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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오늘 내가 걸어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젊은 시절 산을 자주 다녔습니다. 그것도 높고 험준한 산을. 한번은 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눈도 내리고 있고, 시간적 여유도 없고, 안전하게 올라온 길로 신속히 내려가는 게 상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객기가 발동했습니다. 내 사전에 올라온 길로 내려가는 법은 없다며 홀로 능선을 타고 다른 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생각에 어느 정도 능선을 타고 가다 보면 머지않아 옆으로 빠져 내려가는 길이 있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가도 가도 능선만 이어졌습니다. 눈송이는 점점 더 커져 함박눈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러다 얼어 죽겠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능선 타기를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길도 아닌 길고 긴 계곡을 타고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죽을 고생 끝에 동사 및 아사 일보 직전, 그것도 심야에 겨우겨우 한 민가에 도착했습니다. 기진맥진해 한 집 문을 두드리다가 간첩으로 오해받아 경위 조사까지 받고 귀가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길도 길이 아닌 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 가면 ‘개고생’이 분명한 길, 멸망으로 가는 길, 인생 종치는 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네 인생에서 돈이나 명예, 권위나 자리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된 것은 아닌지요?
사실 돈이라는 것은 돌고 돈다 해서 돈이 아닌가요? 없다가도 생기는 것, 목돈 좀 손에 쥐었다 하면 어느새 손에 쥔 한 줌 모래알처럼 빠져 나가버리는 것이 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차지하게 되는 권한이나 직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맡겨진 임기가 채워지면,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물려주고 내려와야 할 부초나 뜬구름같이 허망한 별 것 아닌 자리입니다.
오늘 내가 걸어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결국 우리가 선택할 최종적인 길, 진리와 생명의 길은 예수님께서 먼저 올라가셨던 길입니다. 정말 가기 싫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올라갔던 예루살렘 언덕길입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끔찍해서 생각하기도 싫은 길이었지만 아버지께서 계획하셨으니 올라갔던 골고타 언덕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부활 제4주간 금요일
<그리스도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만난 사람의 삶의 방식>
복음: 요한 14,1-6
금쪽같은 내새끼 116회에서 ‘게임 캐릭터가 죽자 동생의 머리채를 잡고 무섭게 돌변한 금쪽이, 심지어 주먹질까지?!’란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금쪽이는 게임 캐릭터가 죽자 동생들을 심하게 괴롭힙니다. 그 캐릭터의 가치가 자신에겐 너무 큰 것입니다.
아이들이 서로 싸우고 때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싸움은 나의 귀한 것을 누군가 때문에 잃었다고 여길 때 일어납니다. 누가 나의 똥을 훔쳐 갔다면 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은 게임 캐릭터가 자기 삶의 전부입니다.
왜 이렇게 집착하게 되었을까요? 어른으로 성장할 탈출구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숲에 있는데 뒤에서는 불이 나서 계속 내가 있는 곳으로 타고 있고 앞은 큰 강이 흐르는 수렁으로 막혀 있다고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불안하고 두려워서 숨을 곳을 찾게 되고 그 장소를 다른 사람이 노리고 있다면 싸움을 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 그 수렁 절벽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발견한다면 어떨까요? 그 자리 때문에 싸울 일은 없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곧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는 다리입니다. 진리란 말은 그 다리가 하나 뿐이란 뜻이고, 생명이란 말은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하면 죽음 뿐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용서’가 그 생활 방식이 됩니다. 이 세상 것들이 모두 죽음과 관계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에사우로부터 도망칠 때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 계단을 만나야 합니다. 위 금쪽이들의 이야기에서 금쪽이들의 다리는 바로 부모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의 다리입니다. 그런데 그 다리가 휘청거려 아이들의 평화가 깨진다면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상에 갇히고 맙니다. 형제끼리 싸우고 용서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위 아이들의 부모는 매일 싸우고 이혼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저희 집이 가난하다고 아이들 앞에서 인격적인 모욕을 하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을 좋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미워할까요? 저는 아이가 아닙니다. 제가 장난감을 가지고 아이와 싸운다면 저는 아직 어른이 되는 다리를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두 주인공 중 하나는 군대를 제대해서 여자도 사귀며 결혼할 일을 생각하고 그 이전의 일은 다 잊었지만, 또 다른 하나는 평생 군인으로 살 것처럼 죄책감에 사로잡혀 결국엔 자살을 선택합니다.
파올로 코엘료 ‘연금술사’에서 현자는 행복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기름 두 방울을 숟가락에 주며 쏟지 말고 성을 한 바퀴 돌면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성의 아름다운 것들에 정신이 팔려 숟가락의 기름이 쏟아지는 줄 몰랐습니다.
현자는 두 번째 기회를 줍니다. 그랬더니 두 번째는 기름에 주의를 더 기울이다가 주위의 것들은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현자는 행복의 비법은 기름을 쏟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자는 그 사람에게 기름 두 방울을 주면서 그 사람이 이 세상 것들에 정신을 쏟을 존재가 아님을 알려준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은총과 진리라는 두 방울의 기름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집착할 존재가 아님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미워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만났습니까?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4,1-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께서 돌아가신다는 것에 대해 놀라고 혼란스러워하자 그들을 위로하신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2절) 여기서 아버지의 집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며, 아드님께서 아버지께 바칠 하느님의 나라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이 집, 하느님의 이 성전, 하느님의 이 나라와 하늘나라는 지금, 여기서 지어지고 세워지고 준비되고 있다. 거기에 거처가 마련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그 자리가 마련된다. 사랑을 살며 감사하는 삶으로 마련하는 자리이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3절) 이렇게 살아서 그 자리가 마련되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게 되리라 하신다. 우리가 함께 있는 곳은 바로 그분이다. 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받아주실 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시므로 우리가 있게 될 거처는 바로 그분이시다. 여기서 생명은 바로 그분 자신이라는 말이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 그 거처를 마련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았다면, 우리는 그 길을 아는 것이다. 이 길은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다. 그러나 토마스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고 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여기서 길은 거룩한 삶을, 진리는 거룩한 교회를, 생명은 영원한 행복을 의미한다. 그 길은 완덕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은 우리를 복된 목적지, 곧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분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을 통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아들을 통하는 길이다.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므로 아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그러기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참 하느님이라고 하면, 아들이신 하느님만이 진리이시다. 그러므로 아드님은 참되신 분과 같은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죄의 저주로 죽은 우리를 되찾아 태초의 상태로 돌려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생명에 도달하는 방법은 그러므로 세 가지가 있다. 온갖 덕을 실천함으로써, 올바른 믿음으로써,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올 삶을 소망함으로써이다. 우리의 인도자요 수단이 되는 분이 바로 아들이시다. 그분은 생명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생명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세계적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어떤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역사를 배워야 하나요?”
유발 하라리는 이 질문에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답합니다. 과거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에 예속되고 지배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라는 말에서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우리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과거로부터 답습되던 것들에 벗어나지 못할 때가 참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모습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습에 갇혀 있게 됩니다. ‘왕년에 말이야~’라면서 하는 말, ‘전에는 이렇게 했는데’라는 말…. 이런 모습을 향해 요즘 젊은이들은 ‘꼰대’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역사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 과거에 갇혀서 정체되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역사에 더 예속되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교회 안에서도 새로운 것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늘 반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를 따르면 그만큼 실패 확률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모습에서 찾게 되는 기쁨을 얻기는 힘들어집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당시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은 모두 중요했습니다. 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율법이라는 과거를 따르라고 그토록 요구했고, 그러지 않은 예수님 모습을 반대해서 떠나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다른 예수님 모습에 제자들의 마음이 산란해합니다. 앞날에 대한 불안, 세상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걱정이 태산 같았던 것이지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과거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마음을 써야 할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닌, 하늘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때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산란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면서 지금을 새로운 마음으로 더 기쁘고 힘차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넬슨 만델라).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 6)
여기에
길이 있네.
이 길은
지상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는
야곱의 사다리이며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는
진리의 가르침이고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가는
생명의 말씀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마음이 지금도 산란하니
내 마음에 바람이 부는구나...
언제나 되야 이 바람이 멈출까
마음이 미동하지 않고 잔잔한 평정심을 되찾아야
바람이 물러가려나...
창밖에 바람이 부는 걸 알 수 있는 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을 통해서입니다.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
어떠한 삶의 풍파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
내적 평정심과 초연한 자세!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해져
믿음이 약해질 제자들을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세상의 위협과 유혹에 휩쓸리고
마음이 산란해져 있을 제자들을
미리 보았던 것입니다.
결국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을
통하지 않으려고 할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복음 말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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