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반병의 그 사내(4)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관계된 태종대는 산책 코스와 해안 풍경이 유명하다)
16.
시티투어 2층 버스를 타고 부산관광 하는 옥이엄마와 그 사내.
그들의 즐거운 한 때……태종대 풍경속의 그림 같은 남과 여.
멀리 드넓은 바다 위로 외항선들이 점점이 떠있다.
그와 함께 손을 잡고 등대 밑 계단을 내려가는 옥이엄마.
행복한 표정이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마주 선 중년의 남녀.
그의 얼굴이 점점 다가온다.
아, 어쩌지.......갈매기가 머리 위에서 선회를 한다.
자기도 모르게 살짝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니,
그가 아닌 첫 남편의 화난 얼굴.
놀라고 뜨악해서 눈을 뜨니 방 안, 이불 속이다.
꿈을 꾼 것이다..........
전날 전철역에서 만났을 때 그는 몹시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혹시 싶어 가봤더니 그 가게엔 안 계시더군요.”
“.........주방에......있었는데.....”
“아 그랬군요.......참 그 뒤로 몸에 이상은 없지요?”
“예, 덕분에.”
“그럼 다음에........”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온천천 위 주차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할 말이 그거 밖에 없을까, 난 듣고 싶은 말도 할 말도 많은데........
옥이엄마도 가볍게 고갤 숙이고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쪽에서 옥이가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밤 퇴근해가니 옥이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다.
은행 사이트엘 들어가 오늘 입금한 수입을 체크하는 중이다.
매일의 수입을 퇴근길에 은행 ATM기에 입금을 하고
엑셀로 만들어 놓은 일일 입출금 내역을 정리하는 것이다.
“안 추웠어?”
“응, 오늘은 좀 늦네요.”
“마산댁이 좀 일찍 가는 바람에 정리할 게 많아서......”
얼굴과 손발을 씻고 빨래거리를 세탁기에 넣는다.
“참, 아침에 그 아저씬 누군데?”
“.......누구?”
“전철역에서 뭐라고 얘길 해놓곤.....”
“아, 그 분. 손님인데.....예전에 나 차에 다쳤을 때.....일봐주신.”
“글쿠나......”
컴퓨터를 끄고 잘 준비를 하는 옥이에게 옥이엄마가 말했다.
“오늘은 엄마랑 같이 잘래?”
“그래요.”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딸아이와 같이 자고 싶어졌다.
불을 끄고 나란히 한 이불에 누워 딸에게 물었다.
“옥아, 엄마가 재혼하는 거……니는 찬성이라고?”
“그럼,......나도 아버지가 생기니 좋고.”
“니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안 그랬잖아.”
“그 땐 철이 없었지......마산댁 아줌마 말 하시던 분요?”
“아니........”
“그럼, 아까 그분?”
“무슨........그 분은 누군지 어디 사시는 지도 모르는데.”
“난 엄마가 좋다면 누구라도 좋아요.......”
피곤했는지 금방 옥이는 색색 잠들었다.
쉽사리 잠들지 않아 천장을 바라보니 어젯밤 꿈이 생각났다.
오늘 밤 꿈에서도 그를 만났으면 싶었다.
그러다가 망측하다는 듯 눈을 감으며 가는 한숨을 삼켰다.
17.
“어째 옥이애미가 요새 좀 달라진 거 아이가?”
“글치요? 안 하던 화장도 좀 한 거 같고.......”
경주댁과 마산댁은 집안 일 보러 간다고 잠시가게를 비운
옥이엄마를 두고 이야기 중이었다.
“옷도 못 보던 거고..........”
“시장에서 사 입어도 워낙 태가 나는 얼굴에...또 몸매니까.”
“혹시 연애하는 거 아이가.....옥이엄마.”
“남자라면 고갤 절래 절래 젓는 사람인데요?”
짧아진 해로 인해 5시 조금 넘은 시간인데 점차 어두워지고 있다.
저녁 식사로는 좀 이른 시간이다.
“그 남자한텐 안 그런 거 같던데.........”
“워낙에 첫 남편 폭주에 데서 술 절제하는 기 미더워보였스까.”
“정말.......딱 반병이니.......”
“병따개로 따는 빨간 뚜껑 25도짜리 진로소주만 마시는 거 보모
술이 약해서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한번 정하모 좀체 안 바꾸는 성격이것제........남잔 그래야 돼.”
그런 이야길 하는데 호랑이 제 말하면 나타난다고 그 사내가 들어섰다.
오늘은 주유소사장과 함께였다.
두 사람은 수육백반과 소주를 시켰다.
늘 앉던 자리가 아니라 좌식 자리여서 대화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그 사내가 주로 말하고 주유소 사장은 듣는 쪽이었다.
경주댁과 마산댁은 저녁장사 준비를 슬슬 시작했고
때맞추어 옥이엄마가 바삐 들어섰다.
그 사내를 발견한 옥이엄마는 눈인사를 하곤 주방으로 들어섰다.
그가 빙그레 웃은 것 같았다.
“지가 좀 늦었지요?”
“머 마침 맞게 왔구먼.”
“좀 더 일찍 오지......그 사람도 와 있는데......”
마산댁이 약간 빈정대는 어투로 말했다.
“그기........무슨 말이라예?”
조금 각이 선 옥이엄마의 목소리에 경주댁이 개입한다.
“뭐 할라고 그런 말을 하노........손님한테.......옥이엄마도 참고.”
“내가 뭐 없는 말 했소? 요새 좀 붕 뜬 거 알면서.....”
마산댁이 그러는 게 뭣 때문인지 뻔히 알기 때문에
옥이엄마는 참기로 했다.
더구나 그 사람이 와 있는데 티격태격해서야 어디 될 일인가.
옥이엄마는 내심 내가 왜 이리 예민하지 싶었다.
손님들이 점점 많아져 한창 바빠지기 시작할 무렵
그 사내는 주유소사장과 함께 가게를 나갔다.
나가기 전에 주방 쪽으로 눈길을 주는 것이
아마도 자기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라고 옥이엄마는 생각했다.
18.
초겨울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날, 가게는 정신없이 바빴다.
추위에 따끈한 국물이 생각났을까.
주말인데다 가족이나 직장 동료들끼리 비교적 싸면서도
기름진 음식을 나눠먹고 싶은 날씨이기도 했다.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한숨 돌리는 참에
뒤늦게 들어선 손님들이 있었다.
“옴마나, 우찌 여기까지 걸음을..........”
마산댁이 반색을 하고 맞이한다.
“예, 겸사겸사로.......”
그러면서 홀을 휘둘러 누군가를 찾는 눈치이다.
“이리로 앉으시이소. 그래, 뭘 드실라우?”
“제일 비싸고 맛난 거로.......알아서 주소.”
주방에서 얼핏 내다보던 옥이엄마의 눈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저게 누구란 말인가.
철학관 그 사주쟁이, 그리고 약간 다리를 절며 들어선 사람은
그가 천상 내 인연이라고 단정 지었던 마산댁 친척이 아닌가.
사진으로 한번 본 적이 있기에 대번에 알아봤다.
“옥이야, 봐라. 수육 특으로 하나 내고,
가만 있자 식사는 어쩌실라요?“
부산하게 마산댁이 말하는 게 사전에 무슨 약속이 있었나 보다.
옥이엄마는 새침한 표정으로 자기 일만 했다.
바쁠 때 파트타임으로 온 주방 보조가 설거지를 마무리할 무렵
옥이엄마는 서둘러 손을 씻고 퇴근준비를 했다.
“와? 벌써 갈라꼬?”
“야.......집에 누가 오기로 돼 있어서요.”
주방으로 온 경주댁에게만 말하고 옥이엄마가 겉옷을 입기 위해
내실 쪽으로 가자 마산댁이 큰 소리로 부른다.
“옥이엄마, 일로 좀 와봐라. 부러 보러 오신 분인데.....”
저렇게 일방통행으로 밀어붙이는 성격이 때로는 장점이 되고
지금처럼 말할 수 없이 성가시게 느껴지는 단점이 되기도 한다.
“저......약속이 있어서요......”
조그마한 내실로 따라 들어온 마산댁이 사정하듯 말했다.
“잠시만이라도 안되것나?.......내 낯을 봐서라도.”
“제가 마음이 없다고 안 그랬습니꺼.....이라모 곤란하지예.”
옥이엄마는 단호히 말하곤 손지갑을 들고 나와 버렸다.
진작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어쩜 저럴 수가 있을까.
자기들끼리 작당하여 누구를 어찌해보려 하다니…….
뭐 내가 남자 복이 없다고?
이 모두가 여자 혼자 산다고 호락호락하게 봐서 그런 걸게다.
버스를 타고 가며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다 눈을 감는데
라디오에선 오래된 대중가요가 흘러나왔다.
한경애의 ‘타인의 계절’이었다.
그대를 사랑하면 할수록 이렇게 외로워지는 건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이 너무도 깊은 까닭에
우리 사랑 여기 이대로 머물 수 있을까
오늘이 가고 먼 훗날에도 남아있을까
사랑이 깊어 가면 갈수록 우리들 가슴은 빈 술잔
낯선 바람은 꽃잎 떨구고 눈물이 되여 고여라
옥이엄마는 가슴이 싸 아해졌다.
대중가요가 마음에 사무치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거라 했는데.
사랑이라.......짝사랑이 진짜 사랑이라지.
더 슬픈 건 상대방이 알면서도 혼자 해야 하는 외사랑이고.......
정류장 안내멘트로 음악은 끊겠지만 혼자서 후렴처럼 되풀이했다.
‘우리들 가슴은 빈 술잔...........’
19.
“우리 재종도 언자 거의 나아서 괜찮을 낀데.........”
“그래도 다릴 좀 절 더만.”
“그나저나 그 사내가 맘에 있다며 누군지, 어디 사는지도 모르니.”
경주댁과 마산댁은 옥이엄마를 두고 걱정 중이다.
“그라모......저기 주유소 사장한테 함 물어보모 안되까?”
“참, 그렇네........그 사람 예전에 그 주유소 기름차도 몰았다 아인교.”
“그랬는가..........
옥이도 장차 시집을 가야 는데 번듯한 애비가 있어야제.....암.”
“우리 재종도 못잖은데.........상처했으니 서로 같은 처지고.”
“그래도 그렇제.......우찌 철학관 그 사람하고 같이 오노........”
“.................난 옥이엄마 생각해서.”
그건 경주댁도 잘 안다.
우리가 이렇게 같이 산 게 어디 한해 두해인가.
“내일 그라모 내가 주유소엘 함 가보까?”
“지가 가볼 라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하모예.......우리가 나서야지예.”
“그래도 철학관처럼 대놓고 그라진 말고.”
“야아....그건 그렇고, 연말에 공사 시작하는 기 확실한가요?”
“그렇다쿠네.......이 장소에서 십년 세월인데........”
“그래도 다른 데 가겔 알아 보모 안되까요?”
“지금은.........쉬는 기 맞제 싶다.”
주인이 건물을 팔았고 새 주인은 리모델링을 착수한다고 한다.
40대, 50대, 60대 중반인 세 여인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산댁이 주방의 불을 보고 홀 소등 후 두 사람은 내실로 자러갔다.
초겨울의 매서운 바람에 가끔 바깥문이 덜컹거렸다.
20.
대형할인마트의 주말 오후는 정신없이 바쁘다.
캐셔 일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옥이엄마에겐 더더욱 그랬다.
손님 얼굴 볼 새도 없이 커트가 아닌 바구니에 담긴 물건을
기계로 찍다가 옥이엄마는 화들짝 놀랐다.
“이런 데서 또 만나네요.”
그 사내였다.
“....예.”
옥이엄마는 국거리 쇠고기와 인스탄트라면, 밑반찬 등의
식품을 부지런히 계산했다.
“그럼......”
현금으로 계산을 마친 사내는 비닐 백을 들고 웃으며 멀어져갔다.
일을 마친 후 버스를 기다리는 옥이엄마의 마음은 허전했다.
마산댁과 그렇게 헤어지는 게 아닌데 싶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겐 마누라가 있는 기라.
지금도 찾아 헤맨다지만.........”
주유소 사장을 만났다는 마산댁은 그 말부터 꺼냈다.
4년 전 그 무렵, 사내가 부도를 맞았다.
연쇄부도의 희생양이 되어 강원도 어느 산사로 일시 피신했다.
그가 연락두절인 그 사이 아내도 잠적을 했고
아직도 어디 있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라고.
누구는 일본에서 봤다고도 하고 혹자는 전라도 어디라고 했다.
다른 남자가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는 중국 대련으로 건너가 조선족 여자와 사업을 시작했고
동대문시장에서 꽤 자리를 잡았었다는 말도 했다.
그 여자와는 동거까지 했는데 결국은 파탄이 났다고 한다.
몸과 마음과 돈도 함께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엔 돈만 챙기고 몸과 마음도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 크고 넓은 중국 땅에서 어떻게 그 여자를 찾는단 말인가.
애초에 작정을 하고 접근했던 것이다.
깨끗이 포기하고 귀국해서 다른 일을 찾고 있다는 걸 끝으로
마산댁은 말을 맺고 옥이엄마의 얼굴을 살폈다.
“그래도, 난 조선소 그 남자와는 안 합니더.”
옥이엄마는 싸늘하게 말을 뱉었다.
“꼭 그래라는 기 아이라.......옥이 니가 알아야 안되것나 싶어서.”
“그라고예.......며칠 후엔 지가 마트에서 일하기로 했거든요.”
그렇게 그만둔 그 가게는 이제 머잖아 헐린다고 한다.
그래도 덕분에 먹고 살았고 그동안 모은 월급도 이젠 꽤 목돈이 되었다.
누구처럼 무슨 펀드인가에 안든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앞으로도 뭐든 열심히 할 참이었다.
버스가 왔다. 빈자리가 많았다.
차창으로 흘러가는 바깥 풍경이 파노라마다.
혹시 만나면 그에게 주려던 장갑이 백 안에 들어있는 게 생각났다.
그걸 꺼내 만지다가 옥이엄마는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운전기사에게 다가가 장갑을 건네며 말했다.
“저......아저씨, 이거 쓰이소.”
“........?”
“그냥, 새 건데 버리긴 아까워서요.”
“아 예, 고맙심니다.”
버스에 내린 옥이엄마는 멀어지는 버스를 한참 바라보았다.
소실점으로 잦아드는 버스가 그녀의 짝사랑인가 싶었다.
옥이와 그녀의 보금자리인 아파트에도 창마다 거의 불이 꺼져있다.
내일은 옥이를 위해 목이 긴 스웨터라도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했다.
(5)편으로 계속.......
첫댓글 삶이 와 이리 어려분지. 별들은 반짝이기만 하는데... 멀어져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