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일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마르 4,35-41<“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예수님이 군중을 남겨두고 피하셨어요. 도망치듯이 배를 타고 떠나셨죠. 이런 것을 보니 참 어지간하게도 피곤하셨나 보다. 어지간하게도 사람들한테 시달리셨구나!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다른 배들이 쫓아왔다고 그랬어요. 예수님 탄 배만이 아니라 다른 배들이 쫓아온 거예요. 그냥 군중 남겨두고 도망치듯이 배 타고 떠나신 걸 보니까 진이 다 빠진 거야. 내가 신자들이랑 더 있다가 쓰러지게 생겼다 싶으니까 피하신 거예요.
내가 질문 하나 할게요. 여러분들 풀을 2시간 뽑는 게 피곤할까요, 아니면 사람을 1시간 만나는 게 피곤할까요? 단순 육체노동은 기를 얻어요. 저도 여기서 틈만 나면 풀 뽑고 새카맣게 타는데, 그래도 사람들이 날 보면 은퇴 전보다 더 젊어지신 것 같다고 얘기하거든요. 단순 육체노동은 기운을 얻고 또 건강해져요. 그러나 사람을 만나는 것은 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뺏기는 거예요. 물론 예외는 있죠.
여러분이 나를 만나면 내 기를 여러분이 다 뺏어가요. 불편한 사람 만나면 십 분만 같이 있어도 힘들죠. 온몸이 다 아프고 몸살이 나요. 피정시킬 때 또 오늘 이런 자리에서 신자들에게 좋은 기운을 나눠주기도 하지만, 피정 때 보면 나쁜 기운이 사제에게 많이 들어옵니다. 피정에 찾아오시는 분 가운데 70%는 영과 육이 아파서 찾아 오시죠. 하는 것마다 다 잘되고 몸도 뽀빠이처럼 건강하고 그런 사람은 내가 필요하지 않아. 다 자기가 잘 나서 건강하고 가진 것 많고, 풍요롭고 세상 즐기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사제를 찾아오는 사람들, 특별히 저처럼 본당 신부 생활만 한 것이 아닌 사람한테는 아프신 분들이 많이 오죠. 안수할 때 피정시킬 때 좋은 기운을 주면서 동시에 저는 그 나쁜 기운이 나한테 오지 않도록 좀 방어하면서 해야 해요. 안 그러면 제가 쓰러지죠. 그래도 교우들이 있는 동안에는 저는 행복해요. 가끔 셀프안수라고 제 손을 막 자기 머리에 가져가 대서 내 손이 꼬여 뒤로 가 있어요.
또 어떤 산모는 자기 배에 대고요. 제가 피정 때 가끔 그런 얘기 했죠, 저는 강의하면서 치유합니다. 그러니 꼭 내가 머리에 손을 대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불러서 하실 일들은 다 하실 거니까 셀프 안수하지 마세요. 한동안 힘들었던 것이 내가 누구를 쳐다보면 그 사람 아픈 게 나한테 느껴져요. 힘들겠어요, 안 힘들겠어요? 힘들겠죠. 그래서 영적 지도 신부한테 상의했죠. 이제 피정 못 하겠다, 너무 아프다. 암 환자를 보면 내가 그 자리가 아프고, 심장이 불편한 사람 보면 내 심장이 막 터질 것 같아. 하여튼 일단 2시간 풀 뽑고 노동하는 것보다 1시간 사람 만나는 것이 더 힘들어요. 사실은 저만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레지오 나가서 레지오 주회하고 식사하는데 그중에 주는 거 없이 싫은 여자가 하나 있어. 그 여자랑 한 30분만 있으면 뭔가 집에 와서도 ‘레지오 때려 쳐야 하나? 그 여편네는 아프지도 않아, 어떻게 그렇게 안 빠지고 주회를 꼬박꼬박 나와’ 그렇게 힘들어요.
아무튼 예수님은 피곤에 지쳐서 배에 오르시자마자 어떡하셨어요? 얼마나 피곤한지 그냥 배에 오르자마자 쿨쿨 잠이 든 거예요. 그 배가 여객선도 아니고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마는, 하여튼 한쪽에서 쿨쿨 잠이 들었어요. 거기까지는 이해가 돼요. 그런데 어떤 사건이 벌어져요? 거센 돌풍이 불어서 배 안으로 물이 들어와서 배가 침몰할 지경까지 됐어. 그러면 자고 있는 예수님 몸뚱어리가 물에 잠겼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주무시고 계셨다고 돼 있어요.
그죠? 이거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성경이 뻥을 치는 건가? 돌풍이 불기 전까지는 분명히 잠이 드셨던 거예요. 돌풍이 불어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이때부터는 눈만 감은 채 제자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을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제자들은 어때요? 야단법석을 떨죠. 예수님을 깨우면서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됐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어찌 그리 태평하게 잠이 오시오. 우리 죽으면 당신 책임이요.’ 이런 식으로 돌풍이 부는 것이 마치 예수님 탓인 것처럼 몰아가요. 예수님은 보다보다 못해 일어나셨죠?
속에서 예수님도 끓으셨을 거야. ‘이놈 새끼들, 3년 동안 쫓아다닌 놈들이 실망이다.’ 하며 일어나자마자 제자들을 혼내고 싶은데 그러면 제자들이 더 상처받을 수가 있잖아. 그래서 제자들 대신에 누구를 혼내요? ‘바람 잠잠해져라. 조용히 해라.’ 제자 대신에 바람과 호수에게 예수님이 역정을 내셨어요. 조용히 하라 하시니 그대로 됐어요. 그리고 난 다음 예수님은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뭐라고 그러셨어요?
‘왜 그렇게도 겁이 많으냐!’ 아직도 뭐가 없냐? ‘믿음’이 없느냐! 3년 동안 쫓아다니면서 그렇게 많은 기적을 봤는데도, 방금 이 배 타기 전까지도 많은 사람이 치유되고 마귀가 떨어지는 걸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 배 안에서 나 죽겠다고 살려달라니 어찌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 어떨 때는 예수님이 안타까워요. 얼마나 기다리셨을까, 제자들의 그 믿음이 채워지기를. 그런데 그 인간들, 예수님 돌아가실 때까지 믿음 없었어요. 다 도망쳤잖아요. 벌벌 떨고 있었잖아. 그들의 믿음이 채워진 것은 결국 성령 강림 때예요. 그전까지는 예수님이 왕 되면 한자리하려는 기복적인 마음으로 쫓아다녔던 오합지졸이었죠.
‘분명히 이렇게 열심히 뒤에서 봉사하면 나중에 뭔가 나한테 득이 될 거다.’ 손익 계산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왜 그렇게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내가 구약 강의 마지막으로 끝내면서 그 얘기 했어요. 구약 성서를 읽을 때는 항상 자기 자신을 대입하라고 그랬죠. ‘내가 만일에 호세야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래서 거기다 자기 자신을 대입하지 않으면 100번을 읽어도 아무 의미가 없다. 왜 그렇게 겁을 내느냐고 제자에게 얘기했지만, 이 말은 바로 여러분 각자에게, 김웅렬 신부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현재 실시간으로 동영상을 보고 있는 모든 신자에게 하시는 말씀이죠.
‘왜 그렇게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겁먹을 때가 많죠. 저는 겁이 없는데 요즘 겁이 생겼어. 무슨 겁이냐? 비행기 타는 것. 여기 있으면서 넷플릭스에서 하는 전 세계에서 일어난 항공사고 시리즈를 봤는데, 세상에! 비행기 타고 이렇게 많이 죽었구나. 요만한 나사 하나가 부러져 몇백 명이 죽고, 기장 하나가 우울증에 빠져 문 잠그고 알프스산맥에 충돌하고, 너무 허망하게 죽는 거예요. 그것을 보름을 보고 난 다음에는 해외에서 피정 요청이 와도 못 가요. 비행기 타는 겁이 생긴 거예요.
저는 사실 참 겁이 없는 사람에 속해요. 어느 정도로 겁이 없냐면 2015년 10월 2일, 배티에서 첫 토요일 전날이에요. 금요일 오전 11시 순례 미사하고 연풍 성지로 바이크를 끌고 가다가 진천 사거리 지나서 갑자기 차가 나를 들이받았죠. 갈비가 8대가 나갔죠. 그래서 6개월 동안을 침대에 못 눕고 앉아서 밤을 새웠어요. 그때 불면증이 생겼죠. 그런데 갈비가 붙자마자 어떻게 한 지 알아요? 바로 끌고 또 나갔어요. 사고 난 그 자리를. 내가 이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영 헤어나지 못할 거로 생각했죠. 사람들이 나 보러 신부님 제정신 아니시지 않아요? 갈비가 8대가 나갔는데 그때 사실 하느님이 도와주셔서 폐랑 심장이 안 찔려서 살았죠.
갈비도 두 토막이 아니라 세 토막씩 났어. 갈비는 수술 안 되는 거 아시죠? 자기가 알아서 찾아가 붙어요. 희한해요. 내비게이션도 없는데 몸속에 세 도막이 자리를 찾아 붙어요. 그러니까 갈비가 여덟 대 나가고 그 고통 속에 6개월을 살았는데도 딱 붙었다는 얘기를 병원에서 듣자마자 바로 바이크 꺼내서 갔거든.
‘신부님 어디 가세요?’ 배티 직원들이 앞에서 다 가로막아서 가지 마시라고 했죠. ‘가만히 있어. 지금 안 나갔다가 오면 영원히 내가 겁에 질려 살아. 이거 해결하고 와야 해.’ 무섭죠. 처음에 배티에서 내려가는데 그 생각이 자꾸 나는 거죠. 부딪히는 순간, 쇠기둥에 내 허리가 부딪히는 순간! 그런데 가서 다시 보니 내가 똑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내 잘못은 없어. 100% 그냥 치고 들어온 거죠. 그리고 그때 내가 했던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고, 갈비 8대 나간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정도로 저는 겁이 없어요. 겁이 없는데 비행기 사고 2주 동안 보고는 비행기를 못 타. 이 트라우마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타야죠. 가까운 제주도부터 갔다 와야겠죠.
우리에게 겁을 주는 것이 네 가지라 그래요. 첫 번째 환경. 원하지 않는 환경이 올 때 우리 겁나죠.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겼어? 당황하고 겁이 나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요. 두 번째 우리에게 겁을 주는 것은 인간이에요. 정말 소름 끼치는 인간들이 있어요. 무서운 인간이 있어요. 저 인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조마조마하고 그 말 한마디에 그냥 무너져 내려요. 뼈가 부서져요, 말 한마디에. 자기는 화도 안 내요. 조용히 깔고선 얘기하는데 무서워요.
말뿐이겠습니까?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하는 것, 사기당하는 것, 그죠? 대녀한테 상처받고, 대모한테 상처받고, 신자들한테 상처받고, 본당 신부님한테 상처받고, 수녀한테 상처받고, 이렇게 상처받을 때 우리는 겁이 나요. 사람을 가까이하기가 힘들어요.
세 번째는 물질이에요.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는 무섭잖아요. 앞으로 어떻게 살지? 애들을 어떻게 키우지? 남편이 빚만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어. 애들은 지금 한창 공부해야 할 때예요. 어떻게 해야 하나? 행상으로 나서야 하나? 이 물질이 주는 두려움, 그것도 커요.
마지막 네 번째 두려움은 뭡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신부님은 죽음이 두렵지 않으세요, 가끔 묻는 사람이 있어요. 두렵지는 않아요. 정말. 그리고 어떤 때 가만히 있으면 내가 그 생각하다가 딱 꼬리를 끊어버리는데요. 이 생각 계속하다가 어둠이 이 생각을 치고 들어오겠다. 끊어버리는 생각이 뭐냐 하면 ‘빨리 주님 곁에 가고 싶다.’ 그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사실 나도 얘기했던 환경, 죽음, 인간, 물질에 대한 두려움을 다 겪어본 사람이거든요.
수많은 빚이 있는 곳이었고, 어디든지 전부 다 물질 아니면 해결이 안 되는 곳이었죠.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이 황무지에서. 그래서 요즘은 어떨 때 빨리 주님이 불러 갔으면 좋겠다. 밤에 잠들었는데 깨 보니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예수님, 성모님, 그리고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만나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죽음에 대한 겁, 사실 저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많이 넘겼거든요.
군종신부 때 지프가 굴러 큰 수술도 여러 번 받았고, 하다못해 아까 얘기한 바이크 사고로 숨도 못 쉴 지경이 되니 ‘아 오늘이 내가 끝나는 날이구나.’ 그런데도 나는 그 몸을 가지고 그다음 날 은총의 밤을 했어요. 5시부터 10시까지. 기억나세요? 휠체어에 앉아서 링거 꽂고요. 왜냐하면 은총의 밤은 나 아니면 다른 신부가 와서 할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그다음 날 일요일 2천 명 순례자 미사까지 하고 오후에 병원에 들어간 거죠. 독하죠. 저도 독하니까 이렇게 살죠.
환경과 인간과 물질과 죽음, 이것이 4대 두려움이라고 그래요.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왜 그렇게 두려움이 있느냐?’ 오늘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얘기하시잖아요. 그러면서 따라오는 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열두 제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에게 하는 말이에요?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해드리는 얘기죠.
바람도 안 불고 파도도 잔잔해졌어요. 그래서 제자들이 평화를 찾았겠습니까? 평화를 되찾은 이유가 뭡니까? 바람과 호수가 잠잠해져서가 아니라, 권능을 지니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을 때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거예요. ‘아 그래, 주님이 우리와 같이 계셨었지.’ 함께하셨다는 그것을 그때야 깨달은 거예요.
3년 동안을 함께하셨는데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호들갑 떨고 예수님이 잡혀갈 땐 더 난리를 쳤죠. 삼십육계 줄행랑치느라고, 같은 패거리로 끌려갈까 봐. 그러니까 이 닭대가리야 금세 까먹어요, 주님이 옆에 계신다는 것을.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 해결해 주세요, 하면, 그래 알았어. 해결해 줄게 해결해 주고 난 다음 또 다른 어려움에 또 호들갑 떨고. 바다의 풍랑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난 그 이후에도 계속 풍랑은 있었겠죠. 우리 죽을 때까지 풍랑에 시달려요. 그 네 가지의 두려움에 시달려요. 그건 사제건 뭐건 색깔만 다를 뿐 풍랑은 지금도 치고 있고 앞으로도 칠 거예요.
제자들이 평화를 되찾은 이유는 ‘예수님이 내 옆에 계셨구나.’ 하는 것을 그때야 안 거예요. 마치 처음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처럼 멍청하게, 3년을 예수님의 숨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도우미 노릇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계속 반복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반복이 될 때마다 ‘아유 바보야, 나는 언제나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질까?’
주님이 내 앞길 선하게 예비하고 계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제껏 살아온 걸로 봤을 때 정말 고비 고비마다 그분이 살려줬다는 걸 알면서도, 두려움이 닥치면 어쩔 줄 모르고 하느님을 찾기보다는 인간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먼저 찾잖아요. 다시 말하면 환경이 변화돼야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을 모시는 내적 변화가 있을 때 그때 비로소 평화가 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풍랑보다 바람보다 더 거칠고 무서운 태풍 속에 갇힐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이었던 순교 성인들 또 김대건 신부님, 최양업 신부님, 이런 분들은 목숨까지 내던져야 하는 복음 선교에 풍랑을 겪으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았어요.
최양업 신부님의 서간집이 있죠. 내가 만일 그 입장이라면 어찌 이렇게 담대하게 편지를 쓸 수 있었을까, 정말 글자 하나하나가 다 신앙이에요. ‘자기의 동창이었던 김대건 신부는 이미 목이 베인 상태고, 서양 신부들은 있지만 얼굴 생김새가 다르니 돌아다니면서 선교할 수가 없고, 조선 팔도에 있는 천주교 신자들은 최양업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당연해야지. ’
아무리 풍랑이 일어도 하느님 중심의 삶, 성령 중심의 삶, 성모님 중심의 삶, 말씀 중심의 삶, 이 4대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뒤집혔던 배도 금세 제자리를 찾아요. 이 네 가지의 중심이 내 안에 차 있을 때는 절대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아요.
저도 제 사제생활 41년을 뒤돌아보면, 더 나아가서는 신학생 생활도 순탄하게 하질 않았죠. 사제 서품 받기 1년 전에 허리 디스크가 생겨 사제 서품씩 4시간 전에 보류됐어요.
따져보면 신학교 10년, 사제생활 41년, 51년 동안 정말 많은 풍랑 속에 살았지만 그래도 하느님께 감사한 것은 신학생 때도 나는 이 네 가지의 중심의 삶을 살려고 애를 썼던 것 같아요. 절대 내 안에서 하느님 놓치면 안 된다. 절대 성모님 멀리하면 안 된다. 절대로 성령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뭔가 할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기를 쓰고 저는 성경을 읽었어요. 지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신학생 때 성경책 보신 분 있죠? 다 너덜너덜해.
하느님 중심, 성령 중심, 성모님 중심, 말씀 중심, 이 중심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어떤 태풍이 오더라도, 지금 태풍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육지에 닿을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늘 그런 얘기를 했죠. 여러분의 가슴속에 인간을 담지 말고 뭐를 담으라고요? 하느님을 담고 살아라. 그래야 평화를 안 잃어버리고 담대해지고 영적으로 배짱이 생긴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해요.
저는 제 가슴속에 사람 안 담아요. 저는 사재로 살면서 참 많이 사기도 많이 당한 신부예요. 일할 때마다 사기당했어요, 그것도 믿었던 사람들한테. 인간에 대한 배신을 겪고 난 다음에 얻는 영적인 축복은 뭐냐? 하느님과 가까워졌어요. 인간을 사랑하되 믿진 않아요.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죠. 사람한테 믿는다는 말 안 써요. 그 말은 하느님한테만 써요. 저는 그전에는 사람한테도 믿는다는 말을 썼었거든.
‘나 너 믿으니까 이 일 좀 해봐.’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교묘하게 사기를 치는지. 모르는 사람한텐 믿음이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는 믿음이 아니라 신의의 관계라고 그랬죠. 그 신뢰의 관계엔 다리가 놓여 있는데, 그 다리는 분별이라는 나사로 쪼여져 있죠.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내 분별이 부족하면 그 다리는 허물어져요. 어떤 때는 내가 등신 같아서 상대방을 죄짓게 할 때 있어요. 내가 조금 더 지혜롭고 좀 더 분별이 있으면 저 사람이 나한테 그런 마음 안 먹었을 텐데, 내가 멍청하니까 나를 깔보죠. 내가 영적으로 지혜롭지 못하고 분별치 못하기 때문에 상대편을 죄짓게 하는 때도 있어요. 그것도 큰 성사 거리예요.
저는 교우들에게 사람을 가슴에 담지 말아라. 하느님을 가슴에 담아라. 죽을 때까지 여러분들 가슴에 나를 담지 말아요. 내가 여러분 배반할 수도 있어요. 여러분 가슴에 나 담지 말고 누구 담아야죠? 그렇죠, 하느님을 담으세요.
90년대에 제가 중국 선교를 다녔다고 그랬죠. 중국 선교 다닐 때 말만 문호를 개방했지 아주 살벌했었어요. 공안들이 나타나서 총을 막 들이대고, 비행기 안까지도 막 들어오고요. 선교할 때 내 몸에 묵주 감아 가져간 얘기 들으셨죠? 처음에는 모르고 사과 상자에 묵주, 십자가, 성경책 등 잔뜩 세 박스를 가져갔다가 공항에서 다 뺏겼잖아요.
‘너 분명히 관광으로 들어왔는데, 뭐 하는 거야? 아편을 퍼뜨리려고 왔니?’ 공산주의들 입장에서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에요. 그러면서 보관증 써줄 테니까 나갈 때 찾아가래요. 그래서 두 번째 갈 때는 어떻게 했다고 그랬어요. 고민, 고민하다 묵주를 전달하고 싶은데, 50년 동안 공산 치하에서 성물이 뭐가 있었겠어요? 그래서 묵주를 전부 다 줄로 엮어서 발목서부터 칭칭 감았죠. 십자가도 7개 정도 몸에 붙였죠. 비행기에 앉아 있는데 피가 안 통하는 거야, 또 구부리면 묵주가 다 끊어지니 어정쩡 자세. 그때만 하더라도 공항에 현대화된 탐색기가 없었어요. 공안이 이렇게 보다가 랜덤으로 ‘이리 와봐 열어봐.’ 나도 어정쩡하게 걸어 나가면서 공안이라 눈 안 마주치려고 앞에만 보았죠. 그런데 ‘스톱’ 소리가 나서 난 줄 알았는데, 다행히 뒷사람이었어요. 빠져나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공소회장 봉고차 타서 옷을 다 벗고서는 그걸 다 풀었어요.
그때 마중 나왔던 신자들이 펑펑 울었죠. 지금 생각하면 공안에 걸리면 감옥에 바로 가는 건데 무슨 배짱으로 그리했는지. 그때는 딱 하나예요. 우리는 중국에 신앙적으로 빚이 있어요. 중국을 통해서 천주교가 들어왔잖아요. 그리고 제일 먼저 순교한 신부님이 중국 신부님이야. 주문모 신부님. 그래서 50년 만에 한국 신부가 선교하러 들어가는 거예요. 저는 5년 동안 조선족들을 선교했고 5년 동안은 한족들을 선교했죠.
최양업 신부님 김대건 신부님이 부제 때 머물던 소팔가자에는 현수막을 미리 만들어 갔죠. 중국 사람들은 황금색을 좋아하니까 빨간 천에 황금색으로 ‘김대건 신부 추모 현양회’라고 한문으로 적은 현수막을 걸고 5일 동안 피정을 시켰어요. 가서 보니 옛날에 여기서 머물던 김대건 신학생이 성인이 됐다는 걸 다 알아요. 그래서 대건이라는 이름이 참 많았어요. 그런데 내가 그곳 피정을 3년 터울로 3번 갔는데, 2번째 갔더니, 세상에 꼬마를 데리고 나오는데, 얘가 웅렬이래요. 또 간난 아기를 안고 오는데 이름이 웅렬이. 내가 간 다음 낳은 애들은 다 웅렬이야. 이것이 90년대 이야기이니, 지금은 삼십이 훌쩍 넘었을 거예요.
지금은 이렇게 웃지만 몇 번 추방당할 때도 있었죠. 한 번은 연길 회장님 아파트에 있는데 공안이 총을 들고 들어왔어요. 그랬더니 짐 싸래요. 추방한다고. 그래서 왜 그러냐 물었더니 내 앞에 평화신문을 던지면서 보래요. 신문을 보니까 ‘김웅열 신분 연변 자치주 피정’ 이렇게 대문짝만하게 나와 있는 거예요. 그 공안들이 한국에서 오는 신문 다 검열하잖아요. 중국에 들어와서 아편을 퍼트린 것 알고 있으니 나가라는 거였지요.
그때 내가 심양교구 중국 주교님을 잘 알고 있었어요. 주교님은 공산당 중에서도 급이 높죠. 중국은 주교들을 전부 다 공산당이 임명하니, 그러니까 전부 다 상무위원급, 대개 시장급이야. 전화해서 상황이 이런데 도와달라 하니, 공안을 바꾸래요. 공안이 신문에 내지 말고 들어오라고, 나는 이미 요주의 인물이니 다시 한번 이러면 그때는 주교고 뭐고 상관없으니 각오하라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축복이고 은총이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다른 신부님들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잖아요.
그렇게 수많은 기적을 눈으로 보았던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배를 탔으면서도 살려달라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에서, 분명 우리들은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지요. 그렇지만 성체를 모시고 그리스도와의 동일화 신비 속에 산다면, 바람 같지 않은 바람에 병든 잎처럼 떨어지는 법은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려움이 올 때마다 기도할 생각은 안 하고, 분노하고 원망하고 남 탓만 하고 살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죠.
제가 참 많이 강조했죠. 많은 교우가 착각하는 게 한 가지가 있다. 걱정을 기도라고 생각한다. 들어보셨죠? 많은 교우가 기도한다고 앉아 있는데, 사실은 기도가 아니라 걱정만 하다 끝나는 거예요. 걱정만 하다 보면 마귀가 들끓어요.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걱정하는 기도는 하느님께 올라가지도 않아.
그런데 정말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얘기 들으셨죠? 기적이 일어나요. 그래서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기도까지 못 가고 걱정만 하게끔 만들어요. 기도하려고 딱 묵주 잡으면 온갖 분심 잡념 걱정거리가 생각나요. 그것은 묵주 기도가 아니죠, 그냥 걱정만 하다 끝난 거죠.
‘마리아야, 스테파노야, 안젤라야, 안나야, 프란치스코야, 루가야, 다미아노야, 베로니까, 막달레나, 안드레아야, 루시아야, 요한나, 바울아, 도미니카야, 밸라뎃다야, 수산나야, 안젤라야, 엘리사벳아, 유스키나, 스텔라, 요한아. 젬마야, 로사야, 세실리아, 소피아, 크리스티나, 데레사야, 율리안나야, 가브리엘라야, 카타리나야’
‘왜 그렇게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제껏 불렀던 이름들, 또 부르지는 않았어도 여러분들 다 세례명이 있잖아요. 오늘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은 그거예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너 세례받은 지 40년이 넘었잖아? 너 본당에서 간부하고 사목회 임원하고, 너 꾸리아, 레지오 나간 지 수십 년이 지났잖아. 그런데도 왜 이렇게 우왕좌왕하니,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니, 내가 옆에 있는 거 너 모르니, 언제야 네 믿음이 채워지겠느냐?’
오늘 그 믿음을 조금 더 채우기 위해서 여기 불러주셨죠? 믿음은 한 번에 채워지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서, 체험을 통해서, 은혜로운 미사를 통해서, 은혜로운 장소에서 우리 믿음은 채워져요. 제가 콩나물 신앙 얘기 많이 하죠. 콩나물 시루에 물 부으면 물은 다 빠져나가요, 그래도 콩나물은 자라요. 여러분이 여기 와서 집에 가실 때는 은총의 물을 맞고 가시는 거예요. 제가 식사하시고 난 다음에 하실 아주 중요한 일 하나 알려드릴게요. 이렇게 보면 아무리 매트를 깔았어도 씨가 날아와 잡초 같은 것이 올라와요.
라틴어 격언에 그런 말이 있어요. ‘잡초 하나 뽑을 때마다 천국을 향하여 한 발을 나아간다.’ 나도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토마스 킴이라는 분이 이야기하신 것 같아요. 어떤 분들은 어느 게 잡초고 어느 게 아닌지 헷갈린다고 하세요. 저도 헷갈려요. 그런데 잡초는 잡초처럼 생겼어. 그리고 굉장히 잘 뽑혀요. 만일 뽑았는데, 여러 개가 쫙 모여 있으면 그것은 100% 야생화에요. 그래서 만일에 뽑아놓고 내가 이게 지금 큰일을 저지른 게 아닌가 하시는 분은 휙 하고 몰래 버리지 말고, 여기 관계 요원들에게 말하세요. 도와주실 겁니다. 그러면 제 수고가 좀 덜어져요. 어제 또 비가 왔기 때문에 얘네들이 많이 확 올라왔을 겁니다.
여러분들 이제 겁먹지 마세요. 오늘 나오는 제자들처럼 우왕좌왕하지 말고, 정말 어떤 폭풍이 몰아오더라도 ‘그래 주님 내 옆에 계신데, 까짓거 죽기밖에 더 해.’ 그런 배짱이 있어야 해요. 저는 그런 배짱으로 살았어요. 그렇기에 두려운 게 없고 무서운 게 없어. 오직 하느님만 두려워해요. 저는 사람은 안 두려워해요. 환경도 안 두려워해요. 돈도 안 두려워해요.
그래서 오늘 주신 이 거룩한 말씀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것은 2천년 전 열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이라는 것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