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올리가르히' 예브게니 프리고진과 그의 군사 조직 '바그너 그룹'의 6·24 군사반란 이후, 베일에 가려져 있던 '바그너 전사'들의 진로가 보다 명확해지고 있다. '러시안 타임'(코리안 타임보다 더 늦게 움직이는 러시아식 행동 방식/편집자)을 감안하더라도, 6·24 군사반란에 대한 후속 조치가 너무 늦어지면서(사실은 이제 겨우 20일 지났다/편집자) 프리고진의 운명과 '바그너 그룹'의 진로, 크렘린의 다음 수 등을 둘러싼 온갖 억측이 서방 언론을 중심으로 쏟아졌다.
분명한 것은 군사반란을 중단시킨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중재안에 따라 러시아 국방부와 바그너 그룹이 후속 조치를 꾸준히 진척시켜왔다는 사실이다.
러시아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에 따르면 '바그너 그룹'은 13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루간스크주(州)에 있던 후방 지원 캠프를 떠나기 시작했다. 경찰과 함께 고속도로를 따라 움직이는 차량 대열이 목격됐다. 일부 자동차에는 벨라루스 번호판이 달려 있었다.
후방 캠프에 있던 무기들을 반납하고(아래), 벨라루스로 떠나는 바그너 그룹 차량 행렬/TV 채널 텔레그램 영상 캡처
전날(12일)에는 '바그너 그룹'이 보유하고 있던 수백 대의 탱크와 장갑차, 야포, 다연장로켓, 방공포, 자주포, 대전차무기 등 2,000여 중화기를 러시아 국방부에 반납했다는 발표가 나왔다. 러시아 국방부는 2,000여 중화기 군사 장비 뿐만아니라 2만5,000 톤의 각종 탄약과 2만여 개의 개인용 화기도 돌려받았다며 "수십 대의 군사 장비는 우크라이나와의 전투에 사용된 적도 없고, 탄약의 상당량도 창고에 쌓여 있었다"고 밝혔다.
프리고진은 최근 격전지 바흐무트를 공략하면서 탄약 부족을 이유로 국방부를 계속 비난했는데, 창고에 그토록 많은 탄약이 쌓여 있었다는 폭로는 프리고진의 권위와 진실성, 도덕성을 떨어뜨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스트라나.ua는 아예 러시아 국방부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바그너 그룹'은 무장해제됐다며 다시 일어설 힘을 잃었다고 평가했다.
바그너 그룹 창고에 쌓여 있는 각종 탄약 박스/러시아 TV채널 영상 캡처
이 매체는 그러나 프리고진의 소유 회사들이 러시아 정부와 최소 10억 루블 이상의 식품 공급 계약을 갱신했다며 무기는 반납하되 정부와의 상업적 계약은 유지한다는 합의에 따른 것으로 분석했다.
때맞춰 러시아 국방부가 프리고진이 그토록 경질을 요구해온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의 활동 영상을 내보낸 것도 의미심장하다.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은 영상에서 러시아 특수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총사령관 자격으로 "항공우주군의 역할을 주목한다"며 "항공우주군과 군총정찰국(GRU)이 적(우크라이나군)의 공격 무기 보관 및 발사 장소를 선제적으로 파악해 파괴하는 계획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 조금씩 드러나는 크렘린-프리고진 밀약
이같은 공개 행보는 드디어 '물밑 작업'이 끝났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그 시작은 지난 10일 나온 푸틴 대통령과 프리고진의 크렘린 회동 확인이었다. 프리고진과 '바그너 그룹'이 군사반란을 끝내면서 벨라루스로 옮겨갈 것이라고 발표됐지만, 실행 여부는 물론, 푸틴 대통령의 '다음 수'는 서방 언론의 주요 관심사가 됐다. 무수한 억측이 쏟아져 나온 이유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지난 10일 프리고진이 반란 닷새 후인 지난달 29일 크렘린에서 푸틴 대통령과 3시간 동안 만났다고 말했다. 참석자는 프리고진을 비롯해 '바그너 전사'들의 주요 지휘관 등 35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푸틴 대통령에게 군사반란에 대해 해명하고 국가 원수(푸틴 대통령)의 확고한 지지자이자 군인이며, 계속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싸울 준비가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굳이 해석하자면, '충성 맹세'다.
군사반란 후 주요 인사들과 대책회의를 갖는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크렘린 회동 소식은 전날(9일)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빅토르 졸로토프 국가근위대(러시아 정규군과는 별도 조칙체계를 갖춘 국가방위군. 국경경비대와 내무부 산하의 오몬 특수부대 등 무장 조직을 통합한 부대/편집자) 대장과 세르게이 나리쉬킨 해외정보국장도 참석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두 사람은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멤버다.
스트라나.ua는 "페스코프 대변인이 '리베라시옹의 보도'를 아주 신속하게 확인했다"며 "크렘린이 푸틴 대통령의 이미지상 논란이 많은 사건을 공개하기로 결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논평했다. 또 프리고진이 그동안 국방부 지휘체계(쇼이구 장관-게라시모프 군총참모장)를 비난하면서 푸틴 대통령과 독대를 원했고, 푸틴 대통령 역시 군사반란이후 '바그너 그룹'의 새로운 쓰임새를 위해 서로 만나고 싶어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바그너 그룹'의 '행동'(전쟁 성과와 군사반란)을 대놓고 평가한 뒤, 프리고진에게 '고용 옵션'을 제시했다고 페스코프 대변인은 밝혔다. 발표로만 보면 푸틴 대통령은 충성을 맹세한 '바그너 그룹'을 용서하고, 국가에 대해 계속 봉사하는 길을 열어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회동으로 '푸틴-프리고진' 간의 구원(舊怨)은 다 씻긴 것일까?
군사반란 이후 프리고진의 운명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 푸틴 대통령의 성격상, 프리고진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는 주장과 '바그너 그룹'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당분간 '적과의 동침'이 계속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동안 각종 억측이 쏟아진 근본적인 이유다.
◇ 서방 언론이 제기한 프리고진의 길
두 시나리오는 각기 나름의 근거를 갖고 있었다. 러시아 주요 국영 TV, 언론 매체가 일제히 '프리고진'을 배신자로 규정하고 '죽이기'에 나선 게 첫번째 시나리오의 근거다. 군사반란 직후 형사 소송의 일환으로 이뤄진 프리고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자택 압수수색에서 나온 돈과 금괴, 총기, 가짜여권 등 수많은 물품들이 뒤늦게 영상과 사진으로 공개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압수수색에서 나온 현금박스들/텔레그램
러시아 국영 TV채널 '러시야-1'은 지난 5일 시사 프로그램 '60분'에서 경찰 특수요원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프리고진 소유 사업체와 자택을 급습하는 장면을 방영했다. 프로그램 진행자는 프리고진을 '반역자'라고 불렀다. 압수수색은 지난달 24일 진행됐고, 발견된 '현금 박스' 등이 텔레그램 채널 등에 의해 대중에게 알려졌다. 현금은 약 6억 루블(약 85억원) 규모였다.
크렘린 회동 직후인 지난달 30일에는 프리고진이 소유하고 있던 언론 그룹의 문을 닫기로 했다. 통신 매체 판(FAN), 인민 뉴스(People 's News) 경제 오늘(Economy Today) 등 크고 작은 언론 매체가 활동 중단을 발표했다. 프리고진이 러시아내 활동을 접고, 약속된 벨라루스로 넘어가는 것으로 해석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바그너 그룹'의 간판도 내려졌다.
프리고진 소유 매체들의 활동 중단은 지난달 29일 크렘린 회동에서 이뤄진 합의에 따라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그너 그룹의 간판(아래)이 내져진 모습/사진출처:스트라나.ua
그러나 크렘린의 회동 뒤에도 러시아 국영 매체가 '프리고진 죽이기'에 나선 것을 보면, '배신자'로 낙인 찍은 크렘린의 평가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게 스트라나.ua의 평가다.
두번째 시나리오는 중재자인 루카셴코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지난 5일, 6일 "프리고진이 벨라루스에 도착했으나, 오늘은 모스크바, 내일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갈 것으로 보인다"며 "푸틴 대통령이 프리고진을 암살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러시아 국영 TV 채널이 보도한 압수 물품들도 프리고진이 이미 돌려받았다는 보도도 나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의 매체 '폰탄카'는 러시아 당국이 지난 2일 프리고진 측에 현금 1억 달러 가량과 금괴 5개 등 1억1천만 달러(약 1천400억원) 상당의 자산을 돌려줬다고 보도했다. 현지 당국은 프리고진에게 돌려주는 걸 원치 않았으나 "더 큰 권력이 개입했다"는 게 이 매체의 지적이다.
◇ 프리고진의 목은 진짜 안전할까?
'바그너 그룹'의 무기 반납과 벨라루스로의 이동으로 프리고진과 '바그너 그룹'의 향후 진로에 대한 억측은 앞으로 많이 수그러들 것으로 예상된다. 푸틴 대통령이 군사반란 진압 직후 공식 발표한 대로, 주요 무기들을 반납한 '바그너 전사'들은 러시아 국방부로 편입되거나, 집으로 돌아가거나, 벨라루스로 옮겨가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향후 관심은 국방부로의 신규 편입을 포기하고 프리고진을 계속 따르는 세력의 움직임이다. 스트라나.ua는 11일 "푸틴대통령이 '바그너 그룹'을 다시 전방으로 보내기 전에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할 것"이라며 "그것은 기존의 '바그너 그룹'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국방부에 편입된 일부 용병들이 새로운 편제로 전방에 배치될 것이라는 의미다. 전투력이 뛰어나 '바그너 전사'로 불린 기존 이미지는 사라지는 셈이다.
벨라루스로 옮겨간 세력은 벨라루스군의 훈련을 담당하면서, 해외 용병 사업을 계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크렘린 측도 최소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바그너 그룹'의 해외 사업을 배후에서 지원할 것이다.
푸틴-부시 전 미대통령의 만남을 접대하는 프리고진(부시 전 대통령 옆)/사진출처:스트라나.ua
그동안 터져나온 숱한 억측을 뒤집는 크렘린의 공개 행보는 앞으로 더욱 많아질 것이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프리고진의 운명에 대해 "나 같으면 음식물을 주의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크렘린이 쉬 움직일 것 같지는 않다. 괜한 분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13일 알려진 자포로제 주둔 러시아군 사령관 이반 포포프 소장의 경질 소식처럼 물밑에서는 친(親)프리고진 세력의 축출은 계속될 것이다. 친프리고진 성향의 수로비킨 특수 군사작전 부사령관의 오랜 잠적도 '휴가'라기 보다는 '2선 후퇴'로 이해된다. 이 모든 것은 군사반란 이후 쇼이구 장관-게라시모프 총참모장의 군 지휘 일원화를 지지하는 크렘린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하는 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