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35
6월28일[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가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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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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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3jDAmvGnUGs (김도연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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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전부이고 요약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통 교리에 크게 벗어나는 이단이 속출하고 있는데, 한없이 부족한 인간이 한없이 심오한 하느님을 알아가고 이해하고 가르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대형사고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지속적인 겸손의 덕이며 교회 정통 가르침에 대한 충실성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출몰해서 신자들을 대혼돈과 분열로 몰고 갔는데,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이레네오 성인은 이단과의 투쟁에 가장 앞장섰던 분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어색하고 황당한 논리와 주장에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과 강론을 많이 하셨는데, 이를 집대성한 자료가 '이단 논박' 혹은 '이단을 거슬러'라는 문헌입니다.
아직도 판을 치는 이단이나 사이비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릇된 신념에 대한. 확고함입니다.
결국 깊이 파고 들어가면 사이비 교주들의 개인적 야욕과 사심, 과대망상증이 있습니다. 그리고 추종자들의 미성숙한 신앙, 식별력 부족도 사이비들이 활개치는 데 크게 한몫을 합니다.
우리 가톨릭 신앙이 이름처럼 공번되고 보편적이고 상식적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때로 느려 보이고 답답해 보이고 활기차거나 신명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양한 신앙의 유산들, 보물들과 더불어 지극히 이성적이고 동시에 현실적이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이레네오 성인의 생각은 얼마나 교회적이고 정통적인지 모릅니다. 그는 신앙의 규정이 사도신경과 성체와 일치에 있으며, 이는 복음 해석의 열쇠가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사도 전승은 하나이고 공적이며, 성령께서 인도하시기에 영적이므로 교회와 성령을 분리시킬 수 없음을 주장하며 사도 전승에서 많이 벗어난 영지주의자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전부이고 요약입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성체성사와 일치하며, 성체성사는 사고방식을 확인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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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6rX3A0bsn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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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열매가 좋은 열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거짓 예언자에게 속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자신과 일가족의 인생을 망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사이비와 같은 것에 빠지는 이들은 사실 외적으로 주어지는 다른 만족감에 도취하여 교주가 거짓 예언자인지, 제대로 된 예언자인지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잃습니다. 그러나 책임은 결국 자신이 져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군가에게 배우기 이전에 먼저 그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이 말씀이 있기 전에 ‘황금률’ 이야기하셨고 ‘좁은 문’ 이야기하셨습니다. 황금률은 사랑하라는 것이고 좁은 문은 주님 뜻을 따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주님의 뜻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인지 알아보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JTBC ‘싱어게인’ 노래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이승윤’ 씨의 아버지 이재철 목사의 ‘눈물로 얼룩진 아내의 일기장’에 관한 내용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아내가 어떻게 술주정뱅이 남편을 회개시켜 목사가 되게 하였는지, 이재철 목사의 간증을 있는 그대로 옮겨봅니다.
“아마 제 처는 제가 믿음이 좋은 집사라고 생각하고 결혼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매일 술독에 빠져 살았습니다. 매일 술에 취해서 늦게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빨리 들어가면 술친구들 집에 데리고 들어갑니다. 제 처는 성악을 전공했습니다. 술집에서 술을 먹다가 객기를 부리고 싶으면 아내를 불러 노래시켰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거부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성품이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매사에 착한가 보다 하고 감사했습니다.
1984년 8월 2일 새벽 2시에 그날도 꼭지가 돌도록 술을 마시고 그날 우연히 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열쇠가 손에 잡히는 거예요. 저는 술을 먹고 아무리 늦게 집에 들어가도 꼭 벨을 눌렀습니다. 그래야 아내가 깨서 저녁 밥상을 차려주거든요.
저는 술집에서 아무리 술안주를 많이 먹어도 밥 배가 따로 있었습니다. 집에서 밥을 안 먹으면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새벽 1시든 2시든 벨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주머니에 아파트 열쇠가 잡혀서 열고 들어가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들어갔는데 거실도 어머니 방도 캄캄해요. 부부방으로 들어갔더니 불은 다 꺼지고 방바닥에 작은 전등이 켜져 있는데 제 처가 저를 기다리다가 엎드려 잠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머리맡에 노트하나가 펼쳐져 있는데 노트에 물이 흘러서 얼룩이 져 있었습니다. 원래 그러지 않는데 왠지 그 노트의 글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는 제가 그 글을 읽었다는 것을 6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6년 뒤 쓰게 된 나의 고백이라는 책의 내용을 통해서 아내는 제가 어떤 계기로 주님께 사로잡히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 노트의 글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수유리 너머로 갔다.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으며 오늘도 죽음을 생각했다. 약을 먹고 죽을까 아니면 손목을 그어 죽을까… 그러나 그것은 내가 취할 길이 아님을 나는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되돌아왔다.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위해 내게 주신 남편이니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사랑하라 명령하시므로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주님 도와주세요. 나의 약함을 주님께서 잘 아시잖아요.’
제가 이 글을 읽는데, 제 마음과 귀에서 북소리가 풍풍 울리는데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큰 북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교회 다니며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사랑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 사랑은 성경에 문자로만 기록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사랑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을 저는 그동안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재철 목사의 아내는 분명 좋은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남편이 그 열매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결국엔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커다란 북소리를 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놀라움’입니다. 진정 자기 자신과 또 누군가에게 놀라움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좋은 징조가 아닙니다.
호두는 딱딱한 껍질에 쌓여 있습니다. 그 가녀린 새싹이 그 딱딱한 껍질을 뚫고 나와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 그지없습니다. 호두 열매가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땅의 역할이 큽니다. 땅이 그 엄청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호두 열매가 나무가 되는 그 신비한 장면을 보며 땅의 역할을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열매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놀라움을 선사합니다.
좋은 열매란 내가 죽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를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좋은 예언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내 뜻을 죽이고 주님의 뜻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웁시다. 그러면 틀림없이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한 과정에서 나도 놀라고 이웃도 놀랍니다. 모세가 본 불붙은 떨기나무처럼 나무인데 꺼지지 않는 불이 붙어 있어서 놀라워야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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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전에 사목국에 있을 때입니다. 11월에는 교구장님의 ‘사목교서’ 설명회가 있었습니다. 본당의 사목회장님, 기획분과장님, 총무님이 주로 오셨습니다. 교구장님의 사목교서를 발표한 후에 교구의 각 부서의 다음연도 행사의 일정을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사목국의 교육담당 신부였기 때문에 주로 교육일정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총구역장 피정, 구역장, 반장 교육, 사목위원 교육, 지구연수와 같은 일정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냥 이야기만 하면 지루하기 때문에 가끔 양념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당시에 기억나는 이야기 중에 ‘성직자와 조폭의 닮은 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검은 옷을 주로 입고 다닌다. 자기 지갑을 열어 돈을 내는 법이 없다. 서열이 확실하다. 남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조직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일면 비슷한 점이 있기에 당시에 ‘소화제’처럼 웃음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꾸르실료 간부들과 식사를 하면서 제가 지갑을 열어 계산했습니다. 그랬더니 형제님 한 분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이 계산한 것은 정말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성직자가 가난하기 때문에 계산을 못 하는 일도 있겠지만, 그만큼 대접받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터키 순례 중에 ‘카파도키아’의 오래된 동굴 성당을 보았습니다. 교회가 시작되면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동굴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세상의 것들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사랑에 더 깊이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은수자들은 동굴에서 살면서 기도하였습니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오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습니다. 이런 은수자들의 삶이 수도원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수도원과 교도소의 공통점을 생각해 봅니다. “세상과 고립되어 있습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합니다. 음식이 거칠고 부족합니다. 잠자리가 불편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도원과 교도소는 차임점이 분명이 있습니다. 수도원은 자발적으로 들어갑니다. 교도소는 강제로 들어갑니다. 수도원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나갈 수 있습니다. 교도소의 문은 닫혀있습니다. 형기를 마쳐야만 나갈 수 있습니다. 수도원과 교도소의 결정적인 차이는 ‘감사와 불평’입니다. 수도원은 모든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교도소는 불평과 불만이 넘쳐납니다. 스스로 원해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수도원처럼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찾아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타인을 위한 봉사와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버스를 타면 으레 뒷자리를 찾아갑니다. 뒷자리는 때로 멀미를 하고, 내릴 때도 늦게 내리지만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짐을 내릴 때도 버스 트렁크의 좁은 공간으로 들어가 이웃의 짐을 내려 줍니다. 허리가 아프지만 그것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본인의 간식은 물론 이웃의 간식까지 챙겨서 나누어줍니다. 그분들은 나눔의 기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교도소처럼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편하고 쉬운 일만 찾아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하지 못하고 늘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어서 순례를 여행처럼 생각합니다. 이웃의 순례와 묵상을 방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을 수도원처럼 살고 있는지, 교도소처럼 살고 있는지 내가 지나온 삶의 발자국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감사와 찬미,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내가 머무는 곳이 바로 수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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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15-20: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15절) 우리 신앙인은 일반 대중의 유행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닌, 그 반대로 세상을 거슬러 살아야 한다고 하신다. 신앙인은 돼지와 개로부터 만이 아니라, 이리로부터도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리는 개나 돼지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개와 돼지는 잘 보인다. 그러나 이리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낸다. 이리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고 하신다. 이리의 공격은 그것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시나무에서는 포도를 거두지 못한다. 거짓 예언자들은 덕의 가면을 쓰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기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20절) 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힘들고 고생스러운 길이다. 위선자는 수고하려 하지 않고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려고 한다. 그러므로 가면을 보지 말고 좁은 길을 따라가는 이들의 행실이 맺는 열매를 보아야 한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17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악인은 변화할 수 없다거나 선인은 결코 나쁜 길로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사람이 타락한 생활을 하는 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악하게 살았더라도 선으로 돌아설 수 있지만, 악하게 사는 동안에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는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19절)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거둘 수 없고, 가시를 맺는 나무에서 포도나 무화과를 거둘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악한 사람은 좋은 말씀을 듣지 못한다. 훌륭한 교사가 나쁜 것을 가르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나쁜 것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을 막기도 하신다. 자신의 입으로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분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면서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여야 하겠다.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모든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하느님 안에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거기에 우리의 삶도 참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는 생활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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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거짓 예언들을 조심하여라.>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20)
이 말씀을 바로 앞의 ‘좁은 문’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거짓 예언자들’은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문’으로 가라고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왜 굳이 어려운 길로 가는가? 이왕이면 좀 더 쉬운 길로 가라.” 같은 말들이 그런 유혹에 해당합니다. 또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죄가 되는 일 같아서 망설이는데 옆에서 “괜찮아.” 라고 말하는 경우도 유혹입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에서는, 어떤 문이 ‘좁은 문’이고 어떤 문이 ‘넓은 문’인지, 즉 어떤 문이 ‘생명의 문’이고 어떤 문이 ‘멸망의 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이론만 내세우면서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부정합니다. 그런 점에서 거짓 예언자들을 식별하는 첫 번째 기준은,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는가?”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양의 옷차림’을 한다는 말은, 겉으로만 보면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속으로 악의를 품고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끌고 가는 거짓 예언자들이 많겠지만,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거짓 예언자인 줄 모르고 있거나, 또는, 자기는 진짜라고 믿고 있으면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자들이 위험한 것입니다. 바로 뒤에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 관한 가르침이 나오는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한 자들이 주님께 이렇게 항의합니다.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마태 7,22)
거짓 예언자들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합니다.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러니 그자들이 ‘하는 일’만으로는 거짓 예언자인지 진짜 예언자인지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은 진짜일까? 진짜가 아니라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은 진짜일까? 마귀들은 거짓 예언자의 명령을 듣고 쫓겨나는 존재가 아닙니다.(사도 19,14-16) 그러니 그 일은 진짜가 아니라 속임수일 뿐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도 역시 진짜 기적이 아니라 속임수입니다.>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라는 말씀은, “속에 탐욕만 가득 들어 있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양을 구원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만 생각한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요한 10,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자들의 ‘행실’을 보면 식별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겉으로 보이는 ‘행실’만으로 식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로 겸손하고, 선하고, 사랑을 잘 베푸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열매’는, 여기서는 ‘행실’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활동의 결과’를 뜻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따라갔는데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버렸다면, 그 사람은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미리 식별하는 방법은 없는가? 우리가 믿는 교리를 부정하거나 왜곡한다면, 또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부정한다면 거짓 예언자이고, 그것을 식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라는 말씀은, 거짓 예언자들을 통해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라는 말씀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좋은 나무일 수 없고,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나쁜 나무일 수 없다.”로 표현을 바꿔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최종 결과에 대한 말씀이고, 중간 과정에서는 좋은 나무가 타락해서 나쁜 나무가 되는 일도 있고, 나쁜 나무가 회개해서 좋은 나무가 되는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원래는 좋은 나무였는데 변절해서 나쁜 나무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대로 바오로 사도는 원래는 나쁜 나무, 즉 교회를 박해하던 박해자였는데, 주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좋은 나무로, 즉 위대한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도 적용됩니다. “지금 나는 좋은 나무인가? 나쁜 나무인가? 지금 나의 삶은 구원을 향해서 가고 있는가?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진심으로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는 관심 없이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가?”
진실한 신앙인도 어느 순간에 변절하는 때도 많고, 구제 불능처럼 보였던 죄인들이 회개해서 성인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최종적으로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그러니 아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조심하고 조심하면서 끝까지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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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는 예수님의 경고를 전합니다.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양 떼로(시편 78[77],52; 에제 34,10 참조),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이들은 양 떼를 호시탐탐 노리는 이리(늑대)로 묘사되고는 합니다.(에제 22,27; 집회 13,17; 요한 10,12 참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전통적인 표상들을 사용하셔서, 하느님 백성으로 가장한 거짓 예언자들의 음흉함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의 실질적인 목적은 올바른 신앙을 지키는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양의 옷차림을 한 이리들을 분별하려면 ‘그들이 맺은 열매’, 곧 그들의 행실이 어떠한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가시나무나 엉겅퀴 같은 나무에서 포도나 무화과 같은 달고 영양가 높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거짓 예언자들에게도 선하고 올바른 행실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양의 탈을 쓴 거짓 예언자들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교회 역사 안에 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온갖 듣기 좋은 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현혹하는 이단들이 참으로 많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식별하려면 그 열매가 어떠한지를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전달하신 정통 신앙과 가르침에 일치하는지, 그들이 보이는 행실이 진실로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지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웃 사랑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등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저 느낌이 더 좋다거나, 나에게 주는 위로가 더 크다는 등의 피상적인 이유만으로 그들의 꾐에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은 리옹의 주교였던 성 이레네오 학자 기념일입니다. 2세기에 성행하였던 영지주의 이단의 위험성을 알아차리고 교회의 정통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이레네오 성인을 본받아, 우리도 주변에서 양의 모습으로 슬며시 다가오는 이단의 위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우리가 받은 소중한 신앙을 잘 지켜 낼 수 있는 역량을 키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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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김하석 도미니코 신부님]
전교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방법은 삶의 전교라고 한다. 신앙인으로써 모범적인 생활이야말로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보여주고 그들을 신앙으로 이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런데 종교를 가진 사람이 인구보다 많은 나라에서 거짓과 모함이 판을 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신앙인이 신앙인다운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죽하면 믿는 놈이 더하다는 말까지 하겠는가!
남을 탓하거나 타인을 구설수에 올리기에 앞서 먼저 나를 돌아다볼 일이다. 내 삶은 과연 남을 나무랄 만큼 반듯한가? 남을 비추어 자신을 보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이 먼저 행할 일이다.
가령 우리 공동체에 말이 많다면 누구를 떠올리기 이전에 내 말을 줄일 일이다. 미운 이가 많다면 먼저 내 행동을 돌아다볼 일이다. 내 행위에 대한 반성이 비난에 앞서야 한다. 그래서 신앙인은 말은 적게 하고 행동을 많이 해야 한다.
결국 내 행위는 나만이 아니라 내가 믿는 하느님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신앙인, 삶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가 사는 공동체는 건실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나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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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정제천 요한 신부님]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착한 양들은 목자가 참된 목자인지 도둑이나 삯꾼인지(요한 10,1-13) 살펴야 한다.
거짓 예언자나 못된 지도자 문제는 예수님의 중요한 관심사다. 착하디착하신 예수님이지만 못된 지도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에 대해서 얼마나 호되게 비난하시는가!(마태 23장)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 … 겉은 다른 사람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겉과 속이 다르다. 그러니 겉만 보아서는 안 되고 속까지 보아야 한다. 거짓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빌려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거짓 예언자 문제는 과거 일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다. 우리 교회에도 상주의 황데레사, 나주의 율리아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 일이 있다.
개신교에서는 신앙촌, 통일교가 적지 않은 사람들을 뒤흔들었다. 지금도 신천지 교회의 추수꾼들이 교회를 기웃거리면서 기성 교회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을 끌고 나간다고 한다.
어머니요 교사인 교회가 올바른 진리를 가르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올바른 행실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착한 신자들이 다른 데를 기웃거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신자들도 한 목자 아래 머물고 양들의 무리를 떠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참과 거짓을 식별할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초대교회의 가르침은 이것이다.
참된 예언자는 공동체 곧, 보이는 교회에 겸손하게 협력하도록 하지만 거짓 예언자는 자기를 앞세운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라는 오늘 복음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다면, 크게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거짓 예언자는 말로는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섬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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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예언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 현재의 이야기가 아니라,미래의 다가올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맡겨 주신 말씀입니다. 이 의미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 전해지는 하느님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는 미래의 이야기를 예고하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 다룬 것은 현재가 강조된 예언입니다. 문제는 하느님께 위탁받은 말씀을 전하는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탄압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참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반면에 거짓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이야기만 합니다. 그들은 임금의 귀에, 통치자의 눈에, 권력자의 마음에 드는 이야기만 전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에게는 하느님이 아닌 권력자들이 중심에 서 있습니다. 예언의 의미가 왜곡됩니다.
신약 시대에도 거짓 예언자들의 영향력은 여전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거룩한 사람이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 말씀을 전한다고 하였지만, 구약의 거짓 예언자들처럼 그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거짓 예언자들의 위험성을 아시고, 참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는 기준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선포가 맺는 열매를 통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이야기는 참예언입니까? 거짓 예언입니까? 우리가 이웃들 앞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우리 자신이 한 행동은 어떠한 열매를 맺을까요?
우리 가운데 누구도 거짓 예언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참 예언자가 되고 싶습니까?
우리의 말과 행동이 우리 이웃의 눈만이 아니라, 예수님께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며 행동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라는 좋은 나무에서 ‘주님’이라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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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령의 열매를 갈망합니다>
미국에 있을 때 사제관 뜰에는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많이 열렸고 그래서 늘 기대가 되었습니다. 새들과 너구리, 스컹크들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좋은 열매는 그들에게 맛있는 음식입니다. 그들은 단맛을 용하게 알고 무화과를 찾아왔습니다. 매서운 눈을 가지고 다가오던 그들이 구경거리였습니다. 잘 익은 좋은 열매는 사람의 손이 닿기도 전에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사람이나 과일, 채소에 이르기까지 잘 익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햇빛과 비, 그리고 밑거름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보면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서가 있는 곳에는 조화가 있고, 조화가 있는 곳에는 적절한 때가 있으며 적절한 때가 있는 곳에는 유익이 있습니다”(성 이레네오). 사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이 큰 사람이었는지는 입술로 하는 말에서가 아니라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도 그 끝을 보면 놀라워할 사람도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기다리며 햇빛과 비, 거름을 주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고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멋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없어지면 힘이 듭니다. 따라서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어야겠지만 기왕이면 갈수록 깊어지는 멋을 담아야겠습니다. 겉은 화려하고 속 빈 강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경륜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무서워합니다. 눈이 무섭다고 합니다. 제가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남의 속을 볼 줄 모릅니다. 다만 알고 보면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저를 무섭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뭔가 켕기는 것이 있지 않은지…. 따뜻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외견상으로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겉만 보아서는 그 사람이 사심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선적으로 사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속이 훤히 드러나게 됩니다. 더군다나“사람은 속여도 하늘은 못 속입니다.” 그러므로 눈속임으로 하지 않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서 좋은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육의 열매를 지향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갈망합니다.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우리의 전체 생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이 세 가지 각각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 또는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 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할 때 좋은 열매는 당연합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집니다.’ 결국 신앙과 사랑으로 무르익은 삶만이 심판의 불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익은 좋은 열매가 되십시오! 혹 시들한 열매가 보이거든 햇빛을 보게 하고 비를 맞을 수 있게 하며 그리고 거름을 주십시오. “열매를 보면 나무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녀를 보면 부모를 짐작하여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부끄럽게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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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는 지금 직접 하느님 아버지를 보지 못합니다. 또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기도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과연 하느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면서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십니다. 혹시 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 말씀드려 봅니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안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알았을까요? 볼 수 없고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성장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하느님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있으니 하느님을 볼 수 없고 하느님을 직접 느끼기도 힘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 하느님을 보고 느낄 수 있을까요? 이 세상 삶을 모두 마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가 될 것입니다.
어머니 배에서 나올 때는 어느 정도의 성장을 이루고 나서입니다. 비록 걷지도 또 말하지도 못하지만, 부모의 보호 아래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때 어머니 배에서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바로 그런 순간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 것을, 사랑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야 함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 삶을 마치고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직접 뵐 그 날을 기대하면서,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스스로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런데 많은 이가 나쁜 나무를 바라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거둘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 그 나쁜 나무에서 포도나 무화과가 나오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실제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의 거짓된 말과 행동에 빠져듭니다. 좋은 나무가 아닌 나쁜 나무를 바라보면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분명히 좋은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나쁜 나무의 모습을 따르면서,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나쁜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크게 후회할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알맞은 햇빛과 비, 풍부한 거름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 열매를 보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좋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구슬땀을 흘리며 나무에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줍니다.
농부이신 주님께서 만들어주신 이 좋은 환경에서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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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에게 달렸다>
마태오 7,15-20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나에게 달렸다>
내가 밝아야
나의 얼굴이 밝다
내가 고아야
나의 말씨가 곱다
내가 맑아야
나의 눈길이 맑다
내가 부드러워야
나의 손길이 부드럽다
내가 발라야
나의 발길이 바르다
내가 따뜻해야
나의 마음이 따뜻하다
내가 올곧아야
나의 삶이 올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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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믿음과 하느님 체험>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셨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명사이고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오늘도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믿었다고 전합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믿음의 새로운 차원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믿고, 믿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믿지 않고 살 수 없고, 다만 어떤 믿음을 선택하느냐 그것이 다를 뿐이라는 점 말입니다.
우선 하느님은 계신다고 믿거나 안 계신다고 믿는 것일 뿐 다 믿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믿든 나쁜 사람이라고 믿든 다 믿는 겁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아무도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또 가능성을 믿든 불가능성을 믿든 믿는 것이며 다만 불가능성을 믿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것은 시작도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성을 믿을 것인가, 불가능성을 믿을 것인가 늘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을 때도 이 관점에서, 그러니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고 믿거나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 불가능한 것이 있다면 그런 존재가 무슨 하느님입니까?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을 때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을 믿을 때는 거짓이 없이 진실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좋으신 하느님과 사랑의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거짓되고 악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하느님이 무슨 하느님입니까?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은, 늙은 그에게서 수없이 많은 자식을 주시겠다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니며,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믿은 것이고, 나쁜 건 주지 않고 좋은 것만 주시는 하느님 곧 사랑의 하느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믿기로 선택했지만 이 선택에서 더 필요한 것이 체험입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과 사랑 체험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창세기도 믿은 아브라함이 신비경을 체험하는 얘기를 전합니다.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하느님 현존 체험과 사랑 체험이 처음에는 그저 황홀경만이 아닙니다. 공포와 암흑을 먼저 체험하고 그 후에 황홀경도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체험도 그저 달콤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먼저 끔찍한 고통과 그로 인한 두려움 체험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해 질 무렵 공포와 암흑을 체험한 아브라함은
이내 하느님께서 타오르는 횃불로 오심을 체험합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구약에서 하루의 시작이 그 전날 저녁인 이유가 이것이고, 우리의 대축일이 제 1저녁 기도부터인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느님 체험은 반드시 두려움과 기쁨이 함께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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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聖化되십시오!”>
- 성덕聖德의 여정 -
모든 것이 지나갑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자연속에서 살다보니 자연이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집무실옆 꽃길이라 칭했던 애기똥풀꽃도 완전히 사라졌고, 수도원 성전 입구 천국문이라 칭했던 아치형을 싸고 있던 넝쿨 장미꽃도 시들어 사라졌고, 꿈처럼 사랑으로 피어났던 수녀원 담장의 장미꽃들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젊음도 인생도 그러합니다. 정주의 삶을 살다보니 모든 변화가 눈에 보입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남은 삶도 금방일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짧은 인생 최대 화두일 것이며 우리 믿는 이들에게 단연코 주님을 닮아 참내가 되어가는 성덕의 여정뿐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요즘 제가 자주 바치는 인사말은 수도형제에게 배운 “성화되십시오!”입니다. 우리의 살 날이 연장되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바, 부단한 회개를 통해 성화되어가는 것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은 2세기 활약하다 순교한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성 폴리카르포의 뒤를 잇는 사도교부입니다. 이름 뜻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주님에게서 오는 평화” 참 멋집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작년 2022년 그리스도인 일치주간 중인 1월21일 리옹의 이레네오 성인을 ‘일치의 학자(Doctor unitatis)’로 공식 선언했으며 이로써 이레네오 성인은 교회의 37번째 ‘학자’가 됩니다.
무려 사후 1822년 후입니다. 교황은 이레네오 성인을 교회학자로 선언하는 교령에서 “위대한 스승의 교리를 통해 더욱더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완전한 일치를 향해 걷는 여정을 만들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리옹의 성 이레네오는 동방에서 태어났고 서방에서 주교 직무를 수행했다”면서 “성인은 동방과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을 영적, 신학적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됐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레네오 성인은 2세기 주교로 가톨릭 신자들과 정교회 신자들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아왔으며, 당시 그는 영지주의 이단사상에 맞서 주님의 전사로서 치열한 싸움중에 초기교회의 정통신앙을 확립한 대표적 교부로, “가톨릭교회의 수호자였습니다.”
이런 성인들이야 말로 가톨릭교회의 살아 있는 보물로 우리 삶의 좌표가 되어 성덕의 여정에 무한한 영감과 힘의 원천이 됩니다. 주님은 성인들을 기억, 기념할뿐 아니라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사실 성인이 되는 목표는 옛 동방과 서방이 일치합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조선시대 대학자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이 궁극으로 목표했던 공부도 성인이 되는 공부였습니다.
참 사람되기 힘든 세상입니다. 병든 영혼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 강조하는바 정신건강, 영혼건강, 마음건강의 참사람, 성인입니다. 사람은 많은데 사람은 없다고 참으로 건강한 영혼의 사람은 없다고 많은 이들이 개탄합니다.
교회학자는 교의로써 교회에 큰 기여를 한 교회내의 학자들에게 부여되는 칭호로, ‘생활의 성성聖性’, ‘탁월한 학식’, 그리고 ‘교회에 의한 선포’ 등 세가지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그러니 교회학자는 성덕의 사람, 학식의 사람, 교회의 사람으로 우리에게는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위 세 요소에 많이 접근하여 성인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교회를 사랑해야 참 성인이 될 수 있음을 봅니다.
어제 31년만에 만난, 신학교 시절 호감을 지녔던 후배 프라도 사제 정석수 유스티노 도반과의 만남이 어제의 각별한 선물이었습니다. 사제품을 앞두고 1992년 여기서 피정을 하고 그해 서품을 받았으니 만31년만에 만난 것이니 이 또한 기적입니다. 돌“석石”에 물“수水”자라 쓰니 한 수도형제는 “암반수”라는 기막힌 별명도 주었습니다. 저는 “오늘이 신부님의 수도원 방문 축일”이라며 덕담도 드렸습니다. 면담성사 중 프라도 영성도 배웠습니다.
구유에 계신 주님을 섬김, 십자가의 주님 사랑, 감실안의 주님 사랑의 나눔으로, 즉 구유의 섬김, 십자가의 사랑, 감실의 나눔으로 요약되는 삶과 영성으로 이대로 살면 정말 가난하고 겸손하게 사셨던 주님과의 일치로 순수와 열정의 참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눈 성덕의 삶과는 너무 다른 오늘 복음의 거짓 예언자들의 삶입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오늘날로 보면 흡사 양심이 없이 뻔뻔한 사이코패스, 소시어패스에 속했던 부류들 같습니다. 디다케 11장에 나오는 거짓 예언자의 식별기준이 재미있습니다. 교도소에서 가장 사람 취급 못받고 무시되는 부류의 사람들이 전형적 소시어패스 사기꾼들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들도 정말 주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한다면 사이코패스도, 소시오패스도 치유되리라 믿습니다.
“사도는 하루 동안만 머물러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이틀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사흘이나 머물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사도가 떠날 때는 다음 머물 곳을 찾을 때까지 필요한 빵만 가져야 합니다. 만일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영으로 말한다고 다 예언자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생활태도을 지녀야만 예언자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자라도 진리를 행하지 않는다면 거짓 예언자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압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요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질 거라 합니다. 그러니 사람이, 마음이 순수하고 좋아야 생각도 글도 말도 행동도 순수하고 좋습니다.
우선적이 것이 부단한 기도와 회개를 통한 마음의 정화로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 순수와 열정의 참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의 타고난 기질이 있더라도 이를 깨달아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열하고 가열찬 선행의 노력을 다할 때 주님은 이런 기질도 은총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착한 마음에서 선행이지만 부단한 가열찬 선행을 통한 나쁜 마음의 변화도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을 떠나, 예수님을 떠나 참 사람이 되는 것은 요원합니다. 필시 변질 중독 부패되어 괴물도 되고 폐인도 될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알아가면서 참나의 성인이 되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새삼 날로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관계가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하느님의 벗이라는 아브람과 하느님의 관계가 그 모범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아브람을 신뢰하고 사랑했는지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하늘을 쳐다 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시어 주님과의 우정을 북돋아 주시어 성덕의 여정에 큰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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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7,15)
<누가 거짓 예언자들인가?>
'오늘 복음(마태7,15-20)은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7,15-16)
'누가 참예언자들이고, 누가 거짓 예언자들인가?'
우리 모두는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뜻)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러한 소명이 주어졌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이유는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15,16 참조)
'참 예언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는 사람들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짓 예언자'는 그 반대로 하느님의 뜻을 전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전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 멋대로 하느님의 뜻을 해석하면서 하느님을 갈라치기하는 이단자들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말만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참 예언자인가? 거짓 예언자인가?'
오늘은 제가 19년 전인 2004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날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도어야 한다."(루카6,36/서품성구)
저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말만 하고 보다 더 삶으로 살아내지 못한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그리고 이 자비의 힘으로 다시 시작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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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b9v4yF3u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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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 20)
열매는 그냥
맺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는
열매는
그야말로
많은 시간을
필요로합니다.
바람을 견디고
무더위를 견디며
익어갑니다.
주고 받는
사랑으로
좋은 열매는
때를 놓치지
않으며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 삶의
그 자리에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나무는
하느님을
마주하며
하느님을 위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이 깊어갈수록
사랑의 열매는
철이 듭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열매를 맺는
관계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한
머무름의 시간이
가장 좋은
열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열매들입니다.
하느님을
닮았기에
좋은 나무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사랑을
실천합니다.
우리의 좋은
실천이
우리의 좋은
열매임을
압니다.
오늘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맺을 열매는
어떠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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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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