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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집(聾巖集)
김언종 고려대 명예교수
1. 머리말
이 책은 16세기 조선에서 활동한 위인들 가운데서도 청량산(淸涼山)처럼 우뚝 빛났던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선생의 시문집인 《농암집(聾巖集)》을
우리말로 옮긴 한글 국역본이다.
대본인 《농암집》은 농암의 외예손(外裔孫) 김계광(金啟光)이 가장초본(家藏草本)을
바탕으로 수집(蒐集) 편차(編次)하여 1665년 예안(禮安)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원집(原集)과, 후손 이유용(李裕容)ㆍ이재명(李在明) 등이 재차 수집하고
1882년에 편집된 〈연보〉 및 관계기사를 합편(合編)하여
1911년에 목판(木板)으로 간행한 속집(續集)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량은 원집 5권, 속집 2권, 모두 4책으로 총 204판이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간행한 『한국문집총간』 제17집에 수록되어 있다.
농암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棐仲)이다.
그의 선조는 영천에 세거했는데 고조부 군기시 소윤 휘 헌(軒)이 처음 예안현으로
이거하였다. 소윤이 의흥 현감 휘 파(坡)를 낳았고,
현감이 통례문 봉례 휘 효손(孝孫)을 낳았고, 봉례가 인제 현감 휘 흠(欽)을 낳았다.
현감이 호군 권겸(權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성화(成化) 정해년(1467, 세조13) 7월 29일에 선생을 낳았다.
완인(完人)이라는 예칭(譽稱)이 있다. 어떤 사람을 완인이라 할 수 있을까?
윤강(倫綱)과 도덕의 차원에서 흠결(欠缺)이 없어야 한다는 등 여러 기준이
있을 것이지만, 《상서》 〈홍범(洪範)〉에 등장한 이래 전통 상식이 된 오복(五福),
즉, ‘수(壽)ㆍ부(富)ㆍ강녕(康寧)ㆍ유호덕(攸好德)ㆍ고종명(考終命)’을 규준(規準)으로
삼아 이 모두에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섯 가지를 세속의 사람이 그 모두를 다 누리기는 어느 시대 어디서나 지난하다.
단 하나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허다하기에 둘을 누려도 행복하였다고 하겠다.
지행(志行)의 격조가 그 이상을 찾기가 불가한 탁절(卓絶)한 경지에 올라 만세(萬世)의
사표가 된 인물을 성인(聖人)이라 하는데, 성인인 공자(孔子)도 그 삶을 살펴보면
‘완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주-D0001 성인과 완인은 세속에서 비범한 인물들로 존경과 선망의 대상인데
전자는 존경에 후자는 선망에 방점이 있다고 하겠다.
이 책의 주인옹(主人翁) 농암 이현보 선생에겐들 어찌 생로와 병사, 욕망과 갈등의 인환(人寰)에서 곤욕과 좌절, 유감과 회한이 없을 수 있겠는가? 폭군에게 밉보여 생사 판별이 어렵게 수감(收監)되기도 하였고, 체직되기도 하였으며, 부인 안동 권씨와 맏아들 이석량(李碩樑)이 선생에 앞서 세상을 떠나기도 하였지만, 당시의 황당한 형륙과 비교하면 수감은 오히려 다행이었으며, 체직은 자타 오류를 책임져야 하는 환로에서 다반사였고, 부인은 고희를 넘긴 고령이었으며, 맏아들은 장가를 든 뒤였으니, 단장(斷腸)의 고통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향년이 89세였으니 수(壽)요, 예안 강산의 일구(一區)를 확충하여 후손들 삶의 튼실한 터전으로 삼았으니 부(富)요, 돌아가실 때까지 우려할 만한 병치레 한번 없었으니 강녕(康寧)이요, 효행으로 당세의 풍속에 진선미한 영향을 끼쳤으며 후세가 추모하는 높은 덕망이 있으니 유호덕(攸好德)이요, 정침(正寢)에서 자손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돌아가셨으니 고종명(考終命)이다. 뿐만 아니라 품계가 종1품 숭정대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니 과환(科宦)의 대복(大福)을 누렸다고 하겠고, 아들 셋과 사위가 현달하였으며, 훌륭한 후손들이 대대로 족출(簇出)하였고, 5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혈맥(血脈) 종통(宗統)이 중단 없이 이어져 오는 가운데 영천 이씨가 현출(顯出)하고 있는 국가 기여는 갈수록 확대되고 있으며, 훌륭한 종손(宗孫)이 향화(香火)를 일신하여 받들며 추로지향의 한 전범(典範)이 되고 있으니, 이쯤이면 선생의 삶은 생전사후 가위 완인의 삶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주-D0002
모든 성화(聲華)에는 내력이 있다. 우리는 《농암집(聾巖集)》 국역을 계기로 누구나 선생의 글을 읽으며 선생의 풍도와 달덕(達德)을 제대로 추모하고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선생을 위해서라기보다 우리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농암 선생의 삶과 풍도
앞에서 농암을 완인에 비견하였는데, 만약 농암의 삶에서 오복 중 유호덕(攸好德)이 없었다면 그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복 완인론도 공허해진다. 즉, 수(壽)ㆍ부(富)ㆍ강녕(康寧)ㆍ고종명(考終命)만 누렸다면 완인이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망하기도 어렵다. 그 성취와 향유가 여하하든 사인(私人)의 삶에 불과하며 이를 주목한다면 아무래도 정제되지 않은 욕망의 투사일 뿐이다. 다시 말해 수ㆍ부ㆍ강녕ㆍ고종명을 우리가 결국 용인하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이들과 반열을 이루면서도 이들을 승화시키는 ‘유호덕’이 있기 때문이다. 주지되어 있듯 덕을 좋아하고 즐겨 펼치는 유호덕은 함양한 인격으로 타인을 배려하며 존중하고 공공의 복리에 종사하는 언행이며, 내성외왕(內聖外王)에 수렴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농암 생애의 주요 시기인 16세기 전반이 농암의 이미지와 같은 태평의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시대였다는 사실을 상기하여야 한다. 바로 이 시기에 조선의 네 번의 사화, 즉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기묘사화(1519), 을사사화(1545)가 연속 야기되었던 것이다. 성종 시대의 치세가 맥락을 이루고 훈구세력과 달리 도의를 지향하는 사림의 진출이 연속하였지만 불안한 안정과 더불어 조반(造反)이 거듭되었던 위구(危懼)의 시대였다. 농암은 이러한 시대의 풍파와 악착에 좌절하지 않고 고종명하며 원숙한 삶을 이루었는데, 명운도 있었지만 어떤 의지와 명철(明哲)이 없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유호덕과 관련하여 농암이 당대에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네 번의 사화가 경과한 후에 작성된 다음 글에서 그 대강을 살펴보자.
왕은 이르노라. 다스리기를 원하는 임금은 어진 이와 함께하고, 나이 많은 영걸은 경험이 많다. 그러므로 주 무왕(周武王)이 상보(尙父)에게, 한 고제(漢高帝)가 동원공(東園公)에게, 혹 스승으로 삼아서 주(周)나라 8백 년의 기틀을 열었고, 혹 예로 대우하여 한(漢)나라 4백 년의 왕업을 이었다. … ⅰ) 경은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고, 나이와 덕도 모두 높으니, 천하의 대로(大老)이고 당대의 원로(元老)이다. … ⅱ) 우리 선왕(先王)을 도와서 이룬 큰 공적이 사람들에게 남아 있고, ⅲ) 저 시골에 물러나서 행한 고상한 풍모는 풍속을 격려하였다. ⅳ) 관직이 높아도 부귀로 넘친 허물이 없고, ⅴ) 이름을 이루고도 물러난 영광을 누렸다. … 편안히 물러나 뜻을 기르니 명철(明哲)하여 몸을 보전함이 이미 넉넉하였고, ⅵ) 차분히 기미(機微)를 먼저 살피니 반드시 국가를 경영할 원대한 계책이 많았다. 세속 밖으로 고결함을 우뚝 세우고, 국면 밖의 공명정대함을 홀로 드러내었다. ⅶ) 나이가 많아질수록 덕도 더불어 높아져 내가 대통을 잇고 더욱 모습을 보고자 갈망하였다. ⅷ) 공밥을 먹지 못하기에 봉록을 받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오직 충정만 있어서 강호에서도 근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
더구나 나는 많은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하늘은 우리나라에 재앙을 내려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연이어 일어나고 백성의 곤궁함과 재물의 손실이 절박하다. 바야흐로 왕실이 불운하니 참으로 현자가 나서야 할 때이다.……빨리 수레에 멍에를 메어 이 바람을 위로하라. (《농암집》 연보 권2 〈교서〉)
명종이 국정 자문을 위해 재위 9년 1554년에 대사간 정유(鄭裕)의 건의를 윤허하여 88세의 농암에게 내린 이 교서는 모종 천재지변으로 을사사화 이후 권위가 실추된 조정과 피폐한 국정이 재차 부각되자 국운을 소생시키려는 명종의 의지를 배경으로 한다.주-D0003 현자(賢者)를 갈구하고 그 현명한 보좌(輔佐)를 바라는 국왕의 진심이 흥건히 묻어나는 이 교서에 나라의 기덕(耆德)을 예우하는 취지의 수사가 있기도 하지만 국왕의 명의로 작성되고 반포되기에 어디까지나 사실과 중론을 기초로 하며, 과장이나 분식이 감행되기는 어렵다.
우리는 ⅰ)에서 먼저, 당대 조정이 국가 차원에서 농암을 충효의 인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ⅱ)에서는, 연산군ㆍ중종ㆍ인종 세 조정에 연속된 사환이 공적으로 기려지며, ⅲ)에서는, 재야에서 효행을 진작하여 풍속을 일신하였다, ⅳ)에서는, 관직을 악용하여 비리를 저지르거나 교만하지 않았다, ⅴ)에서는, 명예를 이루고 관직에서 은퇴하였다, ⅵ)에서, 강호에서 은거하면서도 국가의 기미를 공정하게 조응하는 통찰도 하고 있고, ⅶ)에서, 나이 들수록 덕이 더욱 높아지고 있으며, ⅷ)에서는, 명분 없는 이록을 멀리하는 염치와 우국의식 견지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8조목은 하나하나 주목되며, 농암이 공사 양면에 걸쳐 이도(吏道)와 인도(人道)의 이상을 추구하는 유호덕을 기반으로 하여, 수ㆍ부ㆍ강녕ㆍ고종명을 향유하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성취는 어느 한 시기의 의지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일생에 지속되는 어떤 각오가 있었다고 추정되며, 33세 젊은 시절의 다음의 자서(自誓)가 그 모티프가 되지 않았나싶다. 농암은 대과에 급제한 이듬해 1499년에 사환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평생 지향하여야 할 다음 규범을 자신에게 서약하였다.
실로 몸을 바르게 하는 데 뜻이 깊네 / 意實深於正已
경외하는 마음 간직하고 어긋나지 않으려면 / 倘存敬而靡差兮
이 홀을 버리고 어디에서 취하겠는가 / 舍此笏而何取
……
하물며 위를 둥글고 아래를 모나게 하였으니 / 矧圓上而方下兮
하늘과 땅을 본떠 체를 삼았네 / 象天地以爲體
……
이에 손에 잡고 몸가짐을 바로 하니 / 爰手持而整容兮
엄연히 마음이 공손하고 정성이 한결같네 / 儼心恭而誠一
……
밖을 바르게 하는 것이 곧 마음을 기르는 것이니 / 正乎外所以養中兮
어찌 이름을 돌아보며 생각하고 신칙하지 않겠으며 / 盍顧名而思勅
마음을 기르면 절로 밖으로 드러나니 / 養於中自形於外兮
마땅히 받들어 지키고 스스로 경계해야 하리 / 宜奉持以自飭
……
어찌하여 말세에 혼미해져서 / 何叔季之昏昏兮
이름과 뜻의 유래를 알지 못하였는지 / 昧名義之有自
신하가 임금을 섬기고 아들이 아버지를 섬김에 / 臣事君兮子事父
누가 용모와 행동에서 바른 것을 취하지 않겠는가 / 孰取正於容止
모두 내면을 버리고 바깥에 힘쓰니 / 咸棄內而務外兮
구슬과 비단을 펼쳐놓은들 무슨 소용이랴 / 錯玉帛兮何裨
……
다행히 공씨가 손으로 뱀을 쳤으니 / 幸擊蛇於孔手兮
정직한 기운이 있어 감탄하고 / 嘆純正之有氣
주자의 이마에 피가 흐르게 했다 하니 / 聞流血於泚額兮
단공의 충의를 찬미하네 / 美段公之忠義
천 년 뒤 인심이 경박하여 / 後千載之澆澆兮
모두 정도를 배반하고 갈림길을 쫓았네 / 擧背正而趨岐
홀이 바른 것은 고금이 같지만 / 笏之正兮古猶今
사람의 사특함은 어찌 그리 많은가 / 人之邪兮何萬萬也
이 〈홀부(笏賦)〉를 짓기 한 해 전 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무오사화는 주지되어 있듯 훈구세력의 패권 지향과 신진 사림의 왕도(王道) 지향이 충돌한 사건이다. 김종직의 제자들이 살해당하고 추방된 나머지 사림 관료들의 기개가 훼손되고 기풍이 저하되었던 당시 상황과 이 서약은 무척 대조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취지를 거칠게 요약하면, ‘사람의 모든 언행은 마음에서 비롯되니 언제나 마음을 해이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 가운데 늘 도리에 따라 자신을 바로잡고 자신을 겸양하고 타인을 존중하며 안으로 그런 마음을 길러 분식 없는 외양을 이루도록 하고, 명분에 부합하는 실질을 추구하는 정명(正名)을 견지하겠다.’라는 것이다. 나아가 홀과 직접 관련하여 이런 지향을 실천한 두 인물을 예시하고 있다. 공도보(孔道輔)ㆍ단수실(段秀實)이다. 중국 송나라 공도보는 군주와 백성을 기만하며 군주의 잘못된 뜻에 아부하는 요악(妖惡)을 척결하려는 사람이고, 단수실은 살 수도 있는 상황에서 충의를 견지하여 결국 순의(殉義)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정도와 충의를 가슴 깊이 새기고 모든 상황에 처신하겠다는 결의를 표방한 것이다. 다시 말해 1498년 무오사화 직후 위축된 세태에서 이러한 기개와 기풍을 스스로 서약하는 농암의 모습에서 우리는 사림 출신 청년 관료의 걸출한 기개와 절조를 읽을 수 있다.
농암의 그러한 지향이 현실과 마찰을 빚은 사건이 1504년 갑자사화 때 일어난다. 연산군이 폭정을 이어가던 1502년에 춘추관 기사관에 임명된 농암은 이미 사필(史筆)에 기인하여 사화(史禍)로도 일컬어지는 무오사화가 있었고 또 연산군이 사관을 꺼리는 것을 알면서도 어전(御前) 가까이에서 기록에 종사하게 해줄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이후 1504년 정월에 세 정승이 연산군에게 직간하다가 처벌받았으나 그들이 시사의 병통을 정확하게 지적하였다고 논평하기도 하였다. 3월에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사료를 열람한 연산군은 전일의 계청과 더불어 농암의 직필을 미워하다가 4월에 사간원 정언으로 재직하던 농암이 세자의 서연에서 강관이 차례를 온당하게 하지 못하였다고 하자, 당일 거론하지 않았다는 트집을 잡아 농암을 하옥시켰다가 유배하였고, 이듬해에는 다시 의금부 옥에 하옥시키고 처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연산군의 ‘실수’로 방면되었고, 안기 배소에서 적거하던 중이던 1506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겨우 화망(禍網)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무오사화의 사필 관련 형륙(刑戮)이 처절하였고 형륙을 주도한 왕이 재위하고 있었어도 사관에 임명되자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노력한 면모에서 우리는 농암이 어떤 인물인지 가늠할 수 있으며, 〈홀부(笏賦)〉의 서약을 신빙할 수 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다시 출사한 농암은 전적(典籍)이 되었고 이듬해 호조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다시 사필을 잡았으며,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하였는데,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아 사람들이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고 하였다. 이 별호는 ‘소주가 담긴 질 그릇’, 즉, ‘겉모습은 소탈하지만 내면에 충의가 맑게 고여 있다.’는 뜻이다. 농암이 환로에 진출한 지 6년 만인 1508년부터 우리는 농암의 삶에서 이전과 다른 이력의 지속을 살피면서도 그 이면에 관통하는 〈홀부〉의 정명 서약을 살필 수 있다. 동년 9월에 농암은 어버이를 봉양하겠다며 세 번이나 상소하여 외직 영천 군수로 부임한다. 양친이 70세를 넘겨 명분이 있었지만 다른 심경도 작용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배소에서 돌아온 농암은 반정 공신들과 그 추종 세력이 새 폐단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바른 말을 하여도 한계가 있다고 절감한다. 권력의 행태에 염증을 느낀 것이라 추정된다. 농암은 1504년 6월 갑자사화 와중에 배소에서 1486년 이래 추수(追隨)한 스승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이 손녀를 궁중에 들이라는 연산군의 명령을 거역하다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慶源)으로 귀양 가던 중 교살(絞殺)당하는 사건을 겪었고, 1505년에는 다시 수감되어 허망하게 죽을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중종반정으로 다시 출사하였으나 공신들이 장악한 조정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목민의 외직을 부모 봉양을 명분으로 하여 스스로 전출시킨 것이라고 추정된다. 외직 허가 상소를 세 번이나 올렸다는 사실이 거듭 주목을 끈다. 농암의 외직 전출은 지방에서 목민관이 되어 자신의 뜻을 실현하고자 한 결단으로 보아야 온당할 것이다. 한강 가에서 송별연이 있었는데, 함경도 영흥 훈도(永興訓導) 직에 있던 34세의 농암의 위인(爲人)을 알아보고 1501년에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에 천거하였던 김세필(金世弼)주-D0004도 참석하였다. 이후 농암의 8개 고을의 수령과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는데 그 편력이 관직생활의 대부분이다. 영천 부사에 부임한 농암은 향교에서 석전(釋奠)을 지내고 군민들과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하였으며, 노인을 공경하고 영재를 기르기에 힘썼다. 즉 농암은 유학의 이상을 성실히 펴 백성을 교화하면서 인재교육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농암은 이 시기에 또 하나의 뜻을 표출한다. 2년 후 1510년에는 고향 예안현(禮安縣) 분천리(汾川里)의 집에 명농당(明農堂)을 짓고 벽에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려 게시하였다. 관직에 연연하며 상사에게 추부(趨附)하지는 않겠다는 포부를 표명한 것이다. 즉 명농당은 그 지향을 기념하는 건물이었다. 이해에 경상도 관찰사 송천희(宋千喜)가 농암을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물산을 풍성하게 하여, 인정(仁政)의 명성이 사방으로 퍼졌다.’라는 계목(啓目)으로 조정에 포상을 품신하였다. 1511년 3월에 농암은 경로연(敬老宴)을 열었다. 경로연은 농암이 자신의 가치와 지향을 구체화하는 행사였다. 70세 이상 노인을 초빙하였고, 이어서 쌀과 고기도 보내주며 경로 풍속을 진작시켰다. 1512년에는 농암은 분천 가 산록에 애일당(愛日堂)을 지어 여든 넘은 어버이를 기리며 그간 이행해오던 효친(孝親) 의지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작은 고을 선성은 바로 나의 고향 / 十室宣城是我鄕
선조가 물려준 경사가 길이 이어지네 / 祖先餘慶積流長
호호백발 두 어버이는 여든을 넘으시고 / 皤皤雙老年踰耋
슬하에 자손들이 이미 마루에 가득하네 / 膝下雲仍已滿堂
어버이 연로한데 어찌 왕궁을 사모하랴 / 親老那堪戀帝鄕
임금 섬길 날은 길다고 옛사람이 말하였지 / 古人猶說事君長
대대로 이어온 평천의 가업 분천 굽이에 / 平泉世業汾川曲
바위 옆에 새로이 구경당을 지었다오 / 新作巖邊具慶堂주-D0005
부모 구존(具存)의 구경(具慶)을 기리며 ‘어버이 연로한데 어찌 왕궁을 사모하랴.’라고 하며 그 실천으로 애일당을 지어 효친의 상징 공간으로 삼았다. 친친(親親)이면서도 친친을 넘어 주변에 효친을 전파하려는 의의가 있었다.
1513년 8월에 조정이 농암을 군자감 첨정 등 내직으로 불러들였고, 농암은 상소하여 사직을 청원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으며, 이듬해에 1514년 3월에 밀양 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1515년에는 충주 목사로 부임하여 농사를 권면하여 가을에 수확이 두 배가 되었고, 양로회(養老會)를 열어 경로를 진작하고 선박세와 교역세를 경감하여 찬사를 받았다. 1517년 11월에 별세한 송재 이우에 이어 안동 부사가 되었다. 안동 부사 재직 시의 농암은 우리가 농암의 생애 고찰에서 주목하여야 할 일들이 있다. 하나는, 1518년 2월 이후 역시 인재양성을 위하여 안동의 향교교육에 주력하던 52세 농암이 안동부 향교에서 18세의 퇴계 이황(1501~1570)을 만난 일이다. 두 분의 관계는 1555년 농암 서세까지 지속되며 주지되어 있듯 두 분 일생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다른 하나는 1519년 9월에 부청에서 양로연(養老宴)을 연 일이다. 양친과 부내의 80세 이상 노인 수백 명을 신분을 가리지 않고 초대하였는데, 농암은 이날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중국춘추 시대 말기 초나라의 노래자(老萊子) 고사가 회자되었으나, 실제로 춤춘 일은 있기 어려워 부사 농암의 그 모습에 사람들이 받은 인상과 여운이 컸을 것인데, 농암의 이 언행은 개인 차원의 희락이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 고을의 수령으로 관내 백성들에게 솔선수범하여 효행을 진작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날 충재 권벌(1478~1548)도 부친을 모시고 잔치에 참석하였으며, 농암의 시에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
우리 고을 사람들이 부사를 칭양하더니 / 人道吾鄕有二天
자기 부모 미루어 부사가 온 노인들을 위로하네 / 能推老老慰高年
국화에서 풍긴 향기 색동옷에 묻어나고 / 掇英香惹萊衣上
모자에 부는 바람 백발에 솔솔 불어오네 / 吹帽風輕鶴髮邊
기쁜 분위기는 화기를 따라 합해지고 / 喜氣剩隨和氣合
즐거운 소리는 축하 소리에 이어지네 / 歡聲從與賀聲連
영남의 고을에서 이런 일 본 적 없는데 / 南中此事看曾未
나의 부모도 참석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 何幸吾親亦赴筵
충재는 이 시에서 화기와 환성을 배경으로 양로연을 부각하며 영남에서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하였고, ‘내 부모 미루어 온 노인들을 위로 하네.’ 라고 하여 농암의 효친이 효친이면서도 경로는 그 확대이고, 효친과 경로는 농암에게 하나로 일관된다고 하였다.
이해 11월 15일에 조정에서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같은 달 11일에 반정공신들의 위훈(僞勳)을 삭제하는 결정이 있었는데, 불과 나흘 만에 급작한 반전이 야기된 것이다. 조정 밖에 있어 화망에 연루되지 않았지만 농암은 깊은 상처를 입었고 그 상흔이 내면에서 26년이나 이어지다 공식 발설한다.
이듬해 1521년 11월에 농암은 조정으로 불려갔으나 1522년 10월부터는 성주 목사로 재임하며 인정(仁政)을 시행하여 1524년 정월에 인사고과에서 최고로 뽑혀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농암은 내직으로 성균관 사성ㆍ시강원 보덕ㆍ동부승지ㆍ형조 참의ㆍ우부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 대구 부사ㆍ평해 군수ㆍ경주 부윤ㆍ경상도 관찰사 등을 두루 거치며 이전과 같이 인재양성과 풍속순화에 힘썼고, 이후 은퇴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으나 조정은 예우를 거듭하며 만류하여, 1542년 76세에 호조 참판을 지내고서야 은퇴를 허락받았다. 그 이후에도 조정은 농암에게 벼슬을 제수하고 예우를 거듭하였는데, 농암은 직책에 나아가지 않고 사퇴 상소를 올리며 봉록을 수령하지도 않았다.
농암의 사환과 관련하여 다음 글을 읽으며 이 기회에 국가 차원의 경륜을 알아보자. 다음은 1545년 6월에 즉위 초의 인종에게 올린 글이다.
《서경》에 “자식을 낳으면 모든 것이 처음에 달려 있으니 스스로 밝은 명을 받지 않은 경우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새로 만기(萬機)를 총괄하는 데 밝음을 명할지 길흉을 명할지의 운명이 바로 오늘에 달려 있으니, 힘쓰지 않겠습니까. ……선왕께서 인성(仁聖)한 자질로 난정(亂政)의 여파를 계승하여 밤낮으로 근심하고 노력하시어 40여 년의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태평무사하여 정치의 효과가 있다고 하지만, 미진한 점도 많았습니다. 이것으로 전하께 남겨 주었으니 전하께서는 정치가 충분하다 자부하지 말고 어렵고 크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선왕께서 이미 극진했거나 미진했던 정사에 대하여 오늘에 잘 계승하여 이루는 노력을 더 하십시오. … 정치의 요체는 인재를 얻는 데 있고, 인재를 얻는 근본은 또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 요체란 밝음과 믿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 임명할 때 밝게 판단하고 이미 임명한 뒤에는 믿고 맡겨서 정성으로 대우하고 전적으로 일임하시며, 귀천을 따지지 말고 발탁하여 조정에 늘어세워 그 포부를 펴게 한다면, 앞에서 말한 정치의 공효를 다하지 못했던 것이 공효를 다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선왕께서도 역시 이것이 중요하다고 여기셔서 현자를 좋아하고 선비를 좋아함이 옛날 성왕(聖王)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인재를 알기는 요순(堯舜)도 어렵게 여긴 것이어서, 혹 밝음과 믿음이 지극하지 못하여 어진 이와 간사한 이를 혼용하지 않을 수 없어서 임용을 잘 끝내지 못하여 결국 후회가 없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듣고 보신 것이니 경계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고인이 그 임금을 경계할 때 반드시 “의심하거든 맡기지 말고, 맡겼거든 의심하지 말라.”라고 하였고, 또 반드시 “임용을 어려워하고 신중하게 하며, 오직 조화롭고 전일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신 또한 전하의 처음 정사를 위해 이 말씀을 올립니다.
인종의 신정(新政)을 맞아 진달한 이 상소를, ‘정치의 요체는 인재 등용이며, 인재 등용은 임금의 밝은 통찰과 신뢰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선왕께서는 인재를 좋아하였으나 반정 등의 여건으로 청탁을 가리지 못하셨고, 또 현자를 끝까지 신뢰하지 못하여 결국 후회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신하를 임용할 때는 신중하게 하시고, 임용한 뒤에는 신하와 화합하고 신하를 신뢰하여야 합니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후자는 정암 조광조(1482~1519) 등을 등용하였으나 급기야 의심으로 불신하여 성세를 이루지 못한 중종의 인사 실패를 언급한 직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묘년 이래 묵은 회포를 과감하게 토로하는 한편 국왕은 국가의 중심이기에 마음을 밝게 닦기를 건의한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인종에게 올린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동년 7월에 인종이 승하하였다.
다음은 재위 9년의 명종에게 진달한 글(1554)이다.
초야의 노신이 조정에서 물러난 지 너무 오래고 귀도 심하게 먹어서 무릇 시정(時政)의 잘못과 곤직(衮職)의 결점이 어떤 일이라고 감히 지적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간언을 받아들이는 한 가지 일에서 물 흐르듯이 받아들이는 미덕이 부족하십니다. 전일에 선과(禪科)를 복설하고 사원(寺院)을 수리하는 일에 대해 대간과 시종에서부터 성균관의 유생까지 한 해가 다가도록 간쟁하였는데도 들어주지 않았고, 새로 수립한 과조(科條)도 너무나 넓고 번잡하여 그 또한 간하였는데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대개 이단(異端)은 우리 도와 서로 성쇠가 관련되니, 후세에 좋은 계책을 물려주기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맹자는 “선왕의 법을 따르면서 잘못된 경우는 있지 않았다.”라고 하였고, 한유(韓愈)도 “정령(政令)의 개정이 옛 정령보다 이로움이 열 배가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새로 세운 과조가 그 전보다 얼마나 이로운지 모르겠습니다. 또 모르겠습니다만, 받들어 행하면서 한 가지 한 가지마다 폐단이 없겠습니까? 대간의 직책을 옛사람은 나무가 먹줄을 따르고 물이 얼굴을 비추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지금 충언과 직언이 받아들이지 않아 실망하는 일이 많은데, 이는 전하께서 선(善)을 향하는 마음이 꾸준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이(程頤)가 “임금은 어진 사대부를 접견할 때가 많고, 환관이나 궁첩과 친할 때가 적으면, 기질을 함양하고 덕성을 도야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맹자 역시 “하루 볕 나고 열흘 추우면 싹이 텄다 한들 내가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고명(高明)하신 학문에 선왕의 빛남을 계승하는 공부를 더하여서 뜻을 확고하게 정하여 다른 논의에 흔들리지 않으면, 충언은 거슬리지 않고 사정(邪正)은 혼동되지 않고, 조정의 기강은 문란해지지 않아서 모든 정사가 닦이고 만사가 다스려져서 태평 정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살폈던 1554년 명종이 재위 9년에 농암에게 내린 교서에, 농암이 상경을 사양하면서 징소의 취지에 부응하여 올린 글이다. 폐정을 혁파하고 태평성대를 이루는 요체는 대간의 충직한 간언을 잘 수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두 가지를 그 사례로 들었다. 첫째, 선과 복설과 사원 수리를 중지하라는 대간의 직언을 불용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둘째, 재위 이후 각종 법령의 조목이 점점 번다해져 백성들의 삶을 구속하고 과도한 처벌이 빈번해지고 있어 이 또한 시정하여야 할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셋째, 치세를 이루려면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 하여 기질을 함양하고 덕성을 도야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명종의 측근에 충의의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지적은 특정 시대가 아니라 어느 시대에도 가능한 제언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모두 당대에서 해결되어야 할 주요 문제들에 관련되어 있으며, 지적과 인용에 함축된 뜻을 살펴보면 매우 정직하고 과감한 직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지적에는 보우와 모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정사 간여와 그 용인은 국초 이래 국시를 훼손하는 사태이며, 후대에 이념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는 비판이 함축되어 있다. 둘째 지적에는 번다해진 법령을 정비하지 않는다면 왕정과 통치의 명분을 상실하고 국가가 마침내 어지러워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내포되어 있고, 셋째 지적에는 명종의 주변을 외척과 외척에 아부하는 무리들이 에워싸고 있어 큰 폐단이라고 비판이 함축되어 있다. 정이의 “임금은 어진 사대부를 접견할 때가 많고, 환관이나 궁첩과 친할 때가 적으면, 기질을 함양하고 덕성을 도야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사례이자 처방으로 인용하였는데, ‘어진 사대부’와 대조되고 있는 ‘환관이나 궁첩’은 말뜻 그대로면서도 ‘외척 윤원형과 윤원형을 붙좇는 불온한 무리’의 환유라고 보아도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언표 너머에, 명종의 처지까지 배려하는 농암의 의도와 충심을 명종이 몰랐다고 하기 어렵다. 당대의 환부를 외면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위난을 무릅쓰고 전개한 진언이라고 할 것이다. 이 글의 이러한 의의를 가리켜 당대에 이미 ‘노성한 체제’라는 논평이 회자되기도 하였다.
당시는 을사사화 이후 여일중천(如日中天)이던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당의 발호(跋扈) 앞에 거의 모든 대소 신료가 침묵을 지키는 상황이었다. 농암의 상경 사양 역시 현명하였다. 출사해 보아야 동탄부득(動彈不得)의 처지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게다가 농암이 조정으로 돌아오는 일은 윤원형 일파의 바람도 아니었고, 출처(出處)의 대도를 아는 농암이 응하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농암이 국가의 원로로서 국정에 관련된 국왕의 자문에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성실하게 부응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 간단하게 살폈지만 농암의 생애를 반추하면서 우리는 농암의 효행(孝行)과 그 영향을 다시 점검해보지 않을 수 없다. 효(孝)가 천경지의(天經地義), 즉 인간사회의 영원히 변치 않는 도리라는 정의가 과연 맞는 것일까? 인간도 동물이니 자식이 어버이를 돌보야 하는 도리는 원래 없는 것인데 인간이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강조한다는 견해도 있다. 늙을 노(老) 자 아래 자식 자(子) 자를 받친 ‘효’자의 원래 형태가 기원전 11세기 이전 상대(商代)의 갑골문(甲骨文)에 이미 보인다. 자식이 늙은 부모를 부축하거나 업은 모양의 상형이다. 이를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표상이라고 조장하고 천양한 것은 공자를 비롯한 유가(儒家)였다. 공자에게 효를 배운 유약(有若)이 “효제야자(孝弟也者), 기위인지본여(其爲仁之本與)”, 즉, “효와 제는 인을 행하는 근본이다.”라고도 하였는데, 제자백가 그 어느 학파에서도 효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거나 준행을 강조하지 않았다. ‘효’는 유가 사상의 총집(叢集)인 사서오경(四書五經)에 무수히 등장한다. 《효경》은 정확히 말해 《순자(荀子)》가 지어진 이후, 《여씨춘추(呂氏春秋)》가 지어지기 이전의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특히 한나라 때부터 거국적으로 효를 강조하였고 뒤이어 역대의 모든 정부에서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효가 충(忠)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충효(忠孝)’는 떼어 놓을 수 없는 한 단어가 되었다. 유학이 관학(官學)이 되면서 효는 전통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규범이 되었고, 동시에 인(仁)의 근본이 되었다.
농암은 조선 시대 효도의 상징적 존재였다. 농암의 시호(諡號)가 효절(孝節)주-D0006이기도 하다. 앞에서 살폈듯이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 전출을 자원하였고, 또 같은 이유로 사직을 청원하기도 하였으며 휴가마다 돌아와 부모를 모셨다. 어머니 안동 권씨가 농암이 65세 때 별세하였지만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으며 아버지 이흠(李欽) 공이 농암이 71세까지 98세를 사는 동안 역시 지극 정성으로 모셔서 당대에 효행 명성이 자자하였다. 46세이던 1512년에 부모를 모시기 위한 별당을 지어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짓고 “좋은 계절과 명절에는 반드시 이 정자에서 술잔을 올리고 색동옷 입고 즐겁게 해 드렸다.”주-D0007 ‘애일(愛日)’은 《여씨춘추》의 “경시애일(敬時愛日), 지노불휴(至老不休)〔백성들이 때를 공경하고 날을 아끼기를 늙어도 그치지 않는다.〕”라는 구절에 처음 보인다. ‘애일(愛日)’에 ‘부모께 효도를 할 날’이란 의미를 부가한 사례는 양웅(揚雄)이 《법언(法言)》 〈지효(至孝)〉에서 언급한 “효자애일(孝子愛日)〔효자는 날이 흘러가는 것을 애석히 여긴다.〕”이고, 주자가 《논어집주》의 〈이인(里仁)〉의 “부모지년(父母之年), 불가부지야(不可不知也). 일즉이희(一則以喜), 일즉이구(一則以懼)〔부모의 나이를 몰라서는 안 된다. 한편으로는 더 사셔 기쁘고, 한편으로는 돌아가실 날이 다가와 두렵기 때문이다.〕”에 “애일지성(愛日之誠)〔날을 아끼는 정성〕”이라고 설명하면서 널리 유행하였다. 전국 여러 곳에 애일당이 있지만 농암의 애일당보다 사연이 많고 규모가 크며 널리 알려진 애일당은 없을 것이다.
이어서 우리는 농암과 퇴계 이황(1501~1570)의 교분도 한번 다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여러 시문에서 농암이 교류한 당대의 유명 인물들을 알 수 있는데, 퇴계와의 교류와 사연이 가장 길고 깊다. 다시 말해 농암은 52세였던 1517년에 18세였던 퇴계와 만나, 1555년에 89세로 서거할 때까지 55세의 퇴계와 38년 동안 인연을 이어갔다. 퇴계는 부집(父執)인 농암을 아버지처럼 모셨고, 농암은 퇴계를 자질(子姪)과 다름없이 아꼈을 것이다. “농암 없는 퇴계 없고, 퇴계 없는 농암 없다.”라는 안동 향현(鄕賢)들의 전승 전언(傳言)이 있기도 하다. 농암은 퇴계의 아버지 이식(李埴, 1463~1502), 숙부 이우(李堣, 1469~1517)와 향우(鄕友)였다. 농암은 이식보다 4살 아래이고 이우보다 2살 위다. 대개 《예기》의 “오년이장(五年以長), 즉견수지(則肩隨之)”에 따라 6~8살 차이는 허교(許交)가 상례였기에 농암은 이식ㆍ이우 형제와 터놓고 지냈을 것이다. 농암이 살던 분천리(汾川里)와 이씨 형제가 살던 온계리(溫溪里)의 거리는 지호지간(指呼之間)이었다. 게다가 진성 이씨와 영천 이씨는 예안 고을 입향 시기 뿐 아니라 문제(門第)와 지망(地望)이 엇비슷한 데다 연인(連姻) 관계로 얽혀있기도 하다. 게다가 송재(松齋) 이우와 농암은 1498년의 과거에 동방 급제한 동년(同年)이기도 하다. 퇴계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송재의 훈도를 받았다.
농암, 퇴계 관계를 좀 더 살펴보면, 농암 증조부 이파(李坡)에게 퇴계 조부 노송정 이계양(李繼陽)은 외손서이다. 농암은 증손자이고 퇴계는 외현손이니, 7촌 척질(戚姪)이 된다.주-D0008 퇴계는 ‘족질(族姪)’이라 한 바 있다. 1549년 2월 한식일, 이파의 묘소 분황고유(焚黃告由)에 풍기 군수이던 퇴계는 제수를 준비하고 참석하여 묘갈문을 짓고 표석 글씨를 쓴바 있다.
송재가 여러 환력(宦歷)을 거쳐 마지막 임직(任職)인 안동 부사였을 때 17세의 퇴계는 안동부 관사에 머물며 향교(鄕校)에서 송재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이때가 바로 1517년인데, 송재는 그해 11월에 재직 중에 별세하였고, 충주 목사이던 농암이 송재의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퇴계는 안동에 그대로 머물며 농암의 지도를 받았다. 퇴계는 뒷날 농암이 돌아가자 농암을 기리는 만사(挽詞)에서 이 시기를 회고하며, “문하에서 학업을 질정하기를 저 안동부의 향교에서 시작하였네.〔登門質業, 自彼府黌.〕”라고 하였다. 고을 수령이 향교의 고비(皐比)에 앉는 것은 당시의 상례였다. 이때부터 농암은 퇴계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었다. 우리는 일단 두 분을 문생(門生)과 고리(故吏) 사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주-D0009
1534년에 68세로 경주 부윤이던 농암이 과거에 응시하러 서울에 가있던 34세 퇴계에게 합격을 바라는 기대를 담은 시 한수를 보낸다.
하늘 그물 넓고 넓어 많은 선비 부르니 / 天網恢恢多士徵
농서 재자 이백처럼 이름을 드날리리 / 隴西才子姓名騰
그해 가을날 용문교에서 그대 실력 알았으니 / 龍門橋會秋曾驗
묻노니 지금 몇 층이나 올랐는고 / 爲問如今躡幾層
셋째 구에서 알 수 있듯, 농암은 1534년 이전에도 용문교주-D0010에서 퇴계와 만나 창수하며 대화하였다. 시에서 퇴계의 포부를 알았으며 학식의 진경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농암은 둘째 구에서 그날을 회고하며 퇴계가 과거에 급제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확신의 장담이면서 한편으론 퇴계를 격려하는 취지가 있다고 하겠다. 퇴계는 그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후 두 분의 많은 교환 사행을 농암의 〈연보〉에서 잘 알 수 있다. 이중 몇 국면만 살펴본다.
1542년, 농암은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한강 제천정(濟川亭)에 마련된 전별연은 조선조에서 보기 드문 정계은퇴식이었다. 중종은 금서대(金犀帶)와 금포(錦袍)를 하사하고, 편안한 귀향이 되도록 호행관리가 인도하라 명령하였다. 이날 전별연은 궁궐에서 한강까지 동료, 벗들의 전별행차가 이어졌고, 이를 본 도성사람들이 담장처럼 둘러서서 “이런 일은 고금에 없는 성사”라고 했다 한다. 많은 관료들이 전별시를 지었는데, 승문원에 근무 중이던 퇴계는 농암이 서울을 떠나기 직전의 3일간의 일정을 함께하며 〈이참판선생가귀(李參判先生假歸)〉, 〈봉전이선생(奉餞李先生)〉 등을 지었다.주-D0011 농암은 돌아오는 한강 뱃머리에서 시조 한수를 읊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받았다고 하여 〈효빈가(效顰歌)〉라 하였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 뿐이오 간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쩔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1543년 1월에 77세 농암은 영지산(靈芝山) 기슭에 정사(精舍)를 지었는데 이곳은 젊은 날의 퇴계가 본제(本第)에서 나와 처음 집을 지은 곳이었다. 농암이 43세 퇴계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대가 예전에 이 산 기슭에 터를 잡고 본디 주인이라 하였는데, 지금 내가 먼저 살고 있으니 이야말로 손님이 도리어 주인이 된 것이 아닌가. 조만간 내려와서 송사하여 판결하세나”라고 하였다. 퇴계는 “‘영지산인(靈芝山人)’이라 한 것은 제가 애초에 집이 이 산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의탁하여 병 많은 몸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뜻을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상공께서 정사를 지은 뒤로 온 산의 연하와 화초, 물 한 줄기와 돌 하나도 모두 상공의 완상거리가 되었으니, 산신령이 참으로 아름다운 경관을 다 바쳐 즐겁게 해주기에 바쁠 것입니다. 제가 비록 헛된 명예나 차지해 스스로 속세에 드러내고자 하였으나, 망녕되이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것만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손님과 주인의 형세는 마땅히 참과 거짓으로 말미암아 나누어지니, 저의 주장이 사리에 맞지 않음을 어찌 훗날 송사하여 따진 뒤라야 알겠습니까. 산신령의 처분이 응당 이미 정해졌을 것이니, 이제부터 네 글자 칭호 〔영지산인(靈芝山人)〕는 삼가 상공께 돌려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해학과 인정, 친애와 존경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환(交驩)이다. 이해 동지 이튿날 퇴계가 농암의 영지산 정사에 와서 놀았다.
퇴계는 1545년에 을사사화를 겪고는 병약을 구실로 사직하고 1546년에 고향 토계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 탐구를 본격화하였다. 토계(兎溪)를 퇴계(退溪)라고 고치고 자신의 호로 삼아 지향을 분명히 하였으며, 1550년에는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그 지향에 매진하였고, 이 시기에 문생들이 모여 들었는데, 이런 사정에 관련된다고 하겠다. 농암은 같은 해 3월 기망에 전해 12월에 또 사직하고 귀향한 퇴계를 농암의 은행나무 아래로 초치하여 환영하는 취지로 술을 마셨고, 또 같은 달에 한서암을 방문한 바도 있다. 이때 퇴계는 시를 지어 “황공하옵게도 산 남쪽에 사시는 노선백께서, 가마타고 온갖 꽃 사이로 오셨네.〔頓荷山南老仙伯, 肩輿穿得萬花來.〕”라고 하였다. 농암은 퇴계가 사표(師表)가 될 인품과 능력을 갖추었음을 일찌감치 인정하고 장차 학문과 교육에서 크게 성취할 것을 확신하였다. 1550년 84세 때, 지명(知命)의 퇴계에게 증여한 시에서는 ‘선생’이란 두 글자를 허여하였다.
가는 구름 비 만들어 하늘이 좋아하는 / 行雲作雨天敎好
선생께서 집을 옮기려 하니 너무나 우습네 / 笑殺先生欲徙家
당시에 ‘선생’ 두 글자는 천균(千鈞)의 무게를 가진 예칭이어서 뒷날 회재 이언적과 퇴계가 ‘선생’으로 불리기 이전에는 이색ㆍ서거정ㆍ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 등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쓰인 용어였다. 농암의 이 호칭은 퇴계에게 최초로 선생이라고 한 사례일 것이다.
1555년 농암 89세. 3월, 55세 퇴계가 서울에서 돌아오는 길에 용수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절구 두 수를 지어 보냈다. 퇴계가 임강사의 반도단으로 농암을 찾아뵈었다. 이날 퇴계와 만대정(晩對亭)에서 꽃을 감상하였다. 또 퇴계와 반도단을 유람하였다. 퇴계는 〈숭정대부 행 지중추부사 농암 이선생 행장(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聾巖李先生行狀)〉에서 이때의 일을 반추하며 “올해 봄에 내가 서울에서 돌아와 임강사의 반도단에서 공을 두 번 뵈었는데, 매우 기쁘게 맞아주었다. 이제부터 길이 문하에서 제자의 도리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퇴계는 스스로를 ‘제자’라 자처하였다. 4월에 농암은 장편 율시를 지어 퇴계의 모당(茅堂)으로 보냈다. 6월에 농암의 병환이 점점 위독해졌다. 이때 퇴계가 와서 문병하고 곁에 있었다. 농암은 13일 긍구당(肯構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퇴계가 아들 첨정공 이준(李寯)에게 보낸 편지에 “지사 선생(知事先生)이 결국 돌아가셨으니, 나라의 불행이요 우리들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1556년, 7월에 퇴계가 지은 〈행장〉이 완성되었다. 퇴계의 명언 가운데 하나로, “소원하는 바는 선인이 많은 것, 선인은 천지의 벼리이기 때문〔所願善人多, 是乃天地紀.〕”주-D0012이라는 시구가 있다. 퇴계는 농암이야말로 천지의 벼리인 선인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구에 대한 주석이라고 말해도 좋을, 퇴계가 〈행장〉에서 서술한 농암의 덕행은 다음과 같다.
고을에 다급하게 구휼할 때는 여유가 있고 없음을 따지지 않아, 간혹 자신은 남에게 꾸어서 먹은 적도 있었다. 임금의 하사품은 이웃과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혹은 술과 안주를 차려서 노인들을 불러 모아 크게 잔치를 열고 즐겼다. 남을 위하는 데는 부지런했으나 자기를 위하는 일은 못하였으며, 몸가짐을 곧게 하고 넘치는 것을 경계하여, 한 가지 경사가 있으면 근심이 낯빛에 드러나고 한 번 벼슬이 오르면 즐거워하기보다 조심하고 두려워하였다. 담박하고 욕심이 적어서, 입고 쓰는 모든 물품이 간소하고 화려하지 않아서 서생(書生)이나 다름없었다. 평소 생활에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였으며, 정침(正寢)에 나가 하루 종일 거처하였는데, 주렴과 책상이 깨끗하였으니, 비록 춥고 더울 때라도 항상 그러하였다. 자제와 비복에 대해 편애하지 않았고, 문벌 있는 집과 혼사 맺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성품이 고상하고 깐깐하였지만 사람을 상대할 때는 어리석고 빈천함을 가리지 않았고 겉과 속이 한결같아, 혹 술상을 차리고 초청하면 구태여 거절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살 때에는 사정(私情)으로 해서 공사(公事)에 지장을 준 적이 없었다. 본현은 호구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종전의 부역법이 한집에서 한 사람씩 내게 되어 있었으므로 식구가 적은 집이 폐해를 입었다. 공이 발의(發議)하여 전답 8결(結)에 1명씩을 내도록 하니, 이때부터 부역이 균일하여 나라와 개인이 모두 도움을 받았다. 일을 요량할 때는 명철하게 살펴 곡진하고 세심하게 하여, 만약 의심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허심탄회하게 자문하여서 행하였고, 이미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가리거나 숨기지 않고 반드시 사람들에게 말하고 고쳤으니, 이것이 더욱 남들이 미치지 못할 점이었다.
퇴계가 기술한 농암의 면모들은 퇴계의 선인론에 하나하나 부합한다고 할 수 있으며, 특히 “남을 위하는 데는 부지런했으나 자기를 위하는 일은 못하였으며, 몸가짐을 곧게 하고 넘치는 것을 경계하여, 한 가지 경사가 있으면 근심이 낯빛에 드러나고”라는 기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종전의 부역법이 한집에서 한 사람씩 내게 되어 있었으므로 식구가 적은 집이 폐해를 입었다. 공이 발의(發議)하여 전답 8결(結)에 1명씩을 내도록 하니, 이때부터 부역이 균일하여 나라와 개인이 모두 도움을 받았다.’라는 기술을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농암의 이 선행은 공정을 기초로 한 덕행이다. 자신의 계층 이해를 떠나 아니 손해가 있더라도 공도(公道)를 지향하는 근본이 표출된 사례라고 할 것이다.주-D0013
이러한 두 분의 관계에서 농암과 퇴계를 사제로 규정해야 하는지 아닌지는 후세에 논란이 있었다. 논란이 있을 수 있고 또 양측의 견해가 일리 있다고 할 수 있다. 농암이 퇴계의 학문의 길에 영향을 끼친 메시지가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앞에서 살핀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안동향교에서 농암은 퇴계에게 사서오경 관련 강설을 하였고, 퇴계의 은일과 면학의 여정에 유례없는 지지와 격려를 하기도 하였으니, 이런 관점에서 두 사람을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퇴계가 침잠하여 마침내 성취한 학문의 본령은 성리학(性理學)이고 농암이 퇴계에게 ‘성리학’을 계도(啓導)하였다는 구체 증좌는 없기에 이런 관점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고 하기 어렵다. 바탕은 유가(儒家)이면서 강호의 풍류를 향유하며 도가(道家)의 분위기가 있던 농암을 퇴계가 ‘노선백(老仙伯)’, ‘지선(地仙)’이라고 존칭하였던 1550년 사례 등을 참조하면 퇴계는 농암을 유도절충론자(儒道折衷論者)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퇴계에 있어서의 농암은 무엇보다도 귀중하며 둘도 없는 ‘인생의 스승’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두 분의 소통을 형영불리(形影不離)였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퇴계가 농암에서 느낀 ‘인생의 스승’임이 가장 절실했던 상황은 1547년에 있었던 봉성군(鳳城君) 사건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퇴계집》 〈연보〉 47세 조에 “농암 이 선생께 올리는 시가 있다.〔有上聾巖李先生詩〕”라 하고 다음의 시를 수록 하였다.
높은 대에 오르샤 새 곡조 부르시며 깊어가는 가을 즐기시리 / 高臺新曲賞深秋
국화 꺾어 손에 드시고 해오라비 바라 보시리 / 手折黃花對白鷗
오늘도 높은 덕 존앙하여 맑은 꿈을 꾸나니 / 仰德至今淸夜夢
달 밝은 때 다시 강물 속 섬으로 갑니다 / 月明時復到中洲
〈연보〉는 이 시가 지어진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달에 규암 송인수, 준암 이약빙이 사사(賜死)되었다. 또 회재 이 선생 등 20여 명의 현인들이 모두 조정에서 쫓겨나 귀양 갔다. 선생은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용퇴할 수 없었다. 이에 국화와 해오라비 사이에서 선유(船遊)를 하며 휴한(休閑)히 지내는 농암 선생의 풍절(風節)을 돌이켜 생각해 보며 더욱더 그리워하고 우러르며 탄식하였다. 농암 선생과 함께할 수 없었으므로 시의 뜻이 이와 같았다.〔是月, 宋圭菴麟壽, 李罇嵓若冰賜死. 又晦齋李先生, 凡諸賢二十餘人, 皆竄逐. 先生方於危疑之際, 亦勇退不得. 于以回想聾嵓先生之休閑風節於黃花白鷗之間, 更足以願慕歎仰, 而恨不同之故, 詩意有如此.〕”
퇴계는 고향에서 양병(養病)하다가 불려와 당시 홍문관 응교 직에 있었는데 그 와중에 봉성군(鳳城君) 문제도 야기되었다. 이기(李芑)ㆍ윤원형(尹元衡) 등은 중종의 다섯째 아들인 나이 겨우 20살 봉성군도 연루시켜 사사하였다. 삼사(三司)에서 그의 처형을 논의할 때 퇴계는 직책상 어쩔 수 없이 참석하였으나 홀로 가담은 하지 않았는데, 뒷날 정인홍이 〈정맥고풍변(正脈高風辨)〉에서 퇴계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 일은 퇴계의 사환(仕宦) 생애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이때 퇴계의 절친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도 죽음을 당했다. 이 괴로운 상황에서 퇴계는 농암의 ‘휴한풍절’을 우러르며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시 뿐 아니라 농암 〈연보〉에서 퇴계 관계 기사를 점검하며 유례가 드물게 아끼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공경하는 두 마음의 교직(交織)을 읽을 수 있다. 농암의 퇴계 사랑과 기대가 표현된 절창(絶唱)은 말년에 서울에서 사환 중에 있는 퇴계에게 보낸 〈여퇴계서(與退溪書)〉의 다음 한 구절일 것이다.
자네가 언제 남쪽으로 돌아올지 기약하기 어렵고 나는 늙어 숨소리가 날로 가늘어지니 더욱 그리움만 더하네. 다만 더욱 평소 절개를 가다듬어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를 바랄 뿐이네.〔南還久近難期, 老我氣息, 日益奄奄, 尤增戀念. 只冀益礪素節, 以副民望〕
이 책에 수록된 시에서 알 수 있듯 농암은 걸출한 시인이기도 하였다. 농암시의 면모를 한마디로 개괄하여 ‘평이명백(平易明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애써 조탁하지도 어려운 전고를 동원하지도 않으면서 복잡다단한 심사를 실타래 풀 듯 풀어낸다. 농암의 시편 가운데 〈분어행(盆魚行)〉이 절창이자 백미(白眉)가 아닐까. 잔잔히 흐르는 강물처럼 서경과 서사를 교직하며 질그릇에 갇힌 물고기들에 자신의 당시 처지를 투영시키며 그 성찰을 읊었는데, 당나라 백거이의 시와 그 격조를 다투어도 좋을 것이다.
한여름 낮은 길기만 하고 / 仲夏晷刻長
태양은 또 한창 이글거리네 / 恒陽又方熾
나의 집 남산 앞에 있으니 / 我屋南山前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네 / 褫職閒無事
문 두드려 찾는 이 없으니 / 門絶剝啄驚
우두커니 앉았다가 낮잠에 빠지네 / 塊坐困晝睡
아이들이 적막함이 답답하여 / 童稚悶寂寥
그물로 작은 물고기 잡아왔는데 / 罩取魚兒至
어린 물고기 네댓 마리가 / 纖鱗四五箇
입만 오물오물 초췌하여 가련하네 / 喁噞憐憔悴
질그릇 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 / 斗水儲瓦盆
풀어놓고 장난거리로 삼았네 / 放之而爲戲
처음 놓아주자 비실거리더니 / 始舍圉圉然
술에서 깨듯이 점점 살아나더니 / 漸蘇如起醉
이윽고 떼를 지어 다니며 / 俄然作隊行
머리 맞대고 먹이를 먹는 시늉을 하고 / 交頭疑湊餌
활기차게 뛰어오르기도 하고 / 撥剌或欲飛
어항 속에서 마음껏 헤엄치네 / 盆中游自恣
하지만 제 살 곳이 아니기에 / 然非得其所
네 삶이 도리어 피폐하겠지 / 爾生還可瘁
지금 한창 큰 가뭄 나머지 / 方此大旱餘
내와 못이 모두 다 말랐고 / 川澤皆枯匱
동이의 물도 아침저녁으로 마르니 / 盆水朝夕渴
썩어 문드러짐을 어찌 피하랴 / 糜爛安可避
서로 돌봐주어 은혜로 여기지만 / 呴沫以爲恩
마침내 버려짐을 생각하지 못하네 / 不思終委棄
작은 물고기 도리어 나를 비웃으며 / 魚兒反笑余
속으로 뜻을 말하기를 / 對臆陳其志
내가 세상 사람을 살펴보니 / 吾觀世上人
벼슬살이의 명리에 빠져서 / 宦海沈名利
줄을 따라 떼를 지어 다니며 / 隨行而逐隊
은택 입기를 바라고 있지 / 添丐恩光被
고관에 청운의 꿈 두고서 / 靑雲鳳池裏
의기양양 그 뜻을 얻었지만 / 揚揚方得意
하루저녁에 풍파가 일어나면 / 風波一夕起
장차 제 몸 둘 곳이 없다네 / 將身無處置
구차하게 살아가는 목숨이야 / 姑息活軀命
사람과 만물이 다름이 없네 / 人與物無異
내가 그 말을 들으니 / 而余聞其言
감탄하고 도리어 두려움이 일었네 / 感歎心還悸
저 어리석고 무지한 미물이 / 冥頑無知物
하는 말이 어찌나 지혜로운지 / 所言何有智
내 고향은 영남 땅인데 / 余居嶺之南
서울의 나그네가 되었네 / 京師爲旅寄
원래 가난 때문에 벼슬하지 않았고 / 旣非爲祿仕
또한 많은 식구 딸린 것도 없는데 / 亦無百口累
그럭저럭 몇 년을 보내다 보니 / 遷延將數年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갔네 / 光陰同隙駟
비록 은혜 갚지 못해서라지만 / 雖言恩未報
이것도 벼슬자리 탐한 것이네 / 亦是貪爵位
백발로 홍진세상을 치달리니 / 白髮走紅塵
어찌 비웃음을 받지 않으랴 / 寧不被譏刺
근래에 심부름꾼에게 들으니 / 頃聞來使言
고향 집 준비가 다 되었다 하니 / 菟裘營已旣
지난 일이야 미칠 수 없지만 / 往追已不及
이제 내 뜻대로 하길 기약하리 / 來者猶可企
이제 곧 수판을 걸어두고 / 行將掛手板
빨리 남쪽 수레고삐 잡으리 / 亟把南轅轡
어린 고기여 어린 고기여 / 魚兒復魚兒
이 말을 마땅히 기록해 두었다가 / 此言當籍記
아득한 만 리 강호로 돌아가면 / 江湖浩萬里
길이 서로 잊기로 하자구나 / 永作相忘地
1539년 10월에 다시 조정으로 불려가 형조 참판에 임명되고 이듬해 1540년 5월 74세 때 쓴 작품이다. 시내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다 잡혀 어항에 갇혀 이윽고 폐사할 운명에 직면할 어린 물고기를 화자가 염려하지만, 그 물고기는 화자에게 오히려 ‘구차하게 살아가는 목숨이야, 사람과 만물이 다름이 없네’라고 화자를 염려한다. 상호 연민의 정서로 유대하는 가운데 화자는 계속되는 자신의 사환이 ‘비록 임금의 은혜 갚지 못해서라지만, 이것도 벼슬자리 탐한 것이네’라며 자신을 자책하며, 고향으로, 즉 강호(江湖)로 돌아가기를 서약한다. 상련의 정서를 공유하였던 물고기에게 너도 강호로 돌아가 서로 다시는 근심을 일으키지 말자는 제언을 하며 끝나는 이 시는 분수와 사환을 대상으로 현재의 기미와 향방을 원숙하게 통찰한 걸작이다. 어린 물고기와 노년의 화자, 그들의 강호회귀의 염원이 진솔하고도 재미있게 형상화되어 있는 명편이다. 참고로, 이 시에서도 홀(笏)이 보여 주목된다. ‘이제 내 뜻대로 하길 기약하리, 이제 곧 수판(手板)을 걸어두고 빨리 남쪽 수레고삐 잡으리’에서 ‘수판’은 홀의 일종이다. 조정의 만류로 농암의 은퇴는 2년 후인 1542년에 가능하였으나, 1540년에 농암은 드디어 봉공(奉公)의 홀을 내리고 무애(無碍)의 자연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시는 이후 이어지는 농암의 본격 강호(江湖) 소요(逍遙) 시편들의 서시(序詩)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취시가(醉時歌)〉는 농암 시의 또 하나의 대표작이다. 1544년 농암 78세 4월, 예안 현령 임조원(任調元), 성균관 학정(學正) 황준량(黃俊良) 등과 함께 분강(汾江)에서 뱃놀이를 하고 지은 작품이다. 뱃놀이의 흥취가 임리진치(淋漓盡致)하게 그려져 있어 강호의 낙취(樂趣)에 그대로 동화되게 하는 흡인력으로 가득하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사위와 장인 붙잡고 함께 춤을 추고〔或壻扶翁相對舞〕, 노비들도 잔을 들어 함께 마시네.〔或婢擧觴同酬酢〕”이다. 이야말로 구구한 예속에 구애되지 않은 여중락(與衆樂) 한마당이 아닌가? 불구소절(不拘小節)하는 농암의 호탕한 인품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또한 우리는 농암의 국어 가사문학(歌詞文學)을 한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의 한 굽이인 분강(汾江)에서의 선유(船遊)는 농암 삶의 한 낙취(樂趣)였다. 이 선유에서 우리말 노래를 동반하여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망아(忘我)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사용한 노래 〈어부가(漁父歌)〉ㆍ〈어부장가(漁父長歌)〉 9장(章)과 〈어부단가(漁父短歌)〉 5장도 이 책자에 실려 있다. 이 노래는 언제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고 강호에서 불려왔는데, 농암이 83세이던 1549년에 정리하며 재구하였다. 그런데 〈어부가〉를 읽어보면 농암과 같은 이력을 거친 인물이 아니라면 토로하기 어려운 회포가 있어 농암의 겸사가 있지만주-D0014 상당 수준 개작이 분명하며 농암의 뜻이 주제로 반영되었다고 할 것이다. 농암의 〈어부가〉 등은 16세기 중반 국문학사의 고봉이며 후대 강호문학에도 영향을 끼친다.주-D0015 농암은 시조(時調)에도 관심이 있어 〈효빈가〉(1542)ㆍ〈농암가〉(1542)ㆍ〈생일가〉(1551) 3편을 남겼다. 〈어부가〉의 일부 국면을 살펴보려 한다.
푸른 향초 잎사귀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 靑菰葉上애涼風起
붉은 여뀌꽃 가에 흰 해오라기가 한가롭구나 / 紅蓼花邊白鷺閒이라
닻 들어라 닻을 들어라 / 닫드러라닫드러라
……
종일토록 배를 띄워 안개 속으로 들어가니 / 盡日泛舟煙裏去
때때로 노를 저어 달빛 아래 돌아온다 / 有時搖棹月中還이라
저어라 저어라 / 이어라이어라
내 마음 가는 곳 따라 기심을 잊었노라 / 我心隨處自忘機라
찌그덩 찌그덩 엇샤 / 至匊悤至匊悤於思臥
돛대 두드리며 물결 타고 정처 없이 흘러가노라 / 鼓枻乘流無定期라
세상만사에 마음 없이 낚싯대에 뜻을 두니 / 萬事無心一釣竿
삼공 벼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어라 / 三公不換此江山라
돛 내려라 돛을 내려라 / 돗디여라돗디여라
산비와 계곡의 바람이 낚싯줄을 거두는구나 / 山雨溪風捲釣絲라
찌그덩 찌그덩 엇샤 / 至匊悤至匊悤於思臥
일생의 종적이 푸른 물결에 있어라 / 一生蹤迹在滄浪라
‘삼공 벼슬’과도 바꿀 수 없는, ‘푸른 향초 잎사귀’ ‘붉은 여뀌꽃’ ‘흰 해오라기’와 어우러진 분강에 배를 띄우고, ‘안개 속’을 선유하기도 하고, ‘달빛 아래’ 돌아오기도 하며, ‘내 마음 가는 곳 따라 기심(機心)을 잊었노라’고 자연의 일부가 된 자신을 토로하고, ‘돛대 두드리며 물결 타고 정처 없이 흘러가노라’고 하였다. 자연에 회귀하여 세속의 명리와 이해를 초월한 심경을 강호 선유에 의탁하여 노래한 이 가사와 농암의 모습에, 농암이 충의로 어렵게 거친 16세기 전반 위구(危懼)의 시대가 배경으로 중첩된다. 그래서 우리는, ‘찌그덩 찌그덩 엇샤, 일생의 종적이 푸른 물결에 있어라’란 농암의 자전성(自傳性)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솟구치고 스러지며 솟구쳐 도도히 흘러가는 저 ‘푸른 물결’이 자신의 일생이 남긴 자취라는 농암의 관조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3. 결어
우리는 농암의 삶에서도 왕조 정치권력의 속성과 한계, 선비들의 이상과 현실이란 오래 반복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농암은 위구의 시대에 출사하여 먼저 자신을 기율할 기강을 확립하였고, 관직을 마칠 때까지 상황에 따라 성실하게 견지하였다. 무오사화가 야기된 1498년은 과거에 급제한 해라서 사화에 연루되지는 않았지만 목도하였고, 1504년 갑자사화 때는 사화에 간접 연루되어 운명을 예측할 수 없었으며, 1519년 기묘사화 때는 조정을 떠나 안동 부사에 재임하던 중이었고, 1545년 을사사화 때는 강호에서 귀거하던 중이었다. 시대의 풍파를 농암은 직접 혹은 간접 체험하며, 관직에서 정명(正名)을 지향하고 실천하였으며, 유학자이면서도 유학에 그치지 않고 도가 이해와 실천에서도 상당한 공력을 쌓았다고 하겠다.
농암은 한 양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다양한 면모를 가진 인물이다. 후대에 농암을 여러 인물로 비유하였는데 백거이에 가장 많이 비의(比擬)되었다. 백거이는 초년에 강고한 현실개혁 의지를 견지하여 풍유시(諷諭詩)에 공을 들이다가 중년에 좌절을 겪고는 한적시(閑寂詩)에 침잠하여 중은(中隱)이란 독특한 철학으로 명철보신(明哲保身)하였을 뿐 아니라, 유불도(儒佛道)를 통섭하는 삶을 살았다. 사환 초기에 폭군 연산군의 광기와 반정 공신의 소위에서 권력의 한 본질을 통절하게 촌탁한 후 능각(稜角)을 깎아내고 원융(圓融)을 위주로 하며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간 농암의 면모가 백거이의 삶과 유사하였기에 겹쳐 본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농암의 강호 취향도 또한 세속의 폄훼와 권력의 비리에 거리를 두고자하는 의지에 단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508년 42세 때 세 번 상소하여 외직 영천 군수로 전출하던 해에, ‘은둔하여 세상의 평가를 듣지 않으려는 사람’에 관련시켜 자호 ‘농암(聾巖)’을 작호하였던 것이다.주-D0016 이러한 면모에서 우리는 농암이 목민에서 비범하게 성취할 수 있는 자질을 미리 읽을 수 있으며, 농암의 그 선택에서 현실과의 갈등에 준용한 중용 추구도 감지할 수 있다.
농암의 효 사행과 관련 시에서 우리는 효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농암은 분강의 바위 농암 위에 애일당을 지었는데, 농암이 부모를 업거나 어깨에 모신 형상이다. 효는 충과 접속되는 왕조의 이데올로기 만 이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효를 충과 분리할 수 있다. 오늘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지난날에도 효자가 충신이 되기 쉬우나 효와 충이 길항하면 굳이 자위부은(子爲父隱)과 관계없이도 효를 선택하기 쉽다. 새삼스럽지만 효는 인간의 삶에서 특정 시공이나 체제를 초월하여 지속되어야 할 기초 의리이다. 한편 효가 자식에게 불합리한 권위를 강요하거나 자식을 종속시키고 사역시키려는 욕망에 명분이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기도 하였다고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농암이 실천한 효는 그러한 효가 아니라 관련 시편들에서 알 수 있듯 부모의 은혜에 순수하고도 자발적으로 헌증하는 친애의 성의였으며 자기충실의 행위였다. 왕조 시대에 효가 강조되었다고 하더라도 효행은 그때에도 그 실천이 어려웠다. 효도 인간에게 본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부모보다 자식에게 더 다가서는 강렬한 애착본능에 후행하며, 성의와 근면과 같은 윤리들과 결합하여야 실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농암의 효행은 효행이 부박해지는 이 시대에 제대로 강조되고 전파되어야 할 유력한 전형이다.
끝으로, 농암의 삶을 두루 살피고 기린 후인들의 여러 글 가운데서 가장 의미심장한 두 분의 글을 적구(摘句)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높은 이름 세월과 함께 다하지 아니하여 / 高名不與年光盡
만고에 길이 우주 사이에 머물러 있으리 / 萬古長留宇宙間
농암의 후배 관료로 좌의정을 지낸 안현(安玹)이 농암을 위해 지은 만장(挽章)의 일부이다.
드높은 풍류와 / 風流標致
시원스런 흉금 / 爽豁襟靈
덕은 맑고도 확고했고 / 德以淸立
지조는 꿋꿋하고 곧았네 / 志以介貞
겸손할수록 더욱 복되고 / 惟謙愈福
검소할수록 더욱 형통하여 / 惟約愈亨
표범이 안개 산에 숨어 있고 / 豹隱山霧
붕새가 구름 속을 나는 듯하였네 / 鵬奮雲程
퇴계가 농암의 서세를 슬퍼하며 지은 제문(祭文)의 일부이다. 농암의 삶을 이처럼 간명하면서도 직절(直截)하게 드러낸 글이 더 있을까 싶다.
[주-D001] 성인인 …… 어렵다 : 공자는 3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17살에 어머니마저 여의었으며 나이 이십 전후에 창고지기 목장관리 등 미관말직을 잠시 하다가 그것마저 끊어져 나이 50이 되도록 변변한 벼슬을 하지 못했고, 아들이 앞서 죽은 상명(喪明)을 당했으며 부인은 별거를 택했고 며느리는 개가하였다. 18년간의 긴 세월동안 상갓집 개[喪家狗]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공자에게 “선생님은 완인이십니다.”라고 말한다면 두 손을 저으며, “제발 그딴 소리하지 말게.”라고 했을 것이다.[주-D002] 선생의 …… 않겠는가 : 한 인물을 평가할 때 하나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찾을 수 없을 경우, 사람들은 으레 과거 역사상의 명인(名人)들 가운데서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인물을 찾기 마련이다. 선생을 존모한 당대의 사람들과 선생을 추모하는 후인들은 선생의 이미지를 누구에게서 찾았을까? 시대순으로 열거하면, 강상(姜尙)ㆍ노래자(老萊子)ㆍ동원공(東園公)ㆍ소광(疏廣)ㆍ정 영위(丁令威)ㆍ진식(陳寔)ㆍ곽태(郭泰)ㆍ도잠(陶潛)ㆍ갈홍(葛洪)ㆍ왕통(王通)ㆍ서적(徐積)ㆍ곽자의(郭子儀)ㆍ배도(裴度)ㆍ호원(胡瑗)ㆍ소옹(邵雍)ㆍ장재(張載)ㆍ백거이(白居易)가 그들이다. 강상은 여상(呂尙) 태공망(太公望) 또는 강태공(姜太公)이라 불리기도 하는 은나라 말 주나라 초의 인물로 주나라 무왕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제(齊)나라의 시조가 된 전략가, 동원공 당병(唐秉)은 진말(秦末) 한초(漢初)에 하황공(夏黃公) 최광(崔廣), 기리계(綺里季) 오실(吳實) 녹리선생(甪里先生) 주술(周術)과 함께 상산사호(商山四皓)라 불리는 은자(隱者)들의 대표 인물로 한나라 초 정권 안정에 공을 세운 인물, 노래자는 전국 시대 사람으로 늙은 나이에도 부모를 즐겁게 하려고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는 효자, 소광은 한나라 사람으로 조카 소수(疏受)와 함께 적기(適期)에 은퇴하고 돌아와 고향 사람들 대접에 재물을 아끼지 않고 널리 시혜(施惠)한 현자, 정 영위(丁令威)는 한나라 요동 사람으로 허령산(虛靈山)에 들어가 도를 닦아 선학(仙鶴)이 되었다는 신선, 진식은 한나라 말엽의 사람으로 청고(淸高)한 덕행과 선정(善政)으로 이름 높은 명사(名士), 곽태 역시 한나라 말엽의 사람으로 맑은 지조를 가지고 당고(黨錮)에 걸리지 않고 자신을 온전히 한 선비, 갈홍은 포박자(抱朴子)라 불리운 저명한 도사(道士), 도잠은 도연명(陶淵明)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한 동진(東晉)의 전원(田園) 시인(詩人), 왕통은 수말 당초의 사상가로 문중자(文中子)로 널리 알려진 박학군자, 서적은 곧은 절조와 훌륭한 재능으로 황제로부터 존중을 받았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여 후인들을 탄식하게 한 북송의 관리, 곽자의는 안녹산 사사명의 반란을 진압한 당나라 현종 때의 공신으로 장수(長壽)와 자손만당(子孫滿堂)의 복록을 누린 인물, 배도는 당나라 중엽의 걸출한 정치가이자 문학가, 호원은 송나라 초기의 사람으로 송대 이학(理學)을 개창한 학자, 소옹과 장재는 주돈이(周敦頤)ㆍ정호(程顥)ㆍ정이(程頤)와 함께 북송오자(北宋五子)로 존앙 받는 성리학의 대가들, 백거이는 당나라 중엽의 뛰어난 시인이자 정치가로 말년에 재산을 흩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 인물이다. 사람들은 농암의 일생 사적 가운데서 유가(儒家)와 도가(道家)를 넘나드는 여러 위인들의 일면과 겹치는 이미지를 발견하여 비의(比擬)한 것이다. 그 면모들을 조합하면 농암의 이미지가 형성될 것이다.[주-D003] 명종이 …… 한다 : 일찍이 1498년에 김일손ㆍ김굉필 등 신진 사류들이 희생되었고, 1519년의 기묘사화에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ㆍ김구(金絿)ㆍ기준(奇遵)ㆍ한충(韓忠)ㆍ김식(金湜) 등 명현들이 희생되었으며, 1545년의 을사사화에 유인숙(柳仁淑)ㆍ유관(柳灌)ㆍ나식(羅湜)ㆍ이문건(李文楗) 등 명사들이 희생이 되었고, 1547년의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권벌(權橃)ㆍ이언적(李彦迪) 등 명현들이 희생되었다. 마침내 88세의 농암은 석과근존(碩果僅存)의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윤원형(尹元衡)의 국정 농단으로 나라가 수습이 어려울 정도로 어지러워진 시기에 어느덧 기둥과 주춧돌과 같은 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서의 여망(輿望)을 한 몸에 모으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에 밝던 대사간 정유(鄭裕)가 왕에게 농암을 조정으로 부르기를 건의하자 명종은 교서를 내려 농암을 불렀다.[주-D004] 김세필(金世弼) : 1473~1533. 1495년(연산군1) 식년 문과에 급제했다. 형조 참판ㆍ부제학ㆍ광주 목사(廣州牧使)ㆍ전라도 관찰사ㆍ대사헌ㆍ이조 참판을 지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趙光祖)를 사사하자, 부당함을 규탄하다가 유춘역(留春驛)으로 장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저서로는 《십청헌집(十淸軒集)》이 있다.[주-D005] 작은 …… 지었다오 :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양곡(暘谷) 소세양(蘇世讓), 용재(容齋) 이행(李荇), 낙재(樂齋) 김영(金瑛),눌암(訥菴) 홍언국(洪彥國), 금헌(琴軒) 이장곤(李長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월연(月淵) 이태(李迨)가 모두 차운시를 지었다.[주-D006] 농암은 …… 효절(孝節) : 가정(嘉靖) 36년(1557) 3월 23일에 내려진 교지(敎旨)는 다음과 같다. “고 숭정대부 행 지중추부사 이현보에게 효절공이라 시호를 내린다. 인자하고 은혜로우며 어버이를 사랑한 것을 효라 하고, 청렴을 좋아하고 스스로 극복한 것을 절이라 한다.[卒崇政大夫, 行知中樞府事李賢輔, 贈諡孝節公. 慈惠愛親, 好廉自克.]”[주-D007] 46세이던 …… 드렸다 : 〈연보〉 46세 조 참조. 애일당은 다시 말해 농암 효성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건물이다. 농암이 82세 때 애일당을 새로 수리하면서 지은 글을 보자. “애일당은 집에서 동쪽으로 1리 되는 영지산(靈芝山) 기슭의 높은 바위 위에 있다. 주인옹(主人翁)이 정덕(正德) 무진년(1508) 가을에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 바위 가에 당을 지었다. …경사스러운 날이나 좋은 절기가 되면 늘 양친을 모시고 여러 아우를 데리고서 술잔을 올리고 색동옷 차림으로 춤추는 것을 반드시 이 당에서 하였는데, 어버이 연세가 점점 많아지니 기쁘고도 두려운 마음이 그 가운데 없을 수 없어서 당 이름을 ‘애일(愛日)’이라 하였다. … 당을 이미 ‘애일’이라고 편액하였으니, 한 몸만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고 어버이를 모시는 데 날이 부족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주-D008] 농암 …… 된다 : 노송정 종택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분재기에 농암의 숙부 이균(李鈞)의 친필 보증 서명이 있다. 분재는 노송정 부인 영양 김씨가 했고, 이균이 문서 작성과 서명을 했다. 이쪽에서는 고종사촌이고, 저쪽에서는 외사촌이니 말하자면 내외종간이었다. 부인에게 농암 아버지 형제는 외4촌이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니 송재와 농암은 6촌에 불과했다. 퇴계가 농암에게 ‘족질’이란 표현 역시 ‘7촌 척질’을 의미한다.[주-D009] 송재가 …… 것이다 : 이 시기에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퇴계의 〈언행록〉에 학봉 김성일(1538~1593)이 기록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 주목을 끈다. “선생이 또 말씀하시기를 일찍이 중종대왕 때 알성시(謁聖試)에서 정암을 먼발치에서 보았는데 걸음걸이가 나는 듯하였고, 행동거지가 본받을 만해서 한 번 보고도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었다.[又曰嘗於中廟謁聖, 望見靜庵, 步趨翼如, 儀表可象, 一見可知其爲人也.]” 이것이 퇴계가 정암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찍이’는 1519년 을사년 4월이다. ‘알성’은 알성시인데, 이해 4월에 정암의 주도하에 기존의 과거제(科擧制)와 다른 형식의 인재 선발책으로 단계이행 시험이 아니라 오직 대책(對策)만으로 당락(當落)을 가리는 시험인 현량과(賢良科)가 실시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사화가 일어나 이른바 기묘명현들이 구금되었으며 정암은 12월에 사사(賜死)되었기 때문이다. 이 한 번의 조우(遭遇)는 퇴계 일생에 큰 영향을 끼친 기억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갓 19세인 퇴계가 어떻게 이 알성시에 참가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때 전국에서 응시한 사람이 모두 120명이고 합격자는 28명이었다. 현량과에 응시하려면 유향소(留鄕所)가 고을 수령에게 인재를 천거하고, 수령이 관찰사에게, 관찰사는 예조(禮曹)에 보고하는 절차를 거쳐야 시생(試生)이 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때 천거된 사람들은 대부분 30 전후의 연령으로 관력(官歷)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약관(弱冠)도 안 된 퇴계가 어떤 경로로 이 시험에 참가할 수 있었을까? 〈퇴계선생연보보유〉에 의하면 “이때 천거로 사람을 뽑는 과거가 있었고 선생은 이미 고장의 선발에 들어 있었다.[時有薦擧取人之科, 先生已入鄕選.]”라고 하였다. ‘천거취인지과(薦擧取人之科)’는 현량과를 가리키고, 퇴계가 이때 안동향교에서 공부하고 있었지만 출신 고장 예안을 대표하여 수재로 뽑혔을 것이다. 당연히 탁이(卓異)한 학력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추천(推薦)이 필수 요건이었기에 천주(薦主)의 영향력도 중요했을 것이다. 예안 현감의 상급자인 안동 부사의 영향력이 작용하였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안동 부사였던 농암은 안동부의 명액(名額)으로는 자신보다 3살 적은 안동 판관 박찬(朴璨)을 천거하고 전별시를 지어 준 바 있다. 농암과 퇴계 간의 교환과 더불어 퇴계는 농암의 둘째 아들로, 맏아들의 조서(早逝)로 적자(嫡子)가 된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 1498~1581)과 평생 둘도 없는 지기(知己)였다. 퇴계보다 3살 연장에 11년을 더 산 이문량의 생몰기간은 퇴계의 일생을 포용하고 있기도 하다. 농암의 4자 이중량(李仲樑)은 퇴계와 동방급제 하였고, 6자 이숙량(李叔樑), 7자 이윤량(李閏樑), 8자 이연량(李衍樑)은 퇴계를 스승으로 모셨다.[주-D010] 용문교(龍門橋)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용수산(龍壽山) 동네 어귀에 있다.[주-D011] 1542년 …… 지었다 : 퇴계의 고족(高足) 월천 조목(趙穆)의 제자 김중청(金中淸)은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그 누구도 그런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우리 농암 선생께서 쇠퇴한 풍속에서 분연히 일어나 용퇴했다. 회재(晦齋), 충재(冲齋)께서 전송대열에 서고, 모재(慕齋), 퇴계(退溪)께서 시를 지어 전별했으니, 중국의 소광(疏廣), 소수(疏受)가 조정을 떠날 때의 1백 량의 수레가 줄을 이은 영광에 어찌 비유되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수천 년 역사 이래 없었던 일로, 우리 농암 선생이야말로 천백만 명 가운데 단 한 분뿐이다.”라고 했다.[주-D012] 소원하는 …… 때문〔所願善人多, 是乃天地紀.〕 : 《퇴계집》 권1 〈和陶集 飲酒 二十首〉 중 제 19수.[주-D013] 퇴계가 …… 것이다 : 농암의 이러한 덕행을 향당의 후배들이 주목하고 기리는 일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1551년 7월 29일 농암의 85세 생신으로 추정되는 날에 안동 임하현(臨河縣)의 진사(進士)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도 참석하였는데, 다음 시를 남겼다. “두 동이 술 나귀에 싣고 멀리 왔으나,[駄載朋樽涉遠程] 하룻밤에 그립던 정 다 풀 수 있을까.[一宵那展隔年情] 흰머리에 꽃 꽂은 이 뱃놀이에서 돌아오는 곳,[簪花白髮回船處] 해 저무는 강가 정자 한 가닥 피리 소리.[落日江亭一笛聲]” 80여 리를 노정으로 석양 무렵 애일당 근처 나루에 당도한 청계는 농암이 선유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애일당에서 퍼지는 피리 소리를 들으며, 문득 ‘두 동이 술’과 ‘하룻밤’으로 회포를 다 풀 수 있을까라고 자문한다. 해 질 녘 정서로 별리의 유감을 미리 제기하여 농암과의 해후를 크게 부각하는 작품이다. 농암이 향당의 후배들에게도 이처럼 다정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주-D014] 어부가를 …… 있지만 : “다만 가사가 대부분 두서가 없고 혹 중첩되었는데, 이는 전해 쓰는 과정에서 잘못됨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성현의 경전에 의거한 글이 아니기에 내 멋대로 고쳐서, 1편 12장은 3장을 버리고 9장으로 장가를 만들어 읊었고, 1편 10장은 단가 5장으로 줄여 만들어 지엽으로 삼아 창(唱)하도록 하여, 합하여 한 부의 신곡(新曲)을 만들었다. 다만 잘라내고 고쳤을 뿐만이 아니라 덧붙인 것도 많으나 옛 글의 본래 뜻에 의거하여 가감(加減)하고 〈농암야록(聾巖野錄)〉이라 이름하였으니, 보는 이는 참람하다고 나를 허물하지 말기를 바란다.”[주-D015] 농암의 …… 끼친다 : 뒷날 수헌(壽軒) 이중경(李重慶)은 농암의 〈어부가 9장〉과 〈어부가 5장〉을 모방하여 〈오대어부가구곡(梧臺漁父歌九曲)〉과 〈어부가오장(漁父歌五章)〉을 짓기도 했다. 이형대, “이중경의 《잡훼원집(雜卉園集)》” 〈해제〉(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고시조 문헌해제》) 참조.[주-D016] 1508년 …… 것이다 : 농암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애일당은 집에서 동쪽으로 1리 되는 영지산(靈芝山) 기슭의 높은 바위 위에 있다. 주인옹(主人翁)이 정덕(正德) 무진년(1508) 가을에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영천 군수(永川郡守)를 청하였다. 영천은 고향에서 3일 거리로 일상적인 공무 여가에 어버이를 찾는 일이 달을 넘긴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을이 좁고 외진 곳에 있어서 어버이가 즐길 곳이 없는 것이 한스러워 마침내 바위 가에 당을 지었다. 바위가 옛날에는 이름이 없고 ‘귀막이 바위[耳塞巖]’로 세상에 전해졌다. 앞에는 큰 강이 있고 상류에는 급한 여울이 있는데, 여울물 소리가 울려서 사람의 귀가 먹먹하게 하니, ‘귀막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이 때문일 것이다. 은둔하여 세상의 평가를 듣지 않으려는 자가 살기에 적당하기 때문에 ‘농암(聾巖)’이라 하고, 내 스스로 호로 삼았다.” 〈애일당중신기〉 참조. 〈농암 애일당〉에서 “높이는 몇 장 남짓되고 위에는 20여 명이 앉을 수 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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