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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시간의 균열 : 21세기 시각문화 조망체계 'Chasm' -Crack of Time : Prospective Scheme of the Visual Culture in 21th Century 최 태 만 미술평론가 국민대학교 미술학부 교수 ‘틈’, 가능성의 영역 굳이 국어사전을 따르지 않더라도 ‘틈’에 대해 우리는 ① 한 곳에서 다른 곳까지의 공간, ② 물체의 갈라진 부위나 물체와 물체가 이룬 사이, ③ 한 때에서 다른 때까지의 시간적 간격, ④ 시간적인 공백, 시간적 여유 혹은 겨를 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틈’은 시간적, 공간적인 맥락에서 간격(interval)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 ‘공간’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틈’은 여기와 저기에 가로놓인 공간적 유예지점으로서 ‘사이'이거나 혹은 연결점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시간과 시간 사이에 난 균열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맥락에서 그 균열의 대척지점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의 시공간’일 수도 있다. 따라서 ‘틈’은 단지 두 개체 사이에 비어 있는 휴지(休止)의 영역이라기보다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관계이다. 이 관계를 연결시키는 것을 ‘소통’이라고 한다면 ‘틈’은 곧 소통의 통로인 것이다. 여러분과 나의 사이에 가로놓인 ‘틈’은 소외의 빌미일 수도 있지만 관계의 근거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 관계가 단순히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아니라 교류하는 장이 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소통의 방법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틈’은 시공간 상에 가로놓인 어떤 ‘가능성’인 것이다. 필자로서는 이 국제미술학 세미나의 발제자가 제기한 ‘재현의 정치학’과 ‘문화민주주의’를 강령(these)이 아닌 가능성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접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골목, ‘틈’ 또는 도시의 숨통 다소 엉뚱한 예로부터 출발해 보자. 베네치아에 가면 우리는 종종 방향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유쾌한 경험일 수 있다. 특히 한가한 관광객의 입장에서 그 거리를 걸을 경우 운하와 고색창연한 건물들 사이로 난 꼬불꼬불한 미로에서 길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당황스런 일이라기보다 즐거운 추억을 누리고 축적할 수 있는 여유를 약속한다. 그 유쾌한 기억이 비단 구경꾼에게만 한정된 것일까? 직선상으로 죽 뻗은 대로에 익숙한 우리에게 좁고 구석진 골목 사이를 걷는다는 것은 도시의 모세혈관 속을 누비고 다니는 낯선 체험을 제공한다. 잘 정비된 넓은 도로와 그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 서로에게 무관심한 채 부산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인파는 오늘날 어느 도시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풍경이다.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이며 또한 경제적 목적에 충실하게 설계된 격자형의 도시공간은 유기적인 구조물인 신체가 기하학적으로 규격화된 인공환경에 적응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이미 익숙해져버린 풍경의 속으로 들어가 보자. 기하학이 끝나는 장소, 거기에 매우 유기적으로 자유롭게 구획된 장소가 시간의 더께를 뒤집어쓴 채 놓여있다. 이 골목, 필요에 따라 적당히 구획해 놓은 것만 같은 무계획적이고 엉성한 길이야말로 도시의 틈이고, 숨통이다. 기하학, 질서, 규칙, 강제, 권력, 감시의 유예공간으로서 골목은 중앙제어장치로부터 전달되는 지령이 일사분란하게 도달할 수 없는, 아마 전달과정에서 그 지역(부위)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뻔뻔하게도 왜곡되거나 변형되기는 하지만 별로 위험할 것 없는 일탈의 장소이자 지점이다. 말하자면 중앙감시체제의 사각지대로서 골목은 우리의 신체가 심리적 해방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시각문화의 맥락에서 볼 때, 어떤 점에서 골목이야말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정립되고 근대 계몽사상을 가능하게 했던 사고-주체의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원근법적 공간을 극복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마틴 제이(Martin Jay)는 ‘시각예술에서의 원근법에 대한 르네상스적 견해와 철학에서의 주관적 합리성이라는 데카르트적 관념과의 일치를 데카르트적 원근법주의’로 부른 바 있다.(마틴 제이, 모더니티의 조망 체제-미술과 건축공간의 해석, 이영철 옮김, 21세기 문화 미리보기, 이영철 엮음, 시각과언어, 1996, 74쪽.) 역사화(istoria)를 화가의 가장 이상적인 작품이라고 주장한 알베르티(Leone Battista Alberti)가 원근법을 ‘시각피라미드의 횡단면’으로 파악했고, (알베르티, 알베르티의 회화론, 노성두 옮김, 사계절, 1998, 69-71쪽 ) 화가의 임무를 ‘평면적으로 관찰한 어떤 물체를 화면이나 벽면 위에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색을 입혀야 하는데,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적당한 시점에서 보았을 때 (평면 위에) 그려진 물체가 마치 부조처럼 (배경면에서) 돌출하여 실물을 방불케 해야 한다’ (앞의 책, 103쪽) 고 했을 때, 이것이 아무리 과학적으로 비쳐진다 하더라도 시각적 환영에 불과할 뿐 실제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사실을 이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방체적 공간표현이야말로 도시와 같은 거대공간을 완전하고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처럼 용인되었다. 예컨대 데카르트적 원근법주의는 합리적으로 설계된 도시의 모델-그 기원은 멀리 로마까지 소급이 가능하다 -에 가장 적합하게 들어맞는다. 여기서 기하학적이고 정방형이며 직선이고 추상적이고 균일한 공간의 이념은 초기 정착민들의 훨씬 우연적인 구불구불한 길들에다 격자형의 혹은 거의 완벽한 원형 패턴들을 반복해서 얹어놓은 것을 뜻한 것이었다. (마틴 제이, 87쪽.) 시선의 독재로부터의 자유 공간에 대한 독재적 장악, 그것이 화면의 통일성을 고양시키고 시각적 안정감을 부여한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우리가 미술사에서 배워왔듯이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창안되고 알베르티에 의해 이론화되었으며, 마사치오, 만테냐, 우첼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프라 안젤리코 등에 의해 회화에 실천되었으며 친퀘첸토에 마침내 형식적 완전성을 확립할 수 있었던 원근법으로 말미암아 세계를 완전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는 생각은 너무 단선적이고(마치 역사는 직선운동을 하며 진화한다는 발상처럼), 기계적 도식에 얽매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원근법 자체는 마치 카메라의 렌즈처럼 단안으로 바라본 결과 세계를 정태적으로 기록해야 하는 결함을 지닌 것이었기 때문에 그 원리가 정립되자마자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실제로 세계관, 더 나아가 천체우주관과 어떻게 관련을 맺을 수 있는가를 다음과 같은 작품들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피렌체의 산타폴로니아(Sant'Apollonia) 수도원에는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Andrea del Castagno)가 약 1447년경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프레스코 벽화 <최후의 만찬>이 있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이성적 냉철함이 지나쳐 뵐플린(H. Wölfflin)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에 적용했던 유명한 개념인 선적이면서 동시에 폐쇄적 특징을 찾을 수 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프랑카스텔(P. Francastel)의 주장처럼 중세가 채색된 빛 la lumière colorée 으로 이상적 공간을 창조하였다면, 르네상스는 투명한 빛la lumière diaphane 으로 이상적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 (피에르 프랑카스텔, 미술과 사회, 안-바롱 옥성 옮김, 민음사, 1998, 31쪽.) 이 공간이야말로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눈’을 가지고자 했던 콰트로첸토 시대정신을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카스테뇨가 이 벽화를 제작하기 150년 전인 1305년경 지오토(Giotto)는 파도바의 아레나 예배당 벽에 <성탄>과 아울러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지오토의 벽화에서 르네상스적 공간은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다. 고딕시대의 필사본 삽화와 비교해볼 때 공간이 보다 넓어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 구성방식은 여전히 설명이 앞서기 때문에 이 작품이 지닌 혁명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이 벽의 공간에 압착해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르네상스 원근법은 ‘입방체적 공간’의 표현으로부터 나왔다. 당대의 인문주의자와 예술가들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기하학을 연구했다. 프랑카스텔의 해석에 의하면 카스타뇨의 <최후의 만찬>에서 ‘하나의 입방체는 다수의 입방체를 대신하고 있다. 하나의 유일한 장소가 지성과 자연의 모든 질서를 집결하는 이 작품에 있어서 표현방식은 세계와의 자연주의적 접촉이 아니라 양식화된 표현방법을 선정하는데 따라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피에르 프랑카스텔, 154-155쪽) 우리가 알고 있는 <최후의 만찬>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1425년부터 1457년 사이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 그라체 수도원 식당 벽에 그린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은화 몇 닢에 스승을 배신할 패덕한 제자가 있음을 밝히는 순간 만찬자리에 일어나는 긴장을 표현한 이 작품은 각 사도들의 성격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주의적 관념을 반영하고 있지만,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비해 화면은 지극히 안정되어 있다. 반면에 베네치아의 산 조르죠 마조레 교회에 있는 틴토레토(Tintoretto)의 <최후의 만찬>은 1592-94 사이에 캔버스에 유채로 제작한 작품으로써 예수가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 평화롭고 따뜻한 친교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화면은 레오나르도의 작품에 비해 훨씬 역동적이다. 즉, 화면의 왼쪽 윗부분에 걸린 등잔과 예수의 몸에서 발산하는 초자연적 빛에 따라 소실점이 애매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틴토레토 자신이 도제들로 하여금 화면을 몇 개의 입방체로 구획한 후 인물을 배치하고 화면을 구성하도록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원근법의 원리를 충실하게 따르고자 했으나 이 작품은 빛의 신비로운 효과, 인물에 대한 변형, 화면을 메우고 있는 신성한 분위기, 상징과 알레고리에의 관심 등으로 르네상스적이라기보다 매너리즘적 특징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에서 공간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싹트고 있음도 주목해야 한다. 알베르티의 선원근법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입각한 천체관을 반영하고 있다. 1513년 폴란드의 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제기하자 지구는 평단면이고, 오히려 우주가 둥근 반구형이라는 이 믿음에 대한 혼란이 일어났다. 이어서 브루노(Bruno)가 주장하고 갈릴레오(Galileo)에 의해 강화된 단일중심으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복수중심의 세계, 무한성이 주장되었던 것이다. (Maurizio Calvesi, Art and Science, ⅩⅦ Esposizione Internazionale d'Arte la Biennale di Venezia, General Catalogue 1986, Edizioni la Biennale Realizzazione Electrice, p.47.)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설한지 80년쯤 후에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발명하여 천체관측에 응용한 결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진실임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물론 교회, 특히 예수회의 혹독한 반대와 탄압에 굴복하여 갈릴레오는 짐짓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으나 훗날 케플러와 같은 학자에 의해 천동설의 허구는 밝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회화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우주천체관의 동요는 당시 지식인 그룹에 속해 있던 예술가들로 하여금 일시점 원근법에 대한 회의를 느끼도록 자극했다. 매너리즘 이후 나타나는 다시점 원근법, 특히 바로크 회화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부상한 복시시점은 바로 이러한 우주관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이 시기에 제기된 경제적 위기와 인플레이션, 종교개혁운동은 르네상스적 확실성을 붕괴시켰다. 하우저(A. Hauser)는 친퀘첸토 시기에 이미 나타나고 있는 고전주의로부터의 이탈의 이유를 고전주의에서 예술적 표현을 얻었던 균형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견고한 현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이상이자 허구였고 르네상스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본질적으로 동적인 시대, 어떠한 해결책에도 만족을 얻지 못한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이태리의 경제적 주도권의 상실,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회권위의 동요, 프랑스와 스페인에 의한 침범, 로마의 약탈(sacco di Roma) 등등의 사태 이후의 이탈리아에서는 조화와 안정이라는 허구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근세편(上), 백낙청․반성완 옮김, 창작과비평사, 1980, 112-113쪽.) 그렇다면 현대에 제작된 <만찬>은 어떠한가? 쥬디 시카고(Judy Chicago)의 주도 아래 1973년부터 시작하여 1978년에 완성한 이 작품은 약 100여명의 여성작가가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 변이 14.4미터에 이르는 이등변 삼각형의 형태를 지닌 이 거대한 식탁에는 39명의 여성 명사들에게 바치는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여성의 성기로 이루어진 음식물을 담은 접시, 잔, 냅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핼 포스터(Hal Foster)가 제니 홀처(Jenny Holzer)나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와 같은 작가의 ‘사회적 재현’에 초점을 맞춰 한 말이긴 하지만 시카고의 <만찬> 역시 포스터의 분석처럼 ‘미술가는 미술작품의 생산자라기보다 기호의 조작자’로 등장하고 있으며, 관객은 ‘미적인 것의 관조자 혹은 구경거리의 소비자라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메시지의 능동적 독해자’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Hal Foster, Subversive Signs, Recording : Art, Spectacle, Cultural Politics, Bay Press, 1985, p.100.) 이 시점에서 필자가 왜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와 이 작품을 비교하였는지 그 이유를 밝혀야겠다. 필자로서는 지오토의 그림에 비해 카스타뇨의 작품이 우수하거나 진화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틴토레토의 그림에 비해 쥬디 시키고의 이 작품에서 ‘표현의 진전’을 증명할 근거는 없다.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형식적 진보가 아닌 표현의 혁신성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사회적 수용과 소통의 방식이다. 사실, 이 모든 작품은 미술비평과 미술관이란 제도에 의해 신비화되고 물질로 구현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탈물질적 초월성’이란 이름 아래 예찬된다. 판단컨대, 비엔날레 역시 예술의 이름으로 벌이는 축제인 한 이러한 ‘신화생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원근법이 세계를 하나의 눈으로 포착하는 ‘시선의 독재’를 용인하는 것이었다면, 나아가 그것이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세계를 허구의 통일된 구조 속에 가둬버리는 올가미였다면 적어도 우리는 정체성, 통일성, 단일성, 대중적 환호 등의 명분이나 유혹에 빠져 우리 스스로 세계를 정태적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시선과 시선이 충돌하는 장이거나 혹은 시선의 독재를 거부하는 골목과도 같은 장소, 그것이 필자가 그려보는 부산비엔날레의 모습이다. 21세기 시각문화의 조망체계란 바로 이러한 독재적 시선으로는 도저히 읽혀질 수 없는 시각문화의 인문지리를 바라보는 복수의 눈이다. 막다른 길인데 어느 방향으로인가 뚫려있는 (비)논리적 구조, 도시의 실핏줄로서 골목은 탈원근법적일 수 있다. ‘틈’, 균열된 시간의 흔적들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함에 있어서 새로운 관점을 세우거나, 기성 패러다임의 수정, 또는 그것의 비판적 극복이 필요할 때 사람들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주희(朱熹)는 공자에게로 되돌아감으로써 송대의 성리학을 열 수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피치노(Marsilio Ficino)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입각한 스콜라철학의 피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플라톤으로 되돌아갔다. 오리지널에 덧붙여진 주석(註釋)은 그들이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으로의 단순한 회귀이거나 기억의 복원을 의도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훗설(Edmund Husserl)이 학문의 절대적 명증성을 위해『데카르트적 성찰』(Cartesianische Meditationen)을 추구했던 것처럼 라캉(Jacques Lacan) 역시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새로운 주석을 덧붙였으며, ‘다시 데카르트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었다. 되돌아간다는 것은 시간은 직선운동한다는 의식에 대한 반역이자 그것에 흠집을 내는 것이다. 그곳에서 ‘틈’이 발생한다. ‘틈’은 이렇듯 시간의 균열에 대한 메타퍼이다. ‘틈’의 가능성은 시공간적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공간적 맥락에서 골목이 원근법의 독재로부터의 자유를 약속하는 장소이듯이, 시간의 가역성(可逆性) 또한 운명적으로 시간의 지배를 받는 유기체로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의 자유를 허용한다. 이 시점에서 부산을 생각해 보자. 지형에 따라 비정형적으로 팽창한 부산은 몇 개의 간선도로와 그것을 연결하는 터널, 다소 위압적으로 도시를 관통하는 고가도로, 무차별한 개발이 가져온 칙칙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도시공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부산의 도시구조가 지닌 특징을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기술할 수 없으나, 나에게 부산은 정서적으로 과부화된 근대화의 개발 드라이버가 그것에 대한 저항과 혼성된 채 착종의 형태로 유예된 장소로 비쳐진다. 사실, 데카르트적 원근법주의의 관점에서 혼성과 착종은 무질서로 비쳐질 수 있다. 이 무질서를 무질서로 내버려두지 않는 것에서 ‘틈’이 틈입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제공된다. 나로서는 혼돈을 예찬하고 싶은 의도라곤 추호도 없다. 그러나 보라. 우리의 의식과 삶이란 얼마나 무질서하며 또한 정돈된 것인가? 이것이 살아있음의 증거이다. 끔찍한 합리주의적 시간관에 균열을 내는 것, 그것은 현실에 가위눌린 우리의 삶이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이자 기회이다. 예술이 어떤 형태로든 이러한 해방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 틈을 메우기보다 그것 사이에서 노는 것(遊於間)은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과잉된 비엔날레 한국은 지금 비엔날레의 풍요를 넘어 과잉공급 상태에 놓여 있다. 아니, 광주비엔날레의 성공(?)에 자극받은 여러 나라, 도시들이 앞 다퉈 비엔날레에 문화산업의 승패를 걸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 아시아 지역에서 개최되고 있는 주요 비엔날레를 꼽는다면 1995년에 창설된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하여 타이페이비엔날레, 상하이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서울 미디어아트비엔날레, 광동비엔날레 등을 들 수 있다. 범위를 더 넓히면 시드니비엔날레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삼년마다 열리는 트리엔날레만 하더라도 요코하마, 오사카, 오스트레일리아 퀸즈랜드의 아시아태평양트리엔날레 등에 이르고 보면 과연 미술이 국제적 페스티발의 좋은 상품인 것처럼 각광받고 있음을 실감할 수밖에 없다. 어떤 점에서 비엔날레란 이 제도야말로 ‘미술관은 사원이고, 비평가는 승려이며, 미적 경험은 신비적 계시이고, ‘미술계’는 종교를 세속적으로 대체한 것’이란 부르디외(P. Bourdieu)의 풍자적 비유(프랜시스 프라시나, 재현의 정치학, 재현의 정치학 40년대 이후의 미술, 폴 우드 외 지음, 정성철․조선령 옮김, 시각과언어, 1997, 112쪽에서 재인용.)를 불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일지 모른다. 낡고 권위적인 미술관에게 기대할 수 없는 활력 같은 것, 우리는 비엔날레에서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점에서 ‘동양담론’(Oriental Discourse)을 핵심어로 내세울 것으로 예상되는 2004광주비엔날레의 총감독으로 지명된 이용우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열 살의 나이로 생각해보는 비엔날레의 정체성으로부터 문화의 쟁의장소로서 비엔날레의 역할, 그리고 문화생산과 소비의 문제, 비엔날레와 대중문화, 비엔날레 서브라임 등 우리 주변에서 비엔날레가 끼치는 여파들을 ‘문화’라는 확장된 영역에서 생각해볼 예정입니다.” 김동욱 수석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용우 2004광주비엔날레 예술총감독 지명자의 발언 (≪Art in Culture≫, 2003년 4월호, 152쪽) 또한 그는 광주비엔날레가 정체성과 차별성을 지녀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응하고 있다. “비엔날레의 정체성은 하루아침에 가시화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체성’이라는 말도 문맥상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정체성은 변해야 더욱 왕성한 생명력을 갖습니다. 물이 고이듯 한 곳에 정체해 있는 정체성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정체성이라는 말이 흡사 바위처럼 꿈쩍하지 않는 고체덩어리로 착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남들이 쉽게 알아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을 주장하는 측은 부단히 흐르고 움직이며 번식작업이 왕성한 생태학적 정체성의 의미를 알고 강조해야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냥 긍정적으로 낙관하기에 현실은 너무나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난 십 년만 되돌아보더라도 우리는 비엔날레 권력이란 것을 목격한 바 있지 않은가? 누구를 거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1997광주비엔날레에서 자신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바 있는 한 명망 있는 큐레이터는 감독직 수락을 제안해온 베네치아 당국과의 협상에 승리함으로써 두 회에 걸쳐 연속적으로 감독으로 활동하는 한편 다른 군소 비엔날레에서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지난 2002광주비엔날레 감독은 1997년에 큐레이터로 활동했으며, 2000부산국제아트페스티벌을 맡았던 사람은 1997광주비엔날레의 실질적인 지휘자이기도 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비엔날레의 과잉공급은 이들을 부산하게 만들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연루될 수 있으므로 이들이 비엔날레를 놓고 생산되는 각종 담론의 진원지 역할을 할 것이고, 특정한 흐름을 주도할 것이다. 권력이 특정인들에게 제한적으로 독점되는 현상을 조장하거나 방치하면서 문화의 분배와 참여, 더 나아가 ‘문화민주주의’를 거론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비엔날레란 낡은 제도에 흥분하고 목을 매고 있는가? 비엔날레는 과연 문화의 쟁의장소가 될 수 있는가? 아니면 기껏 누구의 의심처럼 떡고물이나 탐내는 사람들의 탐욕이 충돌하는 장소에 불과한가? 필자는 비엔날레의 역할이나 능력에 과도한 기대를 할 필요도 없고, 또 필요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여서도 안 된다는 입장이다. 비엔날레를 매개로 의미를 생산, 소통하는 행위 자체가 문화의 일부인 것이다. 제안 : 비엔날레는 네트워킹과 소통 시스템으로 거듭나야 한다. 지금 우리는 여전히 모순(contradiction)과 분쟁(conflict) 앞에 직면해 있다. 부시 행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명된 '악의 축‘의 하나인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독재정권이 마침내 미․영국군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 붕괴되었다. 미국에 의해 주도된 이라크 침공은 예견된 것이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2001년 9월 11일, 세계 경제의 중심부라고 불려졌던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가 민간 항공기를 탈취한 테러리스트의 자살충돌 테러에 의해 붕괴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공군의 진주만 폭격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던 미국인들에게 본토의 중심부가 테러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진주만의 상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심리적 공포를 느끼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다. 9.11테러 이후 부시정부가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부호이자 극단적인 이슬람 전투조직인 알 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은신시키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이 미국군의 포격을 받아 초토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세계의 지식인들은 다시 한번 ‘문명의 충돌’이냐 ‘문명 사이의 공존’이냐 라는 문제에 대해 심각한 토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9.11테러가 발생하자 많은 사람들이 하버드대학의 헌팅턴(Samuel A. Huntington) 교수가『문명의 충돌』에서 예상한 문명 간의 갈등이 마침내 ‘보이지 않는 전쟁’, ‘적이 불분명한 전쟁’이 현실로 나타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였으나, 헌팅턴 자신이 이 테러가 문명의 충돌은 아님을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 할 사건이 하나 있다. 9.11테러가 일어나자마자 부시 미국 대통령은 ‘십자군 전쟁’을 거론하며 테러와의 전쟁이 성전(聖戰)임을 묵시적으로 드러내었다. 물론 그는 금방 이 발언을 철회했으나,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통해 이번 이라크 전쟁이 십자군전쟁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반전을 부르짖었던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 만약 미국이 명분보다는 석유확보란 경제적 이유로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면, 성지회복이란 명분보다 경제적 실리를 더 추구했던 십자군전쟁과의 유사성이 더욱 커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전쟁에 대한 이슬람 문화권의 저항은 더욱 거세질 수 있다. 어쨌든 시간의 순서로 볼 때, 아프가니스탄의 테러리스트들을 ‘청소’한 부시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이란․이라크․북한을 대표적인 ‘악의 축’으로 지목하였다. 사실 ‘악의 축’에 북한을 포함시킨 것은 촘스키(Naum Chomsky) 교수가 지적한대로 이슬람 국가들의 반발을 완화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었으나 워싱턴의 매파 정책입안자들에게 북한은 여전히 골치 아픈 존재임에 분명하다. 마침내 2003년 3월, 부시정권은 여러 나라들의 반대와 유엔의 동의안을 배제한 채 이라크 침공을 감행, 개전 삼주 만에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이라크를 제압한 세계의 맹주 부시가 다음 표적으로 어느 나라(북한? 이란? 아니면 시리아?), 누구를 지목할지 아직 모르지만 어느 정도 예측할 수는 있을 것이다. 9.11의 충격은 세계 경찰국가로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재편 프로그램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한편으로 해방 이후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상당부분 미국에 의존해 왔던 우리로 하여금 이슬람문화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고, 또한 그동안 이슬람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도 깨닫도록 만들었다. 비록 9.11테러가 ‘문명의 충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이슬람=폭력에 호소하는 종교’, ‘꾸란=칼’, ‘아랍인=테러리스트’란 등식에 따라 타문화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내면화시켜온 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에는 1970년대 이후 아랍지역권으로 진출한 기업들의 역할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아랍은 여전히 미지의 땅으로 각인되고 있다. 탈레반이 지배하기 이전에도 아프가니스탄은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나라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이 지역을 경유하여 한반도로 들어왔으며, 신라의 많은 구법순례승들 또한 이 지역을 통과하여 인도로 들어갔다. 현재의 파키스탄 페샤와르 지역에서 형성, 발달한 ‘간다라미술’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중국의 서쪽으로 전래하였고, 다시 한반도에 전해져 석굴암과 같은 훌륭한 불교미술로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수도 서라벌은 당의 장안과 마찬가지로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만큼 처용(處容)이나 괘릉의 무인석 등에서 볼 수 있듯 당시 많은 서역인, 아랍인들이 귀화하여 한반도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三國遺事』는 가락국 수로왕의 부인 허씨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는 만큼 인도 또한 우리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나라임에 분명하다. 한무제가 대동강 이북 지역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문화와 본격적으로 교섭하면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독자적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던 만큼 중국은 우리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미술은 주로 일본, 유럽, 미국으로 편향된 정보의 입수, 교류와 진출을 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이들 문화로부터 나온 현대미술은 우수하고 나머지 지역의 문화는 열등하다는 이분법에 길들여져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모더니즘 미술의 쇠퇴와 함께 고전기 이후 예술의 주요 담론이었던 아름다움, 진리, 본질 등의 ‘거대담론’이 과거지사로 치부되면서 개인, 신체, 성(性), 주변 등이 부각함에 따라 보다 넓고 큰 시각으로 문화 사이에 가로놓인 동질성과 이질성을 조명하고자 하는 의욕의 실천 자체를 가로막고 있다. 문명의 충돌보다 더 위험한 것은 타 문명(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일 수 있다. 서구열강들에 의한 식민지 개척과 약탈이 이루어지면서 주로 문화인류학을 중심으로 타문화에 대한 조사,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그것은 명백히 서구에 의한 비서구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그 가운데 서구인들의 의식 속에 뿌리내린 ‘오리엔탈리즘’은 9.11테러 이후 서구인들에게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을 구축하고 있다. 세계대전이란 광기의 시대를 거치며 미국과 소비에트연방을 축으로 한 세계질서의 재편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문화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만방에 과시하기 위해 모더니즘을 육성했으나, 모더니즘은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기보다 미국 중심의 문화만이 세계언어가 될 수 있음을 공공연하게 주창함으로써 다른 문화 속에서 성장한 예술은 지방주의, 토속주의, 민속예술로서만 논의되었을 뿐 그 가치가 제대로 주목받고 평가되지 않았다. 이런 질곡은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자문화를 비보편적인 것, 열등한 것으로 강요받거나 혹은 정치이념이나 명분에 따라 독선적인 자문화 우월주의를 세뇌 받음으로써 결국 ‘자기도 잃어버리고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여유도 차단당하여 왔던 것이다. 우리 스스로 현재 지금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되짚어보고 그 역사 속에 녹아있는 문화와 문화 사이의 교류와 소통의 과정을 추적한다는 것은 정신없이 앞만 보고 질주한 나머지 우리 스스로 방치해 왔던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정립하려는 노력을 요구한다. ‘틈’을 주제로 한 이 비엔날레는 바로 이러한 노력의 결실을 보여주는 장이 될 것이다. 군사력에 의한 억압이 정의로 통용되는 새로운 불안의 시대에 동방의 모서리에, 그것도 분단된 채 전통과 현대가 착종된 가운데 놓여진 우리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도 우리의 시야는 세계를 향해 열려야 하며 그것은 서구를 향한 일방적 구애(求愛)가 아닌 타문화(문명)와의 공존을 위한 이해와 존중의 정신 위에 수립된 개방성이어야 할 것이다. 공존하기 위해 타문화를 이해해야 하고, 존중해야 하며 무엇보다 그 뿌리를 알아야 한다. 따라서 2004비엔날레는 ‘네트워킹(Networking)과 소통(Communication)’을 핵심어의 하나로 제시함으로써 문화의 공존을 위해 문화(문명) 사이에 가로놓인 ‘그 무엇’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자, 이것들을 관계 짓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근거 없는 구호로서 ‘자민족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자기소외만 가져올 뿐이며, 표피적이고 피상적인 타문화 예찬은 공허한 환상만 낳을 뿐이다. 이런 한계를 불식시키기 위해 그 문화와 문화(문명과 문명) 사이를 주목함으로써 작가는 물론 관람객들이 문화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에 이번 비엔날레의 목표를 삼아야 할 것이다. 소통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강령, 주장, 구호가 일방통행적 방식이라고 한다면 대화의 제안은 쌍방향적이다. 그 쌍방향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네트워킹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요소가 이른바 인터페이스(interface)일 것이다. 네트워킹이란 사람들이 이루는 여러 가지 종류의 일을 횡적으로 연결하는 일종의 그물코와 같은 관계를 형성하는 일을 지칭하는데 일반적으로 네트워크나 인터페이스를 디지털 미디어의 용어로 이해하기 쉬우나 전통적인 예술작품 또한 훌륭한 인터페이스로 활용할 수 있다. 언어, 전통, 관습의 차이가 만들어놓은 오해, 편견, 위계를 불식시키고, 자아와 타자를 평등하게 연결시키기 위한 네트워크의 구축, 그것이야말로 비엔날레가 지향하는 방향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2004부산비엔날레를 위해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자 한다. 먼저, 틈을 뉴튼적 시간관념(직선운동, 진화, 가역성의 부정)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상정할 때 그러한 관념에 균열을 내어야 한다. 시선의 독재를 구축한 원근법의 해체, 그것은 뉴튼적, 데카르트적 관념에 균열을 내고, -단지 균열을 내어 파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선의 지평을 확장시키고 그 이면까지 보게 만드는- 시선의 자유로운 여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시공간의 확장가능성을 나는 돈황의 막고굴에 그려진 벽화, 송대 곽희(廓熙)의 <조춘도>, 원말(元末)에 활동한 황공망(黃公望)의 <부춘산거도>, 그리고 조선 후기 정선(鄭敾)의 <금강전도> 등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필자로서는 공간적으로도 합리성이란 이름 아래 일사분란하고 기계적으로 구획된 것만이 아닌 자연발생적이라고 할만한 것에 대한 주목 즉, 도시의 모세혈관인 골목을 모델로 미술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 ‘사건’이나 ‘물건’ 또는 사람이 그 혈관 속에서 유동할 때 생동하는 문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서로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의 구현을 위해 나는 문명의 전파자이자 약탈자였던 코르테스나 피사넬로가 아닌 진정한 여행자 이븐 바투다와 같은 존재를 부각시켜 이 비엔날레가 이러한 (문화의) 여행자들을 네트워킹하는 장치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
첫댓글 쮠장님예지는 가방 끈이 짧아가 뭔말인지 모르겠심더이 어려운 걸 뭐하러 악착같이 공부합니꺼이해 못하겠심더
그런닌까 공부 하세욧~!!공불 하지 않으니 이해력이 생기지 않는 거죠
여기에 올린 자료들은 어디서도 못 구해보는 알토란같은 정보들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