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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
놀라운 감사의 축복
누가복음17:11-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지난 반년 동안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지금은 예전과 같이 보리나 밀과 같은 농사를 짓지 않아서 그 의미가 많이 줄어들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럼에도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것은 예전이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잘 살 때나 못살 때나,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농사를 질 때나 사업을 할 때나 우리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감사는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계속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마음으로 이번 맥추감사주일도 진정한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리아의 전설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냥꾼이 외아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는데 그날따라 토끼 한 마리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돌아오려고 하는데 눈앞에 들소의 무리가 보여 그 뒤를 좇아갑니다.
그런데 들소의 무리는 바람 속에 사라졌습니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아들이 있는 곳에 왔더니 아들은 없어지고 핏자국이 점점이 나 있었습니다.
그 자국을 따라가니 동굴 속에서 마녀가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화살을 쏘아 마녀는 죽였지만 이미 아들은 죽은 상태였습니다.
아들의 시체를 마녀의 옷에 싸서 집으로 가져온 사냥꾼은 아내에게 말합니다.
“오늘은 신기한 짐승을 잡아왔는데 이것을 요리해 먹으면 영원히 산다고 합니다.
단 이 요리는 근심걱정이 한 번도 없었던 집에서 냄비를 빌어다가 만들어야 합니다.”
아내는 그런 냄비를 빌리러 마을로 내려갔지만 그런 냄비를 빌릴 수 없었습니다.
근심도 걱정도 없었던 집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아내를 향해 ‘오늘은 우리가 그 근심과 걱정을 겪을 차례요’ 하면서 죽은 아들의 시신을 내려놓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대로 우리의 인생은 야곱과 같이 130년을 살던 아니면 짧게 그 인생을 살던 솔로몬과 같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던 험악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험악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루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한 마을에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나병으로 인하여 가정과 마을에서 분리되어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자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들의 외침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자신들의 몹쓸 나병을 고쳐달라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그 안타까운 부르짖음을 듣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너희가 믿음으로 구했으니 믿고 가서 너희 나은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이제 가정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들은 제사장들에게 갑니다.
아직 낫지는 않았지만 나을 줄 믿고 제사장에게 달려가는 이 모습은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가다가 자신들의 병이 나았음을 알게 됩니다.
이때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크고 놀라왔겠습니까?
여기까지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10명의 나병환자들이 이때부터 둘로 갈라집니다.
한 명의 사마리아 나병환자는 자기를 고쳐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나머지 9명의 나병환자는 돌아오지 않고 제사장에게 가족에게 돌아갑니다.
그 모습을 본 주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 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러면서 한 명의 돌아온 사마리아 나병환자를 향하여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람들의 삶에서 감사가 얼마나 인색하고 소홀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0명이 고침을 받았으면 9명은 돌아와 감사를 드려야 그것이 마땅한 것 같은데,
어쩌다가 또라이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한 명이 안 돌아오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 반대가 되었으니 얼마나 이해가 안 가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R. A. 토레이 목사님이 쓰신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시간 주에 풍랑이 일어나서 배 한 척이 파손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수영선수가 목숨을 걸고 뛰어 들어가서 무려 스물세명이나 구조를 했어요.
그것이 지역 신문에 나고 훈훈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오랜 후에 토레이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미시간호에 대한 이야기, 청년 하나가 23명의 목숨을 건진 이야기’를 했더니 예배 후 한 노인이 찾아와 제가 바로 그 청년입니다. 하는 거예요.
사무실에 들어오라고 해서 차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하는 중에 "당신이 그때 겪었던 일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사람도 고맙다는 말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크리스마스카드 한 장도 온 일이 없습니다." 합니다.
목숨을 구한 23명이 한 결 같이 감사하지 못한 것이 가장 인상 깊었다는 말은 감사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주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물론 주님은 병이 낫거든 제사장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지 나에게 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에게 먼저 와서 감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나한테 와서 감사하지 않으면 나병이 재발할 것이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돌아오지 않은 9명의 나병환자들을 향하여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감사는 분명 어떤 조건도 아니고 의무도 아닙니다.
감사하지 않는다고 병이 재발하고 은혜가 저주로 바꾸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발적으로 돌아와서 감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야 마땅하지 않느냐?’ 그것이 오늘 성경에 나타난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감사는 마땅하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마땅하고 당연한 것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탈무드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명언이 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자를 벌하는 법을 하나님께서 만들지 아니한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를 이미 불행으로 벌하셨기 때문이다.'
감사하지 않는다고 벌금을 내고 감옥에 보내고 처벌하는 법은 없어요.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를 때 벌써 그는 불행이라는 벌을 받고 있다는 거예요.
다시 벌할 것도 없이 이미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자는 이미 복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진리는 그렇게 자발적인 감사의 삶을 살아갈 때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돌아온 한 명의 나병환자처럼 억지로나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만족이 있고 건강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아울러 감사하는 자는 더 놀라운 복을 받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귀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돌아온 한 명의 나병환자가 받은 놀라운 감사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축복입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하는 말씀이 있고요 18절에서도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서 15절의 하나님은 성부 되신 아버지 하나님을 말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18절의 하나님은 성자되신 예수님 자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 되었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감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역사요 도우심입니다.’
매 순간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드릴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피조물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복음을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사람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보다 더 훌륭한 신앙의 인물을 기독교 2000년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도 더 수고했고 더 노력했고 열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과 역사하심이라고 고백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가 수고하고 애쓴 것이 훌륭했지만 더 훌륭한 것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큰일을 했다고 해도 자신이 영광을 받으면 그것은 훌륭한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진정한 성도의 모습이요 피조물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반년, 아니면 지나온 여러분의 세월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잘 살았던 못 살았던 지나온 세월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내가 예수 믿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자녀들이 잘 성장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하시므로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의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둘째는, 인정받는 축복입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사람이라” 했습니다.
10명의 나병환자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 때 이 사마리아 나병환자도 함께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혼혈아, 민족의 피를 더럽힌 자라하여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받았는데 몸이 안 좋으니까 그것과 상관없이 서로 이해하면서 함께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사마리아사람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였습니다.
나머지 9명,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긴다고 자부하면서 사마리아사람들을 배척하고 터부시했던 유대인들은 돌아오지 않고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 두 종류의 사람 중에 누가 진정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입니까?
자기는 사마리아사람과 다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했던 유대인들, 그러면서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9명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멸시를 받고 차별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주님께 돌아와 감사한 이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비록 사마리아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함으로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숙한 크리스천은 누구이겠습니까?
신앙의 연륜이 30년 40년 오래된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대를 이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한다고, 헌금 많이 한다고 믿음이 좋다는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입니까?
물론 이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나쁘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귀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귀한 직분을 갖고 있어도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성숙한 신앙인이 아니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할 줄 아는 감사의 사람입니다.
직분이 없어도, 오랜 신앙의 연륜이 없어도, 대를 잇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어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신앙인인 줄 믿습니다.
이 사마리아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함으로 진정한 신앙인으로 인정받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구원의 축복입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했습니다.
이 나병환자는 이미 나병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나병은 불치의 병으로 알려졌는데 그 병에서 치료를 받아 정상의 몸으로 회복되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나병에서 고침 받고 회복된 이 사마리아 나병환자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은 분명 나병에서의 구원은 아니고 또 다른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구원을 영혼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를 사함 받고 영생의 축복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10명의 나병환자는 고침을 받고 집으로 가정으로 직장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도 점점 늙어지고 인생의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문제 앞에 절망하고 다른 병에 걸려 낙심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나병을 고침 받았다고 영원히 행복하고 영원히 죽지 않고 문제도 없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들도 영생의 삶을 준비하고 예비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삶이 아니겠습니까?
9명의 유대인 나병환자는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못함으로 이런 축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명의 사마리아 나병환자는 주님께 돌아와 감사함으로 이런 축복을 받았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감사하는 자에게 주님은 더 큰 감사 더 좋은 감사 더 좋은 축복을 허락하시는 줄 믿습니다.
한 명의 사마리아 나병환자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축복을 받으시고 주님께 인정받는 축복을 받으시고 주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축복 더 큰 축복을 받으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2019.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