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페이 근교엔 무덤들이 많다.
대만의 무덤들은 주로 마을 근처의 낮은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식 봉분이 아니고 조그맣고 예쁜 집을 지어 납골당으로 만든 것이다.
마치 소인국의 별장촌을 연상시킨다.
거리에는 오토바이도 엄청나게 많다.
우리나라의 중국집 배달원들이 타고 다니는 스쿠터 (scooter) 가
온통 거리를 메우고 있다.
모두들 헬멧을 쓰고 떼 지어 질주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5시 35 분에 징기스칸 바비큐로 유명하다는 음식점에 도착하여 한국식이 가미된 저녁식사.
모처럼 먹을 만한 식사로 배를 불리다.
밤 7시경 대만서 가장 크다는 용산사 (龍山寺) 란 절 관람.
대만인들의 신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절이라고 한다.
밤인데도 사람들이 많아 절 입구에서 줄을 섰다.
향내가 코를 찌른다.
두세 가닥 향을 피워 들고 다니며 탑을 돌고 있는 젊은이
관음경을 받들고 꿇어앉아 기도를 하고 있는 소녀
다들 진지한 얼굴이다.
용산사의 주신은 관음보살
부신은 관성제군, 문창제군
관성제군은 3국지에 나오는 무장 관우를 모시는 중국의 민간신앙
문창제군은 도교 신앙의 대상
그래서 용산사는 불교와 민간 신앙 및 도교가 결합된 절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절들이
부처님을 주신으로 모시고 칠성각이며 산신각을 지어 민간 신앙을 수용한 것과 같다.
관광객인 우리들에게는 절의 화려함과 특이한 조각품들이 구경거리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절들이 대개 깊은 산중에 위치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이렇게 도심 한 복판에 있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마음에 든다.
언제라도 마음 내키면 절에 와서 절하고 염불하면서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을 테니까.
용산사 가까이 야시장이 있다.
온갖 잡화들이 불빛에 비까번쩍하다.
옷가게, 팬시점, 구두 방 등등.
뱀 집에서는 징그러운 뱀들이 쇠 찰상 속에서 굼틀거린다.
타이페이 외곽 도시 도원현의
도원 호텔에 도착한 것이 밤 9시.
겉보기와는 달리 안은 깨끗하다.
침대, 가구, 냉장고, 화장실 모두 깨끗하고
면도기며 세면도구들이 아기자기하게 잘 준비되어 있다.
호텔 앞 술집 골목에서
남자 친구들은 맥주 몇 잔 씩
부인네들은 음료수 한 잔 씩
술은 우리나라 술과 맛이 같은데
안주로 시킨 멸치 튀김이며
땅콩 등이 완전히 소태다.
아열대 지방이라 낮에 땀을 많이 흘려
염분을 보충하려고 그렇단다.
노래방도 없고 호프집도 없고
갈 데는 호텔 밖에 없어
10시경 철수한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데는
역시 대한민국이 최고라.
9월 28 일 - 3일째-
아침 6시~7시 사이 호텔식.
메뉴가 좋다.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에서 가장 낫다.
중화요리의 기름기를 많이 빼버렸다.
역시 대도시나 대도시 주변의 호텔은 국제화 되어서
누구나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날씨도 좋고
버스에 오르니 벌써 죽암이 음악을 털어놓고
덩실 덩실 춤으로, 노래로 손님맞이를 하고 있다.
현지인들이 버스 안을 기웃거리며 싱긋이 웃고들 있다.
너희들이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신바람을 아느냐.
어느새 노래는
74 번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
75 번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76 번 꽃을 든 남자
77 번 찔레꽃
등으로 넘어가며
아침 8시 반경
버스는 아파트가 즐비한
타이페이 현으로 진입한다.
꽤 세월을 먹었음직한 아파트들이 창문에 쇠창살들이 붙어있다.
좀도둑들이 하도 많아서요 - 양귀비의 설명.
심지어 어떤 집엔
“도둑님, 하도 많이 오셔서 이제 가져갈게 없을 거예요.
제발 오지 마세요. 세세.“
라는 메모까지 붙여놓았단다.
배용준이도 얼마간 묵었다는 그랜드 호텔 (원산 대반점) 과
101 층이면서 세계 최고 ( 508 m ) 의 빌딩
등을 곁눈으로 보며
9시 10 분경
이에류 (野柳) 지질 공원이 있는 이에류 포구에 도착하였다.
포구 초입은 화산섬들의 전형적인 해안 모습
제주도 바닷가를 연상시킨다.
남태평양의 파도가 검은 바위를 하얗게 물어뜯고 있다.
물가에 놀던 사람이 흡인력이 강한 파도에 휩쓸리면
헤어 나오지 못하고 물귀신이 된다.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 부자 (父子) 가 한꺼번에 죽은 그 아버지의 동상이 서 있다.
이에류 지질 공원은 좁고 긴 해갑 (海岬 - 곶) 에 툭 튀어나와 있다.
1100 만년의 침식과 풍화의 잇단 작용으로
버섯같은 선상암, 촉대석, 벌집암석, 바둑판석,
여왕두, 춘향이와 이도령 석, 선녀의 구두, 물개동산
등 그 이름만 들어도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기이한 암석들의 전시장이다.
구경을 마치고
영상실에서 이에류 지질공원 형성에 대한 해설 영화 관람.
한국어 더빙이다.
차는 다시 달려 유황 온천이 있는 양명산의 장춘곡 골짜기로.
양명산은 온천 말고도 볼거리가 많은 대만 최초의 국립공원이라고.
양명산은 휴화산 - 그러니 지하엔 끓는 물이 많겠지.
꼬불꼬불 사행으로 오르는 산길 주변에
유황가스인지 수증긴지 허연 김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계곡들이 보인다.
단체 표를 끊어 라커에 옷을 벗어 넣고
하늘이 훤한 노천탕에 들어가다.
장춘곡 온천은 30-40 도
유황냄새가 약간 나고 물빛은 희뿌옇다.
피부병에 좋고 신경통에 좋다고 -
우선은 따듯해서 좋다.
여행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다.
샤워기 밑에는 머드 통이 있어서
그것도 온몸에 시커멓게 발라 본다. 아프리카 새깜둥이.
난생 처음으로 머드팩 (진흙팩) 을 해 봤다.
점심은 장춘곡 온천 식당에서 빙글 빙글 돌려가며 먹는 중국요리.
목욕 후라 맥주도 한 잔 씩 하며 맛있게 먹다.
1시 10 분 - 28일 오전 일과는 끝.
버스는 대만 최대의 박물관 고궁 박물관을 향한다.
가이드 양귀비는 고궁 박물관에 대하여
해설에 자신이 있는 듯 소개말에 신이 붙었다.
심심하다고
노래를 청했더니 80 년대의 인기 대만 여가수 등려군의
노래를 한 곡 뽑아 올렸는데
감기로 목이 좀 쉬어서 그렇지 수준급이다.
80 년대 중국인들은 낮에는 등소평의 말씀을 듣고
밤에는 등려군의 노래를 들으며 살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
우리나라에도 첨밀밀, 야래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두 등씨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중국인들의 가슴에 살아있다고 한다.
2시 10 분에 고궁 박물관에 도착 4시 20 분까지
2시간 이상을 관람하다.
고궁 박물관은 중화민국의 국부라고 할 수 있는
손문 기념관이기도 하다.
입구에 들어서니 전시관 건물을 가운데에 모시고
여타 모든 건물들이 좌우 완전 대칭으로 지어져있다.
진입로 양쪽은 중국식 정원
- 양귀비의 해설을 요약하면 -
고궁 박물원은 장개석이 베이징의 고궁 박물관에서 옮겨 간 보물들을 소장품으로 삼아 1965년 세워졌다.
공상당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장개석이 1949년 타이완으로 쫓겨 갈 때, 수만 점의 보물과 도서관의 귀중한 책들을 구축함에 실어 타이완에 옮겼다.
그때까지의 박물관 보물들을 송두리째 타이완으로 가져간 것이다.
그래서 베이징의 고궁박물관은 빈껍데기만 남은 박물관이 되었다..
대만의 고궁박물관은 전시물만 약 70만점.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보다 2배가 넘는다.
또 당시에만 70만점이지 그 후 세계 각국에서 살고 있는 중국인들이 어디서든 진귀한 것을 보면 자기 돈으로 구입해 나라에 바쳤다고 하니 그 수는 해마다 늘었다.
우리들은 부지런히 양귀비를 따라 다니며 해설을 들었다.
모두 3개 층에 걸쳐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1층에는 중국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사진과 유물들
2층에는 도기와 자기
3층에는 기타 유물들로 나뉘어 전시되어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3층 전시실. 엄지손가락 하나만한 조각상을 위해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쳤다거나 3대가 오로지 한 작품에만 매달려 완성한 조각상이라는 식의 전설 같은 얘기도 들었다.
중국의 역사는 정말 길고, 유물은 무궁무진 그 자체다.
그 소장품이 많고 또 종류가 너무 다양해서
(해마다 돌려가며 전시하기 때문에 현재 볼 수 있는 것은 불과 2,000 건인데도)
전시물을 보다가 다리가 아파서 그만 나오고 싶을 정도였다.
조회장이 박물관에 있는 어느 지도를 보았는데 고대 중국의 한나라의 영역이 한반도까지로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양귀비에게 항의했더니 건의서에 써내란다.
그래서 조회장이 부르는 대로 류근모가 받아써서 데스크에 제출하였다.
요즘 동북 공정이라고 중국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저희들의 지방사로 바꾸려는 작업을 진행 중인데 대만에서까지 설마 그럴 리야.
한나라 때에 만주에는 우리의 고대국가인 북부여가 있었고
한 반도 남쪽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한 삼국이 있었다.
평안도 일대에 낙랑, 현도, 진번, 임둔 이라는 한 사군이 있었다고 한반도와 만주 일대를 모두 한나라 영역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한참 잘 못된 것이 아닌가.
만약에 그 잘못된 지도가 우리의 건의로 수정이 되어진다면
그것 또한 이번 여행의 큰 소득이 아니겠는가.
첫댓글 남계, 횟수가 진행될수록 기행문의 정확한 내용과 빠짐 없는 기록에 감탄이 더해가네. 듣다가 흘려버린 내용, 무성의하여 제대로 듣지 않은 내용, 대강 듣고 지금은 거의 잊어가는 사실 등 빠짐 없이 적어 기억이 새로와 지네.
장개석이 70만점의 귀중한 보물을 배로 운반할 때 모택동은 그 배와 함께 보물을 수장했다면 지금의 대만은 완전 중국 땅이면 장개석도 수장 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택동은 그 배를 그대로 보내 주었다고 한다. 아마 장개석도 보물과 함께 한다면 자기는 살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 모택동의 의중을 알고 한 것일까. 모택동의 큰 그룻됨을 알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계속되는 남계의 여행기 재미있게 잘 읽고 있다네. 세계4대박물관 중의 하나인 고궁박물관의 잘못된 지도를 수정 건의하다니 ㅎㅎㅎㅎㅎ.......스넵사진은 소모임 산삼회에 로그인하여 산행앨범에서 감상하기바랍니다.
고궁박물관 소장품은 1931년 만주사변부터 국내 정정의 불안과 일본의 침략등으로 남경 귀주 사천등으로 옮겨 다니던 것이 1949년 약 1/4을 대만으로 옮겼고 북경의 고궁박물관에는 아직도 90여만점이 있으나 수준은 많이 뒤떨어진다함. 모택동과 관련된 말이 있으나 국민당정부의 극비 군사작전이었던 점과 모택동군이 제대로 된 항공기를 보유했을 가능성도 낮은 점 등으로 다분이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