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열왕기상2장1~12절
제목 : 다윗의 유언과 죽음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지만 나라를 공고히 해야 할 과업은 남아 있습니다.
이에 다윗은 그에게 율법 준수와 상벌 조치에 대한 유언(遺言)을 남깁니다.
오늘 본문은
1~4절 다윗의 유언 “율법을 지켜 행하라”에 대하여
5~9절 다윗의 유언 “원수를 제거하고 은혜를 갚으라”에 대하여
10~12절 “다윗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다윗의 유언(1) : 울법을 지켜 행하라(1~4절)
1)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솔로몬에게 유언을 합니다
“1]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임명한 때로부터 그에게 최종 유언을 하는 현 시점에 이르기까지가 어느 만큼의 기간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상당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대기에서는 솔로몬 즉위 후 다윗이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성전 예배의 새로운 규례 제정, 제물 봉헌, 그리고 솔로몬의 왕위 계승을 공포하는 의식을 성대히 행하는 등 여러가지 활동을 한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대상 23장-29장).
명령하여 이르되. - 다윗이 공식적으로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남기는 명령은 대상 28- 29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절 이하의 내용은 다윗이 왕위 계승자인 아들 솔로몬에게 사적(私的) 유언의 형태로 은밀히 당부하는 말입니다.
한편 본서가 솔로몬 즉위 이후의 다윗의 활동을 생략하고 있는 것은,
역대기와 달리 열왕기는 솔로몬의 통치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너는 강한 사람이 되어라(2절)
“[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 직역하면
"나는 모든 땅에 속한 자들의 길로 가고 있노니“
(I am going in the way of all the earth)란 의미로서,
곧 임종(臨終)이 가까왔음을 나타내는 성경적 표현입니다.
일찍이 여호수아도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서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수23:14)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 직역하면 '너는 강하게 되어라! 그리고 남자가 되어라'란 의미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권면은 모세 사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해야만 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맡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권면해 주신 말씀과 동일합니다(수1:6-4).
한편 혹자는 다윗의 이 말을 통해 당시 솔로몬의 나이가 매우 어렸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실 즉위식 이후에도 다윗은 솔로몬을 '어리고 약한 아들'로 말합니다(대상 29:1).
*대상29:1 “다윗 왕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택하신 바 되었으나 아직 어리고 미숙하며 이 공사는 크도다 이 성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이런 맥락에서 유대 사가 요세푸스는
당시의 전통으로 미루어 즉위시 솔로몬의 나이를 14세 정도로 보았습니다.
혹자는 12세로 보기도 합니다(Eupolemus).
아무튼 20세가 채 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Hammond).
그러나 여기서 대장부가 되라는 다윗의 말이 결코 나이의 문제만은 아닙니다(삼상 4:9).
*삼상4:9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오히려 이 말은 여호와의 율법 준수의 임무를 행함에 있어 담대하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Keil, B hr).
왜냐하면 모세의 뒤를 잇는 여호수아에게서도 '담대한 것'과 '율법 준수'는 상호 연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수 1:7).
*수1: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지키도록 아들 솔로몬에게 당부한 것입니다.
3) 율법을 지켜 행하라(3절)
“[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1)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키라.
여기서 '지키라'는 '파수꾼이 되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파수꾼이 되라는 말입니다.
이 같은 용어는 특별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직무 수행을 표현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습니다(레 8:35;18:30;민 1:53;3:7).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도 이들처럼 신적(神的) 직무를 위임받은 여호와의 통치 대리자로서, 여호와를 위하여 여호와의 율법의 파수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 길로 행하라.
그 길로 행하여 – 여기서 '길'(데레크)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의 도(道)입니다.
*시119:3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시119:27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구체적인 일례로, 신 32:4에 의하면 하나님의 길은 공평(公平)의 길입니다.
*신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따라서 솔로몬은 통치할 때 '공평(公平)'을 기본 강령으로 삼아 선민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도(道)로 다스려야 했습니다.
(3)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지키라.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 이러한 표현은 모세 율법 그 전체를 강조하여 제시하려는 중언법(重言法)적인 표현인 것입니다(Keil).
성경 다른 곳에서도 이처럼 비슷한 어휘가 반복되어 나란히 등장하는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신 5:31;8:11;시 119편).
*신5:31 “너는 여기 내 곁에 서 있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에서 그들에게 이것을 행하게 하라 하셨나니”
*신8: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시편119편에서 율법, 증거, 도, 법도, 율례, 계명, 판단, 규례, 길이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4)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켜라 -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즉 솔로몬은 하나님의 율법을 근간으로 하여 백성을 다스려야 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세운 법과 제도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자칫 소수의 집권층만을 위한 악법이 될 우려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은 거룩하고 선하므로(롬 7:12),
그 법대로 통치하는 자나 통치를 받는 자들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공의와 평강의 나라인 것입니다(계 11:15).
*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5) 율법을 지켜 행하면 형통합니다.
형통할지라. – 사전적 의미에서의 형통(亨通)은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형통할지라'('타스킬')은 '지혜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은 지혜롭게 되는 것이고,
또한 지혜로운 그가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형통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B hr).
그러므로 '형통'(사칼)이란 말 속에서 뜻한 바대로 잘되는 그 뜻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지혜(智慧)'란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을 일치(一致)시키는 것입니다.
*시편1편에서도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다고 하였습니다.
4)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솔로몬에게 전합니다(4절)
“[4]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일찍이 나단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삼하 7:12-16)을 이제 죽음을 앞둔 다윗이 솔로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삼하7:12~16 “[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13]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14]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15]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16]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 이 조건절은 원래 나단의 메시지 (삼하 7:8-16) 속에는 보이지 않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로는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8:25;9:5 등).
*왕상 8:25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기 길을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것 같이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네게서 나서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왕상9:5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네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그런데 애초 이 내용은 신명기에 기록된 바(신 6: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에게 위탁한 교육적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도 이러한 의무에서 면제되고 있지 않습니다.
(신 17:18-20).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 신 6:5 주석 참조.
2. 다윗의 유언(2) : 원수를 제거하고 은혜를 갚으라(5~9절)
1) 요압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5,6절)
“[5]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6]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스루야의 아들 요압. - 스루야는 다윗의 누이이며,
요압은 그녀의 맏아들입니다(대상 2:16).
*대상2:16 “그들의 자매는 스루야와 아비가일이라
스루야의 아들은 아비새와 요압과 아사헬 삼형제요”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 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일에 대해서는 삼하 2-3장과 19-20장을 각각 참조하라.
한편, 그런데 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군대 장관 지위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삼하3:6-39;20장).
여기서 특기할 것은 요압의 그러한 살해 행위를,
다윗은 마치 자신에게 행한 일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 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것은 다윗의 권위에 대한 멸시와 도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B hr;삼하3:26;20:11).
적어도 요압은 다윗 왕에 대해서는 끝까지 충성을 바친 훌륭한 전사였지만, 그러나 지나치게 방자하고(삼하 18:5,14),
거칠었던 것 같습니다(삼하 3:27;18:14).
그래서 끼친 공(功) 못지않게 자주 다윗 왕가를 괴롭혀왔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 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행위는 도저히 묵과될 수 없었던 요압의 치명적 실수로서, 다윗은 그 사실에 대해 아들 솔로몬에게 응분의 조치를 내릴 것을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요압이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 다윗은 아브넬과 협상하여 평화적으로 통일 왕국을 이루려 했었습니다(삼하 3:21).
또한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마사를 등용한 것은 내란을 종식시키고 왕국의 재정비를 도모하려던 때였습니다(삼하 19:13;20장).
그런데 다윗의 이러한 평화의 노력이 요압의 살해 행위로 인해 크게 방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요압이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과 압살롬의 군대 장관 아마사를 계략으로 살해한 행위는 다윗을 심히 분노하게 했습니다(삼하 3:29).
*삼하3:29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 여기서 '띠'와 '신'은 어떤 임무를 수행할 때 갖추어야 할 것들로서, 주로 전쟁에 임하는 전사(戰士)가 반드시 갖추어야할 필수 도구였습니다.
만일 요압이 전쟁 중에 정정 당당히 싸워 그들을 죽임으로 그들의 피를 띠와 신에 묻혔다면, 그것은 결코 책할만한 일이 못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태평한 시대에, 곧 다윗이 탕평책을 쓰고 있는 즈음에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시기와 질투 및 복수심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전쟁터에서나 묻혔어야 할 피를 명분 없이 흘리게 했으니,
그것이 곧 요압의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입니다.
(2) 네 지혜대로 행하여라.
네 지혜대로 행하여. – 요압은 그때까지도 군대 장관이었고(35절), 다윗의 조카로서 다윗이 왕이 되는 데 큰 공로를 세운 당대의 세도가였습니다.
그러한 인물을 명분 없이 처단한다면 민심의 동요와 같은 어려움이 생길지도 몰랐습니다(Starke).
그러므로 이 말은 나쁜 술수로 요압을 처단하라는 뜻이 아니라, 납득이 갈 만한 처벌의 정당성과 적절한 시기를 가려 시행하도록 충고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불측한 시도가 재차 드러나자,
그의 동조자였던 요압도 함께 처단합니다(19-25절,28-34절).
(3)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그 백발로 평안히...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
그 무렵 요압도 고령기에 접어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백발의 평안한 죽음은 죄 없는 자의 죽음으로서,
요압 같은 자에게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B hr).
왜냐하면 요압은 까닭 없이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31절).
히브리인들은 무고한 자가 흘린 피는 그 피 값이 보상될 때까지 하나님께 호소한다고 믿었고(창 4:10), 또한 그 피를 흘리게 한 자는 현세에서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수 2:19;마 27:24,25).
한편, 이처럼 '피는 피로 갚아야 한다'(창 9:5,6)는 피의 보상 원리에 입각하여 다윗은 요압이 그 피 흘린 죄를 반드시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솔로몬에게 권고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다윗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요압을 처단하지 않고 아들 솔로몬에게 그 일을 위임했는가?
카일(Keil)은 당시 다윗으로서는 군대 장관인 요압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즉 다윗은 적어도 자신에게는 충실했을 뿐 아니라 많은 전공을 새운 요압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단하는 것은 오히려 득보다 실이 더 크게 작용할 것
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해 또 혹자는 생각하기를, 다윗은 요압과 공모하여 밧세바의 남편이자 신실하고 용감한 신하인 우리아를 죽게 한 씻지 못할 죄악을 저지른 경험이 있으므로(삼하 11:14-25), 그 일로 인해 양심이 찔려 요압을 직접 처리하지 못했다고 보기도 한다(Leon Wood). 아무튼 다윗은 요압의 불의한 살해 행위를 잊지 않고 있다가 결국 솔로몬을 거스려 아도니야의 반역 행위에 가담한 요압을 솔로몬이 처리하도록 그에게 위임하는 것이 오히려 솔로몬 왕국의 강화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 실현 차원에서 더 유익하다고 판단하고 요압의 처리 문제를 자신의 손으로부터 솔로몬에게 넘겨준 것 같다(R. Patterson, J. Hammond).
음부(쉐올) - 죽은 자들의 사후 거처 또는 죽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히브리식 표현. 창 37:35;민 16:30;신 32:22;삼상 2:6;삼하 22:6 주석 참조.
=====2:7
“[7]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그들이 내게 나왔느니라”
바실래 - 바실래 및 그가 다윗에게 베푼 선행에 대해서는 삼하 17:27-29;19:31-39부분의 주석을 참고하라.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 - 다윗의 이 부탁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즉 왕 자신의 식탁에서 함께 먹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Keil),
왕궁에서 음식을 공급받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B hr).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하나의 형태로 결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식탁을 보고 놀랐으며, 솔로몬 왕궁의 매일 음식 소비량이 굉장히 많았다는 기록이 있기 매문이다(4:22,23;10:5).
어쨌든 이 일은 원래 다윗이 한때 압살롬의 난을 당하여 어려음에 처한 자신에게 음식물로 공궤한(삼하 17:27-29) 바실래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해왔던 것인데, 이제 솔로몬에게도 그 선행 보답을 계속하도록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삼하 19:33, 37).
저희가 내게 나아왔었느니라 - 압살롬의 난을 당하여 다윗이 정처없는 피난 길에 나서는 극도의 곤경에 빠졌을 때, 바실래는 여러 가지 식물로 다윗과 그의 일행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채워주는 선행을 베풀었었다(삼하 17:27-29). 따라서 후일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진압하고 다시금 환궁 길에 오르게 되었을 때, 그는 바실래에게 그의 후손들을 보살피겠노라고 약속했다(삼하 19:31-39).
본절은 다윗이 바로 그러한 바실래의 선행을 기억하면서 자신이 바실래와 맺은 약속을 솔로몬 역시 계속 지켜 나가도록 요청하고 있는 장면이다.
=====2:8
“[8]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그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악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그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므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바후림 - 시므이가 살던 '바후림'(Bahurim)은 수도 예루살렘에서 약 9km 가량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고을로, 베냐민 지역에 속한다(삼하 16:5).
게라의 아들 - '게라'(Gera)는 베냐민의 손자이므로(창 46:21;대상 7:6) 시므이의 아버지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시므이보다 약 300년 전의 인물인 사사 에훗도 '게라의 아들'로 불리웠던 것으로 보아(삿 3:15) 이 말은 '게라의 후손'이라는 뜻이다(J.H-
ammond).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 여기서 '너와 함께 있나니'(임메카) 란 말은
곧 너와 가까이에 있다는 뜻으로, 이는 솔로몬이 거주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과 가까운 곳에 시므이가 살고 있다는 뜻이다(Keil, B hr).
그러므로 이 말은 혹자(Starke)의 견해처럼 시므이가 솔로몬의 권력하에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편 '시므이'(Shimei)에 대해서는 삼하 16:5 주석을 참조하라.
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 직역하면, '그는 지독한 저주로써 나를 저주하였다'란 의미인데, 구체적인 저주의 내용은 삼하 16:7, 8에 나타나 있다.
한편 학자들은 여기서 '독한 말'(켈랄라 니므레체트)을 '강렬한 말'(Gesenius), '거친 말'(Keil), '악한 말'(Thenius) 등으로 번역한다.
여하튼 시므이의 그 저주 까닭에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혹 은총을 베풀어 주실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을 정도로 시므이의 독한 말 (저주)은 다윗에게 깊이 원통함을 심어준 말이었다(삼하 16:12).
저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기로 - 압살롬의 난이 평정된 후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환궁할 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생명의 위험을 느낀 시므이는 급히 환영단 일천명을 이끌고 요단으로 내려가 다윗 왕을 영접하는 기회주의적 처신을 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삼하 19:16-23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내가...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 당시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막 환궁하는 시점에서 사울 왕의 지파인 베냐민 기파 소속의 유력자 시므이를 처형하는 것은 시기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일단 시므이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
그러나 다윗의 이 용서는 시므이의 범죄를 용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에 대한 징계를 보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삼하 19:21,23 주석 참조.
=====2:9
“[9] 그러나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이므로 그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 압살롬의 반란 때 시므이는 피난가는 다윗에게 혹독한 저주를 퍼부었으나, 후에 다윗은 그를 용서한 바 있다(삼하 16:5-13;19:19-23).
그 까닭은 시므이가 사울의 출신 지파인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유지였고,
또 그 무렵은 압살롬 내란 이후 회합책으로 민심을 수습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다윗은 시므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삼하 19:23).
그러나 아들 솔로몬에게는 그러한 맹세의 책임이 없는 것이다.
한편 원문은 '무죄'를 '벌하지 않은 상태'로 말하고 있다.
또한 '그러나'는 원문상 '그리고 지금'이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이제까지 벌하지 않은 상태로 보류해 온 시므이에 대한 처벌을 지금 집행할 때가 왔다는 뜻이다(J. Hammond).
그 백발의 피를 흘려...내려가게 하라 - 다윗은 시므이의 행위(삼하 16:5-13)를 단순히 한 개인에 대한 저주와 모욕이 아닌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시대에는 비록 민심(民心) 수습이란 현실적 문제로 그를 처단하지 않았지만 끝내는 처단해야할 존재로 작정했다.
사실 시므이와 같은 기회주의적 인물은 때가 되면 또다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히 있었으므로, 다윗은 솔로몬의 견고한 왕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므이와 같은 암적(癌的) 존재가 반드시 제거될 필요가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혹자는 용서받은 후 시므이의 행동이 신실한 회개에 근거하고 있지않다는 판단하에 다윗이 이처럼 명령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Richard D. Patterson).
또한편 일부 학자들(Stanley, Harwood)은 주장하기를, 시므이를 처형시키라는 다윗의 명령은 '뿌리 깊은 증오심' 내지는 '끝내 참을 수 없었던 복수심'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나,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다윗의 명령은 결코 개인적 차원의 원한이나 복수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 실현' 내지는 '하나님 왕국의 강화'라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인 기름 부음 받은 왕을 모욕하고 저주한 자에 대해 개인적인 용서의 차원을 떠나 신적 심판은 반드시 집행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라고 보아야만 한다(Keil, Hammond).
3. 다윗의 죽음(10~12절)
“[10] 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11]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 동안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다스렸더라[12]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앉으니 그의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
=====2:10
“[10] 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 자서...장사되니 - '열조와 함께 누워 자다'란 표현은 '열조에게 돌아가다'(창 25:8;35:29;49:33)란 표현과 동일한 표현으로서, 곧 '죽음'을 가리키는 성경적 표현이다.
이리하여 통일 왕국 이스라엘의 위대한 성군(聖君) 다윗도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2절) 가고 말았다.
다윗은 자신의 남은 마지막 재임 기간을 새 왕 솔로몬과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일로 보냈다(대상 22:6-19;28:1-21;29:1-22).
이처럼 다윗은 죽는 그 순간까지 맡은 바 소임을 다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하에서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대상 29:28) 죽어 예루살렘의 다윗 성에 장사되었다.
실로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은 가장 위대한 왕이요 의로운 왕이었다.
이런 맥락하에서 다윗이 세운 도시 예루살렘은 '다윗 성'으로 간주되었다(3:1;8:1;느 3:15). 뿐만 아니라 다윗은 이후 이스라엘 모든 왕들의 의(義)의 척도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가증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멸하지 않은 것은 바로 다윗을 생각해기 때문이었다(왕하 8:19).
무엇보다도 다윗은 장차 그의 가계를 통해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서 그 뚜렷한 의의를 지닌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지칭했으며(마 1:1), 백성들 역시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다윗을 기렸던 것이다(마 21:9).
다윗 성 - 다윗이 여부스족에게서 빼앗은 성채로 시온 산성과 동일시 된다(8:1;삼하 5:7;댜허 5:2).
그런데 시온 산(Mt, Zion)은 두로포이온 계곡과 기드론 계곡 사이의 산을 가리킨다.
이곳은 종종 예루살렘과 동일시 되기도 한다(Wycliffe).
유대사가 요세푸스도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예루살렘은 다윗 성이 보다 확장된 것이다(IDB).
그리고 역대 유다 왕들의 무덤은 시온 산 곧 다윗 성에 있었다( 11:43;14:31;15:8).
한편, 다윗의 묘는 느해미야 시대를 거쳐(느 3:15, 16) 후일 사도 시대까지 존재하고 있었다(행 2:29).
=====2:11
“[11]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 동안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다스렸더라”
다윗이...치리하였더라 -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 때인 B.C. 1010년 경에 헤브론에서 왕위에 올라 그의 나이 70세 때인 B.C. 970년경까지 40년동안 이스라엘을 치리한 후 밧세바를 통해 낳은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그의 통치를 마감하였다.
헤브론에서 칠 년을 치리하였고 - 다윗의 헤브론 7년 통치는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서 통치한 기간이다.
이후 다윗은 사울 왕국을 통합하여 명실 공히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서 33년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한편, 다윗의 헤브론 통치기간에 대해 역대기는 여기서와 마찬가지로 7년으로 나타내고 있지만(대상 29:27), 사무엘 서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7년 6개월로 나온다(삼하 5:5).
=====2:12
“[12]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앉으니 그의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
솔로몬이 그 아비 다윗의 위에 앉으니 - 이는 1:46과 중첩되나 본절은 다윗이 죽고 이제 본격적인 솔로몬의 통치기가 시작됨을 나타낸다.
따라서 솔로몬의 즉위(1:46) 이후에도 다윗은 죽을 때까지 얼마동안 일종의 섭정 자격으로 통치를 계속했던 것 같다.
한편, 솔로몬의 즉위 연대는 대략 B.C. 970년 경으로 추정된다.
그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 - 대체로 이 부분은 앞으로 이어져 나올 내용의 요약으로 보고 었다(Keil, B hr, Hammond).
그리고 여기에 상응하는 보다 구체적인 설명은 대상 29:23-25 에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이것은 일찍이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삼하 7:12).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다윗은 떠나도 나라를 견고히 하시겠다는 주의 약속은 사라지지 않습니다(2b~10, 12절).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당부한 것처럼(수1:2~9), 죽음을 앞둔 다윗은 솔로몬에게 힘써 대장부가 되고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라고 당부합니다.
왕이 하나님을 참된 왕으로 인정하고 먼저 충성된 백성이 될 때, 하나님도 언약대로 그 나라를 지키실 것입니다.
진득하게 지켜 낸 말씀 묵상의 자리가 내 삶을 견고히 지키는 버팀목이 됩니다.
자녀들이 주께서 준비하신 인생길을 걷도록, 기대하며 성실히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다윗은 ‘길의 사람’입니다(1,2a절).
승리의 오르막길도, 초라한 내리막길도 경험했습니다.
광야 길이 익숙했고, 망명 길도 감내했습니다.
이제 낯설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걸음을 내딛습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도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지혜 있는 자도, 어리석은 자도 모두 두고 떠나야 합니다.
남들보다 나은 길을 걷고 싶은 욕심에 종착지도 잊은 채 정신없이 살고 있진 않습니까?
길의 주인을 알고,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만이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어떤 길, 어떤 신앙과 가치관을 가르치렵니까?
2) 정의가 설 때 나라가 견고해집니다(5~9절).
다윗은 악을 행한 자는 벌하고 선을 배푼 자는 선재하라고 당부합니다.
특히 나라의 안녕보다 사적인 복수를 감행한 요압과 악독한 말로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에게는 평안히 죽게 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不義 위에 세워진 평화는 불순하고 불안합니다.
내 주변에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위해 먼저 공의가 서야 할 영역은 어디입니까?
3) 다윗은 ‘받은 저주’뿐만 아니라 ‘받은 은혜’도 기억했습니다(7절).
곤경에 처했을 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을 선대한 바르실래의 아들들을 선대하라고 당부합니다.
그에게 한 약조를 기억하고 지킨 것입니다(삼하19:38).
받은 비난은 잊지 못하고, 받은 사랑은 그런 적 없는 듯 잊고 살진 않습니까?
나중에 갚으려다 희미해진 은혜의 경험을 다시금 떠올려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