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있으면 또 5.18이 다가 옵니다.
아래 5.18과 북한관련설이 있어서 제 나름대로 글을 올려 봅니다.
당시 박정희 암살후 최규하가 대퉁령직을 이어 받았으나 전두환의 반란에 의해 얼마 안되어서 쫓겨나고 맙니다.
이때 전국적으로 신군부 반대 시위가 일어 납니다.
전두환은 대규모 시위로 커져서 결국은 쿠데타로 탈취한 정권에 대한 불안감에 겁을 내었던지라 시위대에 대하여 강력한 본보기 억제진압을 기획하게 됩니다.
당시 광주 역시도 전국적으로 흔히 있었던 집회정도에 불과 했습니다.
사실 집회를 참석하다 보면 두가지 갈림길에 항상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즉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저들도 우리 형제인데 폭력으로 맞대응 해야 하는가와 촛불집회와 같이 몽둥이 앞에 머리 내어주는 비폭력으로 해야 하는가 와에 대해 강요받게 됩니다.
사실 집회때 경찰이 진압하는거 보면 살 떨립니다.제가 겪어본 진압대 선두... 이들은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오래전 호기심으로 참석한 어느 시위현장에서 바로 옆에서 시민 한사람이 진압용 수류탄에 발목이 부상당해서 피 을리는것을 직접봤는데 불켜진 병원응급실에 가서 치료를 원했지만 불이익 당할까봐 치료를 안해 주더군요. 잘못하면 병원 문닫아야 된다고,,이해 해 달라고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하더군요,당시 다른병원들도 마찬가지로 치료를 안해 줬다고 하더군요.
여자분으로 기억되는데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저도 모릅니다.
여튼 광주 항쟁초기때도 시위도중 맞아서 피흘리는것을 동료들이 봤다면 아마도 저였더라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것입니다.
돌맹이를 들어야 하고 화염병을 들어야 했습니다
경찰서를 습격해야하고 무기를 탈취해야 했습니다.
시위시 무기로 무장된 진압대들에게 무기로 대처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엇을겁니다.
그런데 전두환 신군부는 시위 현장에 군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정말 글로는 표현하지 못할정도로 진압을 하기 시작합니다.
진압당시 방송국은 노래를 틀어 버렸고 군은 광주를 에워쌓고 차단후 여러분이 들었던 그대로 살육을 시작합니다.
밤새도록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하는 시위대의 방송에서 우리도 힘을 만들어보자고 호소했고 그래서 참석했던 이들은 중무장한 군병력앞에서는 당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니 학생들은 여학생들은 그렇게 같은민족에게 칼에 충에 난도질 당하며 죽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북한은 오판하지 말라고.....즉 이 사건을 계기로 남침하지 말라고,,,당시 시민군이 어떤 생각으로 이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후 모든 방송은 광주를 폭동으로 몰고 관련진실은 모두 차단하고 전국의 시위대들은 이 무섭고 처참함에 숨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냥 소문으로만 들어야 했고 말을 한다는것 자체도 무서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학생들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고 전국에서 이 사건을 알리려고 영상을 만들어서 대도시에서 상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5.18당시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던 친구의 증언을 통해서 어렴풋이 진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접한계기는 80년대 후반대였을까..청량리 광장에서 상영되던 영상을 보고 사실인것을 알았더랫습니다.
제가 당시 이 영상을 보고서도 무슨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개념은 없었을 때였고 상영하는 이들이 앞으로 어떤 피해를 당할지 생각도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동시에 이 사건의 진실을 아는 이들이 도대체 왜 이런 극악무도한 살인진압이 벌어진 배경을 추적하기 시작했고 우리군의 작전권이 미군에 의해서 통제된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광주진압 역시도 미국의 허락이 있었거나 아님 방조했다는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시기 다행히 현재도 우리군은 작전권이 없으며 군 병력 이동시에도 미군이 지배하고 있는 한미 연합사의 승인이 있어야만 이동이 가능합니다. 왜 이시기 작전권이 우리에게 없는것이 다행인가?라는글은 차후 기회되면 적어 보겠음 )
이후 미국에게 군 투입에 대한 책임을 묻게되고 이것을 계기로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과 정청래도 참여한 타 미문화원 점거 사건이 일어 나면서 다시 투쟁에 불이 붙기시작하고 결국 6.29로 이어지고 문민정부,참여정부의 기틀이 마련되게 됩니다.
당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당사자들이 도망다니다가 강원도 원주 천주교에 숨어서 지냈는데 ..이 천주교 신부 개자식들이 자수하게 하여 당시 당시 두사람인가 몇사람이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몇년전 이떤 님의 장례식장에서 당시 이들을 자기가 설득하여 자수하게 했다고 반 자랑삼아 떠벌려대던 천주교신부놈의 목소리를 지금도 잊을수가 없습니다.
이후 문민정부에 이르러서야 광주가 재 조명되기 시작했고 진실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죽었고 벌써 20년이 흘러버렸고 국민들의 기억속에 잊혀져가는 흔한 일이 되어 버렸는데 이제와서 재 조명된들 아니 진실이 밝혀진들 죽어버린 이들에게 아니 삶 자체가 파탄난 피해 가족들에게 무었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 알량한 쓰잘데기 없는 명예회복?
예전 참여정부 시절 상암동에서 일을 할때 우연히 가게로 찾아와서 일을 맡겼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광주민주화 항쟁때 중심에 있었고 보상을 신청하라고 해도 받지 않았는데 너무나 생활이 어려워서 신청해야 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더 이상 관련된 말을 안하더군요.
전 아무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이후 몇년을 가끔씩 봐왔는데도 궁금해도 차마 관련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이후 몇년동안은 가끔 얼굴도 보이던데..잊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어느순간부터는 보지를 못했던거 같습니다.
지금도 광주 5.18묘역 입구 바닥의 돌에는 전두환이름이 있고 여기에 침을 뱉고 가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글을 이렇게 쓰지만 실제로 전 5.18관련 단체에 연관된적도 없고 마음은 같이 하고 싶지만 먹고사는것 때문에...라고 변명하면서 멀거니 보기만 하였을뿐입니다.
5.18로 죽어야 했던 이들이 세월이 이렇게 흐른후 광주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는 이런 나에게..먹고 사는것 때문에...라고 애써 외면하는 이런 나를 보고 지하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아니 어쩌다가 나는 이런 진실을 알아 버렸을까...
제 생각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이 나라에 살면서 어쩔수 없이 다른길을 갈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항쟁당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가야 했던 시민군들이 우리 이웃들,후손을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 미쳐버린 우리 군인들의 총 칼앞에 죽어가야 했던 이 일 만큼은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만원.. 왜 그가 이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다 알고 더 잘 압니다.
다만 지금도 왜곡이 필요한 이들이 존재하고 있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지만원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메스컴에 나오는 것입니다.
첫댓글 회원님 홧팅입니다
아니 이글에 동조하신 분이 이 곳에 계시다니...충격입니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