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각공예
화각공예(華角工藝)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나전칠기에서 자개와 함께 사용한 대모(玳瑁)효과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이후 조선시대 화각함의 테두리 부분에서 쇠뿔로 만든 판에 대모무늬를 그려 넣음으로써 구하기 힘든 대모의 대용 효과를 시도한 것도 있다.
화각기법은 젊은 소의 뿔을 골라 물에 삶아 내부의 뿔뼈를 꺼낸다. 그런 다음 뾰족한 끝부분을 5㎝ 가량 잘라내고 뿔 측면을 상하로 켜서 불 위에서 집게로 집어 펴가며 무거운 것으로 눌러 판판하게 한다. 얻어진 각판(角板) 표면을 줄과 끌로 깎아내어 종잇장처럼 얇게 만든다. 표면을 숯과 속새풀로 갈아내고 그 투명한 판을 일정한 크기로 마름질하고 안쪽 판면에 당채(唐彩)인 석채를 민어 부레풀로 개어 그림을 그린 후 뒤집어 기물의 표면에 2㎜ 가량 띄어가며 부레풀로 붙인다. 각판 사이의 벌어진 틈에 소뼈를 사다리꼴로 얇고 길게 갈아내어 눌러가며 끼워 붙인 후 표면에 광을 낸다.
이때 사용되는 석채는 백(白)·적(赤)·황(黃)·녹(綠)의 짙은 색으로 매우 강렬하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약간씩 노랗게 변색되는 우각판(牛角板)을 통하여 중화되어 보인다. 부드럽고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여성용품에 애용되었는데 무늬로는 십장생·운룡(雲龍)·봉황·모란·물고기·까치와 호랑이 등 민화적 소재가 주류를 이루며 함·반짇고리·자·실패·베갯모·부채·머릿장 등 생활소품에 활용되었다.
그러나 화각제품은 소뿔의 제한된 크기 때문에 작은 함의 제작에도 수십 장의 작은 우각판이 사용되고 여러 공정과 힘든 작업으로 인해 그 당시 귀한 공예품이었다. 또한 우각(牛角)은 민어 부레풀 사용으로 시간이 경과하면서 접착력이 떨어져 여러 개로 구성된 사각판 모서리 부분이 쉽게 벌어지고 습기와 건조, 좀벌레에 약하며 부식되어 현존하는 숫자가 많지 않다.
화각공예의 재료와 제작공정, 사후관리 등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20세기 초에는 우각판을 투명유리판으로 대신하고 석채보다는 양칠(洋漆)을 한 화초장(華草欌)이 발달하였는데 손쉬운 제작공정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화각의 부드럽고 따뜻한 질감과는 달리 유리는 맑고 투명한 느낌을 준다.
화초장(華草欌)은 얇은 투명 유리판 뒷면에 여러 가지 색으로 십장생·꽃과 나비·풀과 물고기·토끼 등 민화풍의 그림들과 부귀공명(富貴功名)·자손창성(子孫昌盛)·만수무강(萬壽無疆) 등 항상 기구하는 글월을 시문한 후 그 뒷면에 노랑이나 분홍 색종이를 붙여 여성적인 화사함을 나타내었다. 유리판은 우각판에 비하여 쉽게 깨지고 두껍고 무게가 있기 때문에 함이나 소품을 제작할 수 없다. 때문에 장과 농, 의걸이장의 쥐벽칸이나 머름칸, 문판 등의 복판에 사용되었고 검붉은 화류목 골재로 둘러지고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사용 중 유리판이 깨지기 쉽고 수리 및 보수가 쉽지 않아 어려움이 있으며 20세기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그 가치에 대한 경시풍조와 관리 소홀로 인해 숫자가 많지 않아 매우 귀한 편이다. 화초장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공예재료 개발의 필요성에 부응해가는 한국 목가구의 새로운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화각(華角)
요약 : 쇠뿔을 얇게 펴서 채색 그림을 그린 후 이를 목기물 위에 붙여 장식하는 한국 특유의 각질(角質)공예기법 및 그 제품.
화각(畵角)·화각(畵刻)·화각(花角)·화각(火角) 등의 명칭으로도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주로 화각(畵角)으로, 일본에서는 화각(華角)으로 부른다. 제품으로는 자[尺]·실패·빗·반짇고리·경대·베갯모·패물함과 소형장 등 주로 여성용의 작은 기물에 이용되었다.
설채(設彩)한 그림 내용은 십장생(十長生)·풍속도(風俗圖)·기명절지(器皿節枝)·신선도(神仙圖)·몽유도(夢遊圖) ·동유도(童遊圖)·화조도(花鳥圖)·금수도(禽獸圖)·수복강녕무늬[壽福康寧文] 등으로서 적(赤)·청(靑)·황(黃)·녹(綠)·백색(白色)의 진채(眞彩)안료를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