개 행정리로 이뤄진 호산리에는 밖범이, 안범이, 밤이고개, 새터범이 등 호랑이와 관련한 다양한 지명이 있다.
호랑이가 많이 출몰한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도 있다. 부산 동구 수정산 자락을 감싸는 범일동, 범내골, 범천동이다. 범일동 안창마을은 '호랑이 마을'로도 불린다. 안창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하천도 '호계천'이다.
경기 가평군 호명산과 충북 괴산군 칠성면에서는 '호랑이굴'도 있다. 호랑이가 드나들며 많이 살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6.대한민국 상징 대표 동물... 문화적 자산
호랑이는 설화 속에서 우리 민족과 오랜 시간 애환을 함께해 왔다. 일단 그 양이 많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서는 1,000 건 이상의 호랑이 관련 설화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700 건 이상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구술과 기록으로 대표되는 두 문헌에 나타난 방대한 호랑이 흔적은 오랫동안 호랑이가 우리 삶과 함께했다는 증거다.
한반도에서 처음 국가가 세워진 사연을 담은 단군신화에서도 환웅의 배필 자리를 놓고 곰과 경쟁을 벌인 게 호랑이다. 쑥과 마늘을 먹으며 버틴 곰이 결국 승자가 되지만 우리 민속에선 호랑이가 곰보다 월등하게 많이 등장한다.
이들 이야기 속 묘사된 호랑이 모습과 성격이 다양한 것도 특징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낸 한국민속상징사전 호랑이편에 따르면 △영웅을 수호하는 신격화된 호랑이 △효와 열을 알아보는 조력자로서의 호랑이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신의의 호랑이 △포악하며 배은망덕한 호랑이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호랑이 등 5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여러모로 한국인에게 호랑이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 문화를 간직한 동물이다.
호랑이의 해를 맞아 국립민속박물관은 호랑이에 관한 상징과 문화상을 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오는 3월 1일까지 열리는 '호랑이 나라' 특별전이다. 산신도, 맹호도 등 유물과 영상 70 여 점을 볼 수 있다.
첫댓글 자양이 호랑이와 관련된 이름이 많은 것, 우리나라의 역사가 호랑이와 그런 관계가 있는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