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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
황 석 영
시계의 초침은 일곱시를 가리키고 있다.
배터리로 가는 둥글고 얄팍한 시계인데 야광의 숫자들이 차츰 푸른빛을 띠어가고 있다. 작렬하는 포탄의 섬광이 비좁은 플라스틱 창으로 쏟아져 들어와 방안을 새하얗게 사진 찍고는 사라진다. 두꺼운 모래주머니로 쌓아올린 토치카 안에는 희미한 가스 랜턴만이 졸면서 매달려 있다.
민가에서 날라온 가구들과 책상 위에 작전지도와 확대경, 정보자료철, 수북이 쌓인 전문(電文)용지, 메모지, 보고서, 컴퍼스, 그리고 사람보다 훨씬 분명한 별 두 개가 찍힌 장군기, 그런 것들 틈에서 나는 졸고 있었다. 나는 장군의 깃발을 지키는 당번병이었다. 나는 가끔 외곽 정찰대가 쏘아대는 방정맞은 연발사격 소리에 잠을 깼다가는 다시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었다. 삼십분 전에 장군의 서랍을 열어 비장된 양주를 홈쳐 마신 탓으로 몰려온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일곱시 십오분까지 장군은 돌아오지 않았다. 포성이 산발적인 폭음에서 규칙적으로 바뀌었을 무렵 ――아마 관측소에서 좌표를 정지시켰을 테지만――말똥 두 개짜리 연대장 한 녀석이 내 졸음을 방해하며 침입했다. 그가 주둥이를 쑥 내민 표정으로 내게 엄지손가락을 펴 보였다.
"지금 안 계십니다.”
그제야 말똥은 안심이 되었는지 철모를 벗어 책상에 쾅 소리가 나도록 내던지고 상의에 허옇게 앉았을 먼지를 털었다. 그는 길고 지리하게 하품을 내뿜고 나서 담배꽁초를 꺼내어 물었다.
“어디 가셨나?”
“참모회의에 가셨습니다.”
중령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벙커의 철판 깔린 바닥에다 거침없이 침을 퉤 뱉었다.
“씨팔, 어쩌겠다는 심본지 알 수가 없단 말야. 명령은 내려놓구, 작전은 저 혼자 하나. 나 드러워서…… 옷 벗어야지.”
나는 부동자세로 서서 보통때 장군 앞에서는 나보다도 더 땅바닥을 기는 그 말똥의 어처구니없는 헛깡을 비웃고 있었다. 중령은 그제야 내 생각이 난 것 같았다.
“쉬어라! 편히 쉬란 말야.”
하다가 그는 나를 다시 자세히 훑어보았다.
“너 첨 보는 놈인데, 언제부터 부관실 근무냐?”
나는 군인정신을 꼭 모시에 들인 햇풀처럼 빳빳하게 먹은 투로 소리쳤다.
“넷, 이틀쨉니다.”
“좋아, 기합은 좀 느슨히 풀어놓구 고함 좀 치지 마라. 너 보병 출신이군.”
“넷.”
“직책이 뭐야?”
중령은 실실 웃는 얼굴로 변하고 있었다. 직업군인의 곤조통을 잘 아는 나로서는 그가 얼굴에 웃음기를 보였다고 해서 절대로 마음을 놓지 않았다.
“경기관총 부사수였습니다.”
“아니 이 녀석아, 지금 직책 말야.”
“당번병입니다.”
“그럼 가져와. 목이 말라 죽겠다. 시원한 걸루…… 알겠어?”
장군의 개가 말똥에게 굽힐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나는 그의 기를 약간 죽여놓을 작정을 했다.
“저는…… 잘 모릅니다. 어제 왔기 때문에.”
“영감 침실에 가보라구. 캐비닛 맨 위칸엔 깡통 주스, 아래칸에는 커피통이 있으니까.”
나는 일부러 뒤통수에다 손을 얹었다.
“잠시 후에 각하께서 돌아오시면 여쭙고 대접해드리겠습니다.”
하자마자 예상했던 대로 중령은 약이 올라서 내게 달려들 듯이 벌떡 일어났다.
“그만둬, 인마!”
중령은 잠깐 사이에 제 분을 스스로 삭이고는 꾸민 것 같은 웃음을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이틀 된 놈치군 무척 똘똘하군. 선임당번들 소식 들었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중령은 보복이라도 해준다는 어조로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임기가, 얼만지 아는가? 한달…… 꼭 한달이야.”
나는 장군의 습성을 대개는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장군은 한달에 한번씩 당번병을 바꾸는데, 매번 그달의 작전에서 수훈을 세운 전공자를 우선순위로 데려다놓는 것이었다.
훈장을 받은 대가는 총채로 그의 책상의 먼지를 털거나 계급장이 번쩍이도록 닦고 계집애처럼 차를 나르고 식사를 시중드는 일을 시키는 것이었다. 한달이 지나면 그는 예하 부대장 중에서 원하는 자에게 당번병을 내주어버리는 것이다. 꼭 한번 먹고는 아랫놈에게 내주어버리는 항구 뒷골목의 어깨처럼 말이다. 중령은 지금 히죽이 웃고 있었다.
“이번 작전이 끝나면 너는·…… 알겠나? 내 당번이다.”
내가 이번에는 풀이 좀 죽어버렸다.
“엣, 알겠슴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 때마다 너는 전화루…… 알겠지…… 내게 긴밀한 연락을 취해주는 거다.”
그때 마지막 초소에서 전화가 결려왔고, 방금 장군께서 통과하셨다는 전갈이 있었다. 우리는 황급히 일어나서 벙커 밖으로 뛰어나갔다. 무개 지프차가 먼지의 구름 속에서 치달려오고 있었다. 유리창이 앞으로 접혀져 훤한 좌석에 장군의 금테 색안경만이 가득 차 있는 듯 했다. 연대장은 철모를 옆구리에 끼고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며, 나는 지프차에서 뛰어내리는 장군에게서 전투모와 지휘봉을 넘겨받았다. 얼굴이 핼쑥한 부관이 따라 내리다가 연대장에게 경례했다. 장군은 연대장의 자기에 대한 경례에 답례하는 대신 덤덤하게 물었다.
“자네가 웬일 인가?”
“단장님, 건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장군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벙커로 들어가며 귀찮게 내뱉었다.
“낼 아침 작전실에서 듣기루 하지.”
연대장은 부관을 앞질러 장군의 뒤통수에 바짝 들이 대며 말했다.
“작전계획대루 마을이 점령됐습니다.”
장군은 고개를 기우뚱하면서 부관을 넘겨다보았다.
“마을이라구……?”
부관은 연대장과 눈을 맞추었다.
“어제 명령하셨습니다.”
장군이 눈까풀에 손가락을 대고 누르면서 색안경을 접어넣었다.
“마을이지…… 그래, 잊어버린 게 아니에요. 피로하군.”
장군을 빼놓은 우리 세 사람은 모두 그 마을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었다. 다만 연대장 휘하의 수색중대가 마을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분석표에는 적의 중대를 섬멸시키고 포대를 부쉈으며 공용화기와 탄약 다수를 노획했다고 적혀 있었다. 장군은 시무룩해진 중령을 달래는 투로 말했다.
“웬 성미가 그리 급해. 사령부에서는 아직까진 소강상태를 이끌어나갈 작정이야. 뭣 때문인 줄 아나, 부관?”
중위는 약간 피곤한 얼굴이었다.
“전선의 균형이라는 것입니다.”
중령은 부관을 무시하고 직접 장군에게 들이댔다.
“마을을 장악한 아군 병력은 일개 중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희 연대를 선봉으로 진격하게 해주십시오. 그대로 두면 적의 반격에 유린되고 맙니다.”
장군은 고개를 젓고 단호하게 말했다.
“모두 작전계획에 따라서 진행될 게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자넨 모르지.”
장군은 뒷짐을 지고 벙커 안을 서성거리면서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 햇병아리 견습사관으로서 내가 처음 임관한 날이지. 오래 전부터 오늘을 기념하기루 해왔었네. 해마다 그래왔어.”
나는 장군의 침대 위에 말쑥히 다려놓은 정복을 펴놓았다. 그의 가슴팍에는 울긋불긋하고 찬란한 약장(略章)들이 무수한 병사들의 죽음에 어울리도록 화사한 상장(喪章)처럼 붙어 있었다. 중령은 확실히 눈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적의 차량과 중장비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으셨습니까, 단장님?”
장군의 시선은 이미 카키색의 정복에 멎어 있었다.
“정복을 입어본 지 오래됐어. 쭉 야전에 있었으니까. 오늘 저녁에 입고 싶어졌어.”
“단장님께선 정복 차림이 안 어울리실 겁니다.”
“어째서? 나두 중위 시절엔 저 부관보다 옷맵시가 좋았다네.”
장군은 웃옷을 제 앞에 갖다대고 웃었다. 나는 침실문 앞에 서서 이 기묘한 놀이를 방관하는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장군은 연대장의 시무룩해진 기분을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자네두 회식에 참석하지. 작전은 오늘 내로 일단락지을 걸세. 이제 얼마 동안은 잠잠할 테니까 말야.”
연대장은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펜대만 잡고 늙어온 행정 장교들의 행사 때마다 차려입고 나서는 전투복이 안 어울리듯, 너의 훈장과 정복은 어울리지 않는다. 역시 그는 정중하게 장군의 제의를 거절하고 있었다.
“저는 회식에 참석 할 시간이 없습니다.”
장군은 웃기만 했다.
“역시 자네는 군인이야. 작전 이외엔 관심이 없구만.”
연대장은 초조한 김에 철모를 요란하게 내려놓았다가 당황하여 다시 차분해졌다.
“점령지역을 방치하시려는 각하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그의 연대는 여태껏 아무 전과도 없이 전사자가 많이 나와서, 병사들 간에도 염라연대란 별명이 나돌고 있었다. 그 말똥은 세번째의 연대장으로 취임했으며 진급을 앞두고 초조한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들이 메스껍게 여겨졌다. 절대로 죽지 않으리라, 절대로 속아넘어가지 않을 테다. 연대장이 말했다.
“모두들 고개를 흔드는 그런 형편없는 연대를 맡겨놓고, 이제는 성공되어 가는 작전을 중지시키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장군은 지도 앞에서 확대경을 들고 서 있었는데, 꼭 희극영화에 나오는 엉터리 사립탐정 같은 꼴이었다.
“중지된 게 아니야. 다 앞뒤를 맞춰놓은 거야.”
마을 부근의 작은 언덕이 사단의 전초 교두보라고 알려져 있었으며, 수색중대는 그곳에 거점을 확보해놓았으나 후속 부대의 진입명령은 내리지 않고 있었다. 연대장은 진입을 원하고 있었으며, 장악한 거점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했다. 장군은 노련하게 느리고 침착한 말씨로 연대장의 물음을 부관에 게로 되돌렸다.
“이럴 때 뭐라구 말하지, 부관?”
“극비입니다.”
“맞았어. 극빌세. 회식을 몇시에 끝내기루 했던가.”
“한 시간입니다. 스물한시 오분 전에 끝날 예정입니다.”
장군은 묘한 말솜씨를 가지고 아랫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우선 연대장의 맥을 죽 뽑아놓고 나서, 그가 방심한 사이에 날카로운 야유로 기를 눌러버리는 것이었다.
“폭풍의 날에도 시간은 흐른다는 말이 있네. 지나갈 일은 다 지나가게 되어 있는 거야. 연대장, 자넨 조종사가 될 걸 그랬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직접 폭격하고 눈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작전은 다섯 수쯤 내다봐야 하거든. 자네 바둑 잘 두는가?”
이때에 나는 참지 못하고 농을 던져버렸다.
“바둑판을 가져오겠습니다.”
장군은 슬쩍 나를 돌아보았는데, 싸늘한 시선이었다. 그는 내 농지거리를 눈치챈 것만 같았다.
“연대장, 자네의 기록카드를 다시 봤네. 소대장 때부터 굵직한 포상을 여러번 받았더군.”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반면에 요령 두 있었겠지.”
중령은 아까와는 달리 아주 진지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저는 언제나 임무와 그 수행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장군은 빈정거리며 부관에게 턱 짓을 했다.
“부관, 들어보라구."
“때때로 자신이 없어집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분별 같은 게 제 임무를 방해할 때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전사 보고서를 읽을 때라든가, 휴가중에 후방에 갔을 때…… 뭐 그렇지요.”
장군은 서랍에서 양주를 꺼내어 두 잔을 따랐다. 그는 한잔을 중령에게 권 했다.
“아이들이 몇이나 되는가?”'
중령은 술잔을 씹어삼킬 듯이 입속에 털어 부었다.
“셋입니다. 아내는 벌써 오래 전부터 제가 옷을 벗기만을 바라구 있습니다.”
“군은 자네 같은 지휘관을 계속 원하구 있지. 자넨 탄탄한 계단을 밟아온 모범장교의 한사람이야. 내 생각으론…… 자넨 참모총장감이지.”
장군이 껄껄 웃자 부관도 웃었고, 중령도 피시식 웃었으며 나는 아까 훔쳐 마신 양주 생각 때문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군은 책상에 다리를 포개어 얹으면서 말했다.
“분별이 일을 방해한다구 말했던가? 그 반대야. 반대구말구.”
“저는 사관후보생 시절 유명한 고문관이었습니다.”
“적응을 못했군 그래.”
“저 때문에 동기생들이 단체기합을 많이 받았죠. 고지식했습니다.”
장군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싱긋, 하는 웃음기를 볼때기 위에 정지시킨 채로 연대장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어떤 생각의 흐름이 뒤를 이어 지나치자마자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려 중위를 보았다.
"부관은 성적이 어땠나?”
“부끄럽습니다만, 수석 졸업생입니다, 각하.”
"자네는 상부의 조처에 항의 하는 편이었나?”
장군은 다시 중령에게 암시적으로 물었고, 중령은 제 말대로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나는 차츰 장군의 심중을 눈치 채고 있었다. 나는 그래봬도 사선을 여러번 넘은 고참병사였던 것이다. 연대장은 군인답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감수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상부의 명령은 항상 옳았다는 말이겠지?”
“제가 묵묵히 복종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그른 명령도 때때로 있습니다만, 군대는 이성적인 일만을 골라서 취급하는 곳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군은 저 혼자 한잔을 더 따라 마셨다.
“그게 바로 분별이란 걸세. 내 추측대로 자넨 유능한 지휘관이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군은 다시 그림자처럼 붙어섰는 부관을 올려다보았고, 중위는 부동자세를 취하며 굳어진 채 대답했다.
“각하……”
그는 망설였다.
“명령이 옳지 않을 때에는 재량껏 시정해야 된다고 봅니다.”
“나도 위관급이었을 땐 그런 위험한 패기를 지니구 있었지. 씨저나 이성계 같은 과단성 있는 지휘관들이 그랬어. 허나 현대전의 군대는 영웅의 지휘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란 말야. 우린 영웅들을 적절히 무기루 사용하긴 하지.”
버저가 음산하게 울었다. 나는 코드를 꽂아넣고 전방에서 들어오는 전통을 받았다. 치열한 전투의 소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상황실에서 중계하는 통신이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그것은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적의 대대 병력이 마을을 반격하고 있음. 수색대의 후퇴 여부를 속히 알려주기 바람.
목소리는 두 번씩 반복되었다가 탁 끊어졌다. 나는 전문지에 그대로 적어서 부관에게 넘겼다. 장군은 부관이 넘긴 전문을 쓱 훑어보고는 휴지통에다 구겨서 내던졌다.
“이리 가까이 오게. 여기가 어딘지 알겠나?”
“적의 방어선 부근입니다.”
“그래 마을은 이 한복판에 있지?”
장군은 지도 위로 확대경을 쳐들고 이리저리로 옮겨다녔다. 메모지, 서류철, 차가운 책상, 지도, 컴퍼스, 지휘봉, 그리고 전문용지가 구겨 떨어진 휴지통…… 장군이 다른 곳을 지시했다.
“그럼 이쪽은?”
“적의 후방기지입니다.”
“방어선의 한곳을 건드려놓으면.”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적의 전차들이 이동하겠죠.”
장군은 의외로 나직하게 속삭이면서 허공으로 머리를 쳐들고 달랑 매달린 랜턴의 꽁무니를 노려보았다.
“알겠나, 이 속임수를! 우리는 적의 허점을 찌른다. 우리는 그들의 배후를 총공격 하는 거야.”
“그래서 수색중대가 마을을 점령하도록 하셨군요.”
“교란작전이지. 적들의 신경을 마을 주변에 잡아두기 위해서야.”
연대장은 그제야 장군의 말귀를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확대경으로 마을을 들여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일 개 중대는 백오십 여명의 병력입니다.”
“문제는…… 사단이 얻게 될 승리지. 총공격은 스물한시에 개시하도록 되어 있네.”
장군은 손가락으로 연방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을이 그때까지만 버텨주면 되겠는데…….”
“무립니다. 적은 우리 중대를 그냥 내버려두진 않을 겁니다.”
장군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야, 시간! 시간을 벌어야 해. 공군에 요청한 것은 어찌됐나?”
부관이 대답했다.
“폭격기 편대의 지원을 해주겠다고 회답이 왔습니다.”
이제 세 사람은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시계가 가는 소리만 벙커 안에 가득 차 있는 듯했다. 휴전이라도 됐는지 포성조차 멎어버려서 다시 산새들이 우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군이 창가에 등을 돌리고 서서 속삭였다.
“격려가 필요하겠지.”
“어떤 격려 말씀입니까?”
“말하자면…… 구원대를 출발시키겠다든가 하는…… 믿음을, 아니 신앙을 줘야 해.”
“사실입니까?”
“사수하라구 그래.”
장군이 돌아서면서 연대장을 똑바로 손가락질했다.
“구원대를 투입하라구 지시했으니까. 이 작전의 성패는 마을을 장악한 자네 부하들의 철저한 연극에 있거든.”
중령이 부동자세를 취하고 주눅이 든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이 작전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장군의 입가에 싸늘한 냉소가 스쳐 지나갔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꽁무니를 빼두자는 거겠지.”
“이 전략은 작전참모본부의 계획입니까?”
“내가 주장했어. 나두 심사숙고했치. 차차 이해가 될 게야.”
장군은 정복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내가 닦아놓았던 별 계급장은 희미한 랜턴 아래에서도 날카롭게 번쩍이고 있었다. 장군은 단추를 채우면서 말했다.
“상황실에 가서 구원대가 출발한다는 것을 알리고 직접 격려 지휘하게.”
연대장이 경례를 붙이고 돌아섰을 때 장군은 다시 그를 불러세웠다.
“이봐 중령, 수색대원 중 생존자는 훈장 상신을 하고 자네 권한으로 특별휴가를 주도록 해.”
장군은 초조하게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는 뭔가……?”
하는 것은 그야말로 장군의 혼잣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충실한 부관이 맞받았다.
“우리는 군인입니다, 각하.”
“뿐만 아니라 전장의 군인이다. 고지 하나, 강 한줄기, 땅 한 뼘에도 희생자의 피가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거야.”
"제가 잊고 하달치 못한 항목이 있습니다.”
“구원대를 출발시킨다는 명령 말인가?”
“넷, 저의 불찰로 아직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장군은 정모를 얹으면서 부관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나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어, 부관.”
“연대장께는 분명히 명령하신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수색대는 적에게 주는 미끼다. 구원대를 보내선 안 되게 되어 있어.”
"중대를 포기하시렵니까?”
“포기가 아니라, 적과 교환하는 게야. 연대장을 속인 게 잘못이라구 생각하나?”
“틀림없이 보낸다구 말씀하셨습니다:”
“싸우는 자들이 고립되었음을 모르게 하기 위해서야.”
나는 벙커 뒤쪽 장군의 침실 문턱에서 꼼짝 않고 목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때 익숙한 어떤 낱말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하마터면 이 퇴색한 말을 입밖으로 내놓을 뻔했다. 희망·…… 희망이지, 희망이야. 중령이 무전기에 대고 떠드는 말은 고립된 자들의 허깨비 같은 희망으로 변할 것이리라. 이 어두운 시간에 던져진 최후의 속임수…… 내 한달간 유예된 소총수의 역할처럼 지도 위에서 확대경 안에서 그 퇴색한 낱말은 저녁의 박쥐처럼 스멀거리며 날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연기처럼 떠돌고 있는 음산한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구원대가 온다는 기대로써 그들은 최후까지 싸울 게야.”
“그런 격려가 전투에 실제로 얼마나 필요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두 개의 적과 싸우게 될 것이다. 구체적인 적과 그리고 추상적인 기대 때문에 매순간 배신당하고 나서 알 것이리라. 그래서는 마지막 순간에 구원대가 도착한달지라도 그들은 오히려 그 새로운 적을 향해 사격을 할지도 몰랐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돛대의 끝이 드디어는 표류 자체보다 더 무섭게 변한 표적이 아닌가. 나는 당번을 그만두기 위해 전속 신청을 할 작정이었다. 죽지 않을 테다, 그리고 속지는 더욱 않을 테다. 그들의 목소리!
“전투를 해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부관은 빈 나팔을 부는 셈이군.”
버저가 울렸다. 나는 등덜미에 얼음이 닿은 듯이 일어나 수화기를 들고 상황실에서 오는 전통을 받아썼다.
수색중대는 완전히 포위되었음, 지원해주기 바란다. 수색중대는 완전히 포위되었음, 지원해주기 바란다.
메모지를 건넸다. 장군이 부관에게 말했다.
“부관, 메모지에 받아쓰라. 하달 하나, 수색대는 절대로 사수할 것. 하달 둘, 구원대는 출발했다. 스물한시 까지 사수하라. 이상.”
장군은 전문용지를 휴지통에 구겨서 던졌다. 내게로 새로운 하달이 건네어졌다. 장군이 권총을 차면서 말했다.
“경호병을 불러서 대기시키라구 그래.”
“회식에 참석하지 않으십니까? 각하를 위해서 마련한 모임입니다.”
"그 전에 할 일이 있단 말야.”
"외곽으로 나가시렵니까?”
"기동순찰을 돌구 싶어졌네.”
"국도에는 지금 아군 정찰 분대가 조금 있을 뿐입니다. 언제 어디서 적의 저격을 받게 될지 모릅니다.”
장군은 홀가분한 듯이 말했다.
"저격병들은 나를 쏘지 못할 거야. 가령 사격한다구 해두 나는 맞지 않네. 병사들에게 사단장의 순찰을 보여줘야겠어.”
“무장헌병들을 배치시킨 다음에 나가십시오.”
수화기를 들려는 부관의 동작을 장군은 막았다.
“두 명의 경호병이면 된다구. 방탄 덮개를 씌우지 않은 열병 지프를 준비하도록. 최고의 속력으로 갔다 와야겠군. 그리고 범퍼에 별 표지판을 꼭 달도록 해.”
부관은 여전히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었다.
"위장하지두 않은 별판 붙은 열병차를 타고 국도를 달리신다면 적의 초년병들도 자기가 뭘 해야 하는가를 눈치챌 것입니다.”
“글쎄, 괜찮다니까. 초급장교 시절부터 내 독전은 패주하는 부하들을 뒤에서 즉결처분할 정도로 엄하구 냉혹했어.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나를 원망하지 못한 것은 죽음이 나와 가장 가까이 있을 때에도 죽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지. 부관은 내 조처가 오히려 잔인한 짓이라구 비난하는 것 같군. 나는 부하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배려를 한 것뿐야.”
“위험한 국도를 달리신다 해도 자신을 벗어날 수는 없으십니다.”
장군은 지휘봉으로 부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부관은 나를 잘못 봤어. 사실 나는 자존심과 명예욕이 큰 사람이야. 내가 야전군 지휘자로서 인정받구 있는 점두 바로 내 명예욕의 적절한 표현 때문이지. 자, 이젠 그만두자구.”
부관도 탄띠를 차면서 나섰다. 나는 어서 구들이 나간 뒤에 술을 한잔만 넘기고 싶을 뿐이었다. 야광시계의 바늘은 아홉시로 직각을 가리키고 있다. 시간은 아홉시.
“저두 순찰에 수행 하겠습니다.”
부관이 말했고,
“좌석이 없잖나. 곧 돌아올 거야.” .
장군은 혼자 지프차에 올랐다. 기관총을 겨눈 두 명의 경호병을 태운 야전 지프가 발동을 걸어둔 채 대기하고 있었다. 장군이 좌석에 앉아서 불쑥 말을 던졌다.
“자네 부관 근무에 불만을 느끼구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
폭격기 편대의 소음이 먼데서 가까워지더니 귀청을 온통 후벼대면서 머리 위를 지나갔다.
“이제서야 공군에서 출동이군. 총공격은 이제 한 시간 남았다.”
차가 떠나려는데 철모를 털커덕대며 중령이 뛰어왔다. 그는 온통 땀으로 젖은 얼굴을 자꾸만 소매로 닦아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입수한 전문용지를 들고 흔들었다.
“단장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아이들은 전멸 직전에 있는데 구원대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몇번 말해야 알겠나, 지휘자가 먼저 초조해하면 되겠는가?”
“제 부하들입니다.”
“내 병사들이지. 방금 들었나? 대형 폭격기들이 날아갔어. 곧 호전될 거야.”
중령은 쳐들었던 종이쪽지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너무 늦었습니다.”
“작전이 끝나면 진급 심의위원회로 자네의 진급을 건의하겠어. 그리구 또 한가지…… 부관 자네를 수색중대장의 후임으로 인사조처해 주지.”
하고 나서 장군은 부관에게 상체를 기울여 속삭였다.
"나는 익숙한 사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구. 부관은 총명한 장교야. 귀관들 회식에 참석하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는 어둠속을 향하여 경례를 올려붙였다. 나는 중령이 떨어뜨린 전문용지를 주워서 읽었다. 읽는 것이 아니라 듣고 있었다.
우리는 전멀한다. 우리는 전멸한다. 우리는 전멸한다.
나는 그것을 장군이 하던 대로 휴지통에 꾸겨 처넣었다.
〔심판의 집, 열화당 竗77: 가객, 백제 1978〕
2016년 7월 13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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