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3＞ 송정

[무념무상]

[동길산 시인, 포구에 서다] < 13 > 송정

생의 그물 너머 저만치 불그스름한 일출

일출이 이름값을 하는 송정포구. 해를 닮아 포구도 둥글다. 사진=박정화

송정은 동해바다. 해가 뜨는 바다. 해가 뜨는 포구. 포구는 해를 닮아 둥글다. 빨간 등대에서 한 바퀴 빙 돌면 흰 등대. 배도 앞머리가 뾰족한 배보다 둥그런 배가 많다. 해를 보려고 해가 뜨기도 전에 모여드는 사람들. 둥글어지려고 모여드는 사람들.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시간.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안 보이는 것도 아닌 시간. 소리는 또렷하다. 둥글다. 밧줄로 잇댄 배와 배가 부딪치는 소리. 부딪쳤다가 떨어지는 소리. 해가 뜨는 바다에 적을 둔 배라서 부딪치는 소리도 둥근가. 떨어지는 소리도 둥근가.

구름은 두텁다. 구름층이다. 해가 달구는지 구름층이 불그스름하다. "야호오! 야호오! 야호오!" 장년인지 노년인지 어렴풋한 아주머니 두 분이 구름층에 대고 야호를 길게 세 번 외친다. 삼각대를 펼치고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표정이 불그스름하다.

바다도 불그스름하다. 불그스름한 바다를 배가 나가고 들어온다. 나가는 배는 가볍고 들어오는 배는 무겁다. 조갑증을 부리듯 휑하니 나가는 배. 여유를 부리면서 느긋하게 들어오는 배. 수면에 배를 붙이고 물결 따라 오르내리는 갈매기도 알 건 다 아는지 들어오는 배만 따라붙는다.

"이거는 홍동, 저거는 녹동." 좀 전에 들어온 배는 1톤짜리 소형 해동호. 뱃전에 늘어뜨린 그물에는 게가 미어터진다. 올해 예순셋 이덕율 선장이 아침거리로 갑판에서 복어를 다듬고 있다. 복어를 보깽인지 꼬깽인지로 부른다. 독 있는 고기가 맛있다는 말도 하고 콩나물 넣고 국 끓이면 복어만큼 시원한 것이 없다는 말도 한다.

'홍동 녹동'은 여기 뱃사람들이 빨간 등대, 흰 등대를 보고 하는 말. 붉은 등불을 비추는 빨간 등대가 홍등이고 초록 등불을 비추는 흰 등대가 녹등이다. 나가는 배는 포구 오른쪽 흰 등대를 보며 나가고 들어오는 배는 왼쪽 빨간 등대를 보며 들어온다. 어느 포구라도 그렇다. 등대 색깔이 그냥 희고 빨간 게 아니라 까닭이 있어서 희고 빨갛다. 모든 존재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다.

말값을 치른다. 게를 만원어치 산다. 묵직하다. 꽃게와 돌게란다. 서울에서 관광 왔다는 장년은 돌게를 '박하지'라고 한다. 충청도 위쪽 태안이나 인천 소래포구에서는 그렇게 부른단다. 해동호가 오늘 새벽 세 시에 나가 잡아온 고기는 부시리 문어 방어 복어 게. 썰어줄 테니 방어도 사 가란다. 말만 들어도 입에 침이 고인다.

등대 사이로 갯바위가 보인다.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은 바위다. 아무런 치장도 필요 없는 바위다. 불그스름한 구름층은 갯바위 너머 구름층. 해는 갯바위 너머로 뜰 것이다.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고 아무런 치장도 필요 없는 해가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고 아무런 치장도 필요 없는 갯바위 너머에 떠서 이 바다를 밝히고 이 바다를 데울 것이다.

날이 밝아지거나 말거나 배는 여전히 부딪치고 떨어진다. 영복호. 밧줄로 잇댄 세 척 배 중 하나다. 시선을 끈다. 목선인 것도 시선을 끌고 다른 배는 대개가 바다색인데 흙색 황토색인 것도 시선을 끈다. 이름도 물어봐서 영복인 줄 알았지 언뜻 보면 명복이다. 황천길 떠난 이의 명복을 빌어줄 것만 같은 배가 부딪쳤다간 떨어지고 부딪쳤다간 떨어지면서 둥근 곡소리를 낸다.

영복 다음다음 배는 대변. 영복과 대변 사이 배는 색깔만 시퍼렇고 이름은 없다. 두 배보다 높이도 낮고 길이도 짧다. 높이도 낮고 길이도 짧은 배가 당차다. 영복호에 부딪쳤다간 떨어지면서 대변호에 부딪치고 대변호에 부딪쳤다간 떨어지면서 영복호에 부딪친다. 부딪쳐 멍들어서 시퍼런 낮고 짧은 배. 배를 잇댄 밧줄은 잇댄 배가 멀어지면 팽팽해지고 다가오면 느슨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러리라. 멀어지면 팽팽해지고 다가가면 느슨해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 지금은 멀어진 그대. 그대와 나 사이가 팽팽해서 그러리라. 지금은 느슨한 그대. 그대와 나 사이가 가까워서 그러리라. 팽팽한 것도 배 하나 사이 거리. 느슨한 것도 배 하나 사이 거리.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그 거리에 그대가 있다. 내가 있다.

산다는 것도 그러리라. 팽팽하다가도 느슨하고 느슨하다가도 팽팽한 것, 산다는 것. 지금 팽팽하다고 해서 언제나 팽팽하랴. 지금 느슨하다고 해서 언제나 느슨하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끼여 시퍼렇게 멍든 그대. 멍은 다르게 보면 바다색이려니 멍들면서 정신은 바다를 닮아가려니. 바다가 되어 가려니. 부딪쳐 보지 않고 멍들지 않고 저 바다를 어찌 알리. 저 바다에 감히 나가리.

'산다는 것을 저만치 그물처럼 던져두고 싶을 때/ 송정에 가고 싶다/ 해변 정원에는 어미를 기다리는 어린 새가/ 색종이처럼 접혀져 울 것이고/ 바다는 깊고 푸른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낼 것이다/ 해변으로 밀려온 파도는 또 그만큼 출렁이고/ 나는 아침도 먹지 않고/ 모래톱에 박힌 조개껍질처럼 까무룩 접혀 있다가'

-손순미 시 '송정'에서

해는 변죽만 울린다. 뜨기는 떴을 텐데 날이 다 밝도록 보이지 않는다. 구름층도 불그스름한 빛을 거둔다. 야호를 길게 외치던 아주머니는 진즉에 나가떨어지고 일출을 기다리던 삼각대도 접힌다.

해 가 뜨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지 수면에 배를 붙인 갈매기는 하나같이 해를 등지고 오르내린다. 나도 해를 등지고 걷는다. 얼은 몸을 잔뜩 구부려 기우뚱기우뚱 오르내린다.

해수욕장 입구 국밥집. 이 신문에도 저 신문에도 맛집으로 소개됐다는 간판에 김이 자욱하다. 사람이 자욱하다. 아침을 먹지 않은 속이다. 허겁지겁 속을 풀고 손님에 밀려 허겁지겁 나온다. 뒤따라 나온 아주머니가 계산했느냐며 붙잡는다. 순서를 기다리는 손님과 식사를 마치고 나온 손님이 일제히 쳐다본다. 계산을 하고 나왔는데도 얼굴이 화끈댄다. 속까지 불그스름해지는 기분이다. dgs1116@hanmail.net

■ 송정역 - 1940년 지은 목조 단층건물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

삼각형 지붕이 이리 빼쭉 저리 삐죽이다. 송정역(사진). 1940년 12월에 지은 목조 단층 기와지붕 건물이다. 문화재청에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기차역이다. 이기훈 역무원에게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이 부산에 또 있냐고 묻자 남창역을 들먹인다. 남창은 울산권이니 부산에선 유일한 역인 셈.

송 정역에 서는 객차는 하루 열네 번. 상행선 일곱 번 하행선 일곱 번이다. 출발지도 부전역 종착지도 부전역이다. 부전역까지 요금은 이천오백 원. 평일에는 사십여 명이 주말에는 팔십에서 백여 명이 송정역 개찰구를 통과한다. 평일 승객을 객차 수로 나눠보면 세 명 꼴. 송정역은 보는 역이고 추억의 역이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곽재구 시인이 노래한 대합실 풍경은 아닐지라도 송정역 대합실 풍경도 만만찮다. 화장실도 '우와'다. 대합실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의 뒷모습이 누군가를 빼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