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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20세기의 출애굽기: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프롤로그 – 시대를 관통하는 거대한 해방의 드라마
20세기 미국 문학의 가장 거대한 기념비이자,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신음소리를 담아낸 한 편의 서사시인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이야기입니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과 대기근이라는 가혹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오클라호마의 고향 땅을 빼앗기고 약속의 땅이라 불리는 캘리포니아를 향해 낡은 트럭 한 대에 몸을 싣고 떠났던 조드(Joad) 일가의 비극적인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자본주의의 모순을 고발한 사회주의적 문학이나, 혹은 예슈아를 모티브로 한 짐 케이시의 희생을 다룬 기독교적 알레고리로 읽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텍스트의 밑바닥에서 유구하게 흐르는 가장 거대하고 고결한 영적 줄기를 추적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 민족의 불멸의 역사이자 전 인류의 해방 서사인 ‘출애굽기(Exodus)’의 역사이며, 이를 관통하는 유다이즘(Judaism)의 위대한 예언자적 전통입니다.
스타인벡이 묘사한 오클라호마의 붉은 흙먼지와 캘리포니아의 푸른 들판은 결코 단순한 미국의 지리적 배경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천 년 전 유대 조상들이 온몸으로 돌파해야 했던 미쯔라임(이집트) 이였으며, 하나님과 마주했던 시나이 광야였으며, 피와 눈물로 들어가야 했던 약속의 땅 가나안의 향한 발걸음의 현대적 재현이었습니다.
조드(Joad) 일가의 낡은 트럭은 홍해를 건너던 히브리 노예들의 행렬이었고, 그들이 마주한 비극은 인류가 우상숭배와 탐욕에 눈멀 때 어떻게 신의 형상을 잃어버리는지 보여주는 영적 교훈입니다.
오클라호마의 미쯔라임(Mitzrayim) – 탐욕의 우상과 노예화
출애굽의 역사는 언제나 ‘미쯔라임(Mitzrayim)’, 즉 이집트라는 억압의 장소에서 시작됩니다. 히브리어 어원으로 미쯔라임은 ‘좁은 곳’, 즉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사방에서 압착하여 숨 쉬지 못하게 만드는 ‘한계와 절망의 감옥’을 의미합니다. 스타인벡이 묘사하는 소설의 도입부, 오클라호마는 완벽한 미쯔라임이었습니다. 자연은 거대한 먼지 폭풍을 일으켜 태양을 지워버렸고, 땅은 어머니의 젖줄을 말리듯 생명력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미쯔라임의 비극은 자연이 아닌 인간에게서 왔습니다. 토라(Torah)에서 이집트의 바로(Pharaoh)가 자신의 성을 쌓기 위해 히브리 노예들의 노동을 쥐어짜고 아이들을 강에 던졌듯, 오클라호마에는 ‘은행’과 ‘대지주’라는 이름의 현대적 바로가 등장합니니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제도이자 괴물이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지주의 대리인들은 농부들을 찾아가 차갑게 선언합니다.
"은행은 사람이 아니오. 은행은 괴물이란 말이요. 은행은 오직 돈과 이익만을 먹고 살아야 하고, 멈출 수 없소. 당신들이 대대로 이 땅에서 피땀을 흘렸다는 건 중요하지 않거늘, 내일 당장 트랙터가 당신들의 집을 밀어버릴 것이오."
현대 사회가 나은 끔찍한 우상숭배의 현장입니다? 유대주의가 규정하는 가장 큰 죄악인 우상숭배는 단순히 금송아지 앞에 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자본, 시스템, 기술을 살아있는 인간의 존엄성보다 위에 두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이웃의 생존권을 제물로 바치는 모든 행위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스타인벡의 트랙터는 바로 고대 이집트의 채찍이자, 인간의 영혼을 쇠붙이로 짓밟는 우상의 상징이었습니다.
농부들은 소리쳤습니다. "이 땅은 우리 조상의 피가 스민 성소(요!" 그러나 우상의 하수인들에게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집이 허물어지고 삶의 터전이 박탈당한 순간, 조드 일가에게는 오직 한 가지 선택만이 남았습니다. 미쯔라임을 떠나는 것, 즉 탈출(Exodus)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문 대대로 내려온 가구들을 단돈 몇 달러에 눈물을 머금고 팔아치우고, 낡은 윌리스 나이트 트럭에 삼대의 목숨을 실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노예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향해 위대한 첫발을 내딛는 히브리 민족의 엄숙한 행진이었습니다.
루트 66, 시나이의 미드바르(Midbar) – 시험받는 영혼들
조드 일가가 진입한 66번 국도는 다름 아닌 ‘미드바르(Midbar)’, 즉 시나이 광야였습니다. 유다이즘에서 광야는 이중적인 공간입니다. 그곳은 물리적 보호막이 사라진 철저한 죽음의 위협지인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마주하고 신의 음성을 듣는 영적 각성의 장소입니다.
66번 국도 위에서 조드 일가는 극심한 시험에 직면합니다.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겪었던 조상들과의 단절, 그리고 죽음이었습니다. 고향 땅의 흙을 떠나기를 거부했던 할아버지는 트럭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뇌졸중으로 길 위에서 숨을 거둡니다. 뒤이어 할머니 역시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둔 국경 지대에서 싸늘한 시신이 됩니다.
유대 전통에서 죽은 자를 존엄하게 묻는 행위는 ‘헤세드 쉘 에메트(חֶסֶד שֶׁל אֱמֶת)’, 즉 어떠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가장 순수하고 거룩한 자비입니다. 돈이 없어 관을 살 수도, 합법적인 장례를 치를 수도 없었던 조드 가족은 할아버지를 광야의 은밀한 곳에 묻으며 병 속에 편지를 써넣습니다. "이 사람은 부랑자가 아니다. 평생 땅을 일구어온 품위 있는 인간이다." 이는 법과 제도가 인간을 버린 광야에서, 유대주의적 존엄의 법을 스스로 세우려는 눈물겨운 저항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광야의 길 위에서 조드 가문이 보여준 영적 진화입니다. 그들은 길 위에서 똑같이 고장 난 차 곁에 절망하고 있던 윌슨 부부를 만납니다. 식량도, 자리도 부족한 상황에서 마 조드(Ma Joad)는 가문의 경계를 허물고 손을 내밉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면 됩니다. 차가 있으면 같이 타고, 고기가 있으면 같이 나누어 먹읍시다."
이것이 바로 토라가 36번이나 넘게 마주치며 강조하는 위대한 명령, ‘게르(גֵּר, 나그네)에 대한 환대’입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용납하고 사랑하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니라." (레위기 19:34)
마 조드는 유대 율법을 배운 적이 없었지만, 고대 시나이 광야에서 유대 조상들이 맺었던 ‘브릿(Brit, 공동체적 계약)’의 정신을 본능적으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66번 국도변에 수백 개의 천막이 모여 임시 사회를 이루었습니다. 그곳에는 탐욕스러운 문명 사회가 팽개친 법, 즉 '굶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고, 아픈 아이를 함께 돌보며, 타인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여기는' 고대 광야의 거룩한 계약이 천막촌마다 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안의 배반 – 쩨덱(צֶדֶק, 정의)이 메마른 골짜기
마침내 조드 일가는 험준한 산맥을 넘어 황금빛으로 물든 캘리포니아의 장관을 목도합니다. 끝없이 펼쳐진 과수원,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계곡. 그곳은 겉보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발을 내딛는 순간, 그 가나안은 축복의 땅이 아니라 인간의 잔인한 탐욕이 결집된 또 다른 지옥이자 심판의 골짜기임이 드러났습니다.
스타인벡은 캘리포니아의 대지주들과 기득권층이 이주민들을 어떻게 조직적으로 파멸시키는가에 대해 분노를 터뜨립니다. 지주들은 8만 명의 노동자가 필요한 자리에 30만 장의 구인 광고를 뿌렸습니다. 절박한 이주민들이 몰려들자 그들의 목줄을 죄며 임금을 생존선 이하로 깎아내렸습니다. 굶주린 아이들이 길가에서 쓰러져가고 있는데, 시장의 가격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지주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오렌지에 석유를 뿌려 불태웠고, 감자를 강물에 던져 썩혔으며, 돼지를 살처분하여 구덩이에 묻고 석회를 뿌렸습니다.
유다이즘에서 이 장면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가장 참혹한 모독입니다. 유대 율법에는 ‘발 타쉬히트(בַּל תַּשְׁחִיתt, 함부로 파괴하지 말라)’라는 대원칙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자원을 인간의 사악한 이익을 위해 고의로 파괴하는 것은 온 우주의 주재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이러한 불의를 향해 사자처럼 부르짖었습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도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모스 5:11, 24)
유다이즘 속의 정의인 ‘쩨덱(צֶדֶק)’은 법 조문을 잘 지키는 소극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굶주린 자가 먹을 것을 얻으며, 사회적 약자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온전히 누리는 구조적 공평함을 의미합니다. 음식이 썩어가는데 아이들이 굶어 죽는 캘리포니아의 현실은, 쩨덱이 완벽하게 메말라 버린 범죄의 현장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권력자들은 이주민들을 인간이 아닌 ‘오키(Okies)’라는 멸칭으로 부르며 격리하고 자경단을 조직해 폭력을 일삼았습니다. 이는 타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기를 거부한 죄악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릴 때, 그 사회에는 선지자들이 경고했던 '분노의 포도'가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탐욕의 포도주 틀에서 짜인 그 포도즙은 마침내 압제자들의 머리 위로 쏟아질 심판의 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짐 케이시와 톰 조드 – 예언자적 소명과 티쿤 올람(תִּיקּוּן עוֹלָם)
이 깊은 가나안의 어둠 속에서, 소설은 우리에게 출애굽기의 모쉐와 아하론처럼 영적 해방을 이끄는 두 명의 예언자적 인물을 제시합니다. 바로 전직 전도사 짐 케이시(Jim Casy)와 마 조드의 아들 톰 조드(Tom Joad)입니다.
짐 케이시는 전통적인 교리와 제도권 종교의 울타리를 과감히 깨부수고 광야로 나온 인물입니다. 그는 베드로처럼 골방에서 기도하는 대신, 굶주린 이주민들의 비참한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각자 떨어진 파편이 아니라, 인류라는 하나의 거대한 영혼의 조각들이다." 이것은 유대교 카발라(Kabbalah)의 핵심 사상이자, 전체 공동체의 운명적 연대를 뜻하는 ‘클랄 이스라엘(Klal Yisrael)’의 정신과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케이시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임금을 위해 파업을 주도하다가, 기득권의 하수인들이 휘두른 둔기에 맞아 "당신들은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는 말을 남기고 목숨을 잃습니다. 그의 죽음은 불꽃이 되어 톰 조드의 영혼에 옮겨붙었습니다. 톰은 처음에는 자기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하던 거칠고 개인주의적인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케이시의 희생을 목격하고 광야의 고통을 함께 통과하며, 그는 시나이산의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 일어선 모쉐로 완전히 거듭나게 됩니다.
톰이 어머니 마 조드와 마지막으로 이별하며 숲속의 어둠 속에서 남긴 대사는, 인류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예언자적 선언이자 유다이즘의 핵심 가치인 ‘티쿤 올람(תִּיקּוּן עוֹלָם, 세상을 고치는 인간의 책임)’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어머니, 제가 어디 있는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사방을 둘러보시면 제가 있을 테니까요. 굶주린 사람들이 먹을 걸 달라고 소리치는 곳 어디에나 제가 있을 거예요.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 곳 어디에나 제가 있을 거예요... 사람들이 스스로 지은 집에서 살며 행복해하는 곳, 그곳에도 제가 있을 거예요."
유다이즘에서 메시아의 시대는 신이 독단적으로 베푸는 마술이 아닙니다. 인간이 불의에 맞서고,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며, 깨어진 세계의 파편들을 하나씩 이어 붙이는 실천적 저항을 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톰 조드는 안락한 피신처를 떠나 불의한 세상이라는 광야로 자신을 유배 보내며, 세상을 치유하는 티쿤 올람의 거룩한 전사가 된 것입니다.
로자셴의 젖 – 죽음의 골짜기에서 피어난 헤세드(חֶסֶד)
이제 우리는 이 웅장한 서사의 종착지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성스러운 구원의 정점인 제30장의 헛간으로 향합니다.
하늘에서는 대홍수와 같은 장대비가 쏟아져 이주민들의 천막과 연대의 보루마저 모두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모든 재산을 잃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던 조드 일가는 겨우 고지대에 있는 어느 허름한 헛간으로 대피합니다. 그 어두운 헛간 구석에는 며칠 동안 아들에게 모든 음식을 양보하고 자신은 정작 아사 직전에 이른 한 노인이 누워 있었습니다. 노인은 이미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어, 단단한 빵조차 삼킬 수 없는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이 극한의 절망 속에서, 얼마 전 영양실조로 아이를 사산하여 가슴에 젖이 가득 차 통증을 느끼고 있던 조드 가의 딸, 로자셴이 천천히 일어섭니다. 그녀는 어머니 마 조드와 소리 없는 눈빛을 교환합니다. 위대한 어머니들의 연대 속에서 언어는 필요 없었습니다.
로자셴은 낯선 노인에게 다가가 그의 곁에 눕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들추어 굶어 죽어가는 노인의 입에 가슴을 물립니다. 소설은 로자셴이 노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슬프고도 신비로운 가슴 벅찬 미소를 짓는 장면으로 막을 내립니다.
세속의 눈으로 볼 때 이 장면은 당혹스러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다이즘의 거룩한 눈으로 볼 때, 이 헛간은 우주의 지성소(Holy of Holies)이며, 이 행위는 인류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헤세드(חֶסֶד, 조건 없는 사랑과 자비)’의 극치입니다.
자신의 아기를 잃은 죽음의 슬픔이 머물던 로자셴의 자궁과 가슴이, 도리어 죽어가는 다른 이의 생명을 살리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유대 전통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 중 하나는 ‘엘 샤다이(אֵל שַׁדַּי, El Shaddai)’입니다. 흔히 전능자로 번역되는 이 단어의 히브리어 어원은 놀랍게도 ‘여성의 유방(שַׁד, Shad)’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자녀에게 젖을 물려 생명을 양육하고 품어주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모성적 얼굴을 뜻합니다. 또한 자비를 뜻하는 히브리어 ‘라하밈(Rachamim, רַחֲמִים)’ 역시 어머니의 ‘자궁(רֶחֶם, Rechem)’에서 나옵니다.
로자셴은 그 어두운 헛간에서 하나님의 모성적 자비를 자신의 인간적인 몸으로 완벽하게 구현해 낸 것입니다. 혈연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일면식도 없는 나그네에게 자신의 가장 깊은 생명의 정수를 나누어준 이 위대한 결말은 자본의 탐욕과 권력의 냉대가 인간성 앞에 완벽하게 패배했음을 선언하는 구원의 찬가입니다. 바로의 군대는 그들의 집을 부수고, 땅을 빼앗고, 아이를 죽였을지언정, 그들 영혼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형상’’만큼은 끝내 더럽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출애굽을 위하여
왜 우리는 오늘날 1930년대 미국의 농부들에게서 고대 히브리인들의 숨결을 읽어내야 합니까? 유다이즘은 단순히 박물관에 갇힌 율법의 파편이 아니라, 압제받는 자들이 어떻게 연대하고, 광야를 어떻게 통과하며, 무너진 세상을 어떻게 바로잡아 가야 하는가에 대한 생생한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스타인벡이 고발했던 분노의 포도는 1930년대 미국의 먼지 날리는 과수원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재 이 순간에도 시스템의 거대한 트랙터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과 자본의 풍요 속에서도, 여전히 수많은 현대인들이 보이지 않는 미쯔라임의 노예 사슬에 묶여 신음하고 있으며, 무한 경쟁이라는 냉혹한 광야 위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윤과 효율이라는 현대적 금송아지 앞에 인간의 가치가 지워지는 비극을 우리는 매일 목도합니다.
조드 일가의 위대한 출애굽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헛간의 어둠을 밝히던 로자셴의 미소는, 우리에게 절망의 나락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서로를 구원하며 거룩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원한 불기둥입니다.
불의한 시대를 향한 선지자적인 거룩한 분노를 잃지 마십시다.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이 있음을 고백하며, 마침내 정의(צֶדֶק, 쩨덱)가 강물처럼 흐르고 자비(חֶסֶד, 헤세드)가 온 세상을 덮는 그날까지, 우리 함께 손을 잡고 이 시대의 광야를 당당히 걸어 나아갑시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울린 위대한 문학 《분노의 포도》가 시대를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토라의 불화살처럼 던지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여정의 끝에서 마주할 진정한 해방을 소망하며, Shalom Aleichem!
By Torah & Judaism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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