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https://blog.naver.com/mungia/222697539853
소련군의 계획
전쟁 2년간 붉은군대의 질적수준은 상당히 향상됐지만 독일 국방군보다 뒤지는 전술적 능력은 쿠르스크전투 초반에도 여전했다. 그들은 전술적 기동도 시작하기 전에 전략적 공세를 취했다. 소련군은 독일정보망으로부터 벗어난 후방에 몇개군이 아닌 전선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략예비대 스텝전선군의 존재는 전쟁기간 중 가장 성공적인 소련식 '마스키로프카'(위장과 기만)였다. 당초 계획은 이들을 하계공세를 위해 이껴두는 것이었다. 이들은 쿠르스크에서 패한 독일군에게 노도처럼 들이닥치려했다. 하지만 보로네시전선군이 며칠만에 붕괴조짐을 보였다.
로트미스트로프(좌측 두번째), 흐루쇼프(우측)
소련군의 목적은 독일군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고 독일 3개장갑군단을 포위섬멸하려는 것이었다. 스타브카는 평범한 승리가 아니고 '전차전의 스탈린그라드'를 통해 칸나에전투 같은 섬멸전을 원했다. 전황은 협공을 가능하게 했다. 독일 제4장갑군의 공격은 화살촉처럼 북으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쐐기대형 후방에는 측면이 취약한 좁은 회랑이 형성돼있었다. 바투틴은 스타브카의 지침대로 작전을 수립했다. 2개 전차군이 양익에서 협공해서 야코블레보-비코브카 지역에서 포위망을 닫고 제48과 제2SS장갑군단을 포위한다. 그동안 2개군이 정면공격을 실시해서 적을 묶어둔다. 의심없이 포위망으로 들어온 적 장갑군단을 4개 방향에서 공격하는 것이다. 서쪽에서는 제1전차군(제4, 31전차군단, 제3기계화군단), 제5근위전차군단, 새로 도착한 제10전차군단과 증강된 보병과 포병이 공격한다. 동쪽에서는 역시 스텝전선군에서 도착한 제5근위전차군(제18, 29전차군단, 제5근위기계화군단), 제2전차군단, 제2근위전차군단과 독립부대들이 가세한다. 멀리 남동쪽에 있는 독일 제3장갑군단에 대해서는 제7근위군이 우익 측면을 돌파해서 후방 라줌노예로 진격한다. 스타브카는 7월 12일을 결정적 순간으로 삼았다. 같은 시간에 돌출부 북쪽에서는 서부전선군 대부분과 브랸스크전선군이 독일 제2장갑군의 취약한 전선을 공격했다. 전선이 붕괴되면 모델의 제9군은 쿠르스크 공격을 중단할 것이다. 남방군집단 선봉에 대한 파쇄공격도 같은날 계획됐다. 그 중 최강은 프로호로프카에서 지친 제2SS장갑군단을 섬멸할 제5근위전차군이었다.
흔히 쿠르스크전투는 7월 12일 프로호로프카의 사상최대의 전차전이 결정적 계기가 된 제2차대전의 전환점이라고 말해진다. 이것은 주로 소련측 기록에 나타난다. 극적인 표현으로는 그때까지 팽팽하던 전황이 프젤강에서 벨고로드로 향하는 4.5㎞ 지역에서 결정됐다고 한다. 그 좁은 지역에서 1,500대의 전차가 충돌했다. 소련측 기록으로는 850대의 소련전차와 700~800대의 독일전차가 강철눈사태처럼 서로에게 돌진했다. 독일전차 400대가 격파되고 제2SS장갑군단은 섬멸됐다. 코네프 원수는 이 전투가 독일기갑부대의 '백조의 노래'라고 표현했다. 이 과장은 서방역사가들에게 전해져서 아직도 사실처럼 알려지고 있다.
'독일전차들이 평원 반대쪽에서 접근했다. 거대한 양측 전차집단이 정면충돌했다. T-34 승무원들은 근접전투의 이점을 살려서 가까운 거리에서 티거와 판터의 포탄이 탑재된 측·후면장갑을 격파했다. 독일이 프로호로프카 점령에 실패하면서 치타델레작전은 종막을 고했다. 12일만에 300대가 넘는 독일전차가 격파됐다. 쿠르스크를 노린 독일군 중추는 마비됐다. 소련군의 승리는 대전 중 단일전투로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양군의 실제전력
진실은 어떠했는가. 먼저 제2SS장갑군단이 7월 12일 300~400대의 전차를 상실할 수 없다. 독일측 기록에 의한 치타델레작전 전기간 동안 군단의 전차, 돌격포 완전손실은 33대이다. 또한 판터와 페르디난트를 보유하지 않았으므로 소련측 주장처럼 격파될 것이 없었다. 로트미스트로프가 주장한 티거 70대 격파도 불가능하다. 그날 가동 중인 티거는 15대였고 그나마 프로호로프카에는 5대뿐이었다. 7월 12일 토텐코프사단은 프젤강 건너편에 있었으므로 소련군과 대결한 것은 SS라이프스탄다르테와 SS다스 라이히사단의 전차 117, 돌격포 37, 대전차자주포 32대였다. 그날 아침 로트미스트로프는 838대를 보유했고 96대가 증원됐다. 그는 휘하 5개군단 중 제5근위기계화군단을 예비로 두고 제3장갑군단에 대비해서 좌익 측면에 100대의 전차를 남겨뒀다. 그래서 소련 672대와 독일 186대의 대결이 실제 수치이다.
엄폐한 소련군 보병
로트미스트로프의 주공은 프젤강과 철도 사이에 있는 라이프스탄다르테 정면으로 향했다. 프젤강둑 부근 지면에 무르고 마을들이 인접해 있어서 기동 가능 폭은 3㎞에 불과했다. 제18전차군단은 강둑, 제29전차군단은 철도를 끼고 돌진했다. 그래서 1단계전투에서 라이프스탄다르테 86대(전차 56, 돌격포 10, 대전차자주포 20)에 대해 소련군 전차, 자주포는 400대로 5대1이었다. 동시에 우익의 다스 라이히도 공격받았는데 제2전차군, 제2근위전차군 200대의 전차가 다스 라이히 99대(전차 61, 돌격포 27, 대전차자주포 12)와 대결했다. 이에 더해서 제69군이 있었고 제5근위군의 제9근위공수군단이 추가됐다. 또한 바투틴은 로트미스트로프에게 포병연대 5, 로켓연대 2, 대전차포연대 1을 보강했다. 좁은 프로호로프카 회랑지역에서 엄청난 화력의 집중으로 어떤 전투에서는 장갑차량 바깥에서는 생존 가능성이 없었다.
제8항공군단의 2/3를 제9군 지역으로 할애한 루프트바페가 산발적으로 나타난데 비해 소련은 2개 항공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제2SS장갑군단이 7월 5일부터 쉼없는 전투로 육체적이나 장비면에서 소모되있었지만 소련최고 전차전문가 로트미스트로프가 이끄는 정예 제5근위전차군은 완전했다. 독일군은 손해를 개의치 않는 소련군의 대규모 돌격을 항상 두려워했다. 그 숫자만이 문제가 아니고 소련군 공격은 자주 두려움을 잊은 듯 행동했다. 동부전선에 종군한 독일병사들에게 소련군 공격시 보드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러시아전사는 최근에 와서야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공격전야
기습이라는 면에서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대부대를 단시간 내에 좁은 지역에 배치한 것은 로트미스트로프와 부하지휘관들의 공적이다. 그들은 3일간 330~380㎞를 이동했다. 독일군 정보는 적의 반격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런 규모인 줄은 전혀 몰랐다. 7월 11일 라이프스탄다르테의 진격은 순조로웠다. 그들은 대초원을 전진하면서 다음날 중요해지는 대전차호를 통과했다. 그 건너에 252.2고지가 거대한 파도처럼 놓여있었다.
사단은 제9근위공수사단을 물리치고 고지와 옥차브루스키국영농장을 점령했다. 이제 프로호로프카는 2.5㎞앞에 있었지만 측면이 노출된 상태였다. 우측의 다스 라이히와 연결은 느슨했고 좌측의 토텐코프도 북진했으므로 그 틈새는 사단 기갑정찰대대가 감시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근위군 소속의 T-34. 소련이 어려운 시기에는 고무부족으로 철제바퀴 사용이 늘어났다.
이런 약점으로 적이 반격한다면 치명적이었으므로 하우서 군단장은 라이프스탄다르테사단을 정지시키고 다음날 토텐코프사단에 군단포병을 총지원해서 프젤강의 226.6고지까지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그 고지가 확보된 후 나머지 2개 사단이 공격을 재개할 예정이었다. 라이프스탄다르테는 심하게 분산되있었다. 우익의 제1SS기갑척탄병연대가 철둑에 있었고 좌익의 제2SS기갑척탄병연대는 252.2고지 앞에 있었다. 제1SS전차연대는 장애물을 빠져나와서 252.2고지 뒤에 있었다. 가동티거 4대가 지원하는 1개대대 병력이었고 나머지 대대는 독일에서 판터로 장비개편 중이었다. 프로호로프카 회랑에는 소련이 주장하는 800대의 전차군이 아닌 1개 대대뿐이었다. 12일 아침 양군이 팔랑크스보병처럼 서로에게 돌진했다는 내용도 사실이 아니다. 7시 30분 로트미스트로프가 공격을 개시했을 때 라이프스탄다르테사단 병사들은 대부분 잠들어있었다. 주변 사단이 따라잡도록 그날 공격계획이 없었고 7일간 치열한 전투로 잠잘 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252.2 고지
라이프스탄다르테의 선봉은 파이퍼 SS소령이 지휘하는 제2SS기갑척탄병연대 제3대대였다. 그들은 전날 점령한 252.2고지 주변 참호에 있었다. '7월 12일 잠에 취해있을 때 적이 나타났다, 보병이 탑승한 끝없는 전차대군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나 마침내 뒤섞였다. 우리는 살기위해 육박전을 벌였다.'
소련전차의 접근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전차장교는 루돌프 폰 리벤트롭 SS중위(외무장관의 아들)였다. 그는 아침에 252.2고지에서 '전차경보'를 의미하는 보라색신호탄을 확인했다. 나머지 중대가 대전차호 후방에 있었으므로 자신의 중대 Ⅳ호전차 7대만 이끌고 언덕을 올랐다. 거기서 거대한 전차부대가 접근하는 것을 발견했다. 코앞에 T-34가 나타났고 너무 많아서 세다가 포기했다. 전차의 벽이 최고속도로 달려왔다. Ⅳ호전차들은 20대를 격파했지만 4대를 잃고 폰 리벤트롭은 소련군 전차에 휩쓸려 후퇴했다. 크리첸코 소장이 지휘하는 제29전차군단(제31전차여단, 제53차량화소총여단), 자주포연대, 제26근위공수연대였다. 그들은 252.2고지 정상을 통과했고 포문을 연 독일전차 2개중대를 향해 내리막길을 달렸다. 소련전차병들은 독일전차를 티거로 오인하고 최대한 거리를 좁히려했다.
최정예 SS사단도 아직 Ⅲ호전차가 다수였다.
소련전차들이 종심돌파에 성공했으면 독일군전선은 붕괴했을 것이다. 하지만 몇분내로 전황이 변하면서 눈앞에 다가왔던 승리가 공격자들에 치명적인 상황이 됐다. 소련군은 우군이 구축해 놓은 대전차호가 있다는 것을 깜빡했다. 소련군 보병이 252.2고지 비탈에 만든 폭 4.5m의 대전차호가 소련군 공격과 직각방향으로 놓여있었다. 독일군 병사들은 점점 더 많은 소련전차가 언덕을 넘어오고 내리막길을 달려서 그들이 숨어있는 뒤쪽의 대전차호에서 차례로 뒤집어지는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소련군은 대전차호를 알아차렸지만 공병을 수반하지 않았으므로 좌측으로 이동해서 수리된 대전차호의 다리를 건너려했다. 필설로 표현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다리를 건너기 위해 측면이 노출되고 독일전차의 쉬운 목표물이 된 T-34가 서로 충돌하고 뒤집혔다. 참호 건너편의 독일전차 2개 중대가 반격해서 60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정오에 제2SS기갑척탄병연대를 구원하고 252.2고지와 옥차브루스키 국영농장을 탈환했다. 언덕 비탈은 아직 불타는 소련전차 100대와 파이퍼대대의 병력수송장갑차들로 전차의 무덤이 됐다.
소련군 반격실패
7월 12일 라이프스탄다르테는 일시적으로 사용불능된 소련전차 190대를 노획했다. 대부분은 언덕 비탈에 밀집돼 있었다. 너무 많은 숫자를 의심한 하우서 SS대장이 직접와서 확인했다. 최신 러시아 자료에 의하면 제29전차군단은 그날 219대 중 179대를 잃었고 118대가 완전손실이었다. 사상자는 전사 1,033명을 포함한 1,991명이다. 252.2고지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라이프스탄다르테 좌익도 큰 위기였다. 바하노프 소장이 지휘하는 제18전차군단(제110, 170, 181전차여단, 제32차량화소총여단)과 영국제 처칠전차를 보유한 제25근위전차군단이 돌격했다. 독일군에게 가장 좋지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소련군이 반격했다. 라이프스탄다르테사단과 토텐코프사단 틈새였다. 제18전차군단은 저항을 받지않고 깊숙히 돌파했다. 그곳은 제2SS기갑척탄병연대 구역이었는데 전술적 협조가 붕괴했다. 확실한 전선도 존재하지 않았다. 양군은 지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지도 불분명해지고 전투는 개인적 싸움이 됐다.
소련측 기록에는 제181전차여단 전차운전병 알렉산드르 니콜라예프가 불타는 T-34를 몰고 티거를 격파했다는 무용담이 전해져서 영화화되고 서방역사가들에게도 잘알려지게 됐다. 독일측 기록과 대조하면 이 사실도 허구이다. 제18전차군단의 공격은 소련측 기록에 의하면 55대를 잃고 실패했다. 군단은 모든 공격에 실패한 후 오후 일찍 후퇴해서 이후로는 수비에만 투입됐다. 달려온 비트만 SS소위와 4대의 티거는 60대의 소련전차와 대결해서 1대를 잃으며 20대를 격파했다.
프로호로프카-벨고로드 철둑 남서쪽 스탈린스크국영농장 부근의 제1SS기갑척탄병연대는 전차도 없이 마르더대전차자주포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공격에 나선 제25전차여단, 제1446자주포연대, 제28근위공수연대, 제169전차여단 일부는 평원지대에서 포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다.
제2SS장갑군단 우익, 남쪽으로 휘어진 전선에는 다스 라이히사단이 위치하고 있었다. 소련 제2전차군단과 제2근위전차군단은 야스야나 폴리야나와 칼리닌으로 돌격해 일시적으로 전선돌파에 성공했지만 제2SS전차연대와 전차구축대대의 반격을 받고 69대의 전차를 잃었다.
치타델레작전 시부터 독일기갑사단에 강력한 장포신 Ⅳ호전차의 수가 대폭 증가했다.
7월 12일 가장 많이 진격한 것은 토텐코프사단이었다. 소련측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제5근위전차군과 전투했다고 한다, 하지만 프젤강 남쪽에는 코즐로프카에서 부교를 수비하는 제6SS기갑척탄병연대 일부 뿐이였고 주력은 프젤강 건너편에서 북진 중이었다. 이 사단은 미하엘로프카에서 도강해서 라이프스탄다르테사단을 공격 중인 소련군 후방을 공격하려 했지만 강 주변이 진창이어서 불가능했다. 로트미스트로프가 그날 제5근위기계화군단으로 토텐코프사단을 저지했다는 것도 부정확하다. 제24근위전차여단과 제10근위차량화소총여단이 프젤강 북쪽에 투입된 것은 사실이지만 늦어졌다. 12일 토텐코프는 자도프 중장의 제5근위군, 제31전차군단을 공격했다. 그들은 아침에 소련군의 맹공격을 격퇴하고 프로호로프카-카르타쉐프카 도로까지 전진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이제 측면 뿐아니라 후방도 위험해졌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숫자에 잠시 당황했지만 성급한 공격에 대타격을 가하고 오후에는 반격을 시작했다.
패배 숨기기
로트미스트로프는 제2SS장갑군단의 패배로 끝나는 거대한 전투를 창작했다. 이 서사시는 많은 역사가들을 동감시켜서 광범위하게 인용됐다. 하지만 독일측 기록에는 그런 패배에 대한 기미룰 찾을 수 없다. 섬멸된 부대 지휘관이라야 하는 하우서 군단장은 그날 대규모 전차전이 벌어져서 돌파에 실패한 적이 많은 전차를 잃었다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날 252.2고지에서 싸운 전차장도 저녁에 100대가 넘는 적전차 격파를 확인하고 대승을 확신했다고 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상스럽게 남방군집단의 상세한 우군 전차손실기록을 포함한 독일측 문서에 관심이 없었다. 7월 12일 라이프스탄다르테와 다스 라이히의 전차 완전손실은 '0'이다. 보급부대의 기록도 일치한다. 완전손실은 후에 소련군 포격으로 회수불능인 3대로 수정된다. 제2SS장갑군단이 전장을 지배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피해는 전날과 비슷했다. 12일 2개 사단은 그 전날 손실까지 포함한 41대의 전차가 장기수리 중이었다. 수리 속도는 독일군에게 결정적 이점이었다. 7월 11일 2개 사단 가동전차는 186대였는데 프로호로프카전투 다음날 가동수는 190대로 늘어나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전투기록을 남기면서 이상스럽게 수리 불가능한 손실만 기록했다. 가용해진 러시아문서에 의하면 7월 12일 제5근위전차군의 완전손실은 235대이다. 러시아 역사가 발레리 자물린은 자료를 바탕으로 207대가 완전손실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수치들도 지나치게 낮다. 소련군 보고체계에는 결함이 있었고 더구나 7월 12일 같은 혼란상황에서는 제대로 작동하기 힘들었다. 전차장교들이 많이 전사했고 생존자들은 사방에 흩어진 격파된 전차수를 알기 힘들었다. 더구나 전장은 독일군 지배하에 들어갔고 소련군은 반격개시점에서 더 밀려난 경우도 있었다.
독일군은 7월 12일 저녁에 전장에 남은 손상된 소련전차를 완전히 파괴했다.(다시 소련군의 손에 넘어가는 경우 재생을 막기 위해) 7월 17일 독일군이 후퇴한 후 소련군은 현장 확인을 통해 신뢰성있는 자료를 보고했다. 제5근위전차군 참모장이 확인한 12일부터 16일까지 자신들의 전차, 자주포 완전손실은 334대이다. 이 손실은 대부분 7월 12일에 발생했을 것이다. 독일군 기록에도 제5근위전차군은 이날 이후 후퇴해서 거의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비로 있었던 제5근위기계화군단의 완전손실 73대를 제외하면 나머지 4개군단의 손실은 261대이다. 그래서 러시아 문서의 235대는 지나치게 적은 수치이고 추가로 308대의 손상된 전차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즉시 수리 가능하다는112대를 제외한 수치이다.
하우서(모자쓴 사람), 제2SS장갑군단 참모장 오스텐도르프(그 우측), 다스 라이히사단장 크뤼거(좌), 제2SS전차연대장 폰 라이첸슈타인(전차병복장)
다음은 모스크바역사연구소가 내린 냉정한 결론이다. '제5근위전차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황을 결정적으로 뒤집지 못했다, 저녁까지 전차 500대를 상실한 후 수비로 전환했다.' 로트미스트로프가 밝힌 16일까지 3,507명의 전사자를 포함한 7,107명의 사상자는 정확한 수치라고 판단된다. 소련군의 단하나의 성공은 사기 측면이다. 광신적인 무장친위대병사들 조차 소련군의 희생정신에 놀랐다. 하지만 자주 언급되는 이런 영웅적 행동이 생각없는 공격으로 허비됐다. 물량과 뛰어난 정신력이 합쳐졌다면 결정적 승리를 달성해야 했다.
프로호로프카의 승자라고 칭송 받는 로트미스트로프 중장이지만 전쟁 중 작성된 소련 비밀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있다. '7월 12일 제5근위전차군은 임무를 달성하지 못했다. 신편성된 군이 전투 첫날 산산히 부서졌다. 지휘관은 스탈린에게 "거대한 전차군으로 뭘한거요?"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스탈린은 분노해서 로트미스트로프를 해임하고 군사재판에 회부하려했다.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로트미스트로프는 적이 400대의 전차를 잃고 섬멸됐다고 보고했다. 더 정확하게는 그 전투와 유관한 바투틴과 흐루쇼프도 가담했다.
스탈린은 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정작 책임질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는 낙관론에 빠져서 7월 12일 오룔과 동시에 프로호로프카에서 반격을 명령했다. 남방군집단 공세의 동력이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스탈린은 신편성 제5근위전차군을 사지로 보낸 셈이됐다. 로트미스트로프에게 자유재량을 줬다면 그런 실수는 피했을 것이다.
성급한 반격
대조국전쟁사에서 정확히 지적한 대로 가장 강력한 소련군 병력이 가장 강력한 독일군의 측면이 아닌 정면을 공격했다. 스타브카는 소모됐다고 판단되는 독일기갑부대가 소련군 집결예정지에 나타난 것에 크게 당황했다. 7월 11일 스탈린이 파견한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전선에 도착해서 오후 늦게 프로호로프카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갑자기 먼곳에서 전차들이 나타났고 바실레프스키는 로트미스트로프에게 전차 이동은 은밀해야 하는데 독일군이 보는 앞에 한낮에 움직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때 전차들이 그들에게 포문을 열였으므로 그 전차는 독일군이었다. 스탈린에게 영향을 받은 바실레프스키는 과민반응을 보이며 당장 그날 저녁 20시에 반격하라고 명령했다. 공격은 다음날 2시 다시 7시 30분으로 최종 결정됐다.
그 결과 제5근위전차군은 적절한 정찰도 정보도 없이 공격에 나서야 했다. 252.2고지 옆에 있는 거대한 대전차호의 존재는 생각하지 못했다. 공격은 성급한 돌격이됐다. 원래 계획됐던 치밀한 준비는 없고 즉시 공격으로 제대들간 협조도 불가능했다. 제29전차군단은 사전포격이나 항공지원없이 공격을 실시했다. 전차부대와 포병은 패배의 책임소재를 두고 다퉜다. 직접 비난은 공군에게 향했다. 지상군과 협조는 없었고 폭격기들은 우군일선병력을 자주 폭격했고 심지어는 2선이나 사령부도 공격했다. 스탈린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로트미스트로프는 이런 대혼란에 대한 책임이 크지 않지만 독일전차와 근접전을 벌인 것은 심각한 잘못이었다.
적절한 병력수송장갑차가 없었던 소련보병은 전차지원작전시 피해가 커졌다
결과는 전술적인 패배 정도가 아니라 대참사였다. 독일군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켰을 뿐 적을 포위하려는 당초 의도는 좌절됐다. 전략적 측면에서도 다가오는 하계공세를 위해 준비한 전력을 써버린 실패였다. 스타브카는 트럼프카드를 아무런 소득없이 낭비했다. 그럼에도 프로호포프카는 독일전차의 무덤이라는 것이 사실처럼 되버렸다. 최근에도 소련전차병들의 우수성으로 전쟁 중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저작들을 확인할 수 있다. 대전의 향방을 바꿨다는 252.2고지에는 거대한 기념비가 서있다.
결론: 소련은 프로호로프카 전차전에서
소수의 티거와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3호 전차에게 개털려버렸는데
이 패배를 덮기 위해 오히려 '독일이 프로호로프카에서 다수의 티거와 주력전차를 손실했다!'라는
거대전투의 영웅담으로 과장함.
|
|
