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아침 8시부터 12시 반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쓰는 동안
소설이 된 삶, 삶이 된 소설
베르베르가 보고 듣고 읽고 겪는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된다
저자는 스물두 장의 타로 카드를 하나씩 소개하면서 각 챕터의 문을 열어 다섯 살 무렵부터 오늘날까지의 이야기를 풀어 간다.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성장 서사의 시작과 끝을 모두 뜻하는 〈바보〉 카드다. 카드 속 인물은 모험을 끝맺으면서, 혹은 다시 시작하면서 봇짐을 메고 길을 떠난다. 그 모습은 데뷔 3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지점을 지나 새로이 출발점에 선 저자 자신과 닮아 있다.
그가 들려주는 다채로운 여정 속 인물과 사건은 모두 그의 소설과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전미연 역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오롯이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을 중심으로 펼쳐질 수 있을까〉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와 인연이 깊거나 스쳐 지나듯 만난 다양한 존재들, 이를테면 뉴욕 거리의 사기꾼, 엉뚱한 영매 친구 모니크, 제멋대로인 반려 고양이 도미노는 저마다 소설 속 등장인물로 다시 태어난다. 그는 고등학생 때 탐독한 아이작 아시모프에게서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는 관점을, 스무 살 때 빠져든 필립 K. 딕에게서 광기의 힘을, 신인 시절 접한 스티븐 킹에게서 서스펜스를 쌓아 올리는 기술을 흡수한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지켜보며 겪은 충격과 여름 캠프에서 만난 친구 자크와의 유체 이탈 경험, 기자 시절에 임사 체험을 취재하며 수집한 정보는 『타나토노트』가 되고, 둘째 아들 뱅자맹을 돌보느라 잠 못 들던 수많은 밤은 『잠』이 된다. 삶이 곧 소설이 된 셈이다.
그뿐 아니라 베르베르에게는 소설이 곧 삶이다. 매년 10월 새 책을 발표하기 위해 그는 글쓰기를 중심으로 엄격하게 짜인 일과를 수십 년째 지속해 왔다. 아침 8시부터 12시 30분까지 〈무조건 하루 열 장〉. 오후 3시부터 6시까지는 집필에 필요한 자료를 조사하거나 소설 이외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6시부터 7시까지는 단편소설을 써낸다. 그렇게 한 시간 한 시간이 쌓여 어느덧 수만 시간을 이루고, 원고 한 장 한 장이 모여 수십 권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끝없는 창조력을 갖춘 타고난 이야기꾼이 한결같이 끈기 있게 글을 써온 결과다.
꺾일 법한 위기들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위대한 재능
〈계속 쓸 생각이다. 내 삶의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런 그조차도 글쓰기의 지난함을 토로한다. 〈여전히 내 직업에 대한 확신이 없다. 새 책을 쓸 때마다 극도의 부담과 위험을 느낀다.〉(467면) 그렇지만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에 별수 없이 〈서스펜스를 창조하는 시계공〉 같은 소설가의 작업을 이어 간다. 장장 12년에 걸쳐 수없이 출판을 거절당하면서도 개작을 거듭한 끝에 결국 『개미』라는 걸작을 세상에 내놓은 베르베르다운 행보다. 어쩌면 그의 진정한 재능은 누가 뭐라든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해내는 것,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는 것, 도무지 결승선이 보이지 않아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수십 년을 써온 그는 이제 자신 있게 말한다. 〈의심과 당혹감과 도저히 마침표를 못 찍을 것 같은 자신감의 결여는 창작 과정의 일부다.〉(467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타로 카드는 〈세계〉다. 카드 속 인물은 과거를 돌아보며 미소를 띤 채 세계를 구성하는 만물과 어우러져 춤춘다. 그 인물의 표정과 몸짓은 지난날을 양분 삼아 더 풍요로워진 내면의 세계를 품고 춤추듯 자유롭게 써 나가는 베르베르를 연상케 한다. 이 책을 마무리하며 작가는 독자들 앞에서 결연히 다짐한다. 〈글을 쓸 힘이 있는 한, 내 책을 읽어 줄 독자가 존재하는 한 계속 쓸 생각이다. 내 삶의 소설이 결말에 이르러 이 책의 첫 문장처럼 《다 끝났어, 넌 죽은 목숨이야》 하고 끝을 알려 줄 때까지.〉(470면)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까지나 기대를 가득 안고 물어봐도 좋을 것이다.
베르베르 씨, 오늘은 뭘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